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전쟁 - 세계 역사와 지도를 바꾼
도현신 지음 / 이다북스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소금, 설탕, 후추, 밀, 커피, 코코아 지금은 모두 전 세계 웬만한 곳에선 넘쳐나는 것들이다. 하지만 과거엔 모두 특정지역에서만 나는 사치품이었다. 누구나 원하는 만큼 얻을 수 없었으며 이것들을 얻기 위한 노력은 인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 설탕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설탕을 먹은 지역은 인도다. 사탕수수가 인도 갠지스 강 유역이 원산지이기 때문인데 지역이 무덥고 습해 사탕수수 재배지역으로 딱이다. 인도는 치즈덩어리를 밀가루로 말아 튀긴 다음 설탕 시럽에 담가 먹는 굴립자문이나 코코넛 가루와 설탕을 반죽한 덩어리를 밀가루로 싼 모닥 같은 과자를 과거부터 즐겼다. 

 인도의 설탕을 중국과 페르시아로 퍼졌는데 페르시아는 기후 때문인지 실패했고, 중국은 성공해서 남북조시대부터 즐겨먹기 시작했다. 서양엔 알렉산더가 인도를 정벌하며 퍼졌는데 기후가 맞지 않아 지중해 동부 일부에서만 생산량 조금 있었다. 

 설탕은 대량 생산한건 600년후반부터 지중해를 제패한 이슬람 세력때부터다. 그들은 이집트, 시리아, 페르시아, 크레타에 설탕 제조공장을 만들었고 이중 이집트 산이 가장 품질이 좋았다. 우리가 먹는 캐러멜도 아랍의 쿠르트 알 밀이라는 과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 이후 유럽인은 십자군 전쟁에서야 설탕의 단맛을 다시 보게 된다. 

 16세기 들어 유럽은 아메리카를 차지하며 축구선수 호날두의 고향이자 대서양의 섬인 마데이라 제도와 아이티, 브라질에 대규모 사탕수수재배 농장을 세운다. 토착민들은 전멸하거나 도망가기 일쑤였기에 흑인 노예를 동원했고, 1500년에서 1880년까지 무려 4천만의 흑인 노예가 강제 동원되었다. 이런 대규모 재배에 16세기 중반부터 설탕가격이 떨어진다. 프랑스는 아이티의 설탕에서 무려 국가재정의 25%를 얻었는데 3만의 프랑스인만 부유했고 48만의 아이티인들은 노예나 다름이 없었다. 역설적으로 프랑스 혁명은 아이티의 독립을 자극했는데 투쟁끝에 아이티인들은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최초로 독립을 이뤄낸 나라가 된다. 뒷끝이 강했던 프랑스는 설탕의 수입을 포기할수 없어 작은 국가 아이티를 재침공하겠다며 위협해 84년에 걸쳐 무려 9천만 프랑을 뜯어낸다. 아이티가 가난한 국가로 전락하게된 결정적 계기라 저자는 평한다.

 1745년 프로이센 화학자 안드레아스 마르그라프가 사탕무를 가열해 설탕 추출해 성공하며 설탕은 결정적으로 싸진다. 사탕무는 서늘한 기후에서도 잘 자라 유럽 전역에서 재배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사탕무는 사탕수수보다 성장도 빠르고 가격이 쌌다. 이는 카리브해의 설탕경제에 치명타를 입혔으며 이로 인해 유럽국가들은 그냥 카리브해의 여러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켜준다.

 

2. 소금 

 소금은 해안이 아니어도 암염으로 얻을 수 있다. 암염은 과거 바다였던 곳의 소금기가 땅속에서 암석처럼 굳은 것이다. 소금은 과거 매우 귀했는데 로마는 유대지역의 사해 소금을 얻기 위해 유대를 정벌한다. 소금 빼곤 사실 쓸모가 없는 지역이었는데 그래서 로마는 제1차 유대전쟁에서 11만 제2차 유대전쟁에서 무려 58만의 유대인을 학살하면서 까지 이 지역을 지켜낸다. 군소반란은 뭐 끊임이 없었다고 한다. 

 소금은 과거 급료로 쓰여 소금 화폐인 살라리움이 오늘날의 봉급을 뜻하는 샐러리가 되었고 프랑스의 소금화폐 솔드는 군인의 급료로 쓰여 군인의 어원인 솔져가 되었다고 한다. 

 베네치아 역시 소금과 무관치 않은데 훈족을 피해 염전이 많은 섬에 피신한게 베네치아다. 이들은 염전의 경제력으로 해군력을 키웠고, 소금을 적극적으로 팔았다. 하지만 힘이 강해진 이후, 자신들의 소금을 강매했고, 이를 위해 적국의 염전부터 해군으로 박살냈다고 한다. 독일의 한자동맹 역시 소금을 중시했는데 로마카톨릭은 예수가 죽은 금요일엔 고기를 금지했고 생선은 허용했기에 소금에 절인 청어를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으로 가면 당의 황소가 소금장수였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소금을 전매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라가 힘들어지면 소금가격이 매우 비싸지곤 했다. 황소같은 소금 밀매꾼은 이를 노려 많은 이득을 취했고 황소는 여기서 얻은 경제력으로 반란을 일으켜 하북과 산동 지역을 휩쓴다. 이어 물산이 풍부한 광주지역을 취하고 이곳의 절도사로 자신의 임명을 당 조정에 요구했는데 당이 거부하자 당나라 북방으로 쳐들어가 초토화시킨다. 이어 낙양을 점령하고 수도인 장안을 점령하자 당황제는 사천으로까지 피한다. 굴욕적이게도 황소는 황제를 칭하고 나라를 세웠지만 당황제가 외부에 도움을 청해 패퇴한다. 당은 얼마가지 않아 망하는데 사실상 황소가 멸망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3. 후추

 후추나무의 열매로 덜익은 상태에선 녹색이나 이를 발효하고 말리면 붉거나 검게 변한다. 후추나무는 덥고 습한 열대에서 자라기에 인도 남서쪽 말라마르 해안이 원산지이며 말레시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잘 자란다. 

 후추는 인도양과 홍해를 통해 유럽으로 팔렸는데 이슬람 제국이 지역을 장악한다. 동로마와 페르시아는 아랍인을 무려 천년간 지배했기에 이들을 우습게 보았는데 결국 이들에 멸망한다. 이후 이슬람제국은 후추 무역을 독점하고 큰 부를 쌓는데 후추에 대한 열망은 유럽인에게 이어져 이것은 십자군 원정과 대항해시대의 원인이 된다. 

 대서양을 뺑 도는 항로를 개척한건 포르투갈이다. 이 소국은 1510년 인도 서부 항구인 고아를 점령하는데 23척의 전함과 1200의 군사로 9천의 이슬람교도를 무찔렀다. 포르투갈의 장군 아폰소 데 알부케르케는 이후 고아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를 악랄하게 탄압했고 1961년에 인도가 정규군을 대규모로 동원하고 나서야 고야를 되찾을 수 있었다. 알부케레케는 말라카도 점령한다.

 후추는 사치품으로 쓰이다. 17세기 공급이 확대되자 가격이 하락하며 인기를 잃는다


4. 밀

 밀은 3대 작물중 하나로 이슬람, 유럽 지역의 주식이다. 밀은 로마를 공화정에서 재정으로 바꾼 것으로도 평가받는다.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일전을 압두고 양국가의 가운데 위치한 이탈리아 시칠리아를 선 점령한다. 시칠리아에는 밀이 잘 자랐는데 대규모로 재배하여 가격도 쌌다. 그 싼 밀이 로마로 대규모로 유입되며 로마의 자영농이 몰락한다. 이들은 도시 빈민이 되거나 일용직으로 전락하였는데 이로 인해 공화정에 대한 원망이 상당했다. 반면 이들은 해외에서 실적을 쌓아온 장군집단엔 열광해 술라, 마리우스, 카이사르 등에 이어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되는데 주요 밑기반이 되고 만다. 로마는 항상 식량 부족에 시달렸는데 이집트를 점령하고서야 만성적 식량부족이 해결되었다. 이집트의 밀 생산량은 제국 전체의 무려  1/3에 달했다고 한다.

 우린 흔히 약장수를 사기꾼이나 안 좋은 사람으로 취급하는데 유럽에선 빵장수가 그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는 과거 유럽인들이 밀을 빵장수에게 맡겨 빵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이 빵장수가 밀가루를 흔히 가로챘기 때문에 생겨난 문화라고 한다. 아무래도 빵 자체가 효모로 부풀어 오르니 속이기 더 쉽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의 알제리 지역엔 바르바르 해적이 있었다. 스페인이 그라나라를 멸망시켜 이슬람 세력을 유럽에서 완전히 축출하자 스페인이 탄압당하고 쫓겨난 이들까지 합쳐져 바르바리 해적이 강성해졌다. 이들은 유럽에 기독교에 대한 강한 원망과 오스만 제국의 후원으로 오로지 기독교 선단만 공격한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의 선단은 오히려 밀 수출로 유럽으로부터 큰 돈을 벌었다.

 바르바리로 골치아픈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대규모 원정을 단행한 적도 있지만 그 때마다 이 해적들은 다른 지역으로 도망갔고, 이후 유럽이 철수하면 본거지로 돌아와 해적질을 계속했기에 근절이 어려웠다. 유럽 국가들은 평화협정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바르바리 해적들이 하나의 연합체가 아니었기에 단일한 협정이 불가능했고, 맺어도 다른 해적들이 노략질을 했기에 무용지물이었다. 바르바리는 오스만에 복속되어 있었기에 유사시엔 오스만의 해군이 되었다. 그렇기에 평소 유럽을 공격하고 밀을 약탈해 적의 잠재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노력도 있었다. 바르바리는 1830년 프랑스가 근거지인 알제리 전역을 식민지화하고 나서야 근절된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제패하고 영국을 노렸는데 해군력이 약해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대륙 봉쇄령을 내려 고사작전을 펼쳤는데 영국은 북미와 교역하며 이를 버텨냈고 유럽 대륙 국가들만 힘들어지는 상황에 봉착한다. 이중 러시아는 영국으로 밀을 수출해 돈을 벌고 있었는데 견디다 못해 몰래 밀을 영국에 수출하다 발각되어 나폴레옹의 대규모 침공을 받는다. 그리고 러시아의 승리로 나폴레옹은 패망한다. 

 우리나라는 밀이 자라기에 적합하지 않은 기후로 밀의 생산량이 매우 적었다. 지금은 누구나 먹는 수제비도 본디 왕족의 음식이었다. 밀이 귀하니 국수도 귀해 국수는 생일날이나 잔치에서나 먹는 귀한 것이었다. 일본 역시 밀이 귀해서 쌀을 먹지 않았고 그들인 만든 단팥빵도 국민들에게 밀을 먹이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한다. 반면 중국은 북부지역에서 밀이 잘 자라 오래전부터 그들의 주식중 하나였다. 중국 북부의 군인들이 남쪽 지역으로 가면 먹어본 적이 없던 쌀을 먹게되어 이를 먹지 못해 굶어죽었다는 기록이 있다는데 믿을 수 있는건지는 잘 모르겠다. 


5. 커피

커피는 에디오피아가 원산지다. 아랍에서 먼저 유행했는데 아랍 수도승들은 명상시간에 졸음을 참기위해 커피를 애용했고, 술도 종교적으로 금지이기에 카페가 유행했다. 유럽은 16세기에 커피를 접했는데 18세기에야 대중화한다. 

 유럽에 커피가 전해진건 전쟁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은 빈을 두번 공략한다. 하지만 모두 패퇴하는데 두번째 공략전에선 폴란드의 윙드 후 사르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폴란드는 역사상 이 시기에 가장 강력했는데 이 모두가 윙드 후사르 덕분이었다. 이 군대는 독수리 날개를 단 판금 갑옷에 길이가 무려 5.5미터가 되는 창을 사용했다. 중세 전쟁에서 창의 길이는 매우 중요했는데 기마대가 적을 먼저 공격할수 있기 때문이었다. 중세 유럽의 공주들은 시집가면서 스파이 노릇도 해서 적국의 창길이를 알아내는 일도 했다고 한다. 윙드 후사르는 긴 창으로 적을 공격하고 대열이 무너지지 않으면 선발대가 다시 돌아가 창을 보충해 재차 공격하는 전술을 썼다. 그래서 1608년엔 스웨덴, 1610년엔 러시아, 1621년엔 오스만을 무찌른다. 상대는 모두 몇배의 군사를 갖고 있었다. 제2차 빈공략전도 이들이 원군으로 나가 막아낸다. 전리품으로 커피콩이 있었는데 포로로 잡혀있던 사람이 커피를 먹는 법도 알아내 이를 전후 카페를 차려 성공적으로 대중화했다. 크림을 올리는 비엔나 커피나 아인스패너 커피가 이때 생겨났다. 

 유럽이나 이슬람과는 다르게 커피는 미국에선 노동자 문화가 된다. 이는 기업주들 때문인데 원래 미국에선 점심시간에 노동자들이 맥주나 와인을 즐겼다고 한다. 근무중에 음주는 당연히 생산성을 떨어뜨렸고 때문에 미국의 기업주들은 술대신 커피를 적극적으로 제공했다고 한다. 커피는 집중력을 높여 오히려 생산성을 높였으니 일석이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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