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
서로 낄낄대면서 한 구절씩 받아 외우던 친구가
멀리,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땅으로 이민을 간다.
다시는 볼 수 없으리
"식구들이 몽땅 같이 가는 길이니 여기 올 일이 없을 거야."
"사람들은 만나면 헤어지는 게 당연한 일이야"
간단하게 이야기하며 서로를 위로했지만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던
그런 친구를 잃는 일은 무섭다
다시 그런 친구를 만들기에는 내게 시간이 별로 많지 않다
열정이 없어졌으므로.
젊은 날 내 곁에 머물던 열정들 모두 그 친구와 나눠가졌기에.

"난 이렇게 추억을 갉아먹고 있다"
유치환의 시귀절도 떠오른다
나도 그렇게 그 친구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없는 자리를 서서히 잊어가겠지

가는 길, 공항에 나가지는 않기로 했다.
서로가 눈물을 주체할 수 없으리란 걸 알기 때문이다.
평생 찾아다녔던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기 위해 떠나는 길
집에 앉아 같이 마시고 싶었던 와인을 새로 따고
혼자 건배를 하며 축배를 들 예정이다.

잘 가라 사랑하는 내 친구야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행복하게 잘 살어
조금 늦었지만 아이 하나는 낳아야지?
아이 낳으면 전화라도 주렴

너 없는 이곳에서 나도 열심히 살도록 할게
보고 싶을 거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울음이 타는 가을江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江을 보겠네.



저것 봐, 저것 봐,

너보다도 니보다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

소리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겠네.



****

강을 가까이 두고 살지 않아서

계절마다 강이 어떤 변화를 겪어내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시인의 눈을 빌어 나도 가을 강을 봅니다.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江'



곧 터져 버릴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은 강은

가지고 있으되 당당하게 빛깔도 소리도 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엔 너무나 짧은 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행여 누가 알아낼까봐 저어하여

그저 이불 속에서 숨죽이며 울음을 삼키는,

이별을 앞두고도 애써 태연한 척 웃는 얼굴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가진 江



마음에 드는 시입니다.



제 메일의 끝머리에는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겠네'

라는 구절을 적습니다.



미치다..

조금 다른 의미이지만,

어떤 일에 푹 빠져 보는 일.

폭발하기 직전이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미쳐보는 일이 하고 싶어서

이 구절을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임영조



푸성귀는 간할수록 기죽고

생선은 간할수록 뻣뻣해진다

재앙을 만난 생의 몸부림

적멸의 행간은 왜 그리 먼가



여말에 요승이 임금 업고 까불 때

간 잘 맞춘 임박은 승지가 되고

간하던 내 선조 임향은 괘씸죄 쓰고

남포 앞 죽도로 귀양 가 소금이 됐다



세상에 간 맞추며 사는 일

세상에 스스로 간이 되는 일

한 입이 내는 奸과 諫차이

한 몸속 肝과 幹 사이는 그렇게 먼가



꼴뚜기는 곰삭으면 무너지지만

멸치는 무너져도 뼈는 남는다

꽁치 하나 굽는데도 필요한 소금



과하면 짜고 모자라면 싱거운

간이란 그 이름을 세워주는 毒이다

간이 맞아야 입맛이 도는

입맛이 돌아야 살맛나는 세상에

그 어려운 소금맛을 늬들이 알어?



******

시집을 고를 때는 조금 다급해집니다.

이를테면, CD를 살 때와 비슷해진다고나 할까요?

마음에 드는 한 곡이 있다고 해서 선뜻 고르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는 짓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우선 찾아서 몇 권을 쌓아두고

바닥에 털퍼덕 앉은 채로 열 편 정도를 읽습니다.



하지만, 이 시집은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에서 너무 감탄한 나머지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이 시

'간'만을 읽고 결정했습니다.



음식에 간을 맞추는 일이 쉬운 일입니까?

간이 맞으면 어느 음식이나 기본적인 맛을 갖고 있는 셈이니

음식에서의 간은 9/10를 만족시켰다고도 볼 수 있지요


고기를 사올 때 덤으로 얻어 온, 살이 두툼한 돼지등뼈로 우거지 잔뜩 넣고,

감자 둥실 띄워서 깻잎이랑 들깨 듬뿍 뿌린 된장 냄새 구수한 감자탕을 해먹었습니다.

뜨거울 때 간을 보면 실패를 하기 쉬운데

급한 마음에 먹어보고 싱겁다고 된장을 더 넣었더니

너무 간이 세져버렸습니다.



물을 부으면 괜찮다고 딸이 망쳐버린 감자탕 위로

자연스럽게 물을 넣어 다시 끓이시는 우리 아버지 사랑으로

간이 센 감자탕도 제자리를 잡아 적당한 간으로

알맞은 맛으로 한끼 저녁을 훌륭하게 때워주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내게 간이 되어 주시는 우리 아버지

어디 한 군데 짠 구석은 없는지,

너무 싱거워 골마지 끼지는 않는지 늘 노심초사하시는 우리 엄마

두 분 덕에 내 인생은 아직까지 적당한 간을 맞춰 살고 있습니다만

이제는 스스로 간을 볼 줄도 알아야 하는 나이인지라

열심히 간을 보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려한 오독



- 임영조



장마 걷힌 칠월 땡볕에

지렁이가 슬슬 세상을 잰다

시멘트 길을 온몸으로 긴 자국

행서도 아니고 예서도 아닌

초서체로 갈겨쓴 일대기 같다

한평생 초야에 숨어 굴린 화두를

최후로 남긴 한 행 절명시 같다

그 판독이 어려운 일필휘지를

촉새 몇 마리 따라가며 읽는다

혀 짧은 부리로 쿡쿡 쪼아 맛본다

제멋대로 재잘대는 화려한 오독

각설이 지렁이의 몸보다 길다

오죽 답답하고 지루했으면

隱者가 몸소 나와 배밀이 하랴

쉬파리떼 성가신 무더위에

벌겋게 달아오른 肉頭文字로.



***

내가 살면서 하는 잘못 중 가장 큰 것

오독이다.

사람의 말을 잘못 읽고

사람의 글을 잘못 읽고

풀의 말을 잘못 읽고

하늘의 말을 잘못 읽고

땅의 말을 잘못 읽고

동물의 말을 잘못 읽고



그리하여,

사람 사이에 오해를 낳고

좋은 글을 터무니없이 깎아내리거나

반대로 허접쓰레기를 좋다거나 하는 일이 생기고

풀에게 너무 많은 물을 주거나 너무 안 주거나 해서 죽이게 되고

비가 올 것 같다 우산을 준비한 날은 하루종일 우산을 끌고 다니고

멀쩡하다 읽고는 비를 맞는 일이 생기고

밟으면 안 되는 곳을 밟고 서서 동티가 나거나

쉬게 해달라는 땅속에 뭔가를 박아두거나

개가 귀찮다고 저리 가라는 말을 못 알아들어 물리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무지하게 오독이 난무하는 내 삶이 여지껏 유지되는 건

나 못지않게 오독을 해대는 이들이 많아

서로 위안받고 살기 때문이다

정말 다행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동양 최고의 의서라는 <동의보감>은 심장에 대해

"아주 지혜로운 사람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 있고 털이 세 개 있으며,

중간 정도 지혜로운 사람은 구멍 다섯에 털 둘, 지혜가 얕은 사람은 구멍 셋에 털이 하나 있다"

보통 사람의 심장에도 구멍이 둘이라고 한다. 하지만 '털은 없다'고 동의보감은 설명한다.

 

한겨레 '유레카' 코너를 읽다가 생각난 건데

양심에 털 난 사람들은 자신이 지혜가 많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듯하다.

양심에 털 난 사람들이 너무 많다보니, 다들 산으로 올라가려고 한다. 왜들 그리 잘나셨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