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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한글역주 - 도올 선생의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1년 7월
평점 :
중용을 공부해보겠다고 덤벼든지 6개월이 지났지만 텍스트를 읽으면 읽을수록 중용에 대한 리뷰를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저 욕심에 중용의 텍스트를 싣고 있는 책만 여러 권 가진 꼴이 되고 말았다. 명심보감을 비롯 논어, 맹자, 대학등의 가르침을 깨달은 후에 중용의 가르침을 받으라 전하는 말이 있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중용의 가르침에 대해 언급한다는 자체가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 듯 하다.
‘동양의 고전은 모든 텍스트를 암기하지 않고 논한다면 그 것이야말로 큰 글을 도둑질을 하는 것’이라고 말해준 학문이 깊은 지인의 말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는 중용을 대하는 마음을 더 무겁게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결코 중용을 가벼운 마음으로 대하지 말라는 뜻 이렸다. 하여 중용의 모든 텍스트를 암기하기 시작했지만 머리가 나쁜 탓에 그만 장구를 거듭해 갈수록 어리버리하고 만다.
이렇듯 감당하기 힘든 중용의 리뷰를 적을 자격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 사람의 독자라도 더 중용의 큰 가르침을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는 심정으로 리뷰를 적는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중용의 리뷰는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중용의 가르침 중 학생들을 대하는 한 사람으로 매우 귀감이 되는 구절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할까한다. 중용의 첫 장구는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라는 글로 시작한다. 첫 구절의 강렬한 인상도 인상이겠지만 지금껏 해온 일과 관계가 있는 교(敎)라는 글이 그 얼마나 무게감이 있는 말인지 깨닫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중용은 위의 15글자를 통하여 性, 道, 敎를 설명하고 있다. 이 중에서 나는 교(敎)라는 말을 깊이 새기고자 한다. 하여 敎에 중점을 두다보니 장구의 시작을 거꾸로 이해할 수 밖에는 없다. 중용의 교(敎)라는 말은 첫 장구인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라는 데서 처음 등장하는 말이다. 이는 ‘道를 닦으며 따르는 것 그것을 일컬어 敎라 한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구절의 뜻으로 보건대 그 敎를 이해하기 위해서 道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가 그것 인데 이는 ‘性을 따르는 것 그것을 일컬어 道라 한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또 性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 그것으로 이는 ‘天이 命하는 것 그 것을 일컬어 性이라 한다’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天이란 우주의 이치 혹은 섭리로 이해하면 될 듯 싶다.
性
그렇다면 天이 命하는 性이란 무엇인가... 이는 모든 자연 속에 존재하는 실체들 각각의 성질을 뜻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근 EBS에서 황제 펭귄에 대한 다큐를 방영한 적이 있다. 영하 5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서 그들은 꼼짝하지 않고 알을 품어 부화시키고 어린 새끼를 키우는 수고로움을 전혀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이 알을 품기 시작하여 새끼로 자라게 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은 너무나도 눈물겹고 고달픈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아마 방송을 보신 분들은 황제 펭귄에게 새끼를 키운다는 것이 그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알을 낳자마자 어미는 아빠 펭귄에게 알을 건네고 먼 바다로 나가 음식을 섭취하고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아빠 펭귄과 교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빠 펭귄은 엄마 펭귄이 돌아오는 그 날까지 무려 4개월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꼼짝도 하지 않고 알을 품는다. 음식물은 전혀 먹을 수가 없다. 아차 실수하여 알을 놓치기라도 하면 영하 50도의 강력한 추위속에서 알은 순식간에 얼어버리고 만다. 그러면 펭귄들은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알을 다시 품어보겠다고 기를 쓴다. 어디 이 뿐인가. 새끼를 또 아차 실수하여 놓치는 경우도 있다. 이 역시 순식간에 얼어버린다. 차가운 시신이 되어버린 새끼를 어미는 품겠다고 또 그렇게 애닯아 한다.
어미가 먹이를 충분히 먹고 돌아오면 아빠 펭귄이 바다로 나가 음식을 섭취하고 돌아온다. 그 거리는 무려 100km가 넘는다. 일정 기간을 넘기면 아기 펭귄은 아사하고 만다. 엄마가 토해내는 음식물이 바닥이 나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펭귄들은 한계 시간대를 넘기지 않고 돌아온다. 그들에게 시계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황제 펭귄은 그토록 연속된 시련의 행위를 왜 마다하지 않는 것을까...바로 天이 命한 그 性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이치는 황제 펭귄에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성질을 부여한 것이다. 어쩌면 펭귄이 그런 삶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선택 마 저도 추호의 어김도 없는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性 이기 때문이다. 뜻이 그러하다면 주희가 그 性에 주석을 달기를, "性은 곧 理를 뜻하는 말이다"라고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는 깊은 의문이 들 뿐이다.
道
‘道를 道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道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기는 하다. 물론 이는 도가인 노자의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유가의 중용에서는 분명히 道를 설명하고 있다.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가 바로 그것이다. 즉 天이 命한 그 性을 따르는 것이 바로 道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황제 펭귄은 도를 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어진 性을 매우 잘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에게 도란 무엇인가를 말할 차례이다. 자연의 한 존재인 펭귄에게 性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그에 합당한 性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도 역시 자식을 낳고 교육시키며 기른다. 뿐만 아니라 가족 뿐 아니라 타인을 사랑하고 도우며 中과 和를 이루려 노력하는 것이 인간이다. 공자가 말했다시피 인간은 仁을 행해야 한다. 자식을 사랑함에 애틋하고 타인을 사랑함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어야 한다. 세상의 和를 이루는 것이 인간이 갈 길인 것이다. 그 길에는 仁, 義, 禮, 知, 信이 있다. 이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敎
비로소 敎라는 말이 나온다.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가 그것이다. 결국 인간이 따라야 할 그 本性에 맞는 길을 가는 것 道이고 그 道를 닦으며 따르는 것이 바로 敎인 것이다. 그렇다면 敎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敎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의 敎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중용의 첫 장구를 공부한 사람에게 敎란 인간 본연의 性을 충실히 따르고 행하며 갈고 닦는 것이 바로 敎인 것이다.
중요은 道 다음에 敎를 놓고 있다. 이 얼마나 敎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던가... 참된 敎를 이토록 의미심장하게 가르치는 고전을 또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敎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할 것만 같다. 교라는 말 속에는 엄중하고도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심연의 지혜를 가진 뜻이 담겨있으니 그 말의 아득함을 어찌 감당해야 한단 말인가...
요즘 학교 내의 교권이 추락했다는 말이 최근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다. 敎의 權이 추락했다는 말은 敎에 權이라는 껍질을 하나 입혔기 때문에 생긴 말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중용에서 말하는 敎는 결코 추락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엄중함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말은 아닐런지...중용에서 가르치는 敎를 깨닫는다면 교권은 반드시 바로 설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