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중국해, 힘과 힘이 맞서다 - 교역의 중심, 동·남중국해를 둘러싼 패권 전쟁 메디치 WEA 총서 10
마이클 타이 지음, 한승동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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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뉴스에서 중국에 대한 한국인의 반감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었다. 연령대가 내려갈수록 중국에 대한 반감이 커졌는데 20대의 반감이 큰 이유로는 중국의 갖가지 역사 및 문화에 대한 자국중심주의적 해석(김치에 한복까지 기가 막히다.), 홍콩에 대한 반민주적 태도 그리고 이와 관련해 중국인 유학생이 국내에 많은 터라 이 문제와 관련해 직접 대학가에서 그들과 부딪힌 경험때문이다. 반면 중국의 경제개발로 인해 짭짤함을 같이 맛보며 성장한 중장년층은 그래도 반감이 좀 덜했다. 

 중국이 강짜를 놓는 곳은 한국 뿐만이 아닌데 남중국해가 그렇다. 바다 이름이 남중국해라고 해서 그 바다의 모든 것이 중국 것은 아닐진데 중국은 이 바다에 떠 있는 모든 섬들의 영유권을 주장한다. 지도를 보면 문제가 되는 파라셀 군도나 스프래틀리는, 파라셀은 베트남의, 스프래틀리는 필리핀의 코앞에 있는 군도다.  

 그래서 이 책을 보며 저자 이름도 마이클 타이인지라 동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무리수와 억지를 조목조목 비판하거나 현대적 상황에서의 갈등 및 미국과의 패권에 대해 동남중국해의 의미를 부여하는 책인줄 알았다. 하지만 책은 동남중국해의 역사책에 가까웠고, 중국의 입장을 많이 대변해주는 책에 가까웠다. 물론 설득력은 상당히 있었다. 

 책에서 역사를 다룬 이유는 동남중국해에 과거 어떤 세력이 있었고 그걸 알아야만 동남중국해의 영유권에 대한 당위성을 어디에 부여할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남중국해에 산재해 있는 여러 나라들과 중국과의 과거 역사관계를 통해 동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 주장에 대해 각 나라가 택할만한 입장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1. 류쿠

우선 류쿠다. 류쿠는 지금의 일본 오키나와다. 류쿠는 1609년까지 독립왕국이었고 중국에 조공하는 나라였다. 저자는 류쿠가 중국에 조공하던 시기가 가장 평화로웠다 말한다.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을 위해 류쿠에 식량을 요구한다. 워낙 요구량이 억지스러워 류쿠는 최선을 다했지만 요구액의 절반만 달성할 수 있었고 히데요시는 1609년 3천의 조총부대를 보내 류쿠를 점령하고 왕과 왕족들을 압송하여 굴욕적 항복문서를 받는다. 

 이후 류쿠는 일본 남부의 사쓰마번의 시미즈 가문이 통치하게 된다. 일본은 류쿠를 일본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시기가 좋지 못했다.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의 눈밖에 나 교역이 여러워지자 도쿠가와 쇼군은 류쿠를 통해 중국과 교역할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류쿠의 일본화를 잠시 피하고 류쿠가 일본의 세력하에 있음을 감춘다. 

 하지만 시기가 흘러 메이지 시대가 되자 상황이 돌변한다. 1871년 류쿠의 배가 타이완에 좌초되어 30명의 선원이 현지인에 의해 참수되자 이를 핑계로 일본 막부는 청에 강하게 항의한다. 어려웠던 청은 어리석게도 타이완이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라고까지 하고 류쿠에 대한 영향력도 포기한다. 일은 이 사건을 통해 청에게 큰 배상금을 부여받고 류쿠에 대한 주권도 사실상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게 된다. 류쿠가 오키나와가 되는 순간이다. 

 일본은 류쿠를 오키나와로 만들었지만 그들을 극심히 차별한다. 메이지시대부터 2차대전가지 무려 60년간 많은 류쿠인들이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 흘러들었다. 하지만 낮은 임금, 잦은 폭력, 극악한 노동조건이 뒤따랐다. 1921년 사탕수수가격이 폭락하자 류쿠인은 해외이주가 많아졌는데 1924년의 미국 이민법 재정으로 이민 길이 막히자 주로 중남미로 흘러들었다. 거기서도 일본 본토인에 의한 차별은 계속되었다.

 2차대전 당시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에 대한 최후 방어선이었다. 미군은 무려 54만을 투입했고 11만일본군이 강한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했다. 엄청난 폭격과 함정, 자살 폭격등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오키나와인 1/4가 사망한다. 전후에도 오키나와는 산업 및 생활시설이 모두 파괴되어 주민들은 2년간 미군의 캠프에 수용된다. 오키나와는 전후에도 1971년까지 미군의 점령지였으며 주둔군 지위협정으로 미군의 범죄에 시달린다. 오키나와 인들은 전후 미국이 설계한 지역에 따라 배치되었는데 농사나 고기잡이, 공동체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터전을 잃은 일부는 오키나와 외곽섬이나 일본으로 이주하게 된다.


2. 베트남.

베트남인들은 오래전 자신들을 락족이라 했고 중국은 이들을 월이라 불렀다. 베트남은 훗날 비엣이라 자신들을 부르게 되고 이게국명이 된다. 베트남은 기원전2879-258년간 지속된 첫 왕조가 있었다. 왕은 반랑이었는데 이웃군벌에 점령된다. 이 군벌은 어우락이란 나라를 세우는데 어우락이 중국 자오루이에 합병되어 버리고 기원전 111년 한무제에 나라 전체가 점령당해 무려 1천년간 중국의 지방이 된다. 

 하지만 중국화 정책에도 중국화가 되지 않았고 당의 멸망후 응오꾸옌이 중국함대를 궤멸시킨 939년 독립을 쟁취한다. 이후 4개 왕조가 들어서며 번영을 구가하지만 1057년엔 송과 4년전쟁을 하게 되고 지금의 캄보디아인 베트남 남쪽의 참파가 100여년에 걸쳐 5차례나 침공한다. 몽골의 침입도 받는데 풍토병에 힘입어 방어에 성공하나 1406년 명의 영락제에 의해 다시 나라가 망한다. 중국은 다시금 강력한 동화책을 실시하나 1408년 레러이가 10년간의 봉기끝에 다시 독립을 쟁취한다. 베트남은 자신들을 괴롭히던 참파를 정벌해 남쪽까지 국경을 확장한다. 참파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도 자행하여 베트남내 참파인은 현재 16만에 불과하다. 

 1620년 북부의 쩐과 남부의 응우옌간의 전쟁이 일어나 50년이나 지속된다. 1772년 떠이선 형제가 반란을 일으켜 남부지배체제를 뒤엎는데 성공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평등을 설파하고 식량과 돈을 재분배하는등 반향이 컸다. 1780년 떠이선은 레왕조를 무너뜨리지만 프랑스의 도움을 받은 응우옌 아인이 남부지역을 탈환하고 하노이까지 점령후 1802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유교질서의 베트남은 프랑스 기독교를 기본적으로 위협세력으로 느꼈고 프랑스는 19세가 카톨릭 개종자를 30만으로 늘리며 세력을 확장하자 양국관계가 본격 악화한다. 1847년 다낭에 구금된 선교사 석방을 위해 파견한 프랑스 전함 두척이 배트남 공격을 받자 이를 구실로 14척의 함선을 동우너해 프랑스가 다낭을 점령한다. 25년간 양국간 전쟁이 이어지고 마침내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화한다. 

 프랑스 덕에 오랜 중국과 베트남의 원한관계가 개선된다. 프랑스 식민치하에서 1925년 베트남혁명청년협회가 결성되고 호찌민이 중베트남간 형제적 연대를 맺는다. 1940년 프랑스의 허락하에 일본군 6천이 인도차이나에 주둔하자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동맹(월맹)을 결성한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베트민이 봉기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수도를 하노이로 삼지만 프랑스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 인도차이나의 공산화를 염려한 미국이 프랑스의 전비80%를 감당하나 프랑스는 패퇴한다. 베트남은 분단되고 호찌민은 통일을 원했지만 한국전의 경험으로 미국의 개입이 두려운 중국은 이를 저지하며 선거를 통한 통일을 주문한다.

 하지만 남쪽 정부의 응오딘지엠이 선거를 거부했고 분단이 고착화한다. 베트남전이 발발하고 소련은 미국과 중국을 고갈시키고자 베트남 지원에 적극적이었지만 중국은 그렇지 못했다. 1965년 이후 베트남 지도자들은 소련에 기울기 시작했고 이는 호치민 타계이후 더욱 본격화한다. 캄보디아에 폴포트가 집권하자 양국관계는 더욱 악화했는데 양자는 기본적으로 캄보디아의 중립을 원하면서도 베트남은 참파였던 캄보디아에 대한 우위를 원한 반면 중국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한편 파리 평화회의에서의 평화적 분위기에 베트남은 중국의 진심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닉슨의 중국방문은 결정타가 된다. 1975년 사이공 정부가 무너지자 하노이는 사회주의의 이름하에 화교소유의 대형 기업을 흡수하고 1978년에는 화교를 추방한다. 그들은 베트남 국적 취득 또는 일자리의 상실을 요구받았다. 난민은 무려 14만에 이르렀다. 

 베트남은 중국과의 해양국경 확정을 위해 중국-프랑스 조약을 이용하려 했으나 이에 따르면 통킹만의 2/3을 잃게 되는 중국이 이를 거부한다. 베트남은 폴포트체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캄보디아에 침공하나 타이로 피신한 크메르루즈는 대량학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는다. 아세안 역시 이 침공을 비난하고, 중국의 덩샤오핑은 징벌적 작전도 구사한다. 베트남은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소련만이 믿을 길이었지만 아프간 전쟁후 소련의 지원도 줄어들자 1989년 캄보디아에서 철수하고 중국과의 관계도 개선해나간다. 


3.필리핀

필리핀은 무려 7천개가 넘는 섬이 있다. 스페인 이전 통합된 정치체제가 없었으므로 오래전 필리핀과 중국과의 교역은 국가간 교역이 아니었다. 9세기 부터 중국인은 중국내 입국이 금지된 아랍상인과의 교역을 위해 필리핀에 간다. 

 1571년 스페인은 마닐라를 만들고 멕시코와의 교역을 위해 중국과 교역한다. 현지인의 인구가 희박하고 문화 및 기술수준이 크게 부족해 이주한 중국인은 스페인사람들이 필리핀을 경영하는데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중국인의 수가 늘자 스페인은 이들을 진압하거나 학살한다. 

 18세기 중반까지 중국인과 필리핀 혼혈인 메스티소가 인구의 5%를 차지하고 이들은 필리핀 중산층과 민족 형성에 중추가 된다. 메스티소들은 중국인이 개종문제로 필리핀에서 쫓겨나자 이들의 자리를 차지하며 더욱 성장했고 더 독립적이고 덜 순응적으로 변해가며 필리피노로서의 정체가 생겨난다. 

 1896년 스페인에 대한 독립전쟁이 촉발되지만 장비가 크게 부족했고 두개의 파벌리 나뉘어 계속 패배한다. 이들은 스페인과 망명에 대한 대가로 보상금과 평화조약을 맺미나 미국이 쳐들어와 마닐라를 점령한다. 미국은 필리핀 저항세력에 대한 대중의 지원을 끊기 위해 민간인을 강제수용하는 보호구역을 설정하고 여기서 30만 수용자중 1만가까운 수가 사망한다. 

 2차대전과 함께 일본은 진주만 공습후 필리핀 루손섬에 상륙한다. 일본점령군은 고의적으로 생멸을 경시해 수천명을 구금 처형하였고, 성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이 자행되고 식량과 의약품 부족으로 일본 점령기간 중 50-100만명 가량이 사망한다. 전후 미군이 돌아오지만 서방에 대한 필리핀의 시선은 좋지 못하다. 그리고 두테르테가 집권하며 이들의 친중성향은 더욱 강화된다. 


3.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최초의 국가는 푸난이다. 하지만 푸난이 몰락후 말라카 해협 주변 해양 교역이 일어나며 당연히 주변 해안 배후 지역이 강해진다. 항구 배후의 스리비자야가 수마트라 남쪽 팔렘방을 중심으로 말레이 반도를 대부분 차지하는 최초의 왕국이 된다. 스리비자야는 불교국가였지만 자바에서 발흥한 싱가사리와 마자파힛 왕국의 등장으로 쇠락하고 13세기 멸망한다. 

 이후 말레이는 시암이 차지하고 이슬람의 영향을 받는다. 스리비자야 왕국의 말레이 계승자로 말라카 술탄국이 등장한다. 말라카에는 파라메스와자라는 국왕이 등장한다. 시암의 속국으로 힘이 필요했던 그는 직접 명에 방문에 보호를 요청한다. 영락제는 이들을 환대하고 정화가 이후 방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락제 사후 해금정책을 시행하며 중국과 관계가 멀어지지만 이즈음 술탄국은 충분한 힘을 얻는다. 

 1511년 아폰수드 알부케르크가 대선단을 이끌고 인도 고아에서 말라카로 항해해 적은 병력으로 이곳으 점령한다. 말레이 술탄은 상업손실로 권력과 속국유지에 큰 타격을 받는다. 1641년 말라카의 주인은 네덜란드로 바뀐다. 네덜란드는 말라카보다는 자바섬의 바타비아가 중심이었으므로 말라카를 오히려 쇠퇴시킨다. 1786년 영국은 페낭을 점령하고 영국의 스템퍼드 래플스가 싱가폴을 세운다. 싱가폴은 번영하여 말라카와 페낭보다 번성하게 되고 인구는 8만이상이고 교역 규모도 페낭의 3배에 이르게 된다. 

 1874년에 이르러도 말랴야 연방의 인구는 30만에 불과했다. 영국이 법과 질서를 이지역에 확립하자 많은 중국인이 이주해온다. 중국인 남자 수가 현지인 수보다 금새 많아지게 되었고 인도와 실론섬에서도 노동자가 이주한다. 초기 경찰은 이 지역에서 온 시크교도가 맡았는데 그래서 말레이시아의 경찰 복장이 시크교도의 복잡ㅇ인 수염을 기른 카키색 반바지 차림이 된다. 

 19세기 말라야의 중요인물은 중국인 얌아르로 그는 친구 류임광의 뒤를 이어 콸라룸푸르에서 두번째 중국인 지도자가 된다. 그는 말레이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해 광산을 복구하고 불탄 경작지를 다시 세웠으며 최초의 학교를 만들고, 법을 개정하고, 6개 경찰대로 치안을 안정시키고, 도로망을 개선하고, 벽돌로 튼튼한 시설을 건축한다. 

 전후 영국은 종교적 권한을 제외한 나머지를 술탄에게서 빼앗으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이는 비말레이인에게 동등한 시민권을 주는 것으로 말레이인에게 강한 저항을 불러온다. 온자파르가 1946년 통일 말레이 국민 조직을 결성하고1957년 말라야는 독립한다. 헌법에 말레이 인들의 특권을 명기하고 각종 법으로 말레이인은 인구대비 많은 특권을 누리게 된다. 1969년 선거에서 비말레이인 야당이 선전하자 말레이인들에 의항 봉기가 일어나 중국인 재산 약탈이 시작되었으며 한달후에는 인도인을 겨냥한 폭동이 일어난다. 이에 정부는 신경제정책을 도입한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경제적 권한을 인종적으로 배분해 말레이인들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기업가가 성장하지 못하고 족벌정치에 부패, 제도적 비효율이 발생한다. 

 1981년 총리가 된 마하티르는 중국과의 교역관계를 증진하면서 그들과 함께 남중국해 석유공동탐사에 나선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도 찬성하고 수많은 인프라 구축에 도움을 받는다. 그는 자동차 제조, 남북 고속도로 건설, 새국제공항, 쌍둥이 빌딩, 푸트리자이드 행정수도 건설에 착수한다. 외환위기시 IMF의 요구를 거절해 재정파탄을 막은 것도 그의 치적이다. 다만 그는 언론 자유를 제약하고, 사법부를 약화시키고, 술탄의 권한을 축소하고 서방에 비판적이다. 중국과 말레이는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4.남중국해 갈등의 역사

남중국해에는 파라셀, 스프래틀리, 플라타스라는 3개의 군도가 있다. 중국은 기원후 1세기부터 파라셀군도와 접촉한다. 이 군도에 대한 언급은 삼국시대 남주이물지에 나온다. 10세기에서 15세중반까지 중국은 500년간 해상활동을 활발히 하는데 남중국해는 중국의 교역을 위해 사실상 호수 역할을 하게 된다. 남송과 원이 교역에 적극적이었지만 원대에 이르러 해금하게 되어 청대까지 남중국해는 중국역사에서 멀어지게 된다.

 하지만 외세의 침입이 남중국해로부터 시작되자 중국인은 남중국해를 교역을 방해하는 섬이 많은 지역에서 자신들의 본토를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인식을 전환하게 된다. 

 중국은 1884-1885 중국 프랑스 전쟁에서 처음으로 남중국해 섬들에 대한 주권을 주장한다. 1932년엔 프랑스가 파라셀, 스프래틀리군도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고 1938년엔 일본이 이를 점령하고 타이핑 섬에 잠수함 기지를 건설한다. 1941년 일본은 이지역을 타이완의 일부라고 주장했고 1945년 카이로 포츠담선언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 파라셀 스프래틀리 군도에 주둔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낸다. 1950년 국민당 정부가 내전에서 패하자 국민당은 파라셀과 스프리틀리에서 철수하고 1954년 프랑스가 디엔비인비전투에서 패배하고 베트남에서 철수하며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 주장을 완전 철회한다. 1956년 하노이는 파라셀 스프래틀리를 중국 영토로 인정하나 사이공 정부는 파라셀 스프래틀리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수비대를 배치한다. 1974년 사이공은 스프리틀리에 정착민을 입식하지만 중국군이 베트남 군을 물리치고 파라셀 전체를 장악한다. 1979년 통일로 입장이 하나가 된 베트남은 초기 입장을 바꾸어 남중국해 모든 섬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한다. 한편 필리핀은 1974년 스프래틀리 5개섬을 점령하고 타이핑섬을 제외한 모든 섬이 무주지이므로 자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에 모든 섬이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중국은 스프래틀리 영유전쟁에 가장 늦게 뛰어든다. 스프래틀리의 44개 섬은 모두 인간이 점령했는데 베트남이 25개, 필리핀이 8개, 중국이 7개 ,말레이시아가 3개, 타이완이 1개다. 

 댜오위다오는 9개의 무인도 열도다. 과거 중국 명의 문헌에 댜오위다오가 등장하며 중국인은 교역을 통해 오래전부터 섬의 존재를 인식한 반면 일본이 주장하는 센카쿠라는 명칭은 과거 어느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19세기 들어서야 오키나와 총독이 댜오위다오에 대한 국가 표지건설을 주문한 수준이다. 일본은 댜오위다오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며 19세기 이전까지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타이완을 포기했지만 센카쿠는 명문화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땅이라 주장한다. 거의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논리와 같은 수준이다. 


5. 중국의 입장은

책은 중국의 입장을 대변한다. 중국은 전성기인 청왕조 시절이후 무려 180만km2의 영토를 상실했다. 중국은 1949년 이전 까지 1천개가 넘는 조약과 협정강요에 시달렸고 이를 통해 영토를 잃었다. 책은 중국이 한치의 땅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무리하게 영토협정에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경우 자신들의 권익을 많이 포기하면서도 타협을 선호했음을 보여준다. 실제 중국은 여러 역학이 작용하긴 했겠지만 과거 서구에 빼앗긴 본토인 마카오와 홍콩도 시간이 지나서 자연히 돌아올때까지 기다리는 우직하고도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다. 

 책은 그리고 중국은 영유권 주장에 겁먹고 비방하는 서구세력을 오히려 비판한다.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러시아, 미국은 상당히 넓은 배타적 경제수역을 갖고 있다. 이들은 인구가 6억에 불과하지만 경제수역이 5400만km2에 이르며 중국은 고작 90만km2에 불과하다. 중국의 것은 모두 앞마당에 불과한데 비해 이들의 것들은 3/4가 모두 본토와 멀리 떨어진 지역이다. 즉, 식민지 시절 발견에 의해 영유를 주장하고 그 이익을 자신들만 누리는 형태라는 것이다. 그럼녀서도 자신들의 행위는 보지 못하고 중국의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온당치 않게 여긴다. 책은 더 나아가 배타적 경제수역 개념을 없애고 모든 나라가 바다를 공동으로 이용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책을 보면서 동남아시아 지역의 어렵고도 모른는 역사와 중국의 무리해보이는 남중국해 영유권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었다. 남중국해는 해외 보급에 의존하는 중국에 반드시 필요한 경로이면서도 과거 식민침탈로 상실한 경험이 있어 더욱 강하고 뼈아프게 다가오는 지역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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