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선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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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라면 내가 어렸을 적, 좀 살림이 나아진 우리나라 신혼부부들이 신혼여행을 가던 곳. 그리고 값싸고 맛있는 귤이 마구 나는 곳, 하루방의 땅. 북한과 대비되어 남한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과 백록담이 있는 곳이었다. 최근엔 제주가 유네스코 자연문화 유산에 등재되었고, 올레길도 유명해지고 제주자치도의 정책으로 중국인들의 부동산투자가 몰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는등 여러모로 과거보다 느낌이 향상된 곳이다. 이젠 뭍사람들도 제주도에 한번 가서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모기업은 본사를 십년정도 전에 제주로 옮기기도 했다.

 과거 교과서에서 여순사건과 함께 또 하나의 반란으로 배웠던 것이 제주 4.3이다. 이 두사건은 마치 샌드위치 같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사건이기도 했고, 한국전쟁과 일제강점기에서의 해방이라는 굵직한 사건 사이에 일어났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또한 광주민주화운동이나 4.19혁명등의 굵직한 민주화운동에 비해 가치나 피해에 대한 인식도 희박한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제주4.3이 국가기념일로 인정된 2014년에 발행되었다. 인정받은 시기가 자못 의외인데(박통의 시기가 아닌가!) 인정은 했어도 제대로 된 지원은 없어서인지 제주일대에서 발굴중이던 4.3의 희생자 발굴은 국가 예산 지원이 중단되 10년째 소득이 없었다고 한다.(정권이 제대로 돌아온 지금에야 다시 재개, 그리고 대통령은 노통에 이어 다시금 4.3에 대해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책 내용으로 돌아오면 4.3의 진행은 이렇다. 주지하다시피 해방정국에서 한국을 담당한 맥아더와 하지 중장은 남한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점령한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한국에는 이미 일본으로부터 많은 실권을 넘겨받은 건국준비위원회가 있었는데 처음 미군정은 이들과 협력한다. 하지만 공산주의와의 대결이 본격화하면서 건준은 점차 친일파를 기반으로한 우파에 힘을 실어주는 미군정에 의해 차츰 무력화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배운 사람들의 입장에서였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일반 인민들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먹고 사는 것과 다시는 힘든 외세의 침입따윈 없었으면 하는 것, 그리고 우리민족의 자주 국가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1947년 제주도에선 이 인민들의 바램과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당시 남한에서는 일본이나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들로 인해 인구가 전체적으로 급증했다. 반면 흉년으로 공급은 준데 비해 인구가 늘어 수요는 많아져 남한 전역에서의 전체적인 식량난이 일어나게 되는데 미군정은 이에 제주도에서 식량의 공출을 실행한 것이다. 제주라고 식량 사정이 좋을리는 없었고,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은 제주역시 많았기에 집단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제주사람들의 눈엔 미국의 공출 역시 지긋지긋한 일본의 공출과 비슷하네 느껴졌을 것이다. 거기에 남한 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는 이야기까지 돌자 47년 3월 1일을 맞이하여 제주 사람들은 이에 항의하는 집회를 연다.

 하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허가 까지 미리 받은 이 시위에 관은 과잉대응하였고, 마치 광주의 일처럼 한 아이가 경찰의 말에 밟혀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사고에 대한 해당 경찰의 대응은 마치 뺑소니범과 같아서 격분한 제주사람들이 경찰을 공격하고, 다른 경찰들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시작해 주민 6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고 만다.

 격분한 제주 사람들은 그해 3월 10일 민관총파업에 돌입한다. 하지만 끝까지 협상을 모르는 정부는 대규모 경찰병력을 뭍에서 파견하고 제주도지사까지 강경파로 바꾼다. 긴장이 완화되지 않은 체로 해는 1948년으로 넘어갔으며 심지어 취조를 받던 학생들이 경찰에 의해 고문치사하는 사건

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마침내 제주 남로당을 중심으로 4.3일 무장봉기가 발생한다.

 초기 전투가 빈발했지만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지위관 김달삼의 노력으로 평화 협상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불과 닷새만에 오라리에서 방화사건이 일어나면서 전투는 재개된다. 48년은 이승만정권에 의한 남한 단독정부를 구성하는 시기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는데 제주는 4.3사건으로 국회의원 선거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다.(그래서 애초 200명으로 계획했던 우리나라 제헌국회는 198명으로 시작한다) 때문에 미국과 이승만은 제주 사건에 민감하고 강경하게 반응하게 된다.

 전투 재개후, 파견된 지휘관 송요찬은 초법적인 지시를 내리는데 제주 해안선 5km 이상 지역에 통행금지를 내리고 이를 어길시 이유불문하고 총살에 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무장대가 산간을 근거지로 했기 때문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제주에는 많은 중산간 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명령은 중산간지역을 기반으로 수많은 학살이 일어나는 근원이 되고 많다. 제주민들 역시 이 명령에 따르기 어려웠는데 가축이나 논밭등 생업이 있는 마을을 떠나기 어려운 면도 있었고, 명령을 따랐음에도 학살당하는 경우가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군경에는 친일 부역자가 많아서였는지 그들의 학살과정은 일제의 그것과 유사했으면 상당히 잔혹했다. 비교적 젊은 나이의 남자면 위험인자로 간주하여 학살하였고, 마을이나 집에 남자가 없으면 무장대에 합류한 것으로 간주해 집안 사람들을 학살했다. 끌고간 이들은 무장대에 협력한 사람으로 간주해 사라진 가족의 행방이나 무장대에 협력한 사람을 말할때까지 잔혹하게 고문했다. 이 고문에 죽어나가거나 불구가 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고문에 못이겨 아무 이름이나 말한 경우도 많았다.

 중산간 사람들은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굴에 숨기 시작했다. 굴에 숨은 사람들은 토벌대에 발각될까 깊이 숨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막다가 아이가 질식사하기도 했고, 토벌대가 굴을 찾아내면 더 깊이 들어갔다 길을 잃어 죽기도 했다. 토벌대는 사람들이 나오도록 굴에 불을 피웠고, 사람들은 질식사하거나 나와서 학살당했다. 학살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아, 학살당한 시체사이에서 나온 한살 배기 아이의 다리를 잡고 현무암덩어리에 패대기 치기도 했으며 임산부를 죽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끔찍한 학살은 49년이 되어서야 잦아들기 시작했고, 국회의원 두명이 선출되면서 끝을 보게 된다. 하지만 살아남은 수많은 사람들은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관련자로 지목된 사람은 한국전쟁 동란중 관리대상으로 다시 학살되었다. 학살기간중 상당수가 기껏 탈출했던 일본으로 다시 밀항하였는데 학살의 정도가 어느정도였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관련자로 연좌되거나 찍힌 제주청년들이 살기위해 한국전쟁 기간 중 그 어느지역보다 자원입대 성향이 강했다는 것이다. 이도저도 아닌바에 강제로 한쪽으로 찍혀 학살당하기보단 차라리 군인이 되는 것이 가족과 자신에게 더욱 안전한 것임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관광지인 한라산은 48년이후 금산조치 되었다가 6년후인 54년에야 다시 입산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4.3은 이승만이 쫓겨난 1960년에야 다시 회자되었다가 박정희와 군사정권에 의해 1987년이 후까지 기나긴 침묵을 맡게 된다. 물론 몇몇 사람들이 일본에서 책을 내고, 용기있게 소설을 내기도 했다.(그 대가로 안기부에 끌려가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이와 같은 책은 그 분들의 소산일 것이다.

 책 말미에는 제주4.3과 관련한 제주관광루트가 나온다. 아름다운 제주를 방문하여 이런 루트로 관광해보는 것오 아픈 역사를 잊지 않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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