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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와 철학하기 - 소유에서 존재로, 넘버원에서 온리원으로, 진리에서 일상으로
김광식 지음 / 김영사 / 2021년 11월
평점 :
세계적 그룹 BTS가 활동 중단에 들어갔다. 전 세계 아미들이 큰 충격을 받을 만도 한데, 아직 그룹 해체로 이어진 것도 아니고, 군대라는 예상해 왔던 현실적 문제가 있으며, 서로가 새로운 성장을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유 등 갑작스런 활동중단에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충분한 이유가 많았다. 그리고 몇몇 구성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혼자 활동을 바로 시작하기도 했기에 활동 중단에 따른 사회적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사실 이들이 이렇게 큰 그룹이 될거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초창기엔 무척 작은 기획사의 그러 그런 그룹이었다. 2014년에 아는 초등학생이 BTS를 좋아한다기에 대체 그것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방탄소년단이라길래 난 박장대소하며 대체 왜 그런 애들을 좋아하냐고, 당시 인기 많던 인피니티 같은 그룹도 있지 않냐고 했었다. 그리고 조롱하며 그 그룹은 무대에 방탄조끼라도 입고 나오냐고 비아냥댔었다. 2018 평창올림픽 때 개막식과 폐회식에 많이 사용된 건 한국 가요였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한국을 대표하는 그룹으로 무대에 섰던 것은 EXO였다. BTS는 그때를 거의 기점으로 세계적 그룹으로 치고 올라갔으니 하나의 분기점이었던 셈이다.
하여튼 이 책은 독특하다. 세계적 인기 그룹의 노래 가사를 철학과 연결시켰다. 물론 그렇다고 책이 인상 깊었던 것은 아니다. 일단 내가 BTS의 노래들을 잘 모르고, 뭣보다 철학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BTS가 워낙 유명하기에 그들의 노래를 여기저기서 제법 많이 듣기는 했는데 워낙 90년대 느린 노래들의 가사도 잘 듣지 못하는 편이라 그들의 빠른 노래 가사는 사실 전혀 듣지를 못한다. 그래도 이해한 바로 책의 철학 주제를 정리해본다면 문화와 자본주의, 다른 모든 사회구조에 얽매이지 않는 주체로서 자신의 자유, 그리고 완성을 위한 아픈 성장이라 할수 있을 것 같다.
주제가 이래서인지 책은 방탄소년단의 노래 가사에서 철학적 핵심어들을 찾아내어 연결해나간다. 저자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창조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은 선과 악, 자신의 문화적 틀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당연히 모든 것을 의심하고 생각의 틀을 넘어야 한다. 이 시도가 방황인 것이다. 그래서 이 답을 강하게 찾고자 하는 욕망이 드는 청소년기와 20대에 사람들은 많이 방황한다. 자유롭기 위해 방황하고 그 방황이 자유를 위한 성장을 낳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한다. 존재는 있음이고 존재자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철학에서 존재론은 있는 것을 연구했기에 답을 찾을 수 없었다고 본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찾기 위해서는 있음에서 없는 것은 모두 제거하면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두 제거하니 결국 남는 것은 없기에 유와 무가 사실 같아짐을 깨닫게 된다. 때문에 있음인 삶은 없음인 죽음과 같은 것이 된다. 그래서 인간은 유한한 시간을 의식해야 하며 그를 통해 살아있음과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고 제대로 존재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본래적 존재 방식을 실존이라고 한다.
실존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피하지 않고 미리 마주보는 실존적 결단이 필요하다. 이렇게 죽음을 미리 체험하는 것은 삶과 존재의 방식을 바꾼다. 주어진 세계에서 사물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관심이나 목적에 따라 세계를 만들어가며 본래적인 자유로운 삶은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삶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산다는 것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소유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성취와 소유만 추구하면 정작 나의 삶은 사라지고 나의 존재도 사라진다. 소유할 것이 워낙 많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심화한다.
에리히 프롬은 삶을 두 가지 방식으로 구분하였는데 소유지향의 삶과 존재지향의 삶이다. 소유지향의 삶은 삶은 성취, 소유하는 것으로 바라본다. 존재 지향의 삶은 삶은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으로 바라본다. 프롬은 맑스가 사회구조가 변화하면 세상이 변화할 것으로 파악한데 반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프롬은 사회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인간의 성격과 성향도 함께 변화하해야 사회가 비로소 바뀐다고 보았다. 실제 사회주의 국가는 사람이 바뀌지 않았기에 성공하지 못했다. 사회가 바뀌는데 있어 구조를 바꾸느냐 사람은 바꾸냐는 중요한 문제다. 조선왕조의 개창자 정도전은 왕이라는 변수가 심한 사람을 믿을 수가 없어 왕을 철저히 견제하고 보좌하는 관료 중심의 구조를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 관료인 양반이 세월이 지날수록 부패하는 모습을 보였고, 세종이나 정조처럼 신하에 의지 않고 개혁을 스스로 이루는 왕들이 나오기도 했다. 결국 양자는 같이 가야하는게 아닌가 싶다.
책은 사람의 자유를 저해하는 또 다른 요소로 욕망을 꼽는다. 사실 이는 계속 언급하는 소유하는 삶, 실존하지 않는 삶과 관련한다. 욕망은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대상에 대한 일반적 욕망과 욕망 자체에 대한 욕망이다. 전자는 직접적 욕망으로 생물로써 생존과 번식을 위해 필요한 본래적이고 생득적인 것이지만 후자는 간접적이고 보다 사회문화적인 것이자 경쟁으로 인해 생겨나는 역시 생득적인 것이기도 한다. 이런 욕망은 매우 다양하지만 후자의 욕망일수록 늘 그것을 채워도 채워도 공허해진다. 결국 나만의 욕망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경쟁을 통해 얻는 것이기에 이기고 나면 부질없어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만의 고유한 실제세계로 돌아가 온갖 상징의 가면을 벗고 다른 사람의 욕망이 아니라 나의 본능에 충실한 삶은 살아야 한다고 한다.
욕망과 관련해 라깡과 들뢰즈의 욕망도 언급된다. 라깡의 욕망은 결핍을 채우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것이다. 반면 들뢰즈가 언급하는 욕망은 생산적이고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것이다. 라깡의 욕망은 인간이라는 주체가 있는 욕망이나 들뢰즈의 욕망은 인간이라는 주체를 넘어선 무생물도 갖는 비인격적 욕망이다. 그래서 들뢰즈의 욕망은 기본적으로 생산하는 힘을 갖고 에너지기에 혁명적이다. 이것은 끝없이 떠돌고 유랑하기에 유목적이다. 라깡의 욕망은 욕망하는 대상이 분명하나 들뢰지의 욕망은 그 대상이 비어있다. 끊임없이 새롭게 무한한 것이 들어오는 것이다.
들뢰즈는 자본주의가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자본주의는 욕망의 운동장에서 분열증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다른 욕망을 금지하는 영토화돤 보통의 욕망들의 선을 무너뜨린다. 무엇이든 욕망하게끔 부추기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러면서도 다른 욕망의 선을 마구잡이로 넘어서 돈이라는 거대한 욕망의 영토를 만들어 놓고서는 다른 욕망은 그곳으로 오지 못하게 막는다. 사랑이나 감정, 해방등의 모든 욕망도 돈으로 종속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 본연의 혁명성에 희망을 품는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나라는 주체, 가족, 자본주의라는 세 가지 억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상품이 아니라 기호를 소비한다고 말한다. 기호가 만들어지고 생산 유통 소비되는 과정을 시뮬라시옹이라 하고 이 기호는 차이를 본질로 삼는다고 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호라는 가치가 중요한데 인기 있는 이미지나 브랜드들은 그만의 기호로써 가지는 가치가 있다. 때문에 그런것들을 소비함으로써 소비자는 차이라는 기호를 사게 된다. 그리고 그 차이는 대개 남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성취나 소유로써 으스대는 이미지다.
보드리야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나만의 개성이나 고유함이라는 욕망이 억압되고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욕망이 이동함으로써 욕망의 미끄러짐 현상에 빠져있다고 보았다. 나라는 고유함을 차이라는 기호에서 찾으려하니 채워도 채워도 밑빠진 독처럼 공허함만 남게되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처럼 나만의 고유함보다 차이라는 기호나 이미지를 욕망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시뮬라르크의 사회라 칭했다. 보드리야르는 이런 구별짓기나 시뮬라시옹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교환이나 대체불가능한 본래의 억압된 개성찾기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