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반양장)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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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는 막상 책의 두께가 독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짖누른다. 많은 독자들에게 곰브리치의 힘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는 책이다. 그러나 서양 미술에 정녕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라면 필독서요 그 가치를 논하기 힘들만큼 훌륭한 책이라 정평이 나있는 양질의 도서이기도 하다. 

교양 철학 시간의 어느 교수님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수강생들의 대답은 각기 다를 뿐 아니라 흥미로운 답변들이 쏟아졌다. 교수님은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넥타이를 맨다거나 술을 마신다거나 결정적으로 인간은 철학을 한다는 것이 차이점이라 생각하신다고 했다. 

이는 분명히 일리가 있는 구별법이다. 인간은 철학을 하므로 동물과 구별된다. 그러나 이 외에도 추가할 수 있는 항목이 있다면 인간은 예술을 한다는 점을 보태고 싶다. 

인간은 예술을 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맞는 말이다. 이 명제를 다르게 표현해본다면 '예술을 하지 않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다'라고 앞서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명제를 역으로 할 때 반드시 정답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는 동양인인 나에게는 true가 아니다. 꼭 철학을 해야만, 예술을 해야만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학문적인 차원의 견해 일 뿐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늘 철학을 하고 있다는 것 또한 타당한 명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매사에 결정을 해야하는 순간이 오고 그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자신만의 철학, 혹은 가치관임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학문적인 사유와 철학을 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 철학이 자신의 판단에 준거가 되어준다는 것은 지당한 말씀. 그렇다면 예술은 어떠한가.  

예술은 일생을 두고 알지 못해도 좋다. 예슬과 접하지 않는다고해서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예술은 인간적인 삶을 한층 더 풍요롭게 한다는 것 또한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풍요로운 인생은 재산이 많다고 일궈 낼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요 배만 부른 인생을 풍요롭다고 말할 수는 결코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크라테스는 왜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인간이기를 소망했던가. 

 비록 배는 고플지언정 정신적 풍요로움의 가치를 인생의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예술 역시 그와 다를 바가 없다. 설사 부유한 인생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예술과 거리를 가까이 두는 것이 풍요로운 인생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음악도 예외는 아니다. 

어느 한 대학생은 학교에서 서양 미술사를 수강해야 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서양 미술사는 그 학생에게는 매우 비호감 과목에 해당한다고 한다.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 학생은 서양 미술사 강의를 통하여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도서관에서 만날 수도 있다. 싫어하는 과목의 학점을 위해서 곰브리치를 만나 그의 저술을 따라 읽어간다면 아마도 그 학생의 인생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우연은 때로 생각지도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대학생 시절은 분야를 구별하지 않고 접해도 좋은 시기이다. 입맞에 맞는 편식을 할 시기는 절대로 아니다. 다양하고 많은 분야를 접하고 그 가치를 알며 조금 더 깊이 나아간다면 인생은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동양의 것이든 서양의 것이든 미술을 알고 지내다보면 그 이름도 유명한 예술가들의 전시회에 가는 것이 그 얼마나 부질없는 짖인지 깨닫게된다. 작품 하나만으로도 몇 권의 책으로 저술 될 수 있는 가치를 가진 예술품들을 단지 몇 분만에 휙~ 돌아보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사전에 철저한 연구와 공부가 전제된 관람의 경우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자신이 그토록 감동하며 읽고 그 의미를 부여한 그림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감상한다면 말로는 다 못할 감동을 선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수십만이 다녀갔다는 전시회에서 과연 이러한 감상이 그 얼마나 있었을 것인가. 대부분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저 그 유명하다는 작가의 작품을 한 번 구경했다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일반적인 관람 문화인 것이 현실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어느 분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다면 작품을 잘 알지는 못하더라도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는 것도 의미가 없냐고 물으신다. 큐레이터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은 물론 유익한 일이다. 모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한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큐레이터의 요약 설명이 가지는 문제는 마치 장편 소설의 요약본을 앍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직접 읽지 않은 소설의 요약은 물론 모르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다. 그러나 그 작품이 주는 감동과 가치를 깨닫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작품의 요약본으로 작품을 이해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에 대한 줄거리와 감상을 이미 읽은 누군가에게 전해들었다고 하자. 파리대왕은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들의 배가 좌초되어 무인도에 상륙하면서 발생하는 인간의 본성과 추악함을  적나나하게 보여주는 책이라는 설명을 들어서 알게되겠지만 그 소설이 가지는 구성과 작품성을 감지하기는 이미 어려움이 있다. 작가의 문체가 주는 질감도 느끼지 못할 것이고 각 주인공들의 갈등과 해법에서 오는 그들만의 인간성과 가치관을 발경하기란 요원하기만 하다. 작품을 읽지 않은 것은 읽지 않은 것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작가가 소설을 통해서 전달하려고 하는 핵심을 놓치기 쉽다.  

극한의 상황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추악함과 야수적인 본성을 가진 젊은이들은 어른들이 구원을 해줄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전달하는 소설이라는 점을 알게되었다고 하자. 그러나 작가의 작품을 직접 읽어본 사람은 저자의 심오한 목소리에 한 발 더 깊이 나아 갈 수가 있다. 윌리엄 골딩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러하다. 어린 청소년들의 탈선과 비행 그리고 그들의 위험한  상황을 어른들이 구원해줄 수 있지만 과연 실제로 이러한 본능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의 기성새대를 과연 누가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궁극의 의문을 던지고 있고 그에 대한 인류의 자성을 촉구하는 강력한 미시지를 담고 있은 소설이 바로 파리대왕이라는 것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있지 않을까. 이러한 현상이 바로 작품을 연구하고 공부하며 감상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확연한 차이점이다.     

예술은 그 작품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감동을 받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작품에 관한 가능한 많은 것을 알면 더 좋다. 작품 관련 역사를 아는 것도 당연히 이에 해당한다. 작품을 읽지 않은 상태로는 자신의 정신적 풍요로움을 기르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비록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곰브리치는 서양의 미술에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 만족을 주는 책이다. 물론 이에 버금가는 또 다른 저자의 책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서양 미술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 가장 선호하며 그치를 인정받고 있는 책임에는 분명하다는 것이 글의 취지일 뿐이다.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는 독자들의 인생을 더더욱 풍요롭게하는데 크게 공헌해 줄 필독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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