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의 세계사 - 서양이 은폐한 '세계상품' 인삼을 찾아서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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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의 대항해시대를 이끈 건 값비싼 동양의 향신료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다. 이슬람제국이 길을 막고 중개무역을 독점하자 서양인들은 한 때 헤라클라스의 기둥(지브롤터 해협)으로 막혔다던 대서양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커다란 아프리카를 돌아 동양에 다다랐고, 그 과정이 너무 힘드니 상대적으로 짧다고 생각한 서쪽으로 가서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도 하였다.

 커피, 후추, 정향, 육두구, 카카오 같은 것들이 모두 인기가 좋았다. 서양은 동양에서 그것들을 직접 서양으로 날랐고, 수십 배의 이득을 누렸다. 그리고 향후엔 식민지를 건설하고 직접 플랜테이션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돈 되는 것이라면 뭐든지 팔아치운 서양인들이 중국인들이 그리도 애지중지하고 귀중했던 인삼을 몰랐을까? 이 책을 읽기 전엔 인삼이 아무래도 약재이고, 동아시아에서만 교역을 하는 것이니 그런 무역체제에 편입이 되지 않은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책 '인삼의 세계사'는 그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다.

 인삼은 진시황이 불로초의 하나로 가능성을 점칠 정도로 오래전부터 동아시아에서 약재로 효능이 높았다. 무역은 당연히 생길 수 밖에 없었는데 위진시대 해로를 통해 인삼 무역이 시작되어 당나라 초기에 이르러 매우 중요해졌다. 당시 중국에서는 한반도에서 오는 인삼을 통칭해서 신라인삼이라 불렀다. 인삼은 명나라 중기에 전성기를 맞는데 사회가 안정되자 사치품 수요가 커졌기 때문이다. 수요증대로 중국자체내의 인삼이 거의 고갈되자 변경의 마시나 호시를 통한 요동삼과 고려인삼을 많이 수입했다. 청을 세운 누르하치가 인삼과 모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게 가능해진 이유이기도 했다. 청대에는 만주족이 자신들의 토대인 만주를 중시하여 만주내에서의 인삼, 진주, 초피는 국가가 철저히 관리했다. 청초기만 해도 이게 잘 운용되어 성경지역에서만 인삼을 채취했지만 차차 재정결핍으로 인삼채취 지역이 만주내에서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인삼은 삼국시대부터 이미 채취가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인삼을 징수하고 생산지가 아닌 곳에서는 인삼세를 징수했다. 조선은 공납으로 인삼을 징수하였는데 전국 329개 군현중 112개 고을에서 인삼을 산출해 약재로 쓰거나 공물로 바쳤다고 한다. 조선은 인삼의 해외 유출을 통제하였는데 임진왜란때 군대를 따라 들어온 명상인들이 돈이 되는 고려인삼을 반출해갔다. 조선은 요동에서의 식량 조달을 위해 중강개시를 허용했는데 이를 통해 명이 자신들이 부족한 인삼과 은을 반출해갔다. 일본 역시 임진왜란때 고려인삼 종자를 탈취해가 조선인 포로로 하여금 자국내 이식을 시도한다. 조선의 인삼교역을 청대에 다소 혼란에 빠졌는데 늘 정기적으로 인삼을 요구한 중국황제들 중 거의 최초로 고려인삼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여진족들 자체가 만주에서 인삼을 얻어왔기 때문으로 이렇게 수출길이 막히자 조선 정부는 인삼을 일본으로 수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17세기 중반부터 청에서도 인삼 수요가 늘어나자 다시 인삼무역이 시작되었고 사행무역과 중강개시 및 후시를 중심으로 무역이 이루어진다. 조선 상인은 주로 청에서 백사와 비단을 수입했고 은과 인삼으로 대금결제를 하는 식이었다. 일본에서는 자생삼인 죽절삼이 있었지만 고려인삼에 비해 약효가 크게 떨어졌고,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일본에 동의보감등의 조선의학서가 보급되면서 인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난다. 이에 조선상인은 일본에 인삼을 팔아 은을 얻고, 이 은으로 중국에서 비단을 사고 일부를 국내에 유통하고 이를 다시 일본에 팔아 큰 무역이익을 얻는다. 당시 일본은 세계 제2의 은공급국이었는데 잦은 무역으로 은이 고갈되자 인삼 결제를 위해 은함략이 높은 특주은까지 만들어낼 정도였다. 하지만 18세기 들어 조선내의 인삼도 고갈되고 일본내의 은도 고갈되자 양측의 인삼교역은 쇠퇴하게 된다. 

 조선에서는 17세기 이전엔 인삼을 끓여서 가공했다. 아무래도 생삼은 무역이 어려웠기에 건조하거나 끓이는 등의 가공이 필요했다. 하지만 인공재배가 시작된 이후 쪄서 말리는 증포방식으로의 변화가 일어난다. 홍삼의 시작이다. 조선에서 홍삼무역을 주도한 것은 역관과 한양의 상인으로 홍삼제조 증포소는 1797년 한양에 처음설립된다. 하지만 1810년 개성으로 이전하는데 이는 개성상인의 힘이 매우 컸음을 의미한다. 이후 개성은 조선의 홍삼제조와 생산을 독점하여 1896는 개성의 인삼밭은 전국의 47%에 달했고 인근 금천, 장단, 풍덕을 더하면 무려 92%에 이르게 된다. 조선은 개화기에 이르자 왕실의 재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내장원을 설치한다. 내장원은 산하에 인삼 및 홍삼에 대한 관리들 담당하는 삼정과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국내외 홍삼판매의 국영독점을 의미하게 된다. 이에 개성상인들은 직접 수출을 통한 이득이 크게 줄어 개성민요를 일으키기도 한다. 나라가 망하며 조선총독부의 주재로 개성의 홍삼무역은 미쓰이물산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해방후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전란을 피했던 개성의 상인들은 홍삼산지와 제조지를 모두 잃게 된다. 이들은 1952년 전란중에도 개성에 잠입후 고려인삼 종자를 얻어오게 되며 이를 이전까지만 해도 인삼의 주변부였던 풍기, 금산등에 이식해 새로운 현대식 홍삼제조시설은 고려인삼창을 준공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유럽의 동인도 회사는 17세기부터 동아시아의 인삼을 유럽으로 들여온다. 하지만 인삼은 유럽자체에 수요가 많지 않았기에 본질적으로 장거리 무역상품이 아니었다. 동인도 회사의 현지무역상품이었는데 그것은 아시아의 한 지역에서 구입한 상품을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처분하고 그 돈으로 그 지역의 상품을 사서 다른 곳에 파는 연쇄거래를 의미한다. 동인도 회사는 유럽에 소량의 인삼만을 팔았으며 그 덕에 매우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인삼이 돈이 되기 시작하자 북미지역에서 인삼을 찾는 노력이 이뤄지고 캐나다에서 인삼이 발견된다. 기후가 동아시아와 비슷하다는 것에 주목한 성과였다. 캐나다 모피 상인들은 원주민을 동원해 캐낸 인삼을 수출하기 시작했고, 북미의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인삼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북미의 인삼은 화기삼이라 불리는데 이는 미국의 상선이 처음 성조기를 달고 광둥에 입항할때 그 깃발이 꽃처럼 보여 중국인들이 화기라 불렀고, 화기가 가져온 삼이라 화기삼이 된 것이다. 북미에서 인삼에 대한 경제적 열품은 골드러시 못지 않았다. 그리고 막 독립하여 경제적으로 취약했던 미국이 국제교역에 참여하는데 소중한 자산이기도 했다. 미국은 식민지 시절 차를 매우 비싼 가격에 수입하고 있었는데 영국과 프랑스를 통한 교역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독립후, 차 수요가 끊이질 않자 차 수요 해결을 위해 중국과의 직접 교역이 필요했지만 서부개척 이전이라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긴 항로를 이용할수 밖에 없었다. 자본이 취약했던 미국에게는 차교역을 위해 미국에선 쉽고 싸게 구할수 있으면서도 중국엔 비싸게 팔수 있는 물건이 필요했는데 당시로선 화기삼이 유일했다. 미국은 중국과의 첫 교역을 위해 군선이던 배를 중국황후호로 개조하였고 첫 교역물품으로 화물 27만달러어치중 무려 24만달러치가 화기삼이었다. 첫 화기삼 거래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상선은 미국으로 돌아와 1500%의 이익을 누리게 된다. 이후 60년간 화기삼 수출로 뉴잉글랜드 상인들을 큰 자본을 축적하게 된다. 반면 화기삼의 엄청난 공급으로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영국은 인삼교역에서 거의 발을 떼게 된다. 그리고 아편에 집중한다. 중국내에서 화기삼은 인기가 값어치가 높지 않았는데 공급이 과잉한것도 있었지만 포장상태가 만주산이나 한국산에 비해 매우 조악했으며 만주나 한국산의 높은 수준의 가공기술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아편 공급으로 아편중독자가 크게 늘어나자 인삼의 해독능력에 의존하여 인삼수요가 늘었는데 상류층은 고려인삼을 서민층은 화기삼을 이용했다.

 한편 유럽에서는 18세기 들어 인삼의 위상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는 중국에 대한 서구의 인식변화와 일치하는데 산업혁명으로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하며 따라잡고 싶고 닮고 싶어하던 중국을 정체된 곳이자 계몽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엔 약전이란게 있었는데 의약품의 균질성을 보전하려고 제법, 성상, 성능, 품질과 저장방법등에 대해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지침서였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선 약전 개혁이 일어났고 표준화를 위해 유효성분이 있는 것에 주목했는데 이점에서 인삼이 불리했다. 인삼의 주성분인 사포닌이 한 분자내에 비극성 분자와 극성분자가 공존하는 화합물로 비누처럼 거품형태로 발생하여 이를 분리, 정제하기가 무척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삼의 성분은 당시 기술로 분석이 어려웠고, 효능이 워낙 좋다보니 동아시아에서 만병통치약처럼 쓰여 그 효과가 오히려 더욱 의심받게 되었다. 거기에 서구에서 인삼의 위상이 추락하게 된 것은 서구화가 되지 못한 면도 컸다. 아시아나 아메리카의 다른 향신료들은 서구 자체내에 많은 수요를 일으켰고, 이에 플랜테이션으로 재배하기 시작했지만 서구의 식민지들중 인삼재배에 적합한 지역이 없었다. 이로 인해 서구의 교역역사에서 인삼은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인삼의 성분이 진세노사이드라는것이 분명히 밝혀지고 효능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지금은 전 세계에서 인삼이 재배되고 있다. 한중일은 인삼이 고갈되기 시작한 18세기 말부터 인삼재배가 본격화했으며 1970년대부터는 캐나다나 뉴질랜드에서도 인삼이 재배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약효가 좋은 고려인삼의 종자가 마구잡이로 유출되었는데 인삼자원에 대한 보호는 지금도 잘 이뤄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거기에 최근 고려인삼은 열을 높이는 작용을 하고 반면 서구의 인삼은 열을 내린다는 프레임이 생겨나 열대국가에서는 오히려 서구의 인삼이 인기가 좋아지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인삼은 다른 향신료들처럼 대항해시대 서구의 중요한 상품 중 하나였다. 특히, 미국같은 나라에는 초기 자본을 형성하게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중요한 상품이기도 했다. 하지만 차이점은 다른 향신료들은 서구사회 자체에 수요가 높았던 반면 인삼은 인기가 좋은 중국의 상품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이다. 거기에 동아시아의 높은 가공수준을 화기삼이 따라가지 못한 점이나 오리엔탈리즘으로 아시아의 모든 것을 얕잡아보고 기술적 한계로 인삼의 유효성분이 적절히 추출되지 못해 약리작용이 뒤늦게 입증되면서 인삼이 서구의 역사에서 조용히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게 이 책에서 말하는 결론이다. 주제가 무척 흥미롭고 재밌는 책이었지만 처음으로 다루는 주제를 발굴한 책이다보니 잘 정리가 안된 느낌도 조금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읽어볼만한 책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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