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온난화가 매우 심각하다. 대륙 서안에 자리잡아 연간 강수량과 기온이 안정적이던 유럽도 극심한 고온과 추위, 홍수를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유럽연합은 작년 그리고 올해부터 기후대책에 상당한 힘을 쓰고 있다. 친환경 에너지는 물론이고 유럽연합에 물건을 팔거나 투자를 받기 위해서 다른 나라의 기업들은 자신들의 제품이 탄소를 적게 사용하여 만든 것임을 입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아직도 곳곳에 화력발전소(이명박정권이 추진한 짓이다.)를 새로 짓고 있는 한국으로선 상당히 신경써야하는 일이다. 그리고 한국의 포스코는 이런 이유로 인해 세계 여러 연기금이나 투자회사 및 금융권으로부터 투자철회를 당하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시일내에 인간윤리의 확립과 환경 문제 해결의 하나로 대규모 가축사육에 대한 문제가 거론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사실 잘 인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가축이 일으키는 탄소배출과, 식량낭비, 오염은 그 자체로 매우 심각하다. 가축은 그 생산 과정에서 냉방과 난방, 대규모 도축과 운송, 가공 과정에서 막대한 탄소를 배출한다. 또한 가축을 먹이는데 사용되는 많은 식량작물을 키우는데는 역시 화석연료를 이용한 막대한 비료가 사용되며 전 세계 엄청난 수의 가축은 그 자체로 메탄과 이산화탄소의 온실가스를 대규모로 방출한다. 참고로 세계의 가축수는 230억 마리에 달한다. 포식자인 인간의 수가 80억이나 되니 당연히 그 수보다 많은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자연상태에서 이렇게 많아 질 수는 없는 것이기에 환경에 막대한 부담을 주는 수라 하겠다.
그리고 인간은 이런 대규모의 가축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 사자처럼 얼룩말이나 사슴을 먹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잡식성 동물로써 인간은 채식만으로도 충분히 연명이 가능하며, 과학기술의 발달로 과거처럼 탄수화물 위주의 곡식만 주로 먹게 되어 단백질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도 아니다. 우리에겐 이미 충분한 식물성 단백질이 존재하고 이를 충분히 싼 가격으로 대규모 공급도 할 수 있다.
거기에 인간의 대규모 공장식 가축 사육은 필요이상으로 가축에게 상당한 고통을 준다. 수평아리는 태어나자마자 큰 박스에 갇혀 서로에게 압사당하거나 질식사당하거나 혹은 산채로 가루가 되어 동료의 먹이가 되거나 비료로 쓰인다. 암탉은 평생을 좁은 케이지에 갇혀 살아야 하며, 육계는 성장호르몬으로 인해 비균형적으로 자라 인간으로 해당하면 관절염환자 같은 고통속에 걷지도 못하다 도축된다. 돼지 역시 서로가 비좁은 곳에 갇혀 꼬리를 씹으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꼬리를 잘리며 어미 돼지는 평생 뒤를 돌아보지 못하며 새끼만 낳다가 생산력이 떨어지면 도축된다. 소 역시 뿔이 잘리고, 거세되며,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헤어진다. 젖소는 계속 우유를 생산해야하므로 새끼를 키우지 못하고 생이별, 임신이 반복되다 쓸모없어지면 결국 도축된다.
사실 과거 고기는 왕족이나 부유층이나 먹을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서민들은 고깃국에 들어간 한점조차도 얼마나 갈망했던가. 이런 고기가 싸진 것은 현대문명에 들어서인데 책 '값싼 음식의 실제 가격'은 고기가격이 실제로는 전혀 싸지 않음을 잘 설명했다. 여기엔 대규모의 사료가 들어가고 이 사료는 화석연료에 의해 재배되며 막대한 정부보조금도 포함된다. 환경에 대한 부담까지 생각한다면 사실 고기는 여전히 비싼 것이며 우리는 이를 알아채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다.
'고기로 태어나서'는 한국의 공장식 농장의 실태를 매우 잘 드러낸다. 소, 돼지, 닭 농장에 저자가 취직해서 직접 경험한 것이므로 르포식이며 매우 적나라하게 실태를 드러낸다. 읽으면서 적잖이 놀랐다. 평생 케이지에 갇혀 있는 산란계는 저자가 보기에 털하나 없고 흉측해 닭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스트레스 환경과 거듭된 산란으로 너무나 약해져 꺼내기 위해 날개만 만져도 쉽사리 뼈가 부러졌다. 한국이다보니 식용 개에 대한 취급도 다루어졌는데 그 도살과정이 적잖이 끔찍했다.
인간의 힘이 강해지며 그 도덕 적용대상이 확대되고, 논리적 일관성으로 인해 동물에게도 인간의 윤리를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졌다. 인간도 진화상 동물의 하나이고 같은 과정에서 진화했기에 상당히 다르지만 인간은 동물과 많은 특성을 공유한다. 무리를 이루어살고자하는 것, 움직임 욕구, 본능에 충실하고자 하는 갈망, 가족을 이루는 것, 어미가 새끼를 돌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것들로 인해 고통과 쾌락을 느낀다는 점이다. 이런 부분에서 인간과 동물을 엄밀히 구분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에 피터 싱어 같은 공리주의자들은 도덕적 대상으로 쾌고 감수능력이 있는 동물을 넣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책' 동물 해방'은 그러한 내용이 잘 집대성 된 책이다. 우리가 쾌고 감수능력이 있는 동물을 같은 윤리적 대상으로 삼고 그들의 이익을 고려해야하므로 채식을 해야하는 이유 그리고 인간이 식용, 그리고 연구용으로 동물을 대하며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있다.
사실 식용으로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좀 알려져 있는 편이지만 연구용은 덜 알려져 있는 편이다. 또한 동물실험은 인간에게 많은 의학적 혜택을 준다는 포장으로 쉽게 정당화 되기도 한다. 하지만 동물실험은 의학만의 것이 아니다. 여러 화학제품의 위험성에 대한 임상실험과 놀랍게도 상당히 많은 심리학 동물실험이 이루어진다.
원숭이의 모성에 대한 심리학 실험을 위해 심리학자들은 새끼 원숭이가 천으로 만든 어미 원숭이에게 안길 때마다 전기충격을 주었다. 새끼가 안을 때마다 전기가 발생하는 식이다. 그럼에도 새끼는 천으로 만든 가짜 어미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새끼가 안을 때마다 날카로운 철사가 나와 새끼를 찌르게 하였는데 역시 별효과가 없었다. 대체 동기와 목표를 알 수 없는 실험이다. 반대로 어미의 모성을 시험하는 실험도 있었다. 모성을 박탈하기 위해 어미가 될 암컷은 무리에게 격리되어 키워졌고 정상적인 사랑을 나누는 것도 방지하기 위해 강간대라는 곳에 묶인체 강제로 임신되었다. 이 어미 원숭이들 중 일부는 결국 모성이 자라나지 않았는데 그들은 충격적이게도 자기 새끼의 두개골을 부수는 행위를 하기도 했다. 뻔한 결과인데 굳이 이런 일을 하는 저의가 궁금할 지경이다.
토끼에 대한 트레이즈 실험은 오래되었고 유명하다. 토끼를 못 움직이기게 고정시키고 화학제품이 눈에 미치는 악영향을 보기 위해 꾸준히 화학 물질을 토끼의 눈에 투여하는 식이다. 이 경우 토끼는 대개 10일 정도면 극도의 고통과 함께 눈이 멀어버린다.
의학분야에서의 실험도 심각하다. 마약 중독의 효과를 알기 위해 동물들에게 코카인을 투입하여 일부로 중독시켜 뻔히 아는 그 결말을 본다. 암을 발생시키기도 하며 인간의 각종 성인병을 일부로 유발하기도 한다. 그나마 의학발전에 도움이 되면 모르겠는데 인간과 동물은 비슷하지만 다르기에 아무런 효용이 없는 경우도 많다. 일부 약품들은 동물에겐 해가 발생했지만 결국 인간에겐 무해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동물실험은 이미 기업화되었는데 미국의 여러 기업들이 심리학 연구소나 의학 연구소, 화학연구소가 원하는데로 동물을 가공하여 공급한다. 털이 없거나 색을 조절하거나, 여러 생태적 조건을 조절하는 형태다.
다음은 식용동물의 고통이다. 우선 닭이다. 미국에서는 매우 1억 200만 마리의 닭이 도축되며 연간 53억마리가 도축된다. 육계의 경우 태어난지 하루된 병아리가 창문없는 긴 닭장에서 자라나게 된다. 지붕에 달린 깔대기에서 모이와 물이 공급되며 초반 1-2주는 성장을 빨리 하기 위해 하루 24시간 밝은 조명을 유지한다. 하지만 자라나면 점차 조명을 줄여 거의 어둡게 하는데 이는 서로간의 공격을 줄이기 위함이다. 이들은 서로 공격하여 상처내어 상품성을 떨어뜨리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뜨거운 칼로 부리를 잘라낸다. 육계는 좁은 사육장에서 자신들의 배설물로 인해 공기가 오염되어 질식사하거나 자기들 무리에 깔려 죽기도 한다. 이들은 앉기도 어려운데 바닥이 배설물로 가득하여 앉을 경우 다리엔 궤양이 가슴엔 물집이 무릎에는 화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리는 가공과정에서 잘리게 되므로 큰 상관은 없다. 이렇게 세월을 보낸후 6-7주후 이들은 도축된다. 전기충격으로 기절된뒤 두 다리가 조임쇠에 묶여 거꾸로 들린채 칼날에 목이 잘려 죽게 된다. 피가 모두 빠지고 뜨거운 물에 빠져 털이 뽑힌후 배가 갈려 내장이 제거되고 우리가 아는 포장형태로 가공되는데 간혼 기절하지 않고 산채로 뜨거운 물에 닭이 들어가 쪄죽거나 질식사하는 경우도 많다.
산란계의 고통도 만만찮다. 이들은 태어난 후, 그리고 어느 정도 자란 후 두차례 같은 이유로 부리가 제거된다. 산란계는 매우 좁은 새장에 갇히는데 이는 경사진 철사바닥이다. 닭은 본능적으로 흙은 발로 긁거나 몸을 바닥에 문대 흙목욕을 하는데 새장에선 이게 모두 불가능하다. 마찰이 없어 발톱이 계속 자라나 바닥 철사와 얽혀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 흙목욕을 하려고 철사에 몸을 문대는 바람에 털이 몽땅 빠지기도 한다. 자리는 매우 좁아 날개를 펴거나 앞뒤고 움직이지 못하며 그 와중에서도 서열이 낮은 녀석은 평생 다른 녀석에게 깔려지내기도 한다. 닭은 마땅히 둥지를 짓고 그안에 비밀리 알을 낳고 싶어하는데 알다시피 새장에선 모두에게 공개된채 알을 낳아야 한다. 인간으로 따지자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변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피터싱어는 말한다.
돼지는 자연상태에서 안정된 사회집단을 형성하고, 공동보금자리를 만들며, 보금자리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 대소변을 처리한다. 활동적이며 거의 하루종일 땅에 코를 박고 먹이탐색을 한다. 특히, 암퇘지는 출산이 임박하면 잠시 공동체를 떠나 땅을 파고 그곳을 풀과 가지로 가득 채운 후 새끼를 낳는다. 출산후 10일 정도가 지나면 새끼를 데리고 공동체로 복귀한다. 하지만 공장식 축사의 돼지는 단단한 콘크리트나 작은 널빤지 바닥에 수용된다. 다리에 쉽게 상처가 난다. 암퇘지는 돈사에서 출산하면 새끼를 일찍 떼어놓는데 이로 인해 젖을 빨리 떼게 되어 더 빠르게 임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과거 돼지들은 연간 평균 16마리를 출산하는데 그쳤지만 지금은 무려 45마리까지 출산한다. 고기돼지는 몸무게를 불리는게 중요하므로 평소 마음껏 먹는 편이다. 하지만 출산돼지는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굳이 살을 찔 필요가 없으므로 적정 사료양의 60% 정도만 공급한다. 그래서 항상 배고픔에 시달리게 된다.
소는 송아지의 고통이 끔찍하다. 빌이란 어린 송아지의 고기는 과거부터 사치품이었다. 풀을 먹기 전의 송아지는 그 고기가 매우 연하고 부드럽기 때문이다. 현재 빌용 송아지를 공급하기 위해 수송아지를 낙농계에서 빠르게 도축한다. 하지만 무게가 얼마 나가지 않기에 인위적으로 빌상태를 유지하면서 무게를 충분히 불린 다음 도축하는 형태가 많다. 일단 송아지가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떼어 감금장치에 움직일수 없게 가둔다. 이들에겐 젖이나 풀이 아닌 비타민, 미네랄, 성진촉진제가 포함된 액체사료가 젖병도 아닌 통의 형태로 공급된다. 이렇게 16주를 가두어 키우면 빌 상태로 181kg까지 무게가 늘어 상당히 수익성이 좋다. 빌용 송아지는 고에너지의 사료로 인해 빨리 크고 열을 많이 방출하는데 태어난지 10주면 털갈이가 시작되어 몸손질 충동경향이 많아지지만 움직일수 없어 방법이 없다. 또한 소처럼 발굽이 있는 동물은 틈이 없는 단단한 바닥이 좋지만 빌송아지는 움직이면 안되므로 배설물이 빠지게 틈이 있는 바닥을 만들어 송아지를 더욱 불안하게 한다. 건초사료를 먹지 못해 송아지는 위가 정상발달하지 못하고 만성 소화불량과 만성설사에 시달린다. 빌송아지의 고기가 색이 연하고 부드러운 것은 사실 철분이 부족해서다. 소는 풀을 통해 철분을 얻는데 빌송아지의 액체사료에는 당연히 철분이 없다. 그리고 혹여 철분을 얻을까 빌송아지의 우리는 철저히 철제가 아닌 나무로 제작된다. 빌송아지란 결국 어려서 어미와 떨어져 젖을 한번 빨지 못하고,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해 소화관도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데다가 평생 움직여 보지 못하고 살만쪄서 몸은 크나 빈혈에 시달리는 소인 셈이다.
소들은 대개 뿔이 잘리고, 거세당하고, 소인이 찍힌다. 하지만 닭의 부리처럼 소의 뿔은 인간의 손톱과는 달리 동맥이 흐르고 신경과 조직이 얽힌 곳이다. 이런 곳을 잘라내는 건 소에게 큰 고통과 출혈을 유발한다. 거세는 더욱 심하다. 소의 거세는 소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날카로운 칼로 음낭을 찢어발기고 고환을 손으로 뜯어내는 작업이다. 소인 역시 달궈진 인두로 수초간 소의 피부를 지지는 일이다.
이렇게 험난한 공장식 사육장에서 자라난 가축들에게 다음으로 기다리는 것은 도축장으로의 운송이다. 미국처럼 큰 국가에서는 도축장으로 이동하는데 2-3일이 소요되기도 한다. 과거 이것이 너무 가혹하다고 하여 철도로 운송하는데는 시간 제한이 주어졌지만 지금처럼 트럭으로 주로 운송하는 방법이 이 법에서 벗어난다. 대부분의 트럭기사들은 운송이 시간싸움이기에 운송하는 가축에게 관심을 쏟지 않는다. 돼지나 소들은 대부분 당연히 트럭을 처음 탄다. 흔들림과 굉음에 겁이 질리기 마련인데 운송하는 트럭은 외부로 노출되어 겨울엔 추위, 여름엔 더위에 시달리게 된다. 가축들은 운송후 체중감소와 수송열이 발생한다. 소들은 대개 체중이 무려 9% 가 줄어든다. 1986년의 기록에 의하면 7400마리의 소, 3100마리의 송아지, 5500마리의 돼지가 수송중 죽거나 심각한 상처로 폐기되었다고 한다. 운송중 서로 놀라 한 곳으로 물려 깔려 죽는 녀석들도 있다.
도축은 대개 전기 충격으로 시작된다. 전기충격으로 기절시킨후 뒷다리를 매달아 공중에 띄운후 칼로 도축하는 식이다. 이는 소, 돼지, 닭이 같다. 전기충격은 기절을 유발하는데 기절했다고 해서 고통이 없을리 만무하다. 한번에 고통을 느끼지 못할 사이 죽인다면 모르지만 이런 일도 쉽지 않다. 최근의 도축을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데 1981년 한 시간에 225마리 도축에서 1986년 275마리 도축으로 빨라졌을 정도다. 1988년엔 5만 8천면의 도축장 피고용인이 부상을 당했는데 이른 빠른 도축 때문에 칼을 다루거나 기계를 다루나 다친 것이다. 사람이 이정도인데 동물은 어떨까, 거기에 정신적 스트레스와 살인적 강도의 노동, 부상으로 이 업계의 이직률은 무려 60%에서 100%에 달한다. 숙련되지 못한 사람이 빠른 속도로 부상의 우려속에 도축한다면 과연 동물이 고통없이 한번에 도축되는게 가능할지 의문이다.
거기에 미국에선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경우 동물이 정신을 잃고 도축하는게 교리상 금지다. 손상을 입은 동물은 도축하면 안된다는게 그들의 교리인데 여기에 기절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처럼 동물을 맨정신인체로 거대한 쇠도끼로 도축한다. 이 도끼는 사실상 망치에 가까운데 한방에 정수리를 부수어야 빠른 그리고 그나마 고통이 덜한 즉사가 가능하다.
이처럼 동물에 엄청난 고통을 주는 공장식 사육장이지만 그 생산성은 형편없다. 동물단백질 1파운드를 생산하기 위해 인간은 동물에게 21파운드에 달하는 단백질을 먹여야 한다. 모든 생물이 먹는 것이 다 그대로 살로 가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다.(100%소화흡수는 모든 생물이 하지 못하며, 자신의 몸의 생명유지와 활동에 에너지가 소모되고, 남는게 성장에 이용된다.), 1에이커의 땅에 단백질 함량이 높은 콩이나 완두를 심으면 300-500파운드의 단백질이 생산되지만 가축의 경우는 40-50파운드의 단백질 생산에 그친다. 대충 식물성 식품이 10배 효율을 갖고 있는 셈이다. 가축 중엔 그래도 소보단 돼지가 단백질 생산이 높은 편인데 이런 돼지보다도 귀리는 6배의 칼로리, 브로콜리도 3배의 칼로리를 같은 면적에서 생산한다. 그리고 낭비가 심한 소보다는 귀리는 무려 25배의 칼로리 생산이 가능하다. 가축은 물과 에너지도 많이 소모한다. 미국 물 사용량의 절반을 가축이 사용한다. 소고기 1파운드를 생산하려면 같은 양의 밀보다 무려 50배의 물이 필요하다. 이로인해 미국과 호주등의 건조지역에서의 가축생산은 해당 지역의 지하수를 빠르게 고갈시키고 있다. 가축 생산은 에너지도 많이 소모한다. 1칼로리의 화석연료당 귀리는 2.5칼로리, 감자는 2칼로리가 나오고, 밀과 콩도 1.5칼로리가 나와 채산성이 있다. 하지만 고기는 3칼로리의 화석연료를 투입해도 1칼로리의 고기 생산에 불과하다. 특히 소는 1칼로리당 무려 33칼로리의 화석연료가 필요하다.
환경오염도 문제다. 가축은 그 수많은 엄청난 양의 분뇨를 만들어낸다. 가축의 수가 이미 자연이 허용하는 수를 넘어선 만큼 분뇨의 양도 그러하다. 네덜란드의 예를 들면 농장에서 매년 9400만톤의 분뇨가 발생하는데 땅이 자연적으로 수용할수 있는 양은 5000만톤 정도다. 나머지는 오염을 일으키는 것이다. 미국에선 매년 수자원 관련 문제를 대부분 축사가 일으킨다. 그리고 고기수요는 산림도 파괴한다. 지난 25년간 고기를 탐닉하는 북미로의 고기 공급을 위해 중미에서는 거의 절반 가량의 열대우림이 파괴되었다. 이 열대우림은 많은 동식물의 서식지이자, 이산화탄소를 흡수저장하고 산소를 공급하는 존재였다. 열대우림의 파괴로 지금 대규모의 멸종과, 땅의 침식과 강의 범람, 강우량과 나무의 감소가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동물에 대한 공장식 가축 사용방식은 에너지 측면, 그리고 식량생산면에서 모두 매우 비효율적이다. 거기에 생산과 유통 소비과정에서 많은 화석연료를 사용하고, 많은 수의 가축 자체가 온실가스를 생성해며, 분뇨등으로 많은 수질, 토양오염을 일으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동물의 본능과 사회성, 개별성을 완전히 무시함으로써 그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야기한다. 때문에 동물해방에서 피터싱어는 이러한 동물을 먹지 않아야 함을 주장하다. 완전한 채식주의자가 되라는 것이다. 에너지를 스스로 얻을 수 없는 동물의 하나로써 인간은 결국 무언가를 먹어야만 한다. 그래서 피터싱어는 쾌고를 감수하는 능력을 가진 동물들만을 먹이감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쾌고를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식물전체와 일부 동물은 식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동물일부의 경우 결국 감각을 느끼는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도 있기에 동물전반에 대한 식용을 금지하는 쪽으로 가자는 것이다.
언젠가 연구가 되어 동물 전체 및 식물마저 감각을 느끼는 존재로 판명된다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썬 현실적인 주장이란 생각이다. 이런 생각도 해본다. 인간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미 최상위 포식자라는 지위자체를 아득히 넘어섰다. 개체수면에서도 그렇고 자원활용능력이나 다른 생물들과의 힘의 차이에서도 그렇다. 때문에 다른 최상위 포식자들이 필요시만 식량자원으로 다른 동식물을 활용하는데 반해 인간은 다양한 이유로 동식물, 특히 동물을 활용한다. 사냥의 즐거움, 불필요한 연구의 이용, 사치와 탐닉으로써의 고기음식등이 그러하다. 이는 충분한 힘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란 생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피터싱어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윤리체계를 일관되게 완성하지 못하는 하나의 중대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윤리체계는 좋은 결과를 불러일이키고자 하는 행동양식과 그 행동의 대상이 일관되어야 하는데 동물에 대한 우리의 행동은 대상에 대한 문제를 반드시 일으킨다. 동물과 인간의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적절한 인간중심의 윤리체계를 가진 인간이 먼훗날 과학기술이 더 발달하여,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가 낸 미약한 신호가 운이 없게도 발견되어 훨씬 강한 외계의 존재를 만났다고 생각해보자. 그들은 인간보다 훨씬 강하게 그 행성 및 항성계 자체의 지배자로 진화한 존재다. 과학기술은 인간과 비교가 안되며 더욱 강한 존재다. 그들이 인간보다 훨씬 발달하여 더 강한 이성과 과학기술로 곧이 다른 존재를 해할 필요가 없다. 에너지를 원시적으로 포식의 형태로 소화시키지 않고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기계 혹은 인공지능과 결합하여 생물학적 형태도 별로 남아있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우연히 인간의 고기가 자신들의 미각을 즐거운 방향으로 엄청나게 자극한다는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들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인간 문명을 파괴하고 그들의 공장식 사육장에서 맛을 강화하는 형태로 멋대로 진화시키고, 인간 사회와 가족을 해체하고, 여성에겐 새끼만을 낳게 하고, 수컷은 그저 죽이거나 고기로 쓰기 위해 폭력성을 줄이기 위해 강제로 중성화하기로 결정한다면 사람은 뭐라고 말할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 행성의 다른 존재와 다르게 더욱 이성적이고, 말을 할 수 있으며, 사회를 이루고, 도구도 쓸수 있으며, 문화와 양식이 있고, 가족과 사랑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특성을 일부 공유하는 외계인들에게 있어 그건 자신들의 그것들보다 매우 수준이 떨어지는 원시적인 형태의 양식이다. 이미 그들은에게 인간의 그것은 어느 정도 공유하지만 진화과정과 과학기술의 발달을 통해 오래전에 지나온 과정에 불과하다. 즉, 인간은 그들에게 동물정도에 불과해지는 것이다. 고통이나 쾌락을 느끼고 가족과 사회를 이루고, 본능과 생각이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고 힘이 훨씬 미약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말이다. 그런 그들에게 인간이 윤리체계를 제대로 완성해놓았다면 조금은 그들이 어느정도 들을 수 있을 만한 할말이 생길 것이다. 당신들이나 우리나 생존을 위한 에너지를 먹기 위해 다른 존재를 죽여야하지만 괘락과 고통을 느끼는 존재에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을 땐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아마도 이말이 유일하게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문명이 좀더 발달하여 배양육 기술이 보편화하고 싼 값에 고기를 공급하는 날이 온다면 사실 굳이 우리가 채식주의자가 되지 않더라도 고기에 대한 윤리와 비생산성, 환경 파괴의 문제는 해결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물에 대한 태도를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다른 분야에서의 동물에 대한 행동에서 큰 차이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식량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윤리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여러 형태로 동물을 괴롭히고 죽일 것이라는 말이다.
피터싱어는 책에서 자신은 동물을 먹는 사람은 존경할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채식은 무엇보다도 건강에 좋고, 우리의 미각을 충분히 만족시킬만한 것이라고 한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고기의 섭취를 줄이려고 하는 노력은 동물을 고통에서 해방하고, 지구의 환경을 개선하는 활동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