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남 박씨의 본관인 潘南은 나주의 潘南面이다. 
인물로는 박상충, 박은, 박세채, 박세당, 박태보, 박지원, 박규수, 박영효, 박경리등이 있다. 
모두 조선의 역사에 일장당관의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라 할수있다. 

 박 ㅇ 서(緖), 박찬(贊) ㅇ  , 박 ㅇ 雨(우)의 돌림자를 를 쓴다면 
반남이 본관일 확률이 높다. 
박항서, 박찬호, 박찬숙, 박찬욱 등 익숙한 현대의 인물들이 이에 해당하는 예라 하겠다.

 
어째든,
숙종이 몸소 반남 박씨를 충신의 가문이라 칭하고 박태보공을 정경대부로 추증했던만큼, 
반남 박씨는 충절의 피가 흐르는 집안인 셈이다. 
그런 반남 박씨의 후손 중 특기할 만한 인물이 하나 있으니 
바로 '기서(琦緖)'이다.
박항서와 같은 항렬(반남 박 25세손)의 박기서는 1996년 당시 평범한 48세의 버스 운전기사였다. 
그러던 그가 그해 가을, 미리 준비해간 몽둥이로 어떤 사람을 타살시키는 살인을 저지른다. 

 그런데 박기서에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연달아 벌어진다.
박기서는 살인죄로 1심에서 8년 구형에 5년형을 선고받았고, 
최종심에서 3년형으로 결정된다. 

 살인죄가 3년형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애초에 살인을 계획한 범죄 인데도 말이다.
박기서는 거사를 결심하고 40cm의 몽둥이를 손수 깍아 '정의봉(正義奉)'이라는 이름을 써 넣었다. 
사전 답사를 마친 후, 가택에 침입하여 그 부인을 묶어놓고는 누워있던 79세의 노인을 몽둥이로 살해했고 
그 사실을 자백했다.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범죄가 확실했던 것이다.

 그런데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은 98년 3.1절 사면대상에 해당되어 1년 5개월만에 출소하는 이례없는 놀라운 상황이 벌어진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재판 중 그의 변호사는 '박기서는 무죄다!!!' 라고 주장했고, 청중들도 무죄라고 소리를 크게 질렀다는 점이다.
박기서가 투옥되자 각계 단체들과 개인들이 격려금과 편지를 보내왔다. 구명위원회도 생겨났는데, 이에 서명한 인사들은 9천명에 달했다.

 
뜬 소문에는 사건담당 형사가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이라 말하고 수갑을 채우지도 않고 연행했다고도 전해졌다. 
( 에이, 설마..... )

어째든, 
익명의 누군가는 투옥된 박기서에게 매달 100만원을 보내왔다. 
출소 후에도 박기서는 일자리와 집등을 주변인들로부터 제공받았다고도 전해진다.
출소 후, 정의봉도 돌려받았다. 
아니, 살인의 증거물을 돌려받는 이런 일이 다있다니....

 그 후 박기서는 택시운전사가 되었고 아마도 현재도 택시운전을 계속하고 있을것으로 추정된다.
그럼, 대체 박기서는 누구를? 왜? 죽였던 것일까.

(물론 검색해보면 다 나오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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