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세상을 바꾼 다섯가지 상품이야기 : 소금, 모피, 보석, 향신료 그리고 석유 - 소금, 모피, 보석, 향신료 그리고 석유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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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욕에 대한 생물의 욕심은 끝이 없다. 애초에 우린 채워지지 않는 그릇인게 분명한데, 특히 인간에게는 생존을 위한 의식주 욕구와 더불어 사회적 위치를 과시하여 번식과 생존을 더 유리하게 하는 과시욕이 있기에 사치품에 대한 욕망도 상당하다. 이 책이 다루는 상품은 소금, 모피, 보석, 향신료, 석유다. 모두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지만 이중 생존에 필수품은 소금 하나뿐이다. 물론 석유도 이젠 생존 필수품에 가깝긴하다. 하지만 나머지 모피, 보석, 향신료는 그렇지 않다. 

 필수품이건 사치품이건 이들은 강한 인간의 욕망을 불러왔고, 이 욕망은 자원의 회소성과 지역적 편중성으로 더욱 배가되었다. 구하기 힘든 만큼 더욱 과시가 쉽고, 비쌌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사람들이 목숨걸고 피를 부를 만큼 이를 얻기 위해 별짓을 다했기 때문이다. 다섯가지 필수품이 만들어간 사람들의 역사를 살펴보자.

 

1. 소금

 지금은 지천에 널린게 소금이며 나트륨과다로 문제가 되지만 사실 소금은 생존에 필수품이다. 농경이전엔 육식을 많이 하여 육류의 소금기를 먹었기에 소금은 필수품이 아니었다. 하지만 농경으로 육식이 크게 줄자 소금은 반드시 필요한 물품이 되었다. 즉, 소금의 교역은 농경의 역사와 함께한다는 셈이다.

 현재는 바닷물을 가두어 점차 농도를 올려가며 최종적으로 소금을 얻는 천일제염업이 있지만 과거엔 그런 방법이없었다. 또한 알았다 하더라도 천일 제염업은 강한 바람과 햇살, 드넓은 갯벌을 필요로 하기에 애초에 할수 있는 장소도 드물다. 동아시아에서도 한중일중 한국만이 가능하다.  

 어쨌든 그렇기에 문명의 발달은 소금과 함께했다. 세계 4대문명은 모두 강 하류에서 시작하는데 여기엔 물과 식량과 더불어 소금을 구하기 쉽다는 이점이 작용한다. 동아시아의 홍산문명은 큰 강을 기고 있지 않음에도 염수와 염호를 인근에 갖고 있었기에 발흥이 가능했다고 저자는 본다.

 소금으로 교역을 시작한 것은 우선 유럽의 페니키아인들이다. 그들은 나라의 뒷쪽으로는 높다란 레바논 산맥이 자리하고 자신들의 평야는 협소하여 애초에 바다로 진출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들은 이집트의 소금호수에서 조염을 가져와 이를 물에 놀이고 끓여 최초로 정제염을 만들었다. 유럽의 지중해는 워낙 깊은 바다에 해안이 대부분 절벽이기에 소금생산지가 무척 적었다. 페니키아는 이런 소금의 회소성으로 유럽 각지를 누비며 부강해졌다.

 다음 타자는 베네치아였다. 원래 베네토 지역에 거주하던 이들은 무시무시한 훈족이 쳐들어오자 살기위해 고려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바다로 도망가는 것이었는데 마침 앞바다 갯벌에 섬이 있어 그리로 도망갔고 그렇게 훈족을 피할수 있었다. 무사히 도망쳤다라는 이탈리아 말에서 베네치아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베네치아는 위치가 비잔틴과 슬라브세계, 서방세계와 이슬람세계, 알프스의 여러 협로와 수로를 통해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로 연결되는 천혜의 중계지역이다. 이런 위치를 통해 자신들의 앞바다에서 천일제염업으로 소금을 생산했고 이를 팔았다.

 소금으로 흥한 마지막은 네덜란드다. 네덜란드는 청어산업으로 흥했는데 한 어부가 청어를 쉽게 손질하는 칼을 발명한다. 이 칼로 청어의 손질이 매우 빨라졌고, 보관을 위해 소금이 필요해졌다. 과거엔 어선의 어업시간과 반경이 짧았는데 물고기를 잡아서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모두 썩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어를 잡은후 바로 내장을 손질하고 소금에 절이면 무려 1년이상 보관이 가능했다. 이로 인해 어선들의 조업시간과 활동반경은 매우 넓어졌고, 어획량도 급증한다.

 네덜란드 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바다 정제염을 대거 확보하고 이를 한번 더 정제하여 소금의 질을 엄청나게 올렸다. 그들은 분업화도 시도하여 청어 손질에 각 단계가 있었고 이를 통해 균질품을 생산할수 있어 청어가 매우 인기가 좋았다.

 

2. 모피

 모피는 가죽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옷이다. 쥐부터, 비버, 담비, 사슴, 곰, 너구리등 털이 많은 동물의 가죽을 주로 칭하는데 이 모피는 해당동물의 절명과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의 영토확장을 불러왔다.

 모피는 털가죽동물이 있는 모든곳에서 교역대상이었지만 러시아서 우선 흥했다. 러시아는 1581년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린 후 이반 4세가 모피교역을 목적으로 코사크 용병에 의한 동진을 시작했다. 당시 시베리아에는 고작 인구 20만에 120여개의 부족만이 존재하여 이렇다할 장애물이 없었다. 경제적 동인과 장애물이 없음이 함께 작용하여 하루에 100km2 이라는 놀라운 속도로 동진이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무려 100여년간의 남획으로 시베리아에서 모피가 더이상 구하기 어려워지자 러시아는 남진하여 중국의 모피를 노리게 된다. 이에 청이 긴장하여 조선에 파병을 요청한 것이 나선정벌이다. 임란과 병란 이후 국방을 강화한 조선은 5천이상의 조총병을 갖고 있었는데 이들이 이 때 활약한다. 화력이 당시 러시아군을 앞서 조선은 이들을 쉽게 격멸하였고 당시 러시아인들은 조선인들의 모자를 보고 머리가 큰 녀석들이 무섭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남에서 좌절한 러시아의 모피 욕심은 동으로 이어져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로 향한다. 거기서도 모피가 아작나자 다음은 물개와 바다사자의 차례가 된다.

 모피러시는 미국에서도 이어졌다. 17세기 러시아의 모피가 바닥나자 북미지역이 새로운 공급처로 자리한다. 북미에는 비버가 많았기에 동부의 넓은 숲지역에서 비버사냥이 이어졌고, 인디언들과 네덜란드인들이 교역을 했다. 비버 남획은 심각하여 1720년까지 무려 2백만 마리의 비버가 사라졌고 18세기의 기록을 보면 한 해에 평균 비버 26만 너구리 23만 여우 2만 곰 2만5천등 50만 마리가 넘는 털가죽 동물이 사냥당했다. 특히, 비버는 잡기가 무척 쉬우면 반면 번식력이 낮기에 금방사라지고 만다.

 모피가 동부에서 사라지자 골드러시 마냥 서부러 사람들은 향한다. 서부의 산맥 너머에 모피가 많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하지만 모피가 생각보다 많지 않자 역시 러시아처럼 해달과 바다표범 사냥에 나섰다.

 모피사냥을 현재도 진행중이다. 덴마크는 연간 1200만 마리의 밍크를 사육하며 중국은 1800만 마리에 달한다. 캐나다에서는 한해 털가죽과 오메가 3등을 위해 30여만 마리의 바다표범을 사냥하며 털이 희고 복슬복슬한 새끼의 경우는 사냥꾼이 가죽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산채로 잡아 껍질을 벗긴다고 한다.  

 모피는 아시아에서도 인기였다. 과거 고조선은 모피 무역의 중심지였다. 철기나 청동기 이전엔 모피를 가공할 만한 도구가 마뜩지 않았는데 고조선 인근에서 나는 흑요석이 아주 적합했다. 하지만 흑요석은 화산활동이 강하게 일어난 곳에서만 있었던 것이기에 무척 희귀했고 이로 인해 고조선은 모피와 흑요석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모피 교역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 시대까진 잘 이어지지만 북방을 상실한 고려 이후로는 수입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모피  수입국이 되었으며 이 사치품을 확보하기 위해 매년 막대한 부를 손실하게 되었다. 반면 모피교역을 장악한 이 지역의 야인들이 성장하여 강한 나라들을 세우고 우리와 중국을 위협하게 되었다.

 

3. 보석

보석의 역사는 유대인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본디 보석은 금이나 은에 비해 값어치가 없었는데 모래가루를 이용해 연마하던 것을 유대인들이 물레를 이용한 연마기술을 개발한 후 광채가 살아나자 가치가 폭등한다. 유대인들은 개방적이던 이베리아 반도에 많이 거주하였는데 스페인의 레콩키스타 달성후 추방령이 갑작스레 내려진다. 그들에겐 불과 3개월의 시간이 주어졌는데 당시 스페인 인구의 무려 6.5%가 유대인이었다.

 항상 쫓겨나고 핍박받은 유대이었기에 그들은 언제나 터전을 떠날 준비를 갖추는 습관이 있었다, 바로 재산을 적당히 분할하는 것이었는데 3분의 1은 현금 3분의 1은 보석 3분의 1은 기타 식이었다. 이런 식의 재산분할이 포트폴리오의 유래다. 보석은 그중에서도 환금이 용이하고 이동이 편해 선호대상이었다.

 유대인들은 개종하거나 가까운 포르투갈이나 북아프리카 그리고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네덜란드 벨기에 지역으로 이주한다. 이때부터 벨기에 앤트워프가 보석 산업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한다. 보석중 최고는 다이아몬드인데 희귀하던 이것이 19세기 남아공에서 대규모 광산이 발견된다. 당시 남아공 일대는 네덜란드 출신의 보어인이 자리잡고 있었고, 영국은 다이아몬드를 노려 무려 45만의 군대를 파견한다. 당시 보어인은 인구 50만정도의 병력은 최대 고작7만수준으로 영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영국은 보어전쟁을 일으켜 21만을 수용소에 강제수용하여 2만이 숨졌고 그들의 집과 토지를 강탈했다.

 이런 영국의 무도한 짓거리를 영국의 학자 존 앳킨스 홉슨은 목도하고 돌아와 책을 쓴다. 제국주의는 국가내의 부유층이 사치를 위해 정부의 통치를 강탈해서 외국의 몸에 빨판을 박아 그들의 부를 빼내려고 제국을 팽창시키는 기생적인 사회과정이란 내용을 담은 제국주의론이다. 이 책에서 후진국의 경제가 선진국에 종속된다는 종속이론이 발전하였고, 이는 레닌 이론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학자는 영국에선 인정받지 못했지만 세계대전가지 예언했다고 하니 대단할 따름이다.

 다이아몬드 하면 극악무도한 드비어스 사가 생각난다. 드비어스사 이름의 유래는 의외로 창립자가 아닌 남아공의 가난한 농부이다. 이 형제는 다이아 광산을 판면서 그 대가로 회사이름에 자신들의 이름이 쓰이기를 요구했다니 그것이 유래다. 드비어스는 유대인들의 회사로 이들이 악명이 높은 이유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고가의 독점 정책을 장기간 펼쳤으며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익을 생산지 및 원산지와 전혀 나누지 않고 오히려 그 지역에 피를 부르는 정책만 감행했다는 점이다.

 드비어스는 초기 회장인 세실로즈가 남아공 정계에 진출해 총독이 되면서 법과 정책을 자기 회사에 유리하게 집행하며 힘을 키워간다. 그들은 이를 이용하여 다이아 광산을 독점하고 병합해갔다. 세실 로즈 사후엔 오펜하이머가 회사를 이어받았다. 그는 회사의 막강한 위치를 이용하여 공급을 조절하고 가격 조작으로 약한 경쟁사를 파산위기에 몰아넣은 후  헐값에 강탈하는 수법을 즐겨 사용했다. 대공황은 그에게 기회여서 위기에 몰린 다이아 광산을 매입했고 싼 값에 나오는 전세계 다이아를 헐값에 매집했다. 이후 견고해진 독점적 위치를 이용 고가로 다이아몬드를 공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드비어스의 공급체계는 생산자-드비어스-사이드홀더-소매상으로 이어진다. 드비어스는 유리한 위치를 이용 10캐럿에 고작 15달러의 가격으로 다이아몬드를 생산자로부터 공급받는다. 드비어스는 놀랍게도 판매자를 자신들이 지정하는데 이들이 사이드홀더다. 사이드 홀더로 지정되어 드비어서로부터 다이아를 살수 있게 되면 엄청난 이익을 얻으므로 사이드 홀더는 드비어스에게 아주 비싸게 다이아를 구매한 후 이를 더욱 비싸게 소매상으로 넘기며 소매상은 이를 더욱 비싸게 소비자에 판매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 15달러짜리 10캐럿 다이아는 무려 12만 5천달러에 이르게 된다. 과정마다 10배이상의 폭리를 취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러시아와 결탁한 레비에프의 등장으로 드비어스의 위치는 예전만 못하다. 한때 그들의 사이드 홀더중 하나에 불과했던 레비에프는 러시아의 다이아 광산을 이용 공급을 시작했다. 그는 아프리카 국가들에 접근해 아프리카 생산지에서 원석 가공을 제안하여 그들에게 일자리와 부를 나눠주겠다고 접근하여 호응을 얻어 시장을 잠식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최근엔 다이아매장이 아닌 인터넷을 통한 구매 등 공급처가 다양화 되면서 다이아 가격은 다소 하락하는 추세라고 한다.

 

4. 향신료

염장은 식품의 보존에 그만이었지만 배부른 유럽의 중세귀족들은 계속된 염장식품에 싫증이났다. 그들은 신선한 스테이크를 선호했는데 향신료를 뿌려 맛과 고기 비린내를 제거하고 보관도 오래가는 스테이크를 좋아했다. 문제는 향신료가 열대성 작물이라 유럽에선 전혀 재배가 안된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몽골제국의 붕괴로 안정적인 교역루트가 이슬람에 막히자 유럽의 향신료 가격은 폭등한다. 이 경제적 요인은 대서양에 인접했으며 이제 막 통일에 성공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모험을 감행하게 한다. 이들은 향신료의 주산지인 인도로 향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포르투갈은 동으로 스페인은 서로 향했다는 점이다. 아메리카의 존재를 몰랐기에 이 승부를 포르투갈의 승리로 끝난다. 동남아와 인도 일부를 차지한 포르트갈은 중국남부 까지 진출했으며 해적소탕을 미끼로 건 포르투갈의 제안에 중국도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포르투갈은 요즘 회자되는 이란의 호르모즈 해협인근을 차지했는데 이로 인해 무역풍에 구애받지 않고 거래가 가능해져 거래의 회전수를 획기적으로 높여 막대한 이익을 누릴수 있었다.

 포르투갈의 뒤를 이은 것은 네덜란드와 영국이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영국은 인도를 위주로 교역했는데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만들고 아시아 요역을 주도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막대한 권한을 이회사에 부여했는데 해상교역권, 식민지 개척 및 관리권, 관리임명권, 전쟁선포권, 치외법권등 사실상 국가나 마찬가지의 권한을 부여한다. 이를 통해 동인도회사는 빠른 타이밍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단과 행동이 가능했다.

 영국은 인도에서는 모직물을 중국에선 차를 교역했다. 차는 녹차, 우롱차, 홍차로 분류되는데 차 잎을 따 온도, 습도, 시간을 잘 맞추면 차 잎이 효소가 산화작용으로 발효되어 검게변하는데 이것이 홍차다. 반쯤 발효되면 우롱차가 된다. 영국인이 차를 즐기게 된 것은 과거 냉장고가 없이 차를 배로 운반하다보니 더운 열대에서 차 잎이 자연히 홍차가 되어서 그렇다. 영국 출신으로 홍차를 즐기던 미국인들은 보스턴 차사건 이후 커피로 돌아섰는데 그래서 아직도 영국은 차문화가 미국은 커피문화가 발달했다.

 

5. 석유

 첨단 산업이 발흥하고 4차산업혁명시대를 눈앞에 두며 석유는 과거의 산업 느낌을 갖게 만든다. 하지만 2011년 기준 세계 5대 기업중 4개가 정유회사이며 이들의 순이익은 매출의 무려 10%이상일정도로 석유의 위력은 아직 건재하며 지배적인게 사실이다.

 석유는 1855년 조지 미쉘이 석유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성분분석을 의뢰하며 발흥한다. 보고서 결과 석유는 다양한 물질로 분류가 가능함이 밝혀졌고, 값싼 공정으로 당시 고래 기름을 활용하던 램프에 사용할 기름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해보였다. 이후 불과 15년뒤 사용처가 아직 불분명한 석유에 사람들이 몰려 무려 75개의 유정이 개발된다. 검은 러시의 시작이었다.

 고래가 남획되어 개체수가 줄자 석유는 더욱 중요해졌다. 램프는 생활필수품이 되었는데 석탄을 활용하는 방법도 고래 기름을 대체할 수 있었다. 석탄을 증류하여 조명용 가스를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발 우려와 가스관이 필요해 가정용으론 사용이 힘든 점든 애로사항이 많았다. 하지만 석유에서 나온 등유는 폭발위험과 가스관, 소음이 모두 발생하지 않았다.

 초기엔 지금은 오히려 가치가 낮은 등유만이 석유의 증류과정에서 필요했다. 나머지 휘발유나 경유, 찌꺼기는 모두 버려졌다. 특히 휘발유는 불이 너무 쉽게 붙고 폭발위험이 높아 처치곤란의 위험물질이었다.

 석유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록펠러다. 록펠러는 발상이 남들과 달라 유정개발보다는 석유의 정유와 운송이 돈이 된다고 보았다. 그는 정유량이 매일 달라 운송에 애를 먹던 철도회사에 일정량을 운송하는 조건으로 싼 가격에 계약을 체결해 경쟁자들을 운송비에서 압도했다.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다른 회사들을 인수합병하기 시작했고, 독점적 지위를 구축한다. 그는 독점에 대한 생각도 남들과 달라 독점이 시작되면 규모의 경제가 가능해지면 양질의 제품을 균질하면서도 싼 가격에 공급할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의 회사 이름은 이런 철학을 반영하듯 스탠더드 오일이었고 가격도 독점적 지위 구축후 80%가 내려갔다. 물론 이윤은 그가 다 먹지만 말이다.

 록펠러는 석유가 당시 위스키나 포도주 통에 담겨 운반되어 이송중 휘발되거나 새는 경우가 만았던 것을 최초로 철제탱크를 개발하여 운송하는 생각도 해냈다.

 이렇게 새로운 연료로 등장한 석유를 모든 나라가 반긴 것은 아니었다. 석탄과 다르게 석유는 지역적 편중성이 컸다. 그러다 보니 수입을 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지금도 그렇지만 안정적인 교역로가 필요했다. 또한 영국이나 독일 같이 석탄이 풍부한 국가는 자국에 관련 산업과 일자리가 많이 구축되었기에 석유로의 전환이 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석탄을 사용한 증기선은 무려 10km에서 적의 눈에 띄는등 문제가 많았기에 결국 영국과 독일도 석유로의 전환을 피하지 못한다.

 잘나가던 스탠더드 오일은 반트러스트법에 의거 1911년 무려 34개사로 강제분할된다. 하지만 이들은 다시 세력을 규합해 미국에는 엑슨과 모빌, 쉐브론, 텍사코, 걸프등의 정유사가 힘을 키웠고, 영국엔 BP, 로열 더치쉘이 있었다. 이 7개의 회사를 세븐시스터즈라고 하며 이들은 1975년 OPEC가 등장하기 전가지 세계 석유의 공급을 독점하며 균일 가격에 석유를 공급하며 큰 이윤을 누려왔다.

 

-오일쇼크음모론

1970년대 제4차 중동전쟁으로 발발한 오일쇼크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각국경제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은 마이너스로 치달았는데 한국의 마이너스 경제성장은 이 시기와 아이엠에프시기, 서브프라임모기지론사태 시기 이 세시기 뿐이다. 하여튼 당시 미국은 재정적자와 달러와의 가치 하락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미국은 유가상승이 절실했는데 유가가 상승하며 석유의 결제화폐인 달러의 수요가 늘어나고 이를 통해 달러가치 상승과 재정적자의 감소 두마리 토끼를 한방에 잡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영국 역시 유가상승이 필요했다. 당시 영국은 북해유전을 발견했는데 시추 비용이 만만치 않아 당시의 유가로는 채산성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영국은 3배정도 유가 상승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세븐시스터즈의 비밀회동이 그해 5월에 열렸는데 공교롭게도 불과 5개월후 제 4차 중동전쟁이 발발한다. 세계는 미증유의 오일쇼크에 빠졌고, 유가는 그들의 기대 이상인 4배로 상승한다. 유가의 상승으로 미국과 영국, 세븐시스터즈는 노래를 불렀지만 다른 나라들은 막대한 재정적자와 물가상승에 시달리게 된다. 이 사건으로 빈국에서 부국으로 부가 대거이동했는데 경제위기는 항상 이런식으로 진행된다.

 

-아프간 침공

미국은 석유산유국이지만 소비량이 워낙 많아 세계패권의 유지를 위해 석유공급이 늘 필요했다. 중동다음으로 전략적으로 미국에 중요한 지역은 그래서 카스피해와 중앙아시아가 된다. 이 지역의 유전은 싱싱한 새로 발견한 유전이었고 해저시추임에도 채산성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스피해에는 무려 2천억 배럴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배럴당 100달러로 계산해도 무려 20조 달러가 되는 금액이다. 이를 미국이 놓칠리 없는데 문제는 이 지역에 다양한 나라가 얽혔다는 것이다.

 카스피해 주변엔 이란,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카자흐, 우즈벡, 타지키스탄이 있다. 이 지역엔 미국의 적인 러시아, 중국이 인접해서 카스피해의 석유를 이들이 차지할 우려가 있었다. 미국으로선 어떻게든 카스피해의 석유를 인도양쪽으로 끌어오는게 필요했으며 그 과정에서 중요한 국가가 아프간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초기 탈레반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그들과 협상한다. 하지만 탈레반의 조건을 수용하기 어려웠던 미국은 협상 결렬후 우리가 다 아는 거짓 명분으로 아프간을 침공한다.

 

- 이라크와 이란

두차례나 전쟁을 치루고 지도자인 사담후세인 마저 제거한 미국은 지금으로선 믿기 어렵지만 오래도록 이라크와 친했다. 이는 이라크를 완충지대로 삼아 이란의 위협으로부터 석유공급선을 안정화시키고 우방 이스라엘의 안보확보를 위함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를 지원한다. 하지만 전쟁후, 사담이 중동의 패자를 노리며 쿠웨이트를 침공해 석유공급선을 위협하자 전쟁을 개시한다. 이 전쟁은 한번 더 이어지게 되는데 이땐 사담이 감히 석유의 결제를 달러화에서 유로화로 바꾼 것에서 야기된다. 결국 미국은 한번의 전쟁을 더 치루고 사담을 제거한다.

 2차대전후 영국은 이란의 민주정권인 모사데크 정권의 석유국유화로 인해 갈등한다. 미국와 영국은 모사데크와 갈등관계였던 팔레비2세를 지원해 백색혁명으로 이란에 친미국가를 세운다.하지만 이란 전통세력의 반발이 계속되어 팔레비 왕조는 고작 20년후 이슬람혁명으로 전복된다.

 

-셰일가스

셰일가스는 수직으로 석유층을 파내려고 수평으로 강한 수압으로 지층을 분쇄하여 석유를 채취하는 방식이다. 과거 채산성이 없던 것이 기술이 개발되거 유가가 상승하며 경제력이 생겨났다. 미국은 셰일가스의 등장으로 최대의 석유수입국에서 더욱 막강한 산유국으로 거듭나게 된다. 셰일가스로 무려 400만 배럴의 자체 수요를 충당하게 되었는데 이는 OPEC에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갑작스런 400만 배럴의 수출감소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OPEC의 단합은 붕괴되고 2010년대에 끊임없이 오르던 유가는 하락세로 돌아서게 된다. 셰일가스는 오일쇼크 못지 않은 이득을 미국에 챙겨주었는데 우선 정적인 러시아와 베네주엘라가 몰락한다. 남미의 반미 세력의 중심이 차베스의 베네주엘라는 차베스의 사망과 유가폭락후 지금의 파탄에 이르렀으며 승승장구하던 러시아의 경제사정도 상당히 나빠지게 된다.

 반면 미국은 수입의 대체로 가격경쟁력이 살아나 제조업이 살아나게 되고, 달러 강세가 시작되었으며 민간소비가 진작되어 최상위 선진국임에도 무려 3%대의 경제성장률을 유가하락후 수년간 유지하게 되었다. 저유가는 한국에도 호재였다. 달러가 강세로 돌아서며 아베노믹스로 인한 엔화 약세의 불리한 정황이 호전되었고, 수출경쟁력이 강화되었으며 저금리가 유지되어 인플레이션 통제가 가능했다. 또한 수출경쟁력 강화와 유가수입으로 인한 적자가 대폭 개선되어 큰 폭의 흑자를 수년간 기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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