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 - 인류의 문화, 충돌, 연계의 빅 히스토리
타밈 안사리 지음, 박수철 옮김 / 커넥팅(Connecting)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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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인류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책은 적으면서도 많다. 그리고 하나 같이 재밌다. 이런 책들의 관점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데, 그 미묘한 차이를 보는 것도 재밌다.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하나 더 늘어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현재의 세계가 서양이 만든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의 지배를 받는 만큼 이런 책들은 동서양의 운명을 가른 차이점도 반드시 살펴본다. 그 원인 역시 서로 매우 유사하면서도 약간 다르게 집어내는데, 지리적 차이, 그 지리적 차이가 만들어낸 철학과 사상의 차이, 종교적 차이, 지리에서 비롯된 농업과 생산형태의 차이,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사회문화적 구조의 차이등 다양하다.

 이런 류의 책들로 내가 본 것은 하라리의 '사피엔스 3부작 시리즈', 다이아몬드의 '총균쇠', 마빈해리스의 '문화인류학 3부작 시리즈', 이언 모리스의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루이스 다트넬의 '오리진'이 있다. 하나 같이 배울게 많은 책들이었다.

 이번 책은 '다시 보는 5만년의 역사'다. 이런 류의 책을 많이 보아서인지 특별한 것은 없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모르는 내용의 살을 채울만한 지식과 통찰이 돋보였다. 읽으면서 노트를 많이 한 것만 봐도 그랬다.

 책으로 들어가면 책 오리진 처럼 5500만년전 있었던 인도와 아시아의 충돌에서 시작한다. 이 충돌로 히말라야가 생성되었고,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습기를 막아 동남아시아와 인도에 많은 비가 내리게 해 이 지역에 울창한 열대우림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습기를 빠진 이 바람이 인도양을 돌아 동아프리카로 향하게 되어 정작 이 지역이 건조기후로 바뀌게 되었다. 이 환경변화는 인류의 진화를 이끌어낸다. 

 동아프리카 지역은 건조해져 울창한 숲에서 관목림으로 바뀌게 되고 인간의 조상은 나무에서 내려가 직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기후 변화가 잦아 환경변화에 따른 많은 진화와 지능의 발달을 촉발시켰다. 영장류는 도구를 사용하여 이런 환경변화에 적응하였고, 결정적으로 언어 사용으로 인간이 다른 영장류와 차별화되었다. 

 언어는 도구를 더욱 정교화시켰고, 도구 제작 발달을 가속화했다. 언어로 도구를 만드는 방법이 전수되고, 학습되어 기술이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1. 강의 문명들

 문명은 강에서 발달했다. 나일강은 무려 6400km로 훌륭한 간선수로다. 강은 북으로 흐르지만 운이 좋게도 바람은 남으로 불어 양방향 통행이 가능했다. 여기서 발달한 이집트 문명은 방어에 매우 유리했는데 남쪽의 강상류는 지형이 험해 오기 힘들었고, 동쪽엔 위협 세력이 없었으며 지형도 거세고 메랄랐다. 서쪽은 알다시피 사하라다. 강에 의한 교류로 문명은 동질화했고, 강을 관리할 필요성으로 강력히 중앙집권화하였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는 나일처럼 지형에 따른 상하류의 구분이 없다. 때문에 하나의 연속적 문화가 형성되지 못했고, 개별적 관계망이 지금의 지도처럼 마구잡이로 나타났다. 거기에 사방이 탁트였다. 농경 및 유목 모두에 적합해 침략이 잦았으며 이에 따라 장벽으로 세운 도회지인 도시국가가 필연적이었다. 사방이 탁트였으니 인구대비 큰 규모의 군대도 필수다. 

 인더스 유역은 5천년전 무려 500만이 거주할정도로 탁월했다. 80km2 구역에 무려 1천개 이상의 도회지가 있을 정도였다. 유역이 물이 풍부해 관개가 매우 쉬웠고 농사도 잘되었다. 생산력이 높아 여가가 이어졌고 이로 인해 초기문명인 하라파엔 예술, 공예, 공학이 발달한다. 하라파의 위쪽 히말라야 저편 고지대에는 유목민이 거주했다. 이들은 3500년전 하라파로 이주한다. 하라파가 세련된 도시민이자 벽돌로 큰 집과 창고를 건설했고, 대규모 농사와 풍요의 여신을 숭배했다면 유목이주민은 소농에 진흙, 대나무, 풀따위로 작은 오두막을 짓는 시골민이었다. 그들은 말을 탔고, 철제무기와 안장, 이륜전차를 갖고 있었으며 스테베엇 기원한 바람, 천둥, 태양, 불의 자연 남신을 섬겼다. 이들은 인더스에서 점차 동으로 이동해 갠지스에 이르렀으며 '베다인'이라 불렸다. 

 중국의 황하는 토양이 매우 건조하고 비옥했다. 관개가 필요했고 경사면이 가팔라 계단식 논밭이 필요했다. 황하는 교통 및 운송에 부적합해 동질적 문화가 생기지 않았으며 독자적 공동체가 강 유역을 따라 길게 형성되었다. 제방이 워낙 자주 범람해 재난 상황을 대비한 사전 권한 체계 구축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위계, 질서, 규율, 복종이 중시되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하는 지혜를 알고 있는 연장자는 매우 중시되었고 이들은 심지어 죽어서도 숭배되었다. 이런 중국의 작은 공동체가 조금씩 합쳐져 마침내 하왕조를 형성한다.  


2. 유목세계

유럽동부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극동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스텝 유목세계가 있다. 초원지대에 거의 평지라 중요한 발견, 발명, 기술이 스텝 유목 지대 양끝으로 빠르게 퍼질수 있었으며 이 전파에 속도를 붙인 것은 말이었다. 말의 가축화로 등자와 안장이 개발되었고, 말을 타기 위해 바지를 처음 입기 시작했다. 셔츠, 셔츠의 소매도 모두 말을 타기 위해 만든 복장이다. 말의 가축화로 유목민은 더욱 빠르고 멀리 퍼지게 되었는데 말의 기동력과 인근 지역의 풀을 남김없이 먹는 말의 습성때문이었다.

 스텝에선 말을 이용한 이륜전차도 발명했다. 제자리 회전이 가능했고, 기동력을 위해 가벼운 바큇살의 바퀴를 사용했다. 합성궁도 만들었는데 기존 활은 한 가닥의 나무로 활을 만들어 파괴력으 높이기 위해선 활이 장궁이어야 했다. 하지만 합성궁은 말발굽에서 만든 접착제로 여러가닥의 나무를 붙여 파괴력은 높이면서도 여전히 크기가 작을 수 있었다. 그리고 활이 작아져 말위에서의 기사가 가능해졌다. 

 유목민은 침략에도 능했지만 교역에도 능했다. 정보망이 널리 퍼진 그들은 어느 장소에 좋은 물건이 있고 어디에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았다. 그들은 교역망을 형성하고 도로와 오솔길을 만들어냈으며 이들의 교역로가 교차하는 곳에 자연히 도시가 형성되었다. 유명한 곳이 페트라인데 농경에 부적합하지만 홍해와 레반트 해안, 페르시아 항구사이를 오갈때 지나야 하는 협곡의 암벽 사이에 위치한 곳이다. 

 고대의 가장 분주한 교역망은 소아시아-이란고원-아프간 지역을 잇는 곳으로 여기에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등 고대 4대문명이 모두 접한다. 이 지역엔 거칠고 메마른 땅이 다수지만 수많은 개울이 흘러 이 개울을 따라 작은 자급자족형 촌락과 유목민이 거주했다. 이들은 4대 문명의 세련된 도심지를 교역으로 이었고, 아랄해, 카스피해, 흑해, 지중해, 에게해, 아무다리야강, 홍해, 페르시아만, 인더스강 등의 수역이 있어 원거리 교역에 더욱 유리했다. 


3. 다른 지역들

 지중해는 대양만큼 크지만 막혀서 잔잔하다. 흑해와 통하고, 홍해와 인접했고 폭풍이 없으며, 폭포와 습지가 없어 교역에 적합했다. 온대 기후여서 해안 풍경이 다양했고 환경의 차이로 지역마다 산물이 달라 교역이 활성화했다. 지중해의 문명은 크레타-페니키아-미케네로 이동한다.

 사하라 이남은 인구가 희박했다. 대륙중심부는 밀림으로 농사에 부적합했고, 모기와 체체파리등이 있어 인구손실이 많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사하라 이남의 서아프리카는 사정이 좀 달랐다. 노크문명이 발달해 들판을 경작하고 소떼를 돌보았다. 북쪽과 달리 독자적 구리 제련법을 알아냈고 기원전 1000년경 철기시대에 진입했다. 기원전 500년 이 노트인은 사라졌는데 아무래도 환경파괴로 아프리카 이남으로 이동하면 세력을 넓힌것 같다. 사하라 이남에선 반투어가 공통어인데 아무래도 반투어의 사용자가 노크인의 후손인듯 하다. 반투어 사용자들은 철제도구가 있어 나무를 자르고 관목지대를 뚫고 식물의 뿌리를 캐내어 적도의 숲을 통과하고 농경을 할 수 있었다. 철제 무기는 기존 수렵채집인을 물리치기에도 충분히 강력했다. 반투는 농경후 토질이 떨어지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관목을 태워 토질을 확보했는데 관목이 모두 사라지면 이동하는 식이었다. 동아프리카까지 이동한 그들은 중간세계의 교역망에 편입하였고, 그 결과 아랍어와 섞인 스와힐리어가 탄생한다. 


4. 서사의 등장

 인류의 원시적 거대 서사는 당연히 특정 환경이라는 지리적 조건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 거대서사는 점차 커지면서 진실과, 거짓, 부적절한 것들을 흡수하고 걸러내며 더욱 그럴듯해져갔는데 이후에는 지리적 조건을 넘어서 진실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지리적 조건에 의한 상호의존성으로 모두가 서로 은혜를 입고 은혜를 베푸는 관계가 되었다. 삶은 하나의 사회적 부채망의 연결이라 할 수 있었다. 이를 집대성한 것은 공자로 그는 모든 사람이 개별 상황에서 도덕적 통찰력을 갖는게 가능하다 보았다. 그리고 사회적 과업에 발맞춤으로써 모든 사람이 의미와 목적 있는 삶을 영위하는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이상사회를 위한 처방이었고, 이상사회는 제국과 가정에서의 삶이 쌍둥이 같았다. 

 중국이 세상을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동심원처럼 보았다면 인도에서 세상은 다층세계였다. 인도의 신은 역동적이고 여러 차원에 존재했으며 사회에는 카스트가 있었다. 갠지스의 철학자들은 우파니샤드라는 성가를 통해 세상을 환상으로 여기고 실재를 단일하고 통합된 전체로 바라보는 시각을 완성했다. 우파니샤드엔 우주의 철학인 카르마가 담겨있다. 

 인도 하라파 문명의 전성기에 아리아인이 남하한다. 그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한 무리는 인더스로 향해 산스크리트어와 베다, 다층신, 데바(악)와 아수라(선)를 만들었다. 다른 무리는 이란으로 향해 아베스타어, 양극신, 다에바(선)와 아후라(악)을 만들었다. 인도에선 사라진 불의 신 아그니와 미트라가 이란에선 인가가 좋았고 아그니는 이후 생명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로 미트라는 계약의 신으로 자리한다. 이란 고원이 교역의 중심지이니 계약의 신은 당연히 중요했다. 

 이란의 신은 동심원과 다층성으 모두 버리고 직선으로 투쟁과 결말이 중요하는 세계관을 갖는다. 조로아스터는 30세에 아후르에게 계시를 받는다. 아후라는 자신만큼 강한 아리만과 투쟁관계의 신이다. 인간은 우주차원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대결사이에 존재하며 그로 인해 선과 악사이에서 자유의지를 갖고 도덕적 선택이 가능하며 이 선택이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조로아스터교의 성향은 향후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늘 잦은 권력 교체로 불변의 세계관이 형성되지 않았다. 도시마다 신이 많았으며 점령당하거나 점령해도 그 신들은 부정되지 않았다. 다만 힘의 차이로 인해 어떤 신이 더 강하고 약한지 정도가 있었으며 자신이 잘못을 하면 신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즉, 한 도시가 다른 도시에 패배하면 자신들의 잘못으로 신에게 보호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런 메소포타미아의 남부에서 히브리가 생겨난다. 아브라함의 인도로 이들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를 거쳐 북으로 이동하다 다시 서로가서 지중해 해변으로 다시 남으로 가서 레반트의 가나안에 정착해 농사를 짓는다. 이후 이집트에 머무른다. 이는 성경에 잘 나와있는데 아무래도 유목민 차원에서의 이주인듯 하다. 

 히브리는 불과 풍요의 신 야훼를 섬겼다. 그들은 각 가정마다 신성한 돌을 갖고 있었는데, 성궤라는 휴대용 용기에 이 돌을 넣고 이동했다. 잦은 이동을 하는 유목민이니 성전따윈 없었다. 히브리는 이집트에서 노예로 전락하고 십계 이후에 다시 레반트로 돌아간다. 거기서 처음으로 정착해 이스라엔, 유다왕국을 세워 번성하고 성전도 짓지만 바빌로니아에 정복되어 성전이 파괴되고 50년간 바빌론에 끌려가 비참하게 생활한다. 

 이시기 에스겔과 이사야 같은 선지자는 고통의 이유로 메소포타미아 특유의, 우리가 잘못해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서사를 전개한다. 히브리는 이과정에서 메소포타미아 최초로 유일신 개념을 만들어낸다. 신은 물리적 형태가 없고, 신전이 아닌 모든 곳에 존재하며, 그로 인해 신상은 신성모독이 된다. 유대는 지역 특유의 부족사에서 벗어나 과거, 현재, 미래를 종합하는 종교적 서사를 만들어낸다. 물론 이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에 상당히 영향을 받는다. 

 그리스의 신들은 신보다 더 크고 무관한 자연의 세계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심사가 뒤틀리는 신에 대해서도 알아야 했지만 잘 살아남으려면 자연도 잘 알아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신에 의한 운명의 필연성도 받아들이지만 현실세계에서 잘 살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는 삶도 중시했다.  


5. 고대 제국의 통치수단

 고대에서 하나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속도는 하나의 권력이 통치할 수 있는 영역의 크기를 결정했다. 선사시대는 그래서 통치반경이 최대 48km였고, 말을 이용한 고대 국가는 최대 560km가 되었다. 그리고 메시지 내용의 정확한 전달을 위해 문자가 사용되었다. 

 페니키아는 인간이 낼 수 있는 몇 십가지에 불과한 소리를 표시하는 문자를 개발한다. 간략한 몇가지 음소로 거의 무한대 단어 생성이 가능했다. 중국은 한자를 개발한다. 상형문자에서 표의문자로 발달하여 문자 자체가 언어가 되었다. 한자는 매우 어렵고 페니키아것보다 뒤떨어지지만 특정한 입말에서 벗어난 문자이므로 권력자가 중국이라는 여려 언어를 쓰는 백성을 다스리기에 적합했다. 

 숫자는 상인의 필요에 의해 형성되었다. 사물에서 벗어나 고유의 기호로 표현 가능한 항목이었고 문자보다도 더욱 문화적 경계를 건널 수 있었다. 

 화폐도 생겨난다. 화폐는 물물교환의 대체수단이라기 보다는 신용과 부채의 계산에서 생겨났다. 왕이 백성에게 납세수단으로 받은 물품은 대개 화폐가 되었다. 

 이처럼 고대국가는 거대 서사, 문자, 화폐, 숫자로 연결되었다.


6. 고대국가들과 종교의 탄생

중국은 역사 신화에서 달과 해가 다니는 길 같은 초자연적 능력을 지난 삼황과 농사, 문화, 비단등 실생활을 만들어낸 오제를 중시한다. 그리고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는 이 삼황과 오제가 하나가 된 최초의 사람이다. 하지만 시황제의 진은 일찍 망하고 한이 그 뒤를 잇는다. 중국의 한은 유교질서의 회복이 목표였다. 그래서 고대 경전에서 학식을 입증한 남자들을 공무원을 사용한다. 한자는 익히기 어려워 관료들이 중국 특유의 지적, 정치적 지도층을 형성하게 된다.

 로마는 기원전 509년 왕을 축출하고 수백의 남자로 구성한 원로원이 나라를 다스린다. 원로원은 해마다 두명의 집정관을 선출해 독재를 막았다. 지주와 소작농, 귀족과 평민 갈등이 심해지자 평민대표인 호민관이 선출되었고 호민관은 원로원의 제안에 거부하는 단 하나의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12표법이 완성되어 귀족, 원로원보다 높은 최고의 개념이 생겨났다.

 중국 인근에선 월지가 다른 유목민은 흉노에 패한다. 월지는 이주하여 중앙아시아에 쿠샨제국을 세우는데 쿠샨은 인더스에서 아랄해에 이르렀다. 위치가 위치이니 만큼 쿠샨은 그리스 일부 제국의 해체과정에서 그리스 유산과 인도의 힌두교, 불교를 모두 흡수한다. 본디 불교도는 부처의 신상을 거부하지만 쿠샨은 그리스 색채로 부처상을 조각해 그리스 조각같은 분위기로 만들어낸다. 이란의 미트라신은 본래 계약의 신이지만 쿠샨에선 인간 어머니와 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초자연적 존재로 변모한다. 그로 인해 미트라는 영원성과 일시성의 경계에 위치하며 중간이기에 인간을 죽음에서 영원으로 이끄를 존재가 된다. 그래서 미트라는 불교의 열반과 극락이 혼존하는 세계에서 극락세계로 넘어가기를 원하는 이를 경계선에서 돕는 고귀한 미륵보살이 된다. 

 그리고 대승불교가 탄생한다. 쿠샨제국은 교역의 중심지다. 원거리 교역과 불자들이 섞이다 보니 한층 더 상업적 불교가 되었고 현실적으로 상업에 종사하면서도 구원을 원하는 이들을 도울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모두가 열반을 위한 고된 생활과 명상이 없이도 소수의 경건한 승려가 미륵보살처럼 도우면 열반에 이를수 있따는 대승불교가 탄생한다. 상인과 일반인들은 승려를 지원하면 되었고 산이나 숲 혹은 돌아다니는 승려가 머물며 일반인을 위해 수련하는 사찰이 탄생하게 된다. 불교사찰은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재물을 받았고 이를 사적으로 쓰기보다는 교역에 투자한다. 즉, 평신도는 불교사찰을 통해 자신의 구제와 교역에 모두 공헌하는 셈이었다. 

 로마는 파르티아에서 이 미트라 밀교를 접한다. 미트라 밀교엔 동정녀 아나히타가, 미트라의 생일은 12월 25일, 미트라 옆엔 황도 12궁에 해당하는 12제자가 있다. 기독교가 그대로 베낀 셈이다. 한편 유대인은 바빌로니아에 이어 로마에도 땅을 빼앗겼다. 전보다 더 초조해졌고 유일신을 넘어 이젠 해방의 길로 이끌 권능을 신에게 부여받은 구세주를 찾게 되었다. 구세주를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 두드러진 선각자가 요한이었고 그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가 돋보였다. 사실 그는 처형당하기 전까지 세력이 그리 크지 않았지만 처형후 부활에 대한 소문이 돌면서 신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로써 예수의 추종자들은 정통 유대교에서 이탈하였고 두 가지가 수정되었다. 하나는 구원이 하느님과 유대인만이 아닌 하느님과 전 인류의 서약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세주인 예수가 인간이자 동시에 신이라느니 것이다. 이는 로마제국에서 잘 수용할 만한 개념이었다. 기존 그리스 로마의 신과 세속세계의 공존, 그리고 구원의 대상을 넓혀 실제 주민의 삶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로마가 노예제, 불평등으로 비대해지며 국가기능을 상실해가지 일반 피지배층의 삶은 더욱 기독교 조직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들은 로마를 본따 속주의 총독처럼 교구를 편성하고 주교를 임명했다. 그리고 자연히 로마주교가 가장 권위가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의 황제가 이 기독교 조직을 제국통치에 활용하고자 공인하기에 이른다. 

 게르만족은 유목민처럼 느껴지지만 아니다. 그들이 거주한 로마 외곽은 넓은 초원지대가 아닌 울창한 삼림이며 그들은 이런 농경에 부적합 땅에서 옮겨다니며 농경을 하는 시골민에 가까웠다. (진짜 유목민이었으면 훈족에 그리 밀리진 않았을 것이다.) 게르만은 로마 국경에서 로마인과 교륙하고, 동화되고 때론 다투었다. 그렇게 게르만은 로마의 외부자에서 내부자가 되어갔다. 우리 생각처럼 로마의 멸망은 게르만의 대대적 침공이 아닌 서서히 이루어진 침투에 의해 자리를 내어준 것에 가깝다. 

 이슬람은 유대교와 유사하다. 유일신에 기독교와는 달리 종교와 세속적 삶이 구분되지 않는다. 이슬람은 부족을 넘어선 초공동체주의로 핵심교리만 받아들이면 누구가 합류가 가능하며 세례같은 의식도 없다. 이런 확산으로 이합집산이던 아라비아부족은 이슬람이라는 하나의 단일한 정치, 사회적 틀을 갖게 되었다. 이슬람은 신의 사도인 무함마드 사후 그의 뜻에 따라 공동체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칭호인 칼리프가 다스리게 디었다. 물론 이 칼리프는 현재까지 이어진 것처럼 세 개로 쪼개진다. 

 이슬람의 핵심교리는 5가지로 신의 유일성을 증거하고 무함마드를 신의 사도로 인정, 매일 5번의 기도, 수입의 일정 부분을 자선 목적으로 기부, 1년 중 특정 달에 금식, 평생 적어도 1회 이상 메카를 방문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확장하였다. 재밌는게 종교에 강요가 없었다. 다만 개종시 면세를 비롯한 혜택을 주므로 웬만하면 개종이 이루어졌다. 북아프리마의 기독교는 이단으로 몰린 아리우스파로 이슬람과 비슷했다. 그들은 비잔틴의 통제를 따를 경우 니케아 공의회의 결론을 따라야 했으므로 차라리 이슬람 치하에서의 자유를 선호했다. 사하라 사막 이남의 노크가 있었던 지역에선 가나제국, 말리제국, 송가이제국이 차례로 부흥했다. 이들 역시 교류를 통해 이슬람을 받아들인다.

 이슬람은 사산 페르시아도 정복한다. 다만 페르시아의 오랜 역사에 아라비아의 문화는 거부되고 오직 이슬람만이 받아들여졌다. 이슬람의 선한 공동체, 선과 악의 대결, 최후의 심판을 대비한 인간의 행동은 조로아스터교와 유사했다.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것이니 당연했다. 이란에서는 무함마드의 사위와 그 아내인 페르시아의 공주 샤흐르바누의 아들은 후세인을 정통후계자로 여겼다. 그래서 시아파로 갈라져나왔으며 이들은 지금도 후세인의 순교일을 가장 중요한 날로 여긴다. 

 중국에선 수와 당이 들어섰다. 수는 대운하를 건설해 분열한 중국을 하나로 이루었다. 그는 교역망을 갖춘 불교세력을 이용하기 위해 불교와 그 사찰을 비호하였다. 그리고 수당시절 인도로의 행렬이 이어진다. 중국인은 인도에서 얻은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개념을 한자로 표현해야했다. 마침 좋은 도구가 있었으니 도교다. 중국인은 도교의 여러 개념을 불교에 사용한다. 이렇게 중국 불교는 도교의 영향을 받았고 선불교가 탄생한다. 열반으로의 여정이 이승에서 융화를 이루는 참선기법으로 이어지고 선불교는 자연을 음미하고 관조적 은거를 선호했다. 당은 이렇게 운하로 양쯔강 유역의 여러 문화를 흡수해 불교, 도교, 유교사상이 혼합된 중국 특유의 문화를 형성한다. 

 인도는 마우리아 왕조 이후 여러 왕국이 흥망을 거듭하지만 사회 조직에 큰 영향이 없다. 항상 하나여야 하는 동심원적 세계관의 중국과는 달리 다층적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카스트가 지배적인 분위기에서 불교는 지배층을 중심으로 거부된다. 불교는 힌두교에 흡수되지 않았다. 힌두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종교적 성향으로 오히려 부처를 수많은 신 중 하나로 여겼다. 불교는 그렇게 인도 남부로 밀련고 남부에선 대승 불교를 거부한 상좌부불교, 소승불교로 거듭나게 된다.

 

7. 중세시대

중세에 중간세계인 이슬람 세계는 융성한다. 무슬림은 상업지향적 태도를 가졌고 그래서 번역이 중요했다. 그들은 도서관을 아라비아어와 페르시아어로 번역한 동서고금의 주요사상과 저작으로 채운다. 그들은 여러 철학에 노출되 백과사전을 편찬하고 원대한 철학의 종합을 시도한다. 그들은 신이 유일무이하다면 세계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플라톤의 이데아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매료된다, 무슬림은 추상적 기본 원리를 탐색하고 완전하게 구현된 수학을 향한 관심을 보였다. 0을 숫자의 하나로 취급하고, 자릿값에 의한 계산법을 흡수했다. 그리고 특정한 미지수를 표기하는 방법을 추가했다. 이슬람 수학자들은 여러개의 가능한 값을 필요한 단일 값으로 압축하는 체계적 방법을 궁금해했다. 역서 대수학인 알자브라고 나왔고, 알고리즘을 뜻하는 왈콰리즘이나왔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문화가 특이하게도 온대가 아닌 열대지역에서 일어났다. 그들도 대규모 기반 시설 건조에 착수했고, 정교한 예술품을 만들고, 수학 천문학을 발달시켰다. 차이는 다른 지역에선 물을 대는 것에 관심이 이었던데 반해, 열대지역이라 물의 제거에 몰두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다른 문명은 범람에 대처했고 이는 통제가능했으며 문명의 발전을 가속화했지만 아메리카는 강우량에 의존했고 이는 대처 불가능해 잦은 흥망성쇠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중세 유럽은 매우 가난했다. 로마에 비해 기술수준은 떨어지고 유지 관리가 안되며 기반시설이 붕괴하고 책을 읽고 쓸수 있는 자는 줄어들었다. 중세유럽은 교역을 싫어했고 돈을 의심했다. 그들은 진정한 부는 토지와 용사들의 용맹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유럽에선 이시기 노르만이 출몰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서로 떠난 사람들은 바이킹으로 불리고 영국에 도착하면 데인인 그리고 동으로가서는 루스인이라 불렸다. 동으로 떠난 이들은 교역을 주로 했는데 토착민인 슬라브인을 잡아다 비잔틴이나 이슬람에 노예로 팔았다. 그래서 노예의 영어 어원인 슬레이브다. 일부 루스인은 슬라브와 결탁해 하나가 되었고 지방귀족이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루스인에서 러시아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러시아인은 비잔틴 근위대에도 들어가고 기독교로 개종해 그리스 정교회에 속하게 된다. 러시아인은 장사꾼으로 흑해 ,카스피해, 무슬림 시장과 맞닿아 활동했다. 이들은 지역의 하자르족을 거의 전멸시키고 중앙아시아 초원 세력과 대결하며 성장해 키예프 왕국을 세운다. 러시아 이전 초원의 유목민은 중앙아시아에서 우랄산맥과 흑해사이의 빈틈으로 이동했는데 여기를 러시아가 막아버린 것이다.  

 가난한 유럽도 다소 변화가 시작된다. 9세기 들어 소작농은 연장과 농법을 개선하는데 땅을 깊이 가는 심경과 쟁기에 옆널을 달아 흙을 뒤집는 장치를 달아 한번에 두가지 일을 하였다. 또한 북쪽 지방의 축축한 토질도 개간이 가능해져 농업생산량이 급증했고 3년에 한번 휴경하기 시작해 경작지가 25%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로 여유시간이 생기고 다양한 물품이 생산되었으며 이로 인해 시장과 도회지가 생겨난다. 반면 생산성의 증가로 추방되는 농노도 늘어나 이들이 유랑하여 유민화하고 로빈후드 같은 이야기도 생겨난다. 


8. 십자군 전쟁, 몽골제국

 유럽기독교 왕국은 종교적 광신자들과 토지는 없고 전쟁에 목마른 기사들, 큰 야심을 품은 공작과 국왕들로 들끓었다. 십자군 전쟁은 이들에게 하나의 분출구였다. 십자군 전쟁으로 동으로 향하는 항구도시가 형성되어 발칸반도는 육로 여행객에게 이탈리아 도시는 해로 여행객에게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 베네치아가 가장 수혜를 보았는데 여기의 금세공업자들은 여행자의 주화및 귀금속을 교환한 후 나중에 그들이 돌아올때 다시 교환해주면 이득이 발생하는 것을 알아냈다. 은행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여행자의 귀금속을 보관해주고 증서를 발급한후 후에 수수료를 받고 귀금속을 다시 내주었다. 그리고 이 증서를 여러사람에게 유통되며 화폐역할을 한다. 유럽에 이슬람의 아라비아숫자, 자릿값, 십진법, 알고리즘, 대수학이 빠르게 도입되었다. 

 십자군은 레반트에 몇몇 왕국을 건설하였는데 이로 인해 유럽과 레반트간 거래가 늘어난다. 성전기사단은 중간에서 송금업무를 맡았으며 처음엔 직접 돈을 보내다 나중엔 돈을 보관하고 회계증서만 보내는 형태로 송금업무를 변화시켰다. 

 몽골제국은 유럽에 여러가지를 선사했다. 우선 여러 지역의 느슨한 교역망이 하나로 묶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 히말라야의 토착병인 흑사병이 유럽에 퍼지게 된다. 1345년 몽골은 흑해도시 카파를 공격하며 흑사병에 걸린 시체를 성으로 던졌는데 카파는 살아남았지만 이 병이 이탈리아 시칠리아로 퍼져 유럽 전체 인구의 1/3을 죽이게 된다. 유럽의 영주는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고, 임금은 상승했고, 소작농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이주한다. 

 유럽에 선사한 또 다른 것은 경쟁자의 파괴다. 몽골은 유럽에 가진 않았지만 러시아 이슬람, 그리고 멀리는 중국을 파괴해 유럽의 경쟁자들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리고 이시가 연결로 많은 동양의 물품이 유럽에 전해지는데 화약, 소형화기, 인쇄 출판술, 의학지식, 화학실험장치, 증류기술, 기계식 시계, 자기나침반, 삼각돛, 육분의등이 그것이다. 

 한편 십자군 운동으로 유럽은 무슬림이라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기독교인은 동일한 목적을 공유하며 유럽이라는 공동의식이 다소 생겨났다. 물론 이 정체성은 타자에 의해 생긴 것이기에 무슬림이라는 타자가 십자군 전쟁의 끝으로 사라지자 내부로 향해 종교재판으로 이어진다. 


9. 기울어진 추

 몽골제국으로 인한 파괴로 몽골 이후 중국과 이슬람에선 복원이라는 서사가 이루어진다. 이들은 과거 잘나가는 제국이었기에 복원은 당연한 것이었다. 한편 유럽의 포르투갈인들은 캐러벨이라는 쾌속 범선을 제족했고, 스페인은 아메리카로 향했다. 스페인은 무슬림과 유대인이 아메리카로 향하는 배에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돼지를 승선시켰는데 이 돼지가 신대륙에 가서 급속도로 퍼지며 유행성 균을 퍼뜨렸다. 때문에 스페인 침략자들은 토착민을 보기도 전에 이미 텅비어버린 도시나 마을을 보기 일수였다. 

 스페인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광산을 개발하고 대규모 농장을 조성한다. 포르투갈은 동으로 향해 아시아의 거점에 요새를 구축하고, 진귀한 아시아 물건을 구입해 큰 이문을 남긴다. 스페인에는 아메리카의 막대한 은이 유입되었는데 그들을 이를 생산성 강화에 쓰지 않고 전함건조, 군대 양성, 물품구입에 탕진한다. 반면 스페인에서 유입되어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등으로 향한 은은 생산성 향상에 쓰인다. 

 경제도 크게 발전하는데 합자회사가 처음 등장한다. 뜻을 모은 상인 여러명이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자본을 여럿이 함께 대어 대규모 사업을 추진하는 형태다. 유한책임회사도 나타나는데 영국 엘리자베스는 동인도 회사를 유한책임회사로 선포한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주식을 발행하는데 일부를 일반인에게 판매하고 그들에게 이익을 일부 나누고 주식의 판매도 허용한다. 

 유럽인은 당시 다양한 주화를 사용했는데 테두리를 깎아내거나 은 함량이 부족한 악화가 유행한다. 이에 네덜란드는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사업을 원하는 이는 누구나 중앙은행에 돈을 맡기고 계좌설립을 의무화 한다. 그후 그들의 주화가치를 중앙은행이 평가해 그 금액만큼 지폐를 발급하고 이로 인해 화폐는 불확실한 물질의 영역에서 벗어나 순수한 수학적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영국은 윌리엄 3세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은행업자들에게 100만파운드의 빚을 진다. 채권을 발급하였는데 이 채권이 사실상 양도가 가능한 화폐로 사용된다. 그리고 윌리엄은 이 빚을 갚지 않는다. 이 채권이 영국의 화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유럽인은 중국과 교역하며 그들의 차와 비단, 자기를 선호했다. 중국은 상거래에 사람들이 많의 쓰는 은을 사용했는데 은이 조정은 은을 세금으로 납부하게 하였고, 많은 중국인들은 은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은의 공급처가 유럽이다. 정확히는 아메리카-유럽-중국으로 은이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차와 비단의 생산을 위해서는 경작지가 필요하였는데 쌀생산량이 부족한 중국에선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유럽인에 의해 신대륙에서 고구마, 감자, 옥수수등의 새작물이 들어오며 이들이 잘자라는 황무지가 새로운 경작지가 되어 식량 공급이 충분해졌다. 이에 차와 비단이 많이 공급되어 중국의 상인은 부를 축적한다. 

 한편 1600년이 되자 소빙하기로 중국에 흉작이 든다. 생계수단을 잃은 농민은 도시로 몰리지만 마침 이시기 스페인도 경제위기로 은 공급이 감소해 중국내 일자린 감소한 상황이었다. 이에 여기저가시 반란이 일어나고 이 틈을 타 청이 발흥해 중국을 차지한다. 영국은 인도 캘거타에 요새를 설치하고 인도인이 반발하자 플라시 전투로 벵골 지역을 차지한 후 인도 전체를 장악한다. 인도의 토양과 기후는 양귀비 재배에 무척 적합했는데 영국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막대한 적자를 보고 있었다. 1800년 영국은 4500상자의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판매하고 1834년엔 4만 5천 상자를 판매한다. 마침내 아편 전쟁이 발발하고 영국은 승리하여 중국에 더 많은 항구의 개항과 치외 법권, 자유거래를 요구한다. 


10. 산업혁명의 기계가 바꾼 삶

 증기기관이 발명된다. 증기기관은 밀폐된 용기 내부에서의 연소작용으로 생기는 힘을 동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여러 발명이 계속되는데 낱장 윤전 인쇄기는 시간당 무려 1만 8천장의 인쇄가 가능했다. 미국에서는 1833년 최고 유통물도 구독자가 4300에 불과했다. 당시 벤저민 데이는 뉴욕선을 창간하고 1부에 1페니라는 저가 정책으로 대박을 친다. 처음 신문은 살인이나 방화, 강도등의 사건을 실었지만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 아닌지라 뉴스를 찾아 돌아다니는 기자라는 직업이 생겨나게 된다. 

 전신기술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대서양 너머의 일도 알게 되었다. 대서양 횡단 통신은 당연히 매우 비쌌으므로 6개의 신문사가 전신비를 공동부담하는데 이것이 AP통신의 원조다. 한편 기계는 인간의 생물학적 기제를 교란하기 시작한다. 공장에서의 근무는 2교대, 3교대로 이루어졌고, 제트기로 시차적응문제가 생겨났으며 전기불로 밤낮의 정의가 바뀌었다. 

 기계는 가처분 소득을 보유한 유례없는 규모의 중산층 계급을 창출했다. 이들은 자신의 기능을 상품화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어느정도의 풍요로움을 누릴수 있었다. 생산의 기계화로 인해 사람들은 대규모 혈족집단에서 핵가족, 개인으로 쪼개졌으며 사람들은 대규모로 직장을 찾아 이주하기 시작했다. 산업화의 생산력은 엄청나서 역사상 가장 많은 이들이 사회나 개인의 생존에 직접 연관이 되지 않는 직업에 종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기계는 성별에 따른 분업도 변화시켰다. 과거 여성은 가사 육아등 사적 영역을 남성은 전쟁, 정치, 사회등의 공적 영역을 맡았다. 하지만 기계가 등장하자 여자들과 가정을 결부시킬 필연성이 약해졌다. 여성의 공적사회진출을 활발해졌고 가사노동을 돕는 기계의 발명으로 가사노동의 필요성과 강도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국민국가도 등장한다. 과거 제국은 넓었고 깊이가 없었다면 국민국가는 응집력이라는 깊이가 있다. 과거 제국의 국경은 애매했던 반면 국민국가의 국경은 지리적으론 가깝지가 서로가 천양지차다. 국민국가는 모든 구성원의 삶에 국가가 지속적으로 관여하고 통제하며 영토안에서 동일한 법률, 언어, 화폐가 사용된다. 이런 국민 국가의 등장으로 모든 제국내에서 자치권을 주장하는 신흥 국민국가세력이 등장하였고 그 결과 지금의 국경은 과거 제국시절부터 무척이나 촘촘하다. 하지만 국민국가역시 일치한 국민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분쟁과 독립요구는 현재진행형이다. 

 현대에 들어선 다국적 기업도 들어섰다. 다국적 기업은 경제적 이익을 쫓아 여러 국가에 진출한다. 다국적 기업은 꾸준히 그 규모를 키워 1970년대에 이르자 몇몇 기업들은 웬만한 국민 국가의 국내총생산 규모를 넘어서게 되었다.


이 책은 과거부터 현재를 망라하지만 과거에 대한 비중이 더 큰 책이다. 현대 부분에 들어서면 압축한듯 빨리 진행되는 느낌이 있을 정도다. 특이점등을 제시하며 미래에 대한 부분도 다르지만 현대 부분과 미래 부분은 다소 아쉽다. 물론 그랬다면 책은 580쪽이 아닌 780쪽 정도로 마무리 되었을 것 같긴 하다. 하여튼 과거 고대와 중세 부분에서 아쉬운 퍼즐을 좀 채울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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