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말하다 - 우리 미술이 발견한 58개의 표정
박영택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나는 추녀다. 
가을이 되면 진득하게 붙어서 책 읽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이리저리 나다닐 궁리다. 

점심시간에 걷기 좋은 가로수길 어딘가에 가서 채 물들지도 않은 은행잎을 보며 궁시렁거리다가,
앞서 가는 다정한 미중년을 보게 되었다.
나는 같이 가로수길을 걷던 이와,
'중년에 저렇게 다정할 수가 있느냐?필시 불륜일게다.'
따위의 엉뚱한 실랑이를 벌이다가 급기야 확인사살을 하게 되었다.

결론을 얘기하자면,그들이 불륜인지 아닌지는 알아 차릴 수 없었다.
팔장을 끼고 걷는 이는 까만 선그라스를 낀 맹인이었다.
하지만 눈이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얼굴 한가득 웃음을 띠고 있었고,
그 광경만으로도 충분히 내겐 부끄러움이었고 부러움이었다.

손의 감각으로 사람의 상태를 읽어야 하는 직업을 가진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으로는 더 미루어 짐작하기가 쉬워진다. 
왜 나는,한쪽 팔에 달랑달랑 매달려 걷는 그 광경을 보고도 맹인이라고 생각을 못했을까?
누군가에게 의지하여 걷는 그 걸음걸이가 마냥 부러웠던 건 아닐까? 

평상시의 나였더라면,짧은 시간 안에 하나라도 더 읽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여주는 걸 그대로 쫒다가는 헷갈려서 낭패를 당하는 고로,
누가 읽어주는 걸 그대로 따른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고,
그 이면에 숨은 것들을 잡아내야 한다. 

이 책은,대형서점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훑어보려 하다가,그림,판화,조각,사진 들이 너무 맘에 들어 홀라당 안아오게 되었다.
거기에 해설을 붙인 박영택의 글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한권의 책에서 공감각을 만끽할 수 있었다. 

저자<박영택>에 관한 사전 지식이 없었던 나는 '얼굴이 말하는' 바를 읽어낼 수 있는 비법에 관한 책이 아닐까 호기심을 가졌었다. 
하지만,이책에는 수많은 얼굴들이 등장하지만,'얼굴이 말하는 바'를 요점 잡아 읽어내는 법에 관한 책은 아니다.

하나의 고착된 작품 한점을 가지고도,보는 사람에 따라 무수히 다른 표정을 읽어낼 수 있단다.
그것을 '박영택'은,
'이것은 미술평론도 아니고 미술사 논문도,작가론도 아니며,그렇다고 마냥 물렁거리는 감상으로 눅눅해진 수필도 아닐 것이다.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두루 섞어놓은 글,특정한 이름으로 규정되기 어려운 문장이자 문체였으면 한다.얼굴 이미지에 기대어 독해하고 고백한 어떤 흔적의 행간이었으면 한다.'
라고 책머리에 소박하게 얘기한다.  

책 표지의 얼굴을 가린 그림은'양유연'의 <숨바꼭질>이란다.
여기서 그는,얼굴이 아닌 얼굴을 가린 손에 대해서 집중조명한다.
제목은 '얼굴이 말하다'이지만...
얼굴만이 아닌 손에 대한,손의 숭고한 노동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래서 그의 글들에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었고,그래서 이렇게 울림이 남다른 건지도 모르겠다.

'농부들이 고된 노동을 통해 작물을 길러내듯이, 그 역시 상당한 노동을 통해 그림을 그려낸다...그에 따라 농사짓는 노동의 미덕을 내재화해서 그림 그리는 일의 당위성을 확보하는 차원으로 바짝 끌어당기고자 한다.(39쪽)' 

52쪽의,
'어떤 사람의 공간을 엿볼 때 제일 먼저 그곳의 책을 본다.책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모든 것을 어느 정도 대변해주는 핵심 단서처럼 다가온다..그의 관심사,기호,취향,그리고 세계관 같은 것들을 은밀히 접촉하고 있다는 기분도 든다.사람들은 살면서 다양한 책을 소유한다.그 책들은 그가 어느 시간대에 필요로 했던 순간을 환기한다.책을 통해 우리는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의삶이 어떠해야 할지를 가늠하곤 한다.해서 그 사람이 읽고 지닌 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 것도  같다.그 사람의 책은 그의 얼굴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책을 한 권 읽은 사람이라고 한다,자신이 읽은 책 한권에 저장된 지식을 갖고 평생 살아가는 존재다.그는 무슨 말만 하면 자신이 읽은 책의 내용을 들먹이며 강변할 것이다.오로지 자신이 읽은 책 안에만 갇혀 있는 것이다.그런 이들은 차라리 책 한 권도 안 읽은 이들보다 못나고 무서운 존재다.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힘닿는 한 열심히 읽고 생각하다가 죽는 일이다.그렇기에 무엇을 안다고 확신하거나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공부란 그저 하다 가는 일이다.편견에 사로잡히거나 편협한 사고를 하거나 특정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으면서 나아가는 일이다.' 
같은 구절은 내가 사람을 가늠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을 보면 그래서 좀 무서울 때도 있다.

또 62쪽의,
'오윤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의 작품이 말할 수 ('없는'정도가 생략되지 않았을까?)어떤 친근함으로 다가옴을,알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그만의 내음이 질펀했고 아득했다.그것은 바로 다른 누구도 아닌 오윤이란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미지였다.그만의 지문 같고 체취 같은 사상이다.마치 박수근이나 장욱진,권진규의 작품이 멀리서 봐도 그 사람의 체취로 혼절할 것 같듯이 말이다.'
같은 경우는 어떤가?
그림이나 사진을 하는 사람뿐 아니라,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도 곁에 두어도 좋을 것 같다.
그도 충분히 그만의 지문과 체취,'문체'라는 것을 내게 각인시킨다.

105쪽의 '먹처럼,멍처럼' 
113쪽의 '얼이 깃든 굴'
따위의 언어 수사는 또 어쩔 것인가 말이다. 

70쪽의'어떤 상황에 몰입된 인간의 얼굴만을 응시하고 있다.빠른 붓질과 핵심적인 부분만을 처리해나가고 나머지는 비워두었다.그 여백은 보는 이들의 상상과 감정이입을 허용하는 공간이다.' 
는 요즘 내가 고민하는 비워냄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래서인지 당시부터 그는 형식적완결성보다는 다소 미완인 상태지만 정신적으로 고양된 단순 고졸한 형태에 더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원시적인 조각들에서 풍기는 강렬한 생명감과 정신성에 그만큼 관심이 컸다는 얘기다.(118쪽)' 
권진규에  대한 해석에 이르러 그의 전공을 상기시킬 수 있었으며...

'그러니까 이성이 통제하는 심리적 질서가 파괴되면서 굳게 닫혀 있던 무의식의 뚜껑이 벗겨지는 것,그것이 바로 불안이다.(131쪽)'
위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정신의학과 철학도 넘나든다.

이쯤되면 무조건 일독을 권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데,
그래야만 '함민복'의 '눈물은 왜 짠가'를 덤으로 읽어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과 표정에 관한 책이어서 일게다.
이 책을 읽는 내내,'파울 클레'의 <앙겔루스 노부스>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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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0-09-30 03:29   좋아요 0 | URL
아, 재밌을 것 같아요. 괜히 리뷰를 읽었다는 후회가 뒤늦게 찾아옵니다.
사고 싶고, 읽고 싶은 책들이 워낙 많아서 이제 나무꾼님 리뷰는 안 읽고 싶어요! ㅠ.ㅠ

손의 감각으로 사람의 상태를 읽어야 하는 직업.
어떤 일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양철나무꾼 2010-09-30 03:38   좋아요 0 | URL
이 시간까지 안 주무시고 뭐하세요?
봄날 식스 팩을 위하여 몸을 만들고 계셨나?ㅋ~.

제 리뷰는 안 읽어도 용서해 드릴테니,
'날씬하네요'같은 잼난 페이퍼 많이 올려주세요~^^

마녀고양이 2010-09-30 08:50   좋아요 0 | URL
굉장히 좋은데?

자기 페이퍼도 좋고, 책의 스크랩 부분도 좋고.
석달동안 책을 사지 않겠다는 터무니없는 결심 중이지만,
일단 장바구니에 넣고, 석달 후에 사야겠다......... ^^

자기 손은 아주 예민할거야. 담에 만나면
요모조모 살펴봐야지, 조용하고 아늑한 곳에서.
내내 내가 자기 손만 만지작거리면서 장난쳐도 용서해 줘~ 크크.

글구! 언니인 내가 잔소리 하건데
일하는 사람이 새벽 세시에 머하는 거야!!! 피부 망친다 그랬지!!!

양철나무꾼 2010-09-30 11:51   좋아요 0 | URL
난 사람들이랑 부비부비 좋아해~
계속 내 손 만져줘.

갑자기 이런 생각도 나네.
이름만 대면 다들 아는 정치인 중에서...악수를 할 때 꼭 손바닥을 간질이며 장난을 치는 사람이 있는 데...

나두,피부 망치는 건 심히 걱정되는데...
지금 공부하는 거 새벽에 집중과 몰입이 잘 된단 말야~ㅠ.ㅠ
뭐,좋은 방법이 없을까요,마고 언냐?^^

마녀고양이 2010-09-30 13:21   좋아요 0 | URL
그럼 좋은 마사지 크림이라도 사서,
내내 열심히 발라! 새벽 공부할 때 얼굴에 팩하고 공부하고!
내가 보기엔,,, 그런거 하나두 안 하지?
맨날 숨쉬는 운동만 하구~ ^^

그런데.... 아무리 집중이 잘 되어도, 새벽엔 잠을 자야하는데 말야.

hnine 2010-09-30 08:58   좋아요 0 | URL
불안과 무의식이 그렇게 연관지어 지는군요.
함민복의 시는 저 책과 또 어떤 관련이 있길래??
한번에 다 알려주지 않는 양쳘나무꾼님~ ^^
손의 감각으로 사람의 상태를 알아내는 일, 저는 알것 같아요 ^^
역시 훌륭한 리뷰입니다.

양철나무꾼 2010-09-30 11:54   좋아요 0 | URL
이 책의 저자,내공이 보통이 아녜요~
전작들도 찾아보고 싶어져요.

훌륭한 리뷰라고 칭찬해주셔서...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0-09-30 11:47   좋아요 0 | URL
손이 닿는 느낌이 참 좋은 사람이 분명 있어요.
제손은 타인에게 어떤 느낌을 줄까 궁금해요.
나무꾼님이 제손을 잡아봐야 아실텐데요.
한번 봐주세요.^^

양철나무꾼 2010-09-30 11:57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의 글이 제게 닿는 느낌은 정갈하고 따뜻해요.
님의 손도,마음도 그러실거예요~^^

쟈니 2010-09-30 13:29   좋아요 0 | URL
오윤 화가의 그림이었던걸로 기억되어요. 얼마전 아시아 리얼리즘에서 본 그림인데, 쌀포대에 그림을 그렸다고 하더군요. 농사의 고단함. 무거움. 그 아래 아버지의 편지.. 등이 마음에 묵직하게 와닿았습니다.

저도 이책 읽고싶어지네요. ^^

양철나무꾼 2010-09-30 14:49   좋아요 0 | URL
착각 하셨던 것 같아요.쌀포대에 그린 저 그림은 '이종구'라는 화가의 작품이고요~
오윤은 박노해와 백무산 시집표지에서 보던 그 판화요~
전 이제 박노해는 별로인데,오윤의 판화가 종종 보고싶어 들출 때가 있어요.

9월 마무리 잘 하시고요,10월에는 좀 자주 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2010-09-30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30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9-30 17:20   좋아요 0 | URL
글은 그 사람의 얼굴...맞져.
책은 그 사람의 역사가 되구.
한 마디 한 마디...뱉어내어 흩어지는 말들조차 나를 이루는 것들인데, 나로인해 표현되는 그것들에 정성과 공을 들여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좋은 글 보고갑니데이^^

양철나무꾼 2010-09-30 23:44   좋아요 0 | URL
전 때때로 maggie님의 댓글이 시나 경구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머큐리 2010-09-30 18:49   좋아요 0 | URL
찜!!

양철나무꾼 2010-09-30 23:47   좋아요 0 | URL
저요,책이요,이 리뷰요,앙겔루스 노부스요?
참고로...전 돼지는 찜보다는 보쌈으로다가 먹는 게 더 맛나던데...ㅋ~.

머큐리 2010-10-01 12:19   좋아요 0 | URL
양철댁이 거론한거 다 찜!!

저도 보쌈이 좋아요..ㅎㅎ

양철나무꾼 2010-10-01 21:19   좋아요 0 | URL
ㅎ,ㅎ...앙겔루스 노부스 보고 알아봤어요~
저도 찜!!!

꿈꾸는섬 2010-10-01 00:37   좋아요 0 | URL
아, 양철나무꾼님 전 군침만 꿀꺽 삼켰어요. 도서관에 신청할까봐요. 9월 과다지출로 허덕이고 있거든요.ㅜㅜ 꼭 이럴때 좋은 책들이 더 보인다니까요.

양철나무꾼 2010-10-01 20:51   좋아요 0 | URL
전 10월에도 과다지출 예정이예요.
친정 아부지와 시어머니가 한날 생신이시지~
울 아들 탄신일이 있어주시지.

맞아요,이럴때 좋은 책들이 더,더,더 눈에 보인다니까요~^^

같은하늘 2010-10-01 00:49   좋아요 0 | URL
서재활동 못해도 잊지 않고 저를 찾아 주시는 양철나무꾼님께 감사해요.^^
저도 이 책 너무 궁금했는데...
요즘 같아서는 책을 손에 붙잡을 시간도 없지만 찜해 두려구요.^^*

양철나무꾼 2010-10-01 20:53   좋아요 0 | URL
책이 좋은 게 그런 거겠죠~
어디 도망가거나 하지 않는거...
잘 쟁여두었다가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다는 것.

서재 활동을 열심히 하시든,그렇지 못하시든...
제겐 여전히 '같은하늘'이신걸요~^^

2010-10-01 02:48   좋아요 0 | URL
{얼굴이 말하다} 흥미로운 책이군요. 언젠가 구해 읽어야겠네요. 저도 얼굴과 관련해 책들을 조금씩 구해두었는데, 겨울에 여러 권을 함께 읽어보려고 합니다. / 함민복 시인의 시를 읽어드리고, 또 읽으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던 돌아가신 어머니 모습이 떠오르네요. 지난 해에는 그의 시집{말랑말랑한 힘}을 구해서 몇몇 시편은 되풀이 읽곤 하였네요.

양철나무꾼 2010-10-01 20:56   좋아요 0 | URL
겨울이 되면 좀 한가해지시나 봅니다.

'함민복'님 좋죠~
읽다보면 전 말랑말랑해 지는게 아니라,결연해지는 것 같아서 탈이지만...
암튼 어렵기만 한 시를 쓰지않아서 좋아요.^^

2010-10-01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1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4 0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4 1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0-10-06 11:10   좋아요 0 | URL
얼굴과 한국 미술에 대한 내용이라 흥미가 가는 책이네요^^
함민복의 시,, 참 제목만 들어도 짠합니다ㅠㅠ
간혹 수많은 알라딘 리뷰들을 읽으면 양철나무꾼님의 글들이 발견하곤 했었는데,,
닉네임도 한 번 보고 나니깐 잊혀지지가 않았구요
드디어 양철나무꾼님의 서재에 들리네요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ㅋ

양철나무꾼 2010-10-11 03:10   좋아요 0 | URL
앗,죄송~!!!
이 댓글을 이제야 봤네요.
그쵸,함민복님의 시는 생활 속에서 깨달음을 줘서 그런가...제목만 들어도 짠해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