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흥

-정몽주

 

봄비가 가늘어 듣지 않더니

밤중에는 자그마한 소리로 들리는구나

눈 녹아 앞 개울 물이 불어나겠네

풀들이야 얼마나 돋아났을까

 

******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선죽교에서 목숨을 잃은 고려 충신..

 

새벽녘에 나는 빗줄기를 느꼈다

실제로 비가 왔다는게 아니라 꿈속에서 비가 들었다.

가늘은 빗소리에 잠이 깨어

몽롱한 중에도 창문을 열고 진짜로 비가 오나

한참을 졸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봄을 기다리고 있다.

누른 빛이 점점 사라지고 온 천지가 푸른 빛으로

충만해질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내 나이를 닮은 누른 빛은 잠시 잊고

남들처럼, 아이들처럼 푸른 빛을 받아

내 영혼도, 내 팔다리의 관절들도

조금은

푸릇푸릇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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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누각

-송찬호

 

 처음 삶은 조금 불편할 뿐이었다 모래를 한 줌 깔아놓

고 그 속에서 자기 몫의 모래 한 알을 가려내야 하는, 잠

시 숨죽이고 들여다보면 세상에는 모래알만큼 많은 희

망들이 있었다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와 아우성치며 살

다 간 바닷가, 물결이 흘러와 또 한 세상을 흔적없이 지

워놓은 모래 위로 물에서 나온 벌거벗은 사내와 여자가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 그들 뒤를 길게 따라가는 모

래 발자국들 숙명처럼 따라가는 맨발자국들

 넓고 넓은 바닷가에 하룻밤 새 대체 누가 저런 고래등

같은 누각을 일으켜세웠을까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

래알만큼 작아지면서 얼마나 많은 거짓말로 저 모래 언

덕을 쌓아올렸을까

 

**************

 

영화에서 멋진 집을 볼 때마다 다짐하곤 한다.

나도 꼭 저런 집을 지어서 살아야지.

내가 아직도 마음 속에 갖고 있는 집은

빨간 머리 앤이 살던 초록지붕 집의 다락방과

이윤기 아저씨의 서재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타라'의 농장에 있던 그 서재

넓고 환한 창이 가득한 거실.

그리고 '가타카'에서 우마 서먼이 살던

바다가 보이던 그 침실.

뭐 합쳐 놓으면 꼴이 이상해지려나?

어쨌든 이런 집을 짓고 살아야지.

 

로또가 맞으면 말이야

실컷 여행도 다니고, 책도 많이 사고, 칠렐레 팔렐레 너풀대는

치마도 많이 사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말이지

 

내가 혼자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산책하고 싶을 때 아무 때나 하고

 

...

...

이렇게 나도 모래알로 수많은 사상누각을 짓고 산다

그러면 어떠랴..

내 삶에 모래알이 가득해서 신발을 신을 때마다

거꾸로 뒤집어 털어내야 한대도

이런 희망 마저 없다면 삶은 막막하지 않은가

 

물 맞은 개처럼 몸을 부르르 털어

어제 치의 모래알을 다 없애버리고

나는 오늘 세워야 할 사상누각을 세우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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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행버스

-임길택

 

아버지가 손을 들어도

내가 손을 들어도

가던 길 스르르 멈추어 선다

 

언덕길 힘들게 오르다가도

손드는 우리들 보고는

그냥 지나치질 않는다

 

우리 마을 지붕들처럼

흙먼지 뒤집어쓰고 다니지만

이 다음에 나도

그런 완행 버스 같은 사람이

되고만 싶다

 

길 가기 힘든 이들 모두 태우고

언덕길 함께

오르고만 싶다

 

****

<탄광마을 아이들>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그 아이들의 눈에 비친

현실이 너무 가슴 아파서 읽을 때마다

가슴 한 켠이 먹먹해짐을 느낀다.

이 시집으로 수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도시 아이들은 그 아이들의 눈으로 그려낸

그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귀찮은, 보기 싫은 세계,

나와 상관없는 세계라고 멀리 치워놓으려는..

 

그런 아이들을 비난하긴 했지만

사실 내 삶도 크게 다를 건 없다

시간이 많았던 지난 분기에

봉사활동이라도 하면 어떻겠냐는 친구의 제안에 따라

그런 카페에 가입은 해놓고도

한 번도 봉사하러 같이 떠나지 못한

내 게으름과 무관심이 그 증거다.

 

다시 시작하는 월요일.

지나는 사람들 모두 내 시선 안에 놓는 일은 못해도

날 보고 손드는 이 있다면

완행버스처럼 길가다 멈추고 서서

기꺼이 들어주리라.

 

모두 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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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마늘밭에서

-율사리 시편 5                          류제희

 

 

비니루 걷어내자 연초록 함성이

우루루 머리 풀고 일어섰다.

손써 볼 틈도 없이, 왁자지껄

 

흙먼지 가라앉고, 마늘 싹보다 먼저

다리 뻗는 잡풀들

제 하늘 만난 듯 속살 드러내고 있다.

 

벌판을 열어제치며

나비 한 마리 꽃잎으로 날은다.

눈 시린 햇살을 투망질하며

 

****

이 시인은 시 만큼이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

지금도 선한 그의 웃음이 떠오른다.

이 봄이 가기 전에 한 번 뵈어야 할 텐데..

언제나 그렇듯이 늘 마음 뿐이다.

 

봄이었다가 겨울이었다가 여름이었다가..

정신없이 계절들이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지만

아무도 모르게 봄은 오리라.

그리고 슬쩍 여름으로 넘어가겠지

그리 되기 전에

밭에 싱그럽게 돋아난 새싹들을 보러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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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이윤학

 

어디,

자신보다 더 불쌍한 인간이 또 있을까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동자

 

거울 속으로 문이 열리고, 그는

급히 거울 속에서 나와

눈물을 감춘다

 

다시, 알 수 없는 눈동자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생각들을 다

누구에게 바칠 수 있을까

 

****

 

거울을 자주 보진 않는다

거울 속에 보이는 이가 '나'란 걸 인정하기 싫어서.

어릴 때부터 그러더니

이런 습관은 나이가 들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거울 속에 있는 이가 '나'란 걸 인정하고 나면

나는 거울 속으로 들어가버릴 것 같다

거기 갇혀서 더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온전하게 거울을 마주하지 못하고

슬쩍 훔쳐보듯 지나친다

 

그렇다고

이 세상이 존재하고 싶을 만큼

굉장한 맛을 지닌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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