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증은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레인맨으로 유명하다. 워낙 자폐가 무엇인지를 세상에 가장 잘 보여준 사례지만 80년대 영화이니만큼 이젠 모르는 사람도 많다. 최근 자폐 관련 영화나 드라마는 템플 그랜딘을 주제로 한 영화와 드라마 굿닥터 정도가 떠오른다. 굿닥터는 한국판과 미국판 두 개가 있고 한국판은 주원이 미국판은 프레디 하이모머가 주연을 하여 시즌을 이어가고 있다.

 이 작품들은 자폐를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 세상의 주목과 지원을 끌어내는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등장하는 자폐인이 모두 서번트 신드롬을 갖고 있어 자폐아는 곧 천재이거나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는 것처럼 잘못 인식하게 만들기도 했다. 자폐아중 천재의 비중은 일반인중 천재의 비중보다 몇 배 높은 것은 사실이나 절대 다수의 자폐인에겐 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즉, 절대 자폐인은 드러나는 특별한 재능없이 그져 자폐 증상만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다.

 자폐를 다룬 책은 생각보다 많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는 2000년대 중반 실제 일본의 자폐인을 소재로 나온 만화다. 만화로 보기 편하며 15권까지 나왔으나 지금은 절판되어 중고가 아니면 구매가 어렵다. 십년 정도 전에 관심을 갖고 모두 보고 싶었는데 그 때에도 이미 돌아다니는 신간이 별로 없었다.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는 유명한 템플 그랜딘의 책이다. 그녀는 자폐이면서도 교수의 자리에 올랐고 미국에서 도축당하는 소의 심리를 최대한 안정시키는 방법을 고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내일을 기다리는 아이는 민수라는 자폐 소년이 주변의 지원과 적절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그렸고, 책 그래 엄마야는 한국의 냉혹한 현실에서 자폐아동을 둔 부모가 정부 사회와 싸워가며 나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나는 자폐아들을 둔 과학자입니다.는 최근의 논란이 되고 있는 자폐에 대한 관점을 다룬다. 자폐는 증상이나 장애로 취급되지만 요즘에는 자폐를 하나의 개성이자 특성으로 보고 오히려 진화상의 이점으로 보는 생각도 생겨났다. 이 책은 자폐의 여러 측면이 그와 부합됨을 보이는 책으로 강렬한 세계 이론을 주창한다. 이는 자폐인이 주변 감각에 매우 예민하여 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오히려 둔감해보이고 세상 및 사람과 거리를 두려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과감각을 뇌가 제대로 소화해낼수 있고 조절할수 있는 쪽으로 진화가 이뤄진다면 자폐는 그것으로 향하는 중간과정정도로 느껴질수도 있겠다.

 이번에 읽은 책은 이런 자폐의 거의 모든 것을 다룬 자폐의 역사다. 자폐라는 개념의 정립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자폐인이 어떤 대우를 받아왔고 그들의 권익이 어떻게 신장되었으며, 최근의 자폐연구 및 자폐의 정의에 대한 변화를 다룬다. 

 정확한 사례는 사실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지만 자폐인은 인류 역사상 오랜 기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개념이나 진단조차 없었던 당시이지만 몇몇 특이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의 기록이나 특성을 살펴보면 지금의 관점에서 그가 자폐인이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폐라는 개념이 자리 잡히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으로 당시는 끔찍한 우생학의 시대였다. 1920년대 미국에서는 17개주가 강제 불임술을 법제화하였다. 이런 조치는 당시 충격적이게도 정파를 가리지 않고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1933년 버지니아에서는 1333명, 캘리포니아에선 8504명이 강제 불임시술을 당했다. 1942년 독일도 아닌 미국에선 미국정신의학저널에 정신장애 어린이의 안락사를 진지하게 옹호하는 논문이 게재되기도 했다. 당시 사회분위기는 이정도였다. 미국정신의학의 수준도 낮았다. 당시의 정신과 의사들은 일반 의사 자격을 취득한 후 정신병원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는게 고작이었다. 어떤 정신의학에 대한 전문성과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총체적으로 부재한 시기였던 것이다. 

 이런 시기에 등장한 것이 카너였다. 그는 당시 미의학계가 모든 환자를 증후군으로 분류하는 관행이 있음을 깨달았다. 당시 정신병동의 환자들은 구속복을 항싱 입는 것이 관례였는데 카너는 크리스마스에 근무하던 병원 환자들의 구속복을 벗겨낸다. 그리고 그래도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음을 입증함으로써 환자들이 구속복에서 벗어나는 전기를 마련한다. 카너의 최대 업적은 바로 자폐증을 최초로 명명하고 진단한 것이다. 자폐는 그리스어로 자기 자신을 뜻하는 auto에서 파생한 것으로 자폐는 autism이다. 카너는 자폐인들이 제각각 매우 다르나 공통의 두 가지 결정적 특징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극단적으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변의 모든 것이 항상 동일한 상태에 있기를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너의 이런 자폐에 대한 최초의 명몇과 진단에도 불구하고 자폐에 대한 의학계와 과학계 대중의 관심은 매우 적기만 했다. 자폐의 진단과 더불어 그 증상을 가진 사람의 수는 점차 늘어갔지만 그 본질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려는 노력은 없었다. 게다가 이렇다할 근거도 없이 몇몇 정신의학자들은 자폐증의 원인으로 엄마를 지목하고 그것을 원인으로 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엄마를 냉장고 엄마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개념을 널리 퍼뜨린 건 베텔하임이란 인물이다. 그는 자폐증을 부족한 엄마의 사랑으로 귀결시켰다. 그는 2차대전의 경험으로 인해 강제수용소와 자폐를 연결시켰고, 나치가 수용소 성인의 정신을 망가뜨렸던 엄마가 자녀의 정신을 망가뜨린 것으로 생각했다. 베텔하임은 다만 나치와 엄마의 직접적 비유가 너무나도 잔혹한 표현이었기에 냉장고 엄마란 좀더 온화한 표현을 사용한다. 이런 흐름속에 자폐의 최초 진단자인 카너마저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 자폐가 어머니의 잘못이라고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폐가 선천적인 것이라는 최초의 통찰을 스스로 배신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런 잘못된 진단과 비유는 역설적이게도 자폐증에 대한 사람들의 주목을 이끌게 된다. 1959년엔 자폐증을 유일 주제로 다룬 52편의 논문과 한 권의 책이 나왔고 네덜란드를 필두로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도 자폐증 진단이 시작되었다. 

 냉장고 엄마는 애초에 실패할수 밖에 없는 이론이었다. 우선 의사들의 연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자폐증의 타당한 이유가 후천적으로 의학 외부에 존재하는데 굳이 의학적 연구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자폐아를 키우느라 엄청난 부담을 가진 엄마들 그리고 자녀를 수용기관에 보낸 부모에게 고통과 혼란을 부여했다. 자신의 탓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이론은 문제의 원인을 선천적인 것이 아닌 후천적이고 환경적인 엄마에게서 찾음으로써 의미없는 치료를 하게 만들었다. 원인이 자녀의 선천적인 것임에도 의사들은 엄마를 겨냥한 치료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맞서 루스 설리번과 울버니 엄마들이 싸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경험적으로 이런 이론이 말도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열정과 조직만으로는 부족했기에 이들은 대항이론이 필요했으며 찾아낸 것이 1964년에 나타난 버나드 림랜드박사였다. 

 림랜드는 자폐증에 관하여 보고된 모든 증례를 한데 모았다. 그리고 이를 연구하여 자폐라는 장애의 전체적인 모습을 밝혀내려고 하였다. 2년간 증례만 230건을 모았고 그는 이를 모두 과학적으로 검토한 후 냉장고 엄마 이론이 허구임을 밝혀냈다. 우선 자폐 엄마들 대부분이 다른 자녀를 갖고 있었고 이들은 거의 대부분 정상이었다. 냉장고 이론 처럼 엄마의 초기 정서적 학대가 결정적 자폐 발생 요인이라면 다른 형제에게서도 상당비율로 자폐가 발생했어야 맞다. 하지만 아니었다. 게다가 냉장고 엄마 이론은 엄마에 의한 아동의 초기의 정신외상에 주목했지만 많은 자폐 발현 양상이 그리 초기에만 집중되지 않았다. 림랜드는 이를 바탕으로 베텔하임을 공격하였다. 사실 베텔하임의 주장은 이렇다할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지 못했다. 베텔하임은 대중매체에는 자폐에 대한 글을 자주 기고하면서도 정작 장애학교에서 수행한 연구는 단 한건도 동료심사를 요구하는 저널에 게재하지 못했다. 

 이런 흐름속에서 1965년 전미자폐어린이협회가 탄생했다. 그동안 자폐아동은 방치되어 왔다. 우생학이 판치던 야만의 시대에는 수용소나 시설에 수용되었고, 그렇게 하는 것을 누구나 부모에게 권장했다. 수용소나 시설에 수용되지 않더라도 돌봄이나 교육의 손길은 없었다. 당시의 미국법은 문제의 소지가 될만한 학생을 거부할 수 있었다. 때문에 매우 드문경우가 아니람녀 대부분의 자폐아는 원해도 학교입학이 거부되었다. 

 협회가 설립된 후 많은 자폐 부모들은 교육받을 권리에 집중했다. 미국의 수정헌법 14조는 모든 미국인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했다. 자폐라고 해서 교육받을 권리가 박탈된다면 이는 분명한 위헌사항이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 장애아동의 교육받을 권리에 대한 재판이 이뤄졌다. 재판에는 흠잡을데 없는 자격을 갖춘 교육전문가들이 강력한 증인이 되어주었다. 이들은  지체아동을 교육하고, 그 발달을 연구하고,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 성과를 거둔 사람이었다. 교육가들의 증언에 의해 장애아동도 학습하고 학습잠재력이 있음이 입증되었다. 소송은 당연히 승소였고 1973년 주정부에서 실행한 각 조정서의 조항은 장애인의 권리와 교육에 대한 기념비적 성과를 담아내게 된다. 파급효과는 엄청났다. 전국 각지에서 관련 소송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자폐는 이 와중에도 소외되었다. 

 하비와 코니부부는 자폐부모 활동가가 되었다. 자녀가 자폐로 진단되었기 때문이다. 하비는 전미자폐어린이 협회를 워싱턴으로 이전했는데 권력층과의 접근성이 협회의 발전과 영향력 확대에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한편 손레이핀 대 캘리포니아 주 소송이 일어났다. 이 소송에서는 처음으로 교육받을 권리 속에 자폐증이 명시되었다.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였고 당시 주지사였고 향후 미국의 대통령이 될 로널드 레이건이 서명하여 최종통과되었다.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면서 비용의 절감을 강하게 외쳤던 자라 이 서명은 상당히 의외의 결과였다. 당시 레이건과 친우였던 사람의 자녀가 자폐였고 법안 통과시점 그와 레이건의 통화가 이뤄졌던게 결정타였다. 

 한편 미국의 시설 수용자수는 1970년대를 기준으로 급감하기 시작했다. 장애아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소송이 잇달아 승리하면서 아아들이 학교로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75년 연방장애아동교육법이 제정되며 연방 보조금을 받는 모든 공립학교는 장애가 있는 모든 어린이에게 평등한 교육접근권을 제공해야 했다. 장애목록이 명시되었고 1990년에는 자폐증도 등재되었다. 

 자폐증의 치료방법도 다양하게 등장했다. 초기 맹위를 떨친 것은 ABA로 대표되는 행동주의적 요법이었다. 강화와 처벌 두 가지 요소로 이뤄지는 행동주의 요법은 자폐아동을 강하게 억압하거나 때리고 충격을 주는 방법을 자주 사용했다. 이런 방법은 효과도 있었지만 비도덕적인 측면이 강해 부모들의 반감을 불러왔다. 또한 행동주의적 요법은 많은 인적 자원을 요구했기에 비용이 비싼 단점도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이런 혐오치료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고 쇼플러가 등장했다. 그는 자폐증이 선천적인 기질적인 원인으로 생겨나며 엄마는 이 증상에 관해 비난받을 존재가 전혀아닌 치료의 강력한 협력자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쇼플러는 자폐어린이들이 가까운 감각(촉각, 고유감각등 내부의 감각)을 이용하여 정보를 잘 받아들이고 먼감각(시각, 청각, 후각등 외부자극에 반응하는 감각)보다 의미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연구결과로 이를 입증했으며 이는 자폐증에 신경학적 독특함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자폐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었다. 폴스타인과 리터는 영국의 쌍둥이 자폐를 연구하였다. 쌍둥이 중 하나이상이 자폐인 경우는 21건이었는데 이중 둘다 자폐인 경우는 4건으로 모두 일란성 쌍둥이였다. 이는 유전이 자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입증한 연구였다. 가족내에서 두 명의 어린이가 모두 자폐인 경우는 1/50정도였지만 일란성 쌍둥이라면 무려 1/3까지 확률이 올라갔다. 마음이론도 자폐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마음이론은 다른 사람의 정신상태가 자신의 정신상태와 전혀 다른 독립적인 실체임을 알아내는 능력을 말한다. 마음이론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름의 지각과 관점을 갖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음이론에 대한 연구 결과 지적장애인은 마음이론이 있음이 밝혀졌고 이는 지능지수와도 무관함이 밝혀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자폐인은 지능지수가 지적장애보다 높은 경우에도 마음이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또한 자폐인은 패턴과 시스템을 인식하고 각 부분을 조작하는데 뛰어는 능력을 보였지만 각 부분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어우러져 작동하는지 파악하는 능력을 부족했다. 배런-코언은 자폐인은 체계적 사고 경향을 두드러지지만 공감능력을 희생하는 남성형 뇌로 이해할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72년 윙은 들쭉날쭉은 자폐인의 수를 정확히 하고 싶었다. 윙과 굴드는 15세 이하 자폐증 진단을 받은 어린이를 모두 확인하고 그들을 가르친 교사 900명과 1:1면담을 시행하였다. 132명 어린이와 그 가족을 직접 찾아가 어울리고 시간을 보내며 데이터를 수집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윙은 자폐증 진단범위가 너무 좁게 설정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윙과 굴드는 자폐증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사회적 기술 장애, 언어적 소통 관련 장애, 사회적 상상력을 결여였다. 그리고 자폐인은 이 세 가지 증상이 무한히 다양한 조합과 강도로 나타나므로 정확히 정상과 경계선 상에 걸쳐있을수도 있었다. 처음으로 연속선이란 단어가 등장했고 1988년 지금은 통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자폐 스펙트럼 이란 용어가 등장하였다. 

 1980년대와 90년대 2000년대 들어 자폐증은 일반인에게도 더 이상 생소한 분야나 용어가 아니었다. 여기엔 영화 레인맨과 템플그랜딘이 큰 역할을 하였다. 레인맨은 사상 최초로 자폐증을 정확히 그려내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수 있었다. 1986년 발간된 템플 그랜딘의 첫 책은 최초로 경험의 형태로 자폐인에 의해 서술된 책이었다. 이처럼 자폐가 널리 알려지면 지원과 관심도 크게 늘었지만 이에 대한 공포도 늘어갔다. 2000년대 들어 자폐인이 급증하기 시작했는데 1987-1998년 사이에 자폐인의 수는 이전 보다 무려 273%나 늘어났다. 이를 두고 현대사회의 병폐나 디지털 문명과 기기등이 원인으로 제시되기도 했지만 사실 궁극적 원인은 자폐 스펙트럼 개념의 대두로 인한 폭넓은 자폐의 진단이 그 이유였다. 실제 1980년대의 환자를 지금의 기준으로 진단하면 그것만으로도 환자의 수는 25%가 증가한다. 

 하지만 자폐인의 증가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 대표적 사건이 지금도 상흔을 남기고 있는 웨이크 필드의 사건이다. 1998년 2월 영국 의사 웨이크 필드는 당시 새로 개발된 MMR백신이 자폐증을 일으킨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조심스러웠지만 매우 파급력이 컸다. 사람들은 안그래도 백신에 대한 공포증이 있는 편이었는데 그의 주장은 이런 경향을 부채질했다. 그의 논문 발표후 4개월이 지나자 MMR백신 접종률은 무려 14%가 떨어졌다. 사람들의 공포는 수은물질은 티메로샬로 까지 이어졌다. 이 물질은 논란의 중심이 되었고 실제로 많은 나라에서 사용금지까지 되었다. 하지만 웨이크 필드의 주장과 이후 이어진 모든 논란은 정확한 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웨이크 필드의 치부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MMR논문과 관련하여 웨이크 필드는 조사과정중 변호사와 관련하였고 논문 발표후 그를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적이 있었다. 또한 그는 논문 발표전 새로운 홍역 백신을 만들어 특허 출원도 해놓은 상태였다. MMR이 대중적 신뢰를 잃는다면 크게 이득을 보는 상황이었다. 이런 모든 상황으로 2009년 미국에서 자폐 부모는 백신 재판에서 패소한다. 백신이 자폐를 일으켰고, 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이었다. 또한 웨이크 필드는 2010년 의사면허를 취소당한다.

 이 모든 논란은 어이없게도 하나였던 자폐 공동체를 둘러 찢는 상흔을 남겼다. 많은 수의 자폐 부모가 웨이크 필드와 백신 논란에 낚여 자폐에 대한 원인을 백신과 티메로샬에서 찾았다. 그들은 매우 힘든상황이었고 뭔가 책임을 물을 만한 것이 필요하기는 했다. 한편 다른 부모들은 자폐의 원인을 비과학적 미신 같은 것에서 찾는 것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그들은 이런 비과학적 시도는 자폐에 대한 원인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 지원을 엉뚱한 곳으로 돌려 오히려 안좋은 결과를 낳은 것이라 우려했다. 이런 입장 차이로 두 집단을 대립한다. 

 하여튼 백신가설은 과학계에서 배척당하고 소송에서도 패하면서 2010년대 들어 지지경향이 거의 사라진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회자될만큼 그 영향력이 남아있기도 하다. 그리고 최근 신경다양성 이론이 등장한다. 이는 싱클레어와 에세이에서 우리를 위해 슬퍼하지 말라는 선언문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부모운동에서 자폐증의 모습은 항상 슬픔으로 채색되었고 자폐는 잘못된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자폐를 그저 한 사람이 존재하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신경다양성 운동은 자폐증의 완치법을 발견하고자 하는 과학적 노력을 거부한다. 애초에 장애나 병이 아니기에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반박도 많이 불러왔다. 사실 싱클레어 같은 자폐인은 매우 드물다. 고학력을 가질 수 있고 자기 주장을 여러 사람앞에서 할수 있으며, 언론활동까지 할수 있는 자폐인은 아무리 스펙트럼이 넓다해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다. 자녀가 중증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싱클레어가 자신의 자녀와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고 지지하지 않는다.

 한편 자폐에 대한 현대의 연구는 더 많은 것을 밝혀내고 있다. 자폐 어린이는 뇌의 크기가 20%정도가 클 수 있고,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때 뇌에서 쾌락과 만족에 반응하여 분비되는 도파민이 분비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자폐인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 등 감정적인 요소와 결합하여 시가적 과제를 수행하는 전두엽과 후두엽의 혈류 조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수면때 급속안구운동이 1/3정도 적었고, 일일 수면시간도 일반인보다 1시간 부족했다. 엄마가 임신 전 엽산을 복용하면 자폐인이 태어날 확륙은 40%나 줄어들었다. 한편 고열이 나면 자폐 증상이 크게 완화되는 보고가 나타났다. 그리고 멜라토닌을 복용하면 평상시보다 잠이 잘 들고, 리스페리돈을 복용하면 반복행동과 과다행동이 줄어드는등 약물 치료 연구도 이뤄졌다.

 하지만 자폐에 대해 갈길은 아직 멀다. 그 발현 스펙트럼이 복잡한 만큼 이렇다할 원인도 전혀 밝혀지지 않았고, 따라서 치료방법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 신경다양성 운동에서 더 나아가 자폐인이 사실 지나치게 고성능이기에 이를 감당하지 못하여 지능이 낮아보인다는 주장부터, 자폐가 인류의 다음 진화로 나아가는 단계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폐인을 키우는데 부모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고 이렇다할 성과도 얻기 힘들다는 오래된 사실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임에도 자폐인의 지원에 대한 한국의 지원은 매우 열악하다. 자폐인 및 발달 장애인에 대한 지원은 대개 학생신분일때만 유지된다. 아이가 학교를 다닐때면 그래도 부모는 낮에 시각을 확보할수 있고, 직장도 다닐수 있다. 하지만 아이가 졸업하면 모든 지원이 종료된다. 성인 발달 장애인을 수용할만한 시설이나 기관도 거의 없는 편이며, 이들을 자립시킬만한 직장도 거의 없는 편이다. 일부 부모가 자구책으로 협동조합을 만들고 있으나 이에 대한 정부 지원은 전무하다. 때문에 아직도 많은 발달 장애 및 자폐 부모는 자녀보다 딱 하루만 더 사는것이 소원인 상태다. 이런 정부는 정부도 아니라는 그들의 외침에 귀를 많이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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