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팀 마샬은 지리의 힘 1권을 펴냈다. 이 책은 방송도 타고 책 자체도 훌륭하여 여러 지리책이 국내 출간되는데 힘을 보탰던 듯 하다. 그 덕에 오랜 인문학이자 사회과학의 선두주자였음에도 역사의 대중성에 눌려있던 지리가 모처럼 빛을 본 듯 하다. 이후, 좋은 지리 책들이 많이 나왔다. 가급적 놓치지 않고 보려 애썼다.
팀 마샬은 주요 선진국의 지리적 조건과 거기서 나오는 역사, 가능성, 그 한계를 다룬 '지리의 힘 1권' 이후 '장벽의 시대'도 펴냈다. 문을 걸어잠궜던 트럼프 시대에 발맞춘 책이었는데 흥미롭긴 했지만 사실 지리의 힘 만큼은 아니었다. '지리의 복수'는 지리가 가진 가능성과 그것이 제기하는 근원적 한계를 여러 국가들의 사례를 통해 설명했다. 러시아가 자연적 척박함으로 인한 폭력성과 전제정치에 대한 너그러움으로 민주주의가 어려운 것, 또한 광활하게 펼쳐졌음에도 자연 방어물이 없어 스스로의 보호를 위해 오히려 팽창하는 성향을 지닌 것, 인도가 자연지물의 한계로 세력이 중국처럼 통합되지 못한 것, 멕시코가 가까운 시일내에 미국에 위협이 될 것으로 본 지점이 독특했다. '각자 도생의 세계와 지정학'은 작년에 본 책으로 미중 전쟁으로 과거 미국이 제공하던 제1질서가 붕괴할 것으로 본다. 제1질서는 자유로운 교역과 이에 대한 미국의 안전 보장으로 국제분업과 상호교류 및 유래없는 평화의 시대를 가져왔다. 하지만 미중전쟁으로 미국이 이 질서를 보장하기 힘들어짐에 따라 향후 교역로에 의존하지 않고 지리적으로 자급자족적 능력을 가진 국가들이 새로운 패권세력으로 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남미는 아르헨티나, 유럽은 터키나 프랑스, 오세아니아의 호주 등이 그러했다. 매우 좋은 책인데 좀 미국중심적이었다.
지리의 힘 2권은 1권에 비해 기존의 논조를 따르면서도 좀더 주변적인 나라들에 초점을 둔 것이 좋았다. 덕분에 잘 모르던 나라들에 대해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고 마지막 장을 우주로 설정하여 지리학의 영역을 확장한 점도 인상적이었다.
1. 호주
호주는 넓고 평평하며 몹시 건조한 평야가 국토의 대부분이다. 70%가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인 outback이다. 그래서 그 넓은 영토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2천 6백만으로 한국의 절반에 불구하다. 인구는 시드니, 맬버른, 브리즈번, 3대 도시에 50%가 몰려있고 유일하게 쓸만한 머리-달링강 유역이다. 이곳은 토지가 비옥하여 강에 의지하며 사람들이 내륙으로 이주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 머리-달링강도 선박의 운행이 가능할만큼 깊지는 못하다.
우리는 흔히 호주의 원주민을 단일종족처럼 여기나 아메리카 토착민의 종족이 매우 다양한 것처럼 이들도 에오라족, 무리족, 능가족, 왈라족등 매우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1788년 이들의 수는 25만에서 50만이었지만 20세기의 영토전쟁으로 수만이 사망한다. 시드니 주변 백인 정착촌들은 점차 성장하여 개척 전쟁을 일으켰는데 2천의 식민지인과 그 수배에 달하는 원주민이 희생되었다. 1910년에 이르러서야 호주는 학살에서 벗어났지만 원주민 아이를 동화시킨다는 이유로 가족과 떨어지게 하여 백인 가정이나 국가시설에 위탁하였다. 이 정책은 1970년대가 되어서야 종료되었고 그 결과 10만의 가족과 과거 유산과 단절된 도둑맞은 세대가 탄생하였다. 2008년이 되어서야 호주 케빈 러드 총리가 일련의 원주민 탄압에 대해 사과하였고 현재 원주민의 수는 80만까지 성장하였지만 이미 과거의 언어와 문화를 많이 잃어버린 후였다.
호주는 지리적 제약으로 성장이 매우 늦었다. 미국은 동부에서 출발하여 서부로 갈수록 비옥한 토지들과 운송이 쉬운 강들이 등장하여 폭발적인 인구성장세와 확장을 이루었지만 호주는 해안 지역을 벗어날수 없어 그러지 못했다. 해안의 거점들은 공식적 교류가 없이 자체 경제, 정치제도를 이루고 있었고 교역도 상호가 없었다. 호주엔 마땅한 짐승도 없었기에 사람이 짐을 육상으로 날라야만 했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철도가 부설되자 일부 해안도시들의 연결되었고 운송과 통신이 발전하며 연방형태로 여러 지역을 묶자는 생각이 탄생했다. 1889년 국민투표가 이뤄졌고 큰 반대속에 통과되었다. 1901년 6개의 영국령 식민지가 연합하여 호주 연방을 구성하였고 이것의 지금의 호주가 된다.
호주는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천연자원이 많고 양모, 양, 육류, 밀, 와인이 풍부하다. 또한 우라늄과 아연, 납은 세계적이며 철광석과 질좋은 석탄도 풍부하며, 금과 은, 텅스텐도 많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바로 원유다. 때문에 호주는 중동에서의 원유 수송이 나라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 교역료는 말라카, 순다, 듬복 해협을 지나는데 현재 적대적인 중국이 이를 봉쇄한다면 호주는 원유 부족 상태에 빠지게 된다. 때문에 호주의 국방력은 원유 수송선 호위를 위한 전함과 잠수함, 그리고 원거리 해상 초계기 확보가 급선무다.
호주는 중국과의 대결을 위해 남태평양에 공을 들이고 있다. 호주는 중국이 남중국해를 지배하는 것은 어찌하지 못하나 남태평양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호주는 이미 이 지역에 가장 많은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섬 나라들은 과거 호주의 식민역사로 그 저의를 의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호주는 이들 국가들을 섬이 아닌 대양 국가로 인정하는 정책으로 호의를 사고 있다.
2. 이란
이란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즐겨 먹는 빵에 비유한다. 그 빵은 안은 평평하면서도 가장자리 껍질 부분이 두텁고 높은데 딱 자신들의 나라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특징은 이란 요새로 만들어주는 이점을 지니면서도 나라의 통합과 발전을 어렵게 하는 요소가 된다.
이란을 둘러싸고 있는 산맥은 자그로스 산맥이다. 서북쪽은 알부르즈 산맥이며 호르무즈 해협 부근은 샌트럴 마크란 산맥이다. 이라크와 접경지역인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가 만나는 샤트알아랍 부근이 유일인 저지대 접근로이지만 이 지역 역시 습지이고 돌파하더라고 바로 자그로스 산맥이 등장하기에 이란 침공을 매우 어려운 과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점령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미 알렉산드로스와 몽골, 티무르 제국이 이런 이란의 지리적 장벽을 돌파하고 이 지역을 접수한 전례가 있다. 이란의 이 지리적 장벽은 자신들을 보호하는 껍질이지만 스스로를 가두는 작용도 하는데 실제로 이란은 페르시아가 오래전 아랍 지역을 지배했던 적을 제외한다면 항상 이 틀안에 갇혀있었다.
대다수 이란 인구는 산악지대에 밀집해 거주하는데 둘러싼 산악 지대 안쪽의 평지가 모두 사막이기 때문이다. 카비르 사막과 투르 사막인데 그 넓이가 어마어마하다. 산악지대의 특성상 지리적 격리가 이뤄지고 그래서 이란인들은 생각보다 다양한 문화를 갖고 있어 서로간의 단결과 화합이 쉽지 않다. 언어도 매우 다양한데 공식어인 페르시아어를 구사하는 자가 60%정도에 불과하다. 거기에 16%의 아제리족, 10%의 쿠르드 족등 다양한 민족이 거주한다.
이란인들은 산비탈을 따라 건설한 도시에 거주하는데 카스피해-테헤란-샤트알아랍강 유역에 대부분이 거주한다. 건조지역이라 물이 부족해 도시는 산자락에 자리잡고 산비탈에 터널을 파서 작은 수로로 물을 끌어올린다. 국토의 1/10만 경작이 가능하고 이중 물을 댈수 있는 곳은 1/3에 불과하다.
이란은 페르시아의 영광이후 긴 침묵을 겪는다. 알렉산드로스의 침략으로 제국이 붕괴했고 이후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아랍에게 상실한다. 몽골 침략 이후 사파비 왕조가 등장하는데 이 때 시아파가 국교가 된다. 사파비는 수니파인 오스만에 대항하기 위해 시아파를 정략적으로 선택했다. 사파비 이후 200년간 혼란이 지속되고 서구 열강이 들어온다. 영국은 유전이 있는 페르시아를 보호국으로 하려 애썼는데 1921년 레자 칸이 정권을 탈취하여 팔레비 왕조를 만든다. 그는 강한 페르시아의 부활을 선언하고 여러 종족을 통합하기 위해 페르시아 대신 이란이라는 국호를 사용한다. 그는 친서방 정책을 펼쳤지만 1951년 국유화 지지자인 모하마르 모사데그가 총리가 되자 서방의 반발로 이란은 국제적 제재를 받게 된다. 호메이니는 샤에 대한 비판으로 이라크로 추방된 뒤 프랑스에 거주했는데 1978년 이란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가 샤가 1979년 해외로 망명하자 들어아 집권한다.
당시 이란내에서는 세속주의적 지식인들이 종교적 환멸에도 불구하고 국왕축출을 위해 호메이니를 지지했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이슬람 공포정치를 시작했고 소수파 종교, 공산주의자들이 고문과 처형 실종되었다. 반혁명의 씨를 말려버리기 위해 이란혁명 수비대를 창설했고 이들은 가장 위압적 군사조직이 되어 나라의 여러 사업도 장악한다. 현재 이란의 젊은이나 자유주의자들은 이 집단을 싫어하지만 거꾸로 많은 부를 제공하는 이들 대기업에 가장 취직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3. 사우디 아라비아
사우디는 인구 3500만으로 인구 대부분이 제다, 메카, 메디나 인근에 거줗나다. 사우디는 주변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같은 아랍 형제라는 말이 무색하고 민족, 종교, 성향이 달라 늘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1744년 종교학자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는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에 충성을 맹세하고 두 집단은 연합한다. 정치는 사우드가 종교는 와하브가 차지하는 식이었다. 이들은 사우디 중앙의 황폐한 네지드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세력 확장 중 오스만 제국에 진압당해 사우드는 이스탄불로 끌려가 참수당한다.
일족은 이 비참한 실패에도 살아남아 1824년 사우드 가문은 네지드의 중심지 리야드를 수복한다. 북쪽의 샴마르를 지배하던 라시드 가문과 다시 갈등이 시작되었는데 이번에도 패배해 사우드는 쿠웨이트로 도주한다. 1901년이 되어서야 20대 중반의 이븐 사우드가 사우드 왕조의 수장이 된다. 그는 1902년 네지드로 침투해 과감히 라시드 총독으 암살하고 1914년에는 네지드 상당부분을 회복한다. 여기에 뜨는 해 영국과 연합해 지는해 오스만과 라시드를 공격하여 1920년 라시드를 제압하고 1925년 메카, 메디나가 있느 헤자르 왕국을 제압한다. 1927년엔 영국과 협정을 맺어 영국은 사우드를 네지드와 헤자르의 왕으로 인정하고 대신 사우드는 요르단에 헤자르 북부를 양도한다.
마침내 1932년 사우디 아라비아가 건국된다. 그는 통합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고려태조 왕건처럼 자신이 굴복시킨 부족 및 고위 성직자 딸들과 결혼하여 20명의 부인과 100명이 넘는 자손을 탄생시켰다. 현재 사우디를 지배하는 가족 네트워크의 시작엔 셈이다. 지금과는 다르게 20세기 초반만 해도 사우디엔 석유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1935년 시추를 시작해 1938년 대규모 유전이 발견된다. 사우디는 1945년 루스벨트와 협상해 미국에 원유접근권을 제공하는 대신 사우디의 안전보장을 확약받는다. 사우디로서는 오랜 숙적 하심가문이 이라크와 쿠웨이트에 있기에 이 같은 보장이 매우 중요했다.
사우디를 일으킨 이븐 사우드가 죽자 그 계승자는 사치와 향략을 일삼아 1964년 실각한다. 이복동생인 파이샬이 즉위했는데 국유화로 석유 수입이 1600%가 증가했다. 이 돈으로 그는 통신 및 운송망을 건설하고 후한 복지제도를 수립한다. 이런 부로 인해 많은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오게 된다. 이들이 저렴한 임금으로 노동을 하기에 오늘날의 사우디는 젊은이들의 실업률이 매우 높고 상당히 낭비가 심하다. 사우디는 적은 인구에도 세계에서 6번째로 원유 소비가 많으며 발생 전력의 70%를 냉방에 사용한다. 부족한 물 역시 담수화 시설을 통해 가정과 농가에 보급하는데 수많은 보조금으로 가격을 낮추기에 이 역시 아까지 않는다. 젊은 세대의 노동시장 진입과 경쟁력 확보, 에너지의 절약이 향후 사우디의 과제다.
하여튼 파이샬 지위 기간은 1965년 TV방송이 이뤄졌고 이에 대해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이 시위를 벌인다. 파이샬은 이들을 달래기 위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귀국시키고 교육기회까지 부여하는데 이것이 향후 독이 된다. 1975년 파이샬은 암살되고 할리드가 즉위한다. 1979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메카에 침입해 테러를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국왕은 지도력에 큰 타격을 입게되고 사우디 왕가는 그간 추진해오던 국가 현대화에 제동을 걸게 된다. 오히려 이슬람에 기대 시대를 역행하게 되는데 극장이 폐쇄되고 공교육에서 종교시간이 늘어나고, 학교와 대학은 이슬람 성직자를 더 많이 고용하는등 제대로 시대를 역행한다.
한편 이라크 전쟁으로 왕국이 위협을 받자 사우디는 빈라덴의 요청을 거부하고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 의존하기 보다는 미군을 주둔시킨다. 미군은 승리하고 왕국은 보호받았으나 극단주의자들은 이 현실이 매우 불편했다. 결국 이들은 사우디 내에서 테러를 자행하여 외국인 거주지와 미영사관등을 공격해 100명 이상이 사망한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사우디내 외국인 고급 인력의 20%가 위협을 느껴 떠나게 된다.
2017년 MBS, 모하메드 빈 살만이 왕세자로 올라선다. 그는 과감하고 공격적인 외교정책과 개혁을 실시한다. 여성에 운전을 허용하고 영화관을 열고 종교적 판결을 현대화하고 시장주의를 강화했다. 한편으로는 각국의 외교를 조종하고 급기야는 자신을 비판한 언론인을 살해하기도 해 국제적 비판을 받았다. 그는 새로운 사회계야긍ㄹ 제시하는데 국민은 덜 부패하고 덜 관료적이며 석유시대 이후에도 살아남을 국가의 건설이다. 하지만 이 국가에서 국민들은 지금의 고복지 시스템에서 벗어나 더 일하고 대신 더 큰 자유를 얻어야한다. 그에게 걸림돌은 오랫동안 같이 해온 와하브 극단주의자들이다.
4. 그리스
이 나라는 국토의 4/5가 산맥이다. 본토의 중심부에 핀토스 산맥이 남북으로 자리한다. 동쪽의 테살리아, 마케도니아에서만 경작이 가능하다. 때문에 그리스는 세력을 뻗어나가기 힘들고 인구부양이 어렵다. 지형으로 인해 연결도 안되고, 상호교류는 물론, 인구증가와 중앙집중도 어렵다. 때문에 현재도 식량 수입이 많고 도로, 철도 부설이 어려우며 뱃길로 쓸만한 강도 딱히 없다. 이런 황폐함으로 인해 어쩔수 없이 해상교역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고대에 문화를 꽃 피운다.
그리스는 아테네-페르시아-아테네-스파르타-로마-비잔틴으로 역사가 이동한다. 비잔틴은 1453년 멸망하는데 1800년이 되어서야 제국이 약화되 그리스 봉기가 가능했다. 1832년 열강에게 주권을 인정받으니 그리스인은 정작 협상에서 배제되었고 그 결과 그리스 인구의 1/3만이 새로운 그리스 국경에 포함되었다. 그리스인들은 과거 비잔틴 제국 수준의 부활을 염원했지만 열강은 그리스를 군주국가로 만들고 덴마크 빌헬름 왕가의 요르요스 1세로 등극시킨다. 그리스인에게는 좀 실망스러운 혈통이었지만 왕은 러시아 영국 왕가와의 친분을 이용 더 많은 영토를 얻어낸다. 테살리아를 병합하고 그 그세로 1600년만에 1896년 1회 올림픽도 개최한다.
영국은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막고자 그리스를 보호국화하려 한다. 1912년 1차 발칸 전쟁이 일어났고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대 오스만이 대결했다. 여기서 그리스가 이겨 테살로니키 항구를 획득한다. 2차 발칸 전쟁에서는 불가리아가 그리스 세르비아를 공격했다고 패해 영토를 상실한다. 그리스는 이 두 차례 전쟁으로 영토가 70%늘어나고 인구도 480만까지 증가한다.
1차대전에서 그리스는 상황을 관망하다 연합국에 참전하여 터키 이즈미르를 포함하여 오스만의 영토를 획득한다. 하지만 1922년 무스타파 케말의 터키군에 패해 비잔틴 제국의 재건 야망이 수포로 돌아간다. 이로 인해 양국에 살던 그리스 터키인들이 서로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터키에서 그리스로 돌아간 그리스인이 무려 150만 반대 상황의 터키인이 40만이었다. 150만의 난민은 새로 획득한 테살로니키로 주로 유입되었는데 이로 인해 지역이 황폐화하고 유대인으로 불똥이 튀어 반 유대주의 정서가 강화한다. 이 배경에서 공산당이 지지를 얻자 그 혼란으로 군사정변과 권위주의 정권이 출현한다.
그리스는 독재자 이오안니스 메탁시스의 지휘아래 2차대전에 참전했다 이탈리아에 패해 독일에 항복한다. 산악지형을 이용해 게릴라가 항전했으나 적군의 식량 징발로 수만명이 아사하고 7만이 처형되었으며 수백곳의 마을이 파괴되었다. 여기에 6만의 그리스계 유대인이 나치에 의해 희생되었다. 해방 후엔 내전이 일어났다. 공산주의 세력이 득세하자 미국이 그리스 군대를 지원하였고 그리스 반군은 알바니아로 퇴각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5만이 사망하고 50만의 이재민이 생겨났다.
그리스는 이후에도 군부독재를 겪다 1974년에야 민주화가 되었다. 현재 그리스는 경제위기를 겪고 난민의 통로로 고통받으면서도 터키와 대결하고 있다. 그리스는 인구의 1/3이 수도권에 거주하고 섬에는 고작 수십만만 거주한다. 섬은 무려 6천여개에 달하는데 터키-그리스 사이 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극히 유리하지만 대부분 사람이 거주하지 않고 그 수가 워낙 방대하여 방어에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최근 지중해 동부에서 거대 가스전이 발견디었는데 이로 인해 그리스 터키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자국수역에 에너지가 없는 터키는 사이프러스, 그리스 영해를 탐색하고 터키-사이프러스-리비아를 있는 배타적 경제수역을 강제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물론 이 지역은 사이프러스와 그리스의 영해를 포함한다. 또한 러시아는 서유럽이 가스를 자국에 의존하는 현상황을 유지하고 싶어 이 상황에 터키의 편에서서 초조히 지켜보고 있다. 그리스는 이집트,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이탈리아, 요르단과 함께 동지중해 가스포럼을 형성했다. 이 기구는 에너지와 안보기능을 같이 한다.
그리스는 미국에 전략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크레타섬의 수다만에 미군해군 기지를 유치했다. 2020년 그리스는 미국에 군사훈련, 급유, 응급상황시 그리스의 군부대 접근권까지 부여했다. 이들은 미국의 믿을 만한 동맹이 되어가고 있다.
5. 에디오피아
에디오피아는 지리적 이점과 많은 인구, 풍부한 수자원으로 이 지역의 잠재적 패권국이다. 이 나라는 무려 12개의 커다란 호수와 9개의 큰 강을 갖고 있어 유독 수자원이 풍부해 이를 다른 나라에 제공해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갖는다. 이 담수는 멀리는 중동에까지 영향을 미쳐 이를 이용해 홍해로의 접근성을 높이고자 한다.
에디오피아는 동아프리카 지구대가 나라를 관통한다. 산맥과 계곡이 6400km나 이어지며 나라는 동서로 갈라놓는다. 지구대의 서쪽이 인구 밀집 지역인데 다수의 커피 농장이 있다. 숲이 울창한 삼림에서 강물이 솟아나고 그물이 지대를 빙빙돌아 폭포가 되어 비옥한 평야로 흐른다. 하지만 가파른 협곡과 폭포는 역시 장거리 운항을 방해한다.
핵심지인 아디스 아바바는 주변 낮은 완충지대로 둘러쌓여 난공불락이다. 에디오피아는 인구가 1억1천이며 향후 10년간 1억3천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 나라는 드물게 에너지와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하지만 농업은 물이 풍부함에도 주기적 가뭄과 삼림남벌, 과도한 방복, 군사독재, 빈약한 인프라로 휘청거린다. 이로 인해 역설적이게도 수백만의 인파가 인도적 손길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에디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는 드물게 식민지배를 당한 경험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아프리카국가처럼 종족 문제를 겪는다. 9개의 주요 부족이 국가내 존재하고 이들의 분포에 맞게 9개의 행정구역이 있으며 4개의 주요언어가 있다. 오모로족이 35%로 가장 많고, 암하라족이 27%, 티그리에족이 6%, 소말리족이 역시6 %이다. 에디오피아의 중앙지형은 이들 부족들을 지역적으로 격리시키고 통합을 어렵게 한다.
에디오피아는 유구한 역사처럼 건국전설이 있다. 고대의 시바여왕이 이스라엘 솔로몬 왕과 정을 나누어 메넬리크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 메넬리크는 성장하여 아버지 솔로몬을 찾아가 모세의 십계명이 있는 언약궤를 가지고오는데 이것이 현재 악숨에 보관되어 있다. 메넬리크부터 시작된 왕좌를 1970년까지 이어진다.
에디오피아는 악숨제국때 강성하였고 이집트 남쪽과 홍해, 예멘을 지배했다. 300년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이집트 곱트파와 함께하면서 서방 교회와 단절된다. 1500년 세력을 확장한 오스만이 침공하지만 포르투갈 상인들이 무기를 제공하고 훈련을 도와 막아낸다. 에디오피아 인구의 상당수는 카톨릭이지만 1/2은 무슬림이며 이들은 외곽지역인 동부저지대에 거주한다. 이 지역에도 최근 이슬람 근본주의가 침투하여 긴장감이 높아지는 상황이다.
1855년 현대 에디오피아가 탄생한다. 국왕 테오도르스 2세가 여러 왕국을 강제통합하였고 군대를 재편성하고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유럽 기술자들이 상인에 활력을 넣는 기술을 전수해주었다. 이집트와 이탈리아와 침공도 방어해냈고 수도를 아디스 아바바로 옮겼고 수도와 지부티 항구, 홍해를 잇는 철도를 부설한다. 1930년에 하일레 셀라시에 1세가 즉위하여 경제를 현대화하여 국제연맹에 가입한다. 하지만 2차대전에 참전했다 무솔리에 패배하여 점령당하는데 해방후 황제는 미국 루스벨트를 설득하여 이탈리아에서 해방된 에리트리아를 획득한다.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이를 승인하는데 1960년 에리트리아가 봉기하고 1974년 멩기스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는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고 공포정치를 시행한다. 이에 경제가 무너지고 기근이 발생하였으며 에리트리아에도 패배한다. 멩기스투는 구소련이 붕괴하자 짐바브웨로 도주한다. 새정부는 티그레이 출신의 멜레스 제나위가 이끌었다. 그는 각 지역에 독립을 도무할 권한을 주었고 이에 에리트리아가 독립한다. 2018 아비 아미르가 총리에 선출되고 그는 최초의 오모로족 출신으로 반대파와 언론인 수천명을 석방하고 에리트리아와도 화해한다.
이런 일련의 시도에도 종족간 긴장은 여전한데 오로모는 무슬림으로 가장 수가 많음에도 이제서야 처음으로 권력을 잡을 만큼 그간 소외되어왔다. 암하라는 기독교이며 오랜 지배역사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고, 티그레이는 수가 적음에도 최근 나라를 지배한 것에 대한 향수가 여전하다. 그리고 다른 소수민족들은 이들을 두려워하며 다시 전제적 지배를 당할가 걱정한다.
에디오피아는 내륙국으로 홍해연안에 접근하는게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 지역의 지정학이 난리다. 2017년 사우디와 UAE는 테러지원을 이유로 카타르와 단절한다. 터키는 카타르 편을 들고 이로 인해 긴장감이 더욱 높아졌다. UAE는 소말리아가 터키와 손을 잡자 바로 투자자금을 소말릴랜드와 푼틀란드로 돌려 군사기지와 항만을 건설했다. 이지역의 오랜 후원국인 터키는 소말리야 쪽의 주요항구와 항만을 지배하는데 인근 아랍국들은 이것을 터키의 신 오스만 주의로 보고 경계하고 있다. 에디오피아는 중립을 견지하고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 쉽지 않아보인다.
결국 강한 잠재력을 바탕으로 내부의 혼란과 외부의 혼란을 잘 조절하는 것이 이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6. 우주
지금까지의 지구지배는 지상군과 해군을 전략적 위치에 배치하고 해상항로와 요충지의 출입을 저지하고 여기에 공군력을 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주시대가 다가오자 저궤도에 자리를 선점하고 자산을 배치하는 것이 새로우 지구 지배 전략을 대두하고 있다.
우주는 3개의 범주로 구성된다. 우선 테라인데 지구와 그 영공 비행체가 연료 재공급 없이 지구 주위의 궤도로 갈수 있는 한계거리다. 지구우주는 최저 지구궤도에서 지구자전과 궤를 같이 하는 지구 정지궤도까지이다. 달우주는 여기서 달 궤도까지를 의미한다. 이중 향후 수십년간 가장 중요한 것은 지구우주로 거대한 군사적 이점을 제공할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지구가까이에는 5개의 칭동점이 있다. 이곳은 지구와 달의 중력효과가 서로 상쇄되어 정박한 물체가 연료소모없이 머무는게 가능한 황금포인트다. 이 중 하나는 위성들이 있는 벨트를 내려다볼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거대한 조망권을 제공한다. 가장 값진 곳이다. 다른 하나는 달의 뒤편에 존재하는데 지구와는 멀지만 향후 우주범위가 더 넓어지면 중요해 질 지역이며 때문인지 중국이 달 뒤편에 진출했다.
이런 흐름속에 미국은 2019년 우주군을 창설한다. 세계 각국은 극초음속 미사일 개발에 열을 올리는데 이 미사일은 기존의 대륙간탄도미사일과 다르게 포물선 비행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방향과 고도변환이 가능해 타격지점과 요격 좌표를 계산하지 못한다. 이런 무시무시한 미사일을 방어할 수단이 우주에서의 레이져 요격이다.
최근 위성은 통신기술의 발달로 그나라의 통신과 정찰의 최첨단 장비다. 때문에 거의 모든 선진국들은 정보와 감시활동을 위성에 의지한다. 따라서 그 나라의 위성 파괴는 사실상의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어진다. 러시아, 중국, 미국, 인도, 이스라엘은 이런 중요성 때문에 위성을 공격하는 킬러위성 시스템을 개발했다. 레이저로 위성을 파괴하는 방법, 위성교란 통신 기술, 위성 충돌 기술등이 그것들이다.
인류는 남극의 경우처럼 아직 우주에 대해서 이렇다할 평화적 이용 협약이 없다. 물론 남극 조약역시 이를 거부하며 영유권을 주장하는 극 인접 지역 국가들이 적지 않다. 아마 지구와 가까운 우주도 그리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지구권 국가들인 지리라는 요소의 가능성과 한계에 갇혀있지만 우주에서는 새로운 지리적 조건과 지정학이 등장할 것이다. 이에 발빠르게 다가갈 필요가 있으며 세계적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적잖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