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그렇기에 주변의 인간과 협력 및 경쟁을 한다. 주변 협력자들 중에는 자신과 유전자를 100%공유하는 일란성 쌍둥이에서 절반을 공유하는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일부를 공유하는 인척들이 있다. 그리고 유전자를 거의 공유하진 않지만 나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을 주는 친구들이나 믿을만한 협력자들, 그리고 같은 문화권의 부족 구성원들도 있으며 이들은 나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을 준다. 반면 나의 생존과 번식에 방해를 주는 경쟁자들은 성적 경쟁자들이나 생존을 위한 자원을 갖고 다투거나 사기 및 공격적 행동을 보이는 인간들, 우리 부족과 적대적 성향을 띠는 경쟁부족 구성원들이다. 

 이렇게 주변의 사람이 나의 생존과 번식에 협력적이냐 경쟁적이냐에 따라 인간은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에게 가중치를 부여하게 된다. 민주사회에서 태어난 우리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배우고 그리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모든 주변인을 평등하게 대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은 사람에 대한 자신의 가중치의 정도를 공감이라는 감정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개인의 유전전 근인도, 그리고 같은 사회문화권 구성원, 개인적 친밀도나 그 사람의 협력도, 혹은 사회의 쓸모 있는 구성원으로서 그 사람의 위치나 외모, 성별, 나이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사람은 매일 일어나는 사건 사고 속에서 피해자의 조건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그가 보이는 공감정도는 현저히 달라진다. 때문에 공감이란 수단이 도덕성의 조건으로 그리 좋지 못함을 책 공감의 배신은 보여준다.


 






 공감에 대한 차이는 재난 영화를 봐도 쉽게 볼수 있는데 재난 영화에는 많은 공식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빌런인데 모두가 생명상실의 위기 상황에서 자기만 살겠다고 모두를 위기에 몰아넣거나 구조순서를 가로채려고 시도하는 그런 자들이다. 그런데 이런 빌런들은 이상하게도 대부분 성별은 남성이며 나이는 대개 젊거나 중년층이고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경우가 많다. 영화 해운대에서 난리치다 구조대원을 죽음으로 이끈 젊은 재벌, 부산행에서 주인공들을 막아버린 아마 적당한 기업 중역으로 보이는 안경 쓴 아저씨, 2012에서의 러시아 재벌, 샌안드레아스의 역시 재벌, 영화 엑시트에서의 지배인, 타이타닉에서의 로즈의 약혼자등이 그렇다. 아마 좀더 찾아보면 이보다 훨씬 많은 것이지만 아마 빌런의 유형은 상당히 비슷할 것이다. 

 위기상황에서 유독 남성, 그것도 젊거나 중년이면서 사회경제적 지위가 비교적 높은 이들이 이런 진상을 부리는데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이들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각자도생의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완력을 쓰기 좋은 위치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아무래도 여성이나 노년, 어린 아이들에 비해 힘이 강하니 스스로 살고자 난리치기 적합하다. 더구나 사회경제적 위치가 높은 사람은 그 상황에서 그것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용할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사용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들이 아무래도 가장 공감 받지 못하는 존재로 위기 상황에서 가장 낮은 가중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트롤리 딜레마란 윤리학 사고 실험이 있다. 양편 중 한 쪽을 반드시 죽일 수 밖에 없을 때 선택을 하게 하는 실험인데 크게 사람의 수나, 그 사람이 나 자신 혹은 얼마나 나와 관련이 있는지, 나이는 어떤지, 성별은 어떤지가 조건으로 주어진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이 상황에서 보통의 사람들은 적은 수의 사람보다는 더 많은 사람을, 남자 보다는 여자를, 그리고 어린 아이를, 노인보다는 젋은이를, 뚱뚱하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보다는 보통으로 보이는 사람을 더 살리려는 경향이 있다. 재난영화의 각자도생의 상황은 어찌보면 트롤리의 딜레마 상황과 가장 유사하다. 그렇기에 중년 혹은 젊은 남성은 자신이 가장 가중치가 낮음을 스스로 깨닫고 난리치는 것이 아닐까. 그저 가만히 있다가는 자신의 구조순서나 탈출순서가 마지막이 될것이 자명하고 그것은 자신의 생존율을 급격히 낮추기 때문이다. 실제로 타이타닉호 침몰사고에서 남성승객은 20%, 여성승객은 74%, 어린이는 50%가 생존했다. 남성이 의도적으로 구조에서 배제되었거나 혹은 스스로 양보했음을 추측하게 하는 대목이다. 

 사실 각자도생의 상황에서 어느 정도 젊은 남성의 가중치가 가장 낮음은 다소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 원시사회에서 젊은 남성은 소규모 집단에서 완력이 강해 집단의 전투력이나 생존력을 높이는데 가장 기여할만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꾸로 각자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여성이나 아이, 노인, 혹은 같은 다른 남성에게 자신들의 생존을 가장 위협하는 존재이며 동정이 가장 가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중치가 낮은 것일까? 

 

 하여튼 개인은 그럴지언정 헌법이나 여러 법들에서 선언적으로 우리 사회, 혹은 세계 모든 구성원은 평등하다고 외치는 국가나 사회, 세계마저도 사실 사람마다 현저한 가중치를 두고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이를 매우 쉽게 접할수 있는데 가령 같은 죄를 저지르고도 사람의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 형량이 매우 다르며 심지어 기소조차 되지 않는 경우, 혹은 같은 20년형을 받고 복역을 하더라도 누구는 만기를 채워야 나올수 있지만 누군가는 특별한 형태로 4-5년만에 나오기도 하는 그런 경우를 봐도 그렇다. 

 그리고 이런 사회가 개개인에게 부여하는 가중치는 생명가격표라는 이름으로 가장 적나라하게 등장한다. 바로 이 책의 제목이다. 생명 가격표는 글자그대로 생명에 가격을 붙이는 것인데 재난이나 테러, 사건사고로 사람이 생명을 잃는 경우 유족에게 부여되는 보상금이나 배상금이 바로 그것이다. 같은 사고로 사망한 경우라도 누구는 1억 누구는 10억의 배상금을 받는다. 이것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산정하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한 개인의 생명가격을 산정하는 방식으로 널리 사용되는 방법은 비용편익 분석이 있다. 비용편익분석은 순현재가치의 최대치를 지닌 대안을 가려내는것으로 흔히 선택된 규제안이 가져올 비용과 편익에 대한 고려를 할때 사용된다. 가령 에너지 전환을 위해 한국에서 시대착오적으로 신규로 건설하고 있는 화력발전소를 모두 폐기한다면 상당한 고정비용과 해당 기업에 대한 배상금이 투입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에 미세먼지와 탄소 발생량을 줄여 국민 건강과 환경에 기여하고, 한국의 대외이미지를 개선시킨다면 이것이 편익이 된다.

 이 비용편인 분석엔 많은 문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우선 통계적 생명가치를 중요한 투입변수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통계적 생명가치는 생명 하나당 공정하게 주어지는 생명가치인데 이게 높으냐 낮느냐에 따라 생명가격표가 현저히 달라지게 된다. 미국의 경우 통계적 생명가치는 10만 달러정도로 높게 책정되어 있는데 이는 미국의 기대소득치는 넘는 수준이다. 때문에 미국의 경우 인명 상실에 대한 보상금액이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편이다. 한국은 생명상실에 대한 보상금이 매우 낮은데 이는 아마도 정부 당국에서 통상적으로 통용되는 통계적 생명가치가 낮기 때문이 아닌가로 추정된다. 

 비용편익분석의 또 다른 문제는 통계적 생명가치가 실제 위험이 증가하는 현재가 아닌 사망이 발생하는 미래를 의미하는데 사용된다는 점이다. 화력발전소를 그대로 존치시켜 발생하는 현재의 손해보다는 그로 인해 사람이 사망하는 이후를 계산하기에 현재적 쓸모가 적다는 것이다. 다른 문제는 할인이다. 미래의 사망에 대한 손해를 계산하고 미래의 것이기에 경제적 개념으로 물가상승률에 대한 할인이 적응된다. 물가가 매년 10%오르면 현재의 10만원은 7년후면 5만원의 가치에 불과하다. 때문에 할인을 적용하면 미래 세대의 생명이 현세대의 그것보다 현저히 가치가 작아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정량화하기 어려운 요소를 간과하는 면이 있다. 화력발전소의 경우 혜택을 보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동식물도 이득을 본다. 하지만 이런 것은 편익내역에 대개 포함되지 않으며 포함하려고 해도 산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발전소의 폐쇠는 바로 견적이 정확히 나온다. 또한 공정성이 고려되지 않는다. 대개 피해를 입는 계층은 사회적 약자나 서민일텐데 발전소 관련자는 보다 재벌이다. 공정을 기대하기 어려우며 이런 비용편익을 분석하는 집단들 역시 이들과 엮여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비용편익 분석이 생명의 가격을 특정 사업에 대한 사회적 규제안에 다한 편익과 비용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사람의 사망에 대한 보상금은 보다 직접적인 생명가격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죽게 만든 사람은 민사 형사상 책임을 지게된다. 형사는 징벌적으로 죄에대한 형벌이고 민사는 사람을 죽게 한 것에 대한 보상이다. 민사에서 보상금액은 실제비용과 기회비용으로 나뉘는데 실제비용은 장례비용등을 포함해서 희생자의 죽음을 처리하는데 드는 비용이며 기회비용은 희생자가 살아있었을 경우 기대할수 있었던 소득이나. 봉사등이다. 이 기회비용이 사람의 나이나 성별, 직업에 따라 매우 달라질수 있기에 개개인의 생명가격표는 매우 달라지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보상금액의 산정에 생명자체에 대한 가치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미국의 많은 법이 생명자체에 상실에 대한 보상은 규정하고 있지 않으며 희생자등 남아있는 사람에 대한 문제만을 고려한다. 어찌보면 법은 철저히 산자만을 위한 것이란게 여기서도 드러난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범죄자의 경우도 그가 자살하거나 사망하면 사건은 그냥 종결되어버리고 피해를 구제받지 못한 희생자만 남게되는 경우와 매우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점 때문에 자주 희생자가 사망한 경우보다 사망하지 않고 큰 부상을 입은 경우 보상금이 더 커지는 일이 생기곤 한다. 미국에서는 피해를 입은 사람이 원래대로 생활할수 있게끔 지원하고 보상하는 것이 개념이기에 큰 부상을 입어 평생재활을 해야하는 경우 보상금이 사망보다 더 커진다. 매우 역설적인 경우다. 

 이런 식의 보상금 규정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바로 직업이 없는 아동이나 특정 직업이 없는 가정주부의 경우 보상금이 터무니 없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이 경우 가정주부는 그가 기대소득은 없지만 가정에 기여하는 서비스나 봉사의 정도를 크게 잡거나 아이의 경우 유가족의 정신적 충격과 상실에 대한 고통을 고려하는 비경제적 손해배상을 크게 잡아 실질적 보상금을 높이는 형태로 진행되기도 한다. 

 이처럼 저자는 책 생명가격표를 통해 법적인 평등으로 포장된 우리의 삶이 실제로는 사회적 가중치를 부여받아 적나라하게 돈으로 책정되는 현실과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과정은 매우 일상적이며 의외로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지만 상당히 기업과 권력있는 사람들 편향적일 수 있으며 투명성과 공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생명가격표, 즉 사회적 가중치가 낮게 책정된 사람들은 그 생명의 가치가 낮게 책정되었기에 마구잡이로 취급당하고 존중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한국의 경우 위험한 건설현장이나 공사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생명가격표는 매우 낮게 책정되어 있다. 때문에 기업주들은 그들이 죽어도 경제적으로 형사적으로 그리 큰 손해를 보지 않기에 이들을 마구 잡이로 소모한다. 그 결과가 매일 6-7명이 죽어나가는 한국의 산업현장이다. 기업은 이윤극대화가 목적이기에 사업비용과 사람의 생명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아 늘 수익을 극대화하려고 한다. 실제 역사상 수많은 담배회사들이 이것이 건강에 치명적 문제를 일으킴을 알고 있음에도 이를 오래도록 숨겨왔으며 많은 위험한 화학물질을 배출하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도 이 제품이 노동자와 소비자에게 얼마나 많은 해악을 안기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은폐했다. 

 때문에 사회적으로  개인의 통계적 생명가치를 높게 책정하는게 필요해보인다. 한국은 이것이 낮기 때문에 보상금이 터무니 없이 적으며 형사적으로도 형벌이 매우 낮다. 그래서 기업이 지금처럼 할수 있는 것인데 형사처벌 수위를 높이고 보상금을 상당히 크게 한다면 지금같은 행태를 부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생명가격표에서 모두가 다르기에 개인의 직업이나 기대소득에 따른 가중치는 어느 정도 반영하더라도 모든 사람에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을 받을 수 있는 통계적 생명가치를 높게한다는 평등정도는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어느정도 선언적 평등을 실현할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법상에서도 생명자체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도 필요해보인다. 사망보다 부상의 배상금이 더 큰 것은 여러모로 역설적이다. 현실이 이렇기에 어설프게 사고를 내느니 확실히 사고내서 교통사고 사망자를 죽이는게 더 낫다라는 우스게 소리가 심각하게 돌아다니는게 아닌가.

 그리고 개인의 생명가격표를 책정하는 과정을 투명하게 하고 독립된 기관에서 이를 수행하는 것도 필요해보인다. 한국의 많은 규제기관은 노동부건 환경부건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마치 기업부처럼 행동하는 경향성을 많이 보인다. 때문에 이런 생명가격을 책정하는 독립기관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사람하나하나의 생명가격표는 다르더라도 그것이 충분히 높아 모두가 어느 정도는 평등하고 귀하다는 생각을 가질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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