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세계사보다 더 재미있는 최진기의 전쟁사 1~2 세트 - 전2권 세계사보다 더 재미있는 최진기의 전쟁사
최진기 지음 / 이지퍼블리싱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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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살과 만행, 문명의 파괴가 있지만 전쟁사는 재밌다. 이는 후대의 인간이 당시 전쟁의 잔혹성을 목도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게임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고 그도 아니면 그 자체를 즐기는 잔혹성을 가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장기나 바둑, 체스 그리고 최신의 전쟁관련 비디오, 모바일 게임들은 대개 인기가 좋다.(삼국지나 문명시리즈가 얼마나 재밌는가)

 그래서 목적이 무엇이든 전쟁을 다룬 책도 많다. 인간의 분명한 한 부분이기 때문 일 것이다. 그런데 전쟁책들은 대개 상세한 전술이나 이긴 전략, 무기등은 잘 다루지 않는 편이다. 그런면에서라면 이 책은 분명 빈틈을 잘 찌렀고 그래서 재밌다.

 저자 최진기는 두권의 책으로 고대부터 지금까지 10개정도의 전쟁을 다룬다. 다 재밌지만 새롭게 안 내용만 좀 정리해보았다. 과거 석기시대때도 전쟁은 있었겠지만 당시엔 어느 정도 규모의 문명도 없다고 봐야하니 제대로 된 문명의 전쟁 기록은 청동기부터라 할 수 있다. 청동은 귀하면서도 약했기에 청동기시대의 전쟁은 주로 귀족이 참가했다. 당시 국가재정도 열악하고 청동이 워낙 비싸 군인 스스로가 전투에 필요한 무장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 대가로 전쟁의 부산물도 약탈군인이 챙겼다.

 청동기엔 전차를 이용한 전투가 많았는데 그야말로 럭셔리전쟁이다. 청동무기에 마차, 말, 마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관점에선 우습게도 상대편과 장소와 시간을 약속잡아 전투했다고 한다. 전차가 평지에서만 운영이 가능하니 그랬던 것이다. 중국에서도 청동기 때 전차전투가 주로 이루어졌다. 거기에 인접군 귀족끼리 서로 아는 사이거나 인척이다 보니 전투에서 패배해도 대량학살이나 인명살상은 많지 않았다.

 본격적인 전투 규모의 확장은 철기시대 부터였다. 그리스는 보병중심의 부대를 갖추었는데 평지가 없다보니 기병이 양성되지 않고, 기병이 없다보니 궁병역시 양성하지 않았다. 상성상 보병은 궁병을 잡고, 궁병은 기병을 잡으며, 기병은 보병을 잡는다. 그리스 보병은 궁병과 기병이 없다는 점에서 약점을 갖지만 강력한 팔랑크스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팔랑크스 대형은 보병들이 여러열로 밀집해 오른손엔 긴 창을 왼손은 방패를 들고 전진하는 대형이다. 방패는 상당한 크기로 자신 뿐만 아니라 옆편의 아군까지 보호했다. 팔랑크스 대형은 강력하지만 약점도 있었는데 공성전을 하지 못했고, 전진공격밖에 되지 않으며, 평지가 아닌 산지에선 대형유지가 안되 쓸모가 없었다는 점이다. 팔랑크스 대형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서로들 사람인지라 팔랑크스 대형끼리 붙다보면 대형이 점차 오른쪽으로 밀리기 시작한다. 이유인즉슨, 상대편이 창으로 찔러대니 왼손의 방패를 창만 들고 있는 자신의 몸 오른쪽에 슬슬 놓기 시작하고, 옆의 아군이 방패를 따라 오른쪽으로 이동하는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팔랑크스 대형끼리 맞붙으면 대형의 왼편이 적에게 노출되게 된다. 그렇다보니 팔랑크스 대형에서는 오른쪽엔 공격력이 강한자를 왼쪽에는 수비력이 강한자를 배치했다. 팔랑크스 대형의 전투결과는 극적이었는데 막강한 밀집대형이지만 조직력으로 버티는 지라 먼저 틈을 보이는 쪽이 수비대형이 무너져 갑작스레 적의 창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전술은 무거운 창과 방패를 오래들고 있는 쪽이 이기는 사실상의 체력전이었다.

 중세의 몽골 군은 세계최강의 군대였다. 몽골군은 거의 모조리 기병이었는데 말이 워낙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모두 안짱다리라 보병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또한 말때문인데 몽골인들이 워낙 어려서부터 말을 타다보니 그에 적합하게 다리에 변형이 와 안짱다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몽골군의 강점은 몇가지가 있는데 우선 몽골군은 수가 워낙 적다보니 자신들의 인명을 최우선하는 전략으로 전투를 했다점이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고 근접전을 최대한 피하고 멀리서 활로 공격하는 전략을 주로했다. 기본적인 전술은 만구다이라는 유인책들이 적을 유인해와 본진이 포위하여 적은 활로 섬멸하는 방식이었다.

 다음 강점은 이들의 빠른 기동력이었다. 몽골군은 조랑말을 이용하여 말이 순발력은 좋지 못했지만 지구력이 우수했다. 이런말로 하루에 수백킬로미터를 진군했다. 거기에 이들은 다른 농경국가와는 다르게 보급부대가 필요치 않았다. 식량을 말린 젖이나 말린 고기를 이용했는데 말린 고기를 물에 풀어 끓여 먹으면 훌륭한 식사가 되었다. 거기에 병사 일인이 수마리의 말을 갖고 다니며 교체하며 탔고, 말이 못쓰게 되면 잡아서 말고기로 사용했기에 웬만하면 보급에 의한 식량문제는 몽골군과 상관이 없었다.

 다음 강점은 흡수력과 합리적 정신과 잔혹함이다. 몽골군은 공성전과 수전에 약했다. 하지만 금나라와 호라즘을 공략하면서 그들의 공성기술을 익혔다. 고려에선 수전을 익힌다. 거기에 몽골군은 인명을 중시하고 오로지 이기는 것만이 우선이기에 상대편을 철저히 도구화한다. 몽골인은 풀을 먹는 사람과 고기를 먹는 사람으로 인간을 분류하고 고기를 먹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풀을 먹는 사람을 천시했는데 농경민이 바로 그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을 마구 학살하였고, 전쟁에 동원해 공성전시 앞장 세웠다. 그들은 화살받이가 되었거나 상대편 공성군의 사기와 체력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했다. 몽골군은 마무리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초원이 근간이기에 점령한 성은 무너뜨리고 풀로 태워 초지화했다. 상대편에겐 항상 항복을 강요하였고, 저항시엔 모두 죽여 항복하는 적들을 많이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약간의 원한이 있거나 본보기가 될 경우엔 항복의 약속을 어기고 모두 학살하는 만행도 더러있었다. 이런 몽골의 사고는 지배적인 종교나 철학 및 문화가 전반적으로 부재하고, 오로지 수적으로 열세인 유목민의 수를 중시하는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다 할 것이 없기에 흡수도 쉬웠을 것이다.

 임진왜란의 3대첩은 진주대첩과 한산도대첩, 행주대첩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 입장에서고 일본입장에서는 우리에겐 가장 뼈아픈 칠천량해전과, 울산성전투, 벽제관 전투가 조선정벌의 3대전투다. 이중 벽제관 전투가 가장 의아한데, 이는 명군에게 일본군의 무서움을 알리고 이로인해 전황을 교착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명군은 초기의 실패를 딛고 이여송이 요동5만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탈환하며 위세를 떨친다. 문제는 그 여세를 몰아 한양을 탈환코자 벽제관까지 정예기병을 이끌고 치달았다는 점이다. 일본군의 유인에 걸려 조총의 집중 사격을 당하여 패전하는데 지휘관만 무려 15명이 전사했다. 하지만 의외로 명군과 일본군의 피해는 비슷한데 막강했던 명군의 기병대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벽제관 전투로 일본군을 명군과 조선군의 추격없이 남부로 피신하여 전력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 전투이며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아 전황이 길어지는 것을 천추의 한으로 기록한다.

 칠천량해전은 임란중 조선수군의 유일한 패배로 일본군은 거의 피해없이 일만에 달하는 조선군을 그야말로 학살한다. 낌새를 눈치채고 탈영한 경상우수사 배설의 12척이 통제사 이순신의 명량해전에서 쓸수 있었던 유일한 전력이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남으로 피신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는다. 당시 일본은 봉건영주가 성을 빼앗기면 패배하는 형태였기에 축성술이 매우 발달해있었다. 조명연합군은 마음먹고 가토 기요마사가 있던 울산왜성을 공격하지만 양측모두 치열한 전투끝에 1만5천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조명연합군이 포위를 풀어 끝이난다. 당시 물부족과 식량부족에 고전한 가토는 임란후 자신의 영지인 구마모토로 돌아가 성을 쌓으며 무려 우물을 12개나 팠다고 한다. 이 전투의 의미는 일본군이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며 히데요시 사후 무사히 퇴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는 점에 있다.

 베트남은 대단한 나라다. 2차대전후 아무것도 없는 무장상황에서 지형지물을 이용한 기습전으로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공산화를 막기 위해 미군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은 무장도 완벽하고 심지어 고지를 차지한데다 숫적으로도 우위였다. 그런 이들은 고지를 파고들어 점령했으며 무기를 분해하여 고지를 올라가 방공포를 설치해 상대의 공군전력도 무력화했다. 프랑스는 2차대전에 참여한 정예들이 일만이나 포로로 잡혔으며 이 큰 저당으로 인해 베트남에서 손을 뗄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가혹한 육로이동으로 일만중 무려 8천이 죽고 만다.

 이후 공산화가 이루어지자 미국은 남베트남을 지원한다. 마음같아선 북베트남을 치고 싶었지만 중국이란 큰 존재가 있기에 어쩌질 못한다. 중국과 인접한 공산국을 치면 어떻게 되는지를 한국전에서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킹만 사건으로 명분을 어거지로 만든 후 북베트남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직접 공격이 아닌 폭격을 감행한다. 전쟁은 북베트남이 공격해오기 전까지 주로 남베트남의 베트콩과 이루어진다. 하지만 미군의 보급로 차단 작전은 실패한다. 북베트남 정보는 보급로로 인근 사회주의 국가들을 경유하여 설정하여 미군이 어찌할 수 없었고, 베트남 내부에서는 정교하고 방대한 땅굴을 이용해 안전했다. 미군은 네이팜탄과 고엽제등으로 짜증나는 정글을 없애려 했지만 열대의 습기찬 정글은 좀처럼 타질 않았다. 밀림속에 감춰진 곡사포로 공중전도 쉽지 않았으며 기관총만 갖고 있는 베트남의 미그기에 미사일로 무장한 팬텀기가 일방적으로 당했다. 워낙 덥고 습한지역이라 열감지 장치가 잘 작동하지 않았고, 적의 후방을 잡기 위해 팬텀기가 크게 선회해야했는데 고장도 잦았다. 미국은 이런 복합적 요인을 감당치 못하고 패전한다. 베트남 전쟁은 기간이 무척 길고 폭격이 무척 잦았음에도 인명피해는 양측합해 200만이 안될 정도로 상대적으로 인명손실이 적었다. 밀림으로 인해 직접전이 적었고, 숨을 만한 곳이 많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이 전쟁외에도 다양한 전쟁들이 재밌게 실려있다. 한국인이 썼음에도 서양의 전투사가 대부분이란게 좀 아쉽다. 한국, 중국, 일본의 국제적이었던 고수, 고당전쟁이나 규모가 컸던 중국왕조들의 전투도 다루었으면 좋지않았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좋은 책이다. 빠르고 재밌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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