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생
-임영조

말이란 이미 뱉은 말보다 아직
혀끝에 숨긴 말이 더 궁금하고 두렵다
허나, 여름 내내 속끓이던 앙가슴
그 주체 못할 충만을 터뜨려
영롱한 아픔을 지상에 쏟는 석류여
네 고통의 축제가 눈부시고 뜨겁다
남모를 가슴속 오랜 꿈과 슬픔이
한여름 땡볕과 비바람 속에서
얼마나 부대끼고 견뎌야
그토록 절실한 언어로 익어
누구나 눈여겨볼 홍보석이 되는가
새겨들을 비유가 되는가
스스로 익어 고개 숙인 이삭들
땅에서 얻은 이름 제 무게대로
땅에 다시 내려놓는 이 가을
내 오랜 그리움을 방생하노니
가서 부디 누군가의 시(詩)가 되거라
가장 간절하고 뜨거운 언어로 눈떠
가을산 다 태우는 정염이 되거라
아니면 더욱 쓸쓸해진 사랑의 불씨
까만 분꽃씨로 여무는 고독이거라
이 고요 깨우는 노래로 남거라
그대 영혼 적시는 국향(菊香)으로 피거라
내 오랜 외로움도 방생하노니.

****
무슨 재주를 얼마나 지녀야
내가 가진 외로움을 방생할 수 있는 걸까?
아직 살아계신 이 시인을 찾아가 비결이라도 들어봐야 하나

아주 오래 전에 방생에 참여했던 적이 있었다.
고작해야 방생하는 곳에서 진을 치고 장사하는 이들이
내어놓는 거북이(자라나 남생이인들 내가 알아볼 재주가 없으니)
그거 하나씩 사서 물가에 내어놓는 대대적인 행사였는데
그렇게 놓아주면서 그놈들이 다시 장사치 손에 잡히리란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우린 무엇을 위해 방생을 한 걸까?
내가 지은 죄를 이런 식으로 속죄하나이다?

나도 이젠 방생을 다시 하고 싶어졌다.
이번엔 訪生.
다들 바쁜 터에 누구에게 내 삶을 찾아다 달라겠는가
내가 가야지.
가자.가자.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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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 3~8세 ㅣ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47
로렌스 데이비드 지음, 고정아 옮김, 델핀 뒤랑 그림 / 보림 / 2000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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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떠올라서 쓴 동화라는데 이야기도 무겁지 않아서 아이들이 읽기에 적당하다.

그저 카프카의 변신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일 뿐 결말도 전혀 다르다.

그레고리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다가  '카라부스 프로블레마티쿠스 (딱정벌레)로 변했지만

<줄어드는 아이>처럼 처음엔 누구도 그레고리가 변한 걸 알아채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유일하게 알아챈 사람은 친구인 마이클 뿐.

엄마, 아빠가 언제나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안심을 한 걸까?

'네가 변한 걸 몰라봐서 미안하구나'

'네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서 미안하다'

언제나 관심 받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딱정벌레로 변하게 하고,

그것이 다시 사랑받음으로 해소되는 게 다행이면서 가슴이 아프다.

언제든 아이들은 관심과 사랑을 받지 않으면  벌레로 변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닐봉지로 변하기도 하고,

때로는 집의 일부분이 되거나 거리의 일부분이 되어버린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그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는데

('만약 내가 어느 날 아침 일어났는데 벌레가 되었다면' 이라는 가정 아래 나온 얘기들은)

아이들은 엄마가 못 알아본다면 슬프겠지만 나머지는 아주 재미있을 것 같다면서

날아다니거나, 기어다니면서 평소에 보지 못한 것들과 얘길 나눌 테니 얼마나 좋겠냐고

학교에 안 가도 되니 참 신나겠다고 했다.

그런 걸 봐도 아이들은 모두 엄마의 관심을 끌고 싶어하는 심리가 은연중에 나타난다.

손가락을 가볍게 다치기만 해도 밴드를 잔뜩 붙이고 손가락을 치켜 세운 채 나타나

눈앞에서 왔다갔다 하는 아이들이 자꾸만 생각난다.

나 여기 있어요..좀 봐주세요..사랑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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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벗고 들어가는 그곳
-황지우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먼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熱帶魚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는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들처럼
헛된 것만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 생을 '쇼부'칠 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은 아니다

******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일년에 두 켤레씩
나는 벌써 80켤레의 신발을 갈아신은 폭이다.
내가 신은 신발에 대한 기억들은
껍질 벗겨내는 칼이 만들어낸 얇은 당근 껍질과도 같은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신발 갈아신기는 몇 번이나 될까?

어릴 때에야 어른들이 신겨주는 대로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얌전하게 신었지만
내 마음이라는 걸 인정하면서부터
나는 신발을 내 멋대로 신으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내게 맞지 않는 신발들로 인해
발에 상처가 나고 다리를 절뚝거리게 되고
다리때문에 머리까지 아파오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신발 갈아신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아직도 내가 신은 신발은 나를 기우뚱거리게 만든다
뒷축이든 앞축이든 닳아버린 이 신발을
어느 순간에 벗어버릴 수 있을까?

그리고 또,
내가 정말로 끝까지 신고 갈 신발을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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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혈압

-김명인

 

이 불안 어디서 오는 것일까

햇살 비듬도 성긴 황혼녘에 앉았으나

바닥 모를 깊이에서 며칠째

오한이 솟아오른다, 어느새 몸이 아득한

절벽의 둘레에 섰다, 바닥이

안 보이는 끝없는 나락,

천 가닥 파랑마다 일만 마디의 비명을 일렁이며

반짝이는 것은 햇살인가

내가 지금 이곳에서

무서움으로 끓여내는 죽음의 시간도

살의 한 올이려니, 썩은 관절로

틈새를 이으려는 온몸이

또 이렇게 부서지듯 삐걱거린다

눈 시려 내다볼 수 없는

저쪽은 여전한 꽃밭이지만 늦된 나비,

거울 안쪽에서 힘겹게 날고

난반사 되어 늦가을 햇살만 조각조각

날개 위로 내린다

 

****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 늘상 있는 일이다

죽음에 이르게 되면 막상 죽음 따윈 안중에도 없을 일이다

무엇이 우리를, 나를 죽음으로 이끄는가

하지만,

무서움이 수호령처럼 나를 막아서면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내 생들이

내 앞에서 일렁이며 운다

우는 자 그대로 두고 나는 돌아서서

무서움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한다

앞으로 그 힘을 얻기 위해

당분간 살아 있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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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3

-장석남

 

강에 비가 오는군

저녁이 되자

수면 위에서 비는

휜다

자꾸 휘는 걸 보면

점점 가파르게 휘는 걸 보면

비는 비로서만 내리는 것은 아니야

가만, 비는 희끗희끗

진눈깨비로군

 

강물 속이 궁금하다는,

이 세상엔 아무 미련 없는 자세로 뛰어드는군

강은 죽음 쪽으로도

깊어지는가?

 

진눈깨비는

어느 좌익의 이름자 하나 빠진 수필문처럼

저무는 강에라도 적(籍)을 두려

저렇게

저러게도 삶을

수식하는군

 

*****

 

물은

사람을 미치게 하기도 하고

사람을 고요하게 만들기도 한다

 

바다엘 다녀왔다

썰물 시간에 걸려

내 발치에서 물을 느껴보진 못했지만

멀리서 반짝이는 그 물들은

내게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들어와봐..

들어어봐..

 

내 몸 안의 많은 물들은

대부분 눈물로 소비되는 편인다

안과의사에게 경고를 받을 정도로

내 눈은 건조하다.

너무 많은 눈물이 내 눈을 통해 빠져나갔다

이러다가 내 눈이 모두 짓물러

좋아하는 일 -무언가를 보는 일-을

못 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휩쓸고 지나간다

 

그래

이젠 눈물은 그만 흘려야지

강물에 보태주는 일 따위는 그만해야지

다만 강물 속에 빠진 내 눈물을 그리워만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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