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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위로: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 (네이버 국어사전)
사는 게 뭐 별거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주변을 둘러봐도 그렇고, 심지어 유명한 작가가 썼다는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도 그렇게 그렇게 살아간다.
이 책은 내게 한장의 음반 같은 책이다.
보통 책은 첫 페이지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가지만, 음반은 필 꽂히는 것만 무한반복하여 듣는다.
처음 intro가 나오는 것부터가 그렇다.
음반을 생각하고 설렁설렁 읽어 넘긴다.
그런데 웬걸, 처음부터 남의 얘기 같지가 않다.
책을 고쳐 잡게 된다.
-이래서 힙합을 헤드폰으로 듣는구나. 이건 정말, 일대일인데?
-그래?
-응. 나한테만 말하는 것 같고, 진짜 심장이 쿵쿵 뛴다. 단순하고 불안, 미숙?
어른들이 듣기에나 그렇지.
-근데 그런 게 묘하게 뭔가 막 사람을 움직여.그리고,(106쪽)
처음 감정이입을 하기까지가 좀 힘들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열일곱살 강연우의 1인칭 시점의 소설인데,
이 녀석이 이 시대 열일곱 먹은 소년 같지가 않았다.
속에 나이 4,50 근처에서 연애 못하고 죽은 처녀 귀신 쯤이 들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나이에 비해서 한참 조숙하다는 건 얘기했고 소심하고 섬세하기 까지 하다.
단지 사랑에 관해서만 숙맥이다.
(뭐, 러브 라인이야...나이에 관계 없이 처음이면 순진무구할 수 있는 거니까~)
소년과 짝을 이루는 몇 명의 소년,소녀 들이 등장하는데,
소년의 친구들이 더 설득력 있었다.
겉넘고 싶고 그래서 겉넘어 보게 되는 질풍노도의 시기.
강연우의 엄마 신민아는 엄마 같지 않다.
잘 봐줘야 누나 정도.
폭풍우 몰아치는 날 카페에 앉아 창밖 경치를 봐야 했고, 어떤 새벽에는 취해 들어와 마구 깨우는 바람에 공원에 나가서 탠덤바이크를 태워저야 했고, 극장에서는 반드시 캐러멜 향 팝콘과 다이어트콜라를 나눠 먹어야 했고, 핑크색과 초록색 가발로 바꿔 써가며 스티커 사진을 찍어야 했고, 각기 다른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거리를 걷다가 반쯤 남았을 때 바꿔 먹어야 했고, 집 앞 놀이터에 불려나가 캔맥주가 두 개쯤 비는 동안 스프라이트 한 캔을 마셔줘야 했고, 그네까지 밀어줘야 했고......이 모든 게 본인의 주장으로는 신 육아법이라고 한다.(351쪽)
그런 엄마 신민아 씨는 일곱살 어린 남자와 사귄다.
강연우는 그를 형이라고 부른다.
사실 나는 위로를 잘 믿지 않는다. 어설픈 위안은 삶을 계속 오해하게 만들고 결국은 우리를 부조리한 오답에 적응하게 만든다. 그 생각은 변함없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하게 되었다.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는 거기 실려간다. 삶이란 오직,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이란 것이 생겨나고 변형되고 식고 다시 덥혀지며 엄청나게 큰 것이 아니듯이, 위로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러니 잠깐씩 짧은 위로와 조우하며 생을 스쳐 지나가자고 말이다.
우리 모두는 낯선 우주의 고독한 떠돌이 소년. 이 말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 <작가의 말>중에서 -
책 뒤의 '작가의 말'을 읽기 전까지,
제목은 <소년을 위로해줘>였지만, 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었었다.
그런 일들을 겪어 내고도 꿋꿋이 잘 살아가고 있는 소년을 위로한다는 건,
삶을 계속 오해하게 만들고 그를 부조리한 오답에 적응하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그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놔야 가능한 일인데,
아직 열일곱이라면 희망만을 얘기해도 좋은 나이가 아닐까?
오히려 소년의 어머니, 소녀의 아버지, 뭐 그런 사람들을 등 두들겨 주고 싶었다.
그 시기에 머물러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그들,
심지어 이삿짐을 나르는 아저씨들 까지 위로해 주고 싶었다.
-정서가 메마르셨는데 양초가 저렇게 많겠냐?
-그건 또 그렇네. 박스에도 엄청 많아요. 초가 장난 아니게 무겁다는 거 처음 알았잖아. 어떻게 책박스보다 더해.(25쪽)
이 책을 읽으면서 알았다.
책보다 양초가 더 무겁다는 것.
책이 무겁다고 궁시렁 거리는 이삿짐 아저씨들에게 한번씩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와락 보듬고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등 두들겨 주고 싶었던 건 소녀의 아버지였다.
네, 지금은 다르다는 것,압니다. 남자들도 자신들도 자신 속의 섬세함과 마음 약함 같은 거 드러내는 데 눈치 안 봐도 되고,때로는 그게 오히려 장점이 되고 있어요. 하지만 어떡합니까. 어릴 때부터 입어온 옷이 이미 피부나 마찬가지가 돼버린걸. 다른 옷을 입어볼 여유가 없었던 사람에게는 말입니다. 그옷이 살을 파고들어 흉터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손바닥에 칼로 손금을 판 얘기 들어보셨습니까. 나는 그렇게 감정은 물론이고 운명까지도 ‘개척’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익히며 성장했어요. 타고난 감성은 억눌러야 했죠. 세상이 이렇게 달라진 것, 저도 환영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랐으면 훨씬 솔직하고 다정한 사람이 됐을 거라고 생각하고 부러운 마음도 많아요. 하지만 그건 머릿속 생각일 뿐이에요. 달라진 세상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동의하지만 훈련된 대로 꼰대 기질이 먼저 나와버리니까요. 출세와 돈밖에 모르는 사람, 점점 그렇게 돼가는 거죠.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합니다. 안 그러면 지금의 삶은 갖지 못했겠죠. 결혼도 마찬가지예요. 절실한 감정보다는 내게 반드시 필요한 대상이라는 확신이 열정을 만들었습니다. 사회적 기준에 맞는 조건을 하나씩 하나씩 갖춰나가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으니까요.(439쪽)
엄마 신민아씨는 내가 아는 누군가랑 좀 닮아 애착이 갔다.
남의 눈에 거스르지 않게 살고 싶어 친절을 익혔다지만, 어쨌거나 남들 눈에 조금은 튀게 살고 있는 엄마는, 연우에게 이런 충고를 한다.
-연우 네가 지나치게 예민한 거야. 그 아저씨들, 피곤해서 남 일에 그렇게 관심없어. 그리고, 피곤한 사람은 무신경할 수밖에 없거든. 배려라는 게 원래 뇌에서 나오는 거라 체력 소모가 엄청 많다구. 그걸 갖고 뭐라고 하면 안 되지.(41쪽)
-내가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그게 관계를 가볍게 만들어주거든. 누구나 짐을 지는 건 싫어하니까. 연우야, 이거 중요한 문제야. 약간 멀리 있는 존재라야 매력적인 거야. 뜨겁게 얽히면 터져. 알았지?(47쪽)
이쯤되면 연우의 엄마 신민아 씨는 세상에 무심해지라고 가르치고 있다.
헌데,이건 어찌보면 아들 연우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각성의 말 쯤으로 들린다.
예민한 더듬이를 가진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라 적당한 거리감인지도 모르겠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도 말아야 하고,
그렇다고 아주 멀리 가지도 말아야 한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켜볼 것이며,
그리고 규칙적으로 그가 그 자리에 있는 지 점검 정도는 해주어야 겠지.
이걸 이 책에선 이렇게 멋지게 얘기한다.
-주변의 위험한 물건 다 치워놓고 마음껏 놀게 해주는 것, 그게 방목이야. 대부분 혼자 하도록 내버려두지만 결정적일 때는 개입을 해야 해. 그러니까, 멀리 있더라도 연결은 끊어지면 안 된다 이거야. 그런 걸 방목의 기술이라고 하지.(251쪽)
신민아의 법칙 중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이거였다.
...방정식이 안 풀리면 책을 덮고 밥을 먹어라. 무조건 붙잡고 끙끙대기보다는 새로운 기분으로 문제에 매달릴 수 있도록 체력을 보충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본다. 연우야 잘 들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서 일이 저절로 잘 풀리는 건 아니야. 스스로 일을 잘 풀어가게 되는 거지. 그리고 말야, 서로 사이가 좋아서 가족이 행복한 게 아니라, 각기 제 인생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가족이 사이가 좋아지는 법이야. 그러니까 내가 내 행복을 찾고 있는 건 너를 위한 일이기도 해.(214쪽)
결국,
책 한권을 읽고 소년을 위로하겠다고 마음 먹으면서,
내가 등 두들김을 받고, 위로를 받고,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내'가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건, 그러니까 '가족'을 위하는 일이기도 하다.
제목을 슬쩍 바꿔 힙합처럼 읊조려본다.
아줌마도 위로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