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임영조

옥상에 널린 빨래가
다냥한 햇볕 받아 눈이 부시다.
오랜만에 사람을 벗어버리고
찌든 때를 씻어내고 냄새도 털고
날아갈 듯 가볍게 펄럭거린다

이제는 각자 옷 그만 두고
새나 되어 훨훨 날아가겠다는 듯
온 하루 빨랫줄을 잡고 흔든다
바람이 부추기면 신바람이 나는지
쩔쩔매는 바지랑대 혼자 바쁘다

주인의 흉허물을 싸고돌던 한통속
백주에 속속들이 드러나면 저렇게
서로 다른 색깔로 아우성칠까
자중지란 난파된 갑판에 서서
수기를 흔드는 보트 피플들 같다

다시 보면 가을 운동회 날
하늘에 나부끼던 만국기 같은
저 옥상에 넌 빨래를 보면
아직 덜 마른 내 마음이 무겁다
사람도 때를 씻고 무게를 덜면
저렇듯 깨끗하고 가벼울 수 있다면
제멋대로 부시게 펄럭일 수 있다면

젖은 빨래처럼 몸 무거운 날
나도 눅눅한 마음 꼭 짜 널고 싶다
한 점 얼룩 없는 백기로 펄럭
내 멋대로 세상에 나부끼고 싶다

**
감기 덕분에 호흡이 부자유스러운 걸 느꼈습니다.
이쯤 되면 먼지 켜켜이 앉은 가습기를
장롱 위에서 꺼내야 하지만
지난 겨울 그걸 틀었다가
벽지에 곰팡이가 생긴 뒤로 친해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 늦은 저녁에 드드드디리리 거리며 빨래를 하고 있습니다.
감기는 온도보다 습기 때문이라는데 빨래로라도 습도를 맞춰야지요
사실 내일 아침이면 우리 어머님한테 한 소리 들을 겁니다.
빨래는 햇볕을 받으며 말려야 한다고 말이죠.

저도 사실은 햇볕에 보송보송하게 마른 빨래의 감촉이 좋습니다
어릴 적 살던 집에는 마당이 제법 넓어서
커다란 다라(이건 왜 적당한 표현이 없는지)에
펌프질을 해가며 시원스레 빨래를 하고
꼭 짜지 않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가지들을 척척 걸쳐놓고
바지랑대로 대충 중심을 잡아 놓기만 해놓아도
요즘 같은 이런 볕이면 뚝딱 마르는데 그 까칠하고 바삭바삭한 느낌이
햇볕을 옷 안에 고스란히 담아둔 것처럼 따스해서
얼른 그 옷으로 바꾸어 입기를 소원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너무도 조용한 시각인지라 세탁기 소리가 참으로 요란합니다.
지금 마지막 코스를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은 뻥 뚫린 코를 위해 약간의 섬유 린스도 넣었습니다.
‘화려한 로즈향’이랍니다. 무얼 넣어도 햇볕 냄새만은 못하겠지만
아쉬운 대로 꽃향기 속에서 잠이 드는 기분도 그리 나쁘진 않겠지요?

다 되었다고 노래를 합니다그려.
기분에 따라 수시로 음악이 바뀌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슈베르트의 숭어입니다. '이렇게 맑은 물에 숭어가 잡힐까?'
더 떠들기 전에 끄고 널어야겠습니다.
참, 이 빨래들은 주인의 몸을 떠나 세탁기 안을 빙빙 도는게
여행같은 느낌이 들었을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와집 한 채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
완전범죄를 꿈꾸는 범인 하나가
자신의 행적을 지우려 눈밟은 길을 지워가듯
그렇게 길을 지워 내가 있는지 나도 모르게
산골 어딘가 틀어박혀 있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설령, 단 하루도 못 있고 사람들이 그리워 문명이 그리워
미쳐버릴 지라도...
이 시는 가끔 가을이라는 계절에 시달릴 때쯤
내 눈앞에 나타나 나를 흔들고 가는 시입니다.

우리가 갔던 산음이 생각납니다.
여전히 산음은 조용하고, 공기 맑고 낙엽송이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바람에 꽃비처럼 떨어지던 황금빛 낙엽송 이파리들.
돌아와 그것이 추억이 되면 훨씬 아름다운 법인지
비석치기 하면서 깔깔대던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지던
그 녀석들 지금 보이는 듯 합니다. 

굴참나무.
그 숲에도 무시무시한 고문위원이 있었던지
몸에 온통 굵게 굵게 채찍질 모습이 그대로 남은 나무
그 나무로 너와집을 만든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워낙 뒷전에서 딴짓을 하느라 잘은 못 들었지만요.

우리는 일생 무언가에서 연결 고리를 찾느라 시간을 보냅니다.
너와 나의 고향을 찾고, 학교를 찾고, 동네를 찾고
취미를 찾고, 심지어 머리 길이, 좋아하는 색깔, 운동,
음악, 미술 등등..
어떻게든 연결을 지어 나 혼자가 아니란 걸 깨달아야
안심을 하는 모양입니다.
저도 지금 그 짓을 했습니다.
너와집, 산음, 굴참나무..

또다시 지금은
나와 가을을 같은 방향에서 바라보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노독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고단하다
내가 고단해서 그리 보일 테지만 길도 분명 한숨을 쉬고 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길을 통해 집으로 갔으랴
무거운 발걸음으로 인해 길은 점점 더 땅속으로 파고 든다
그리하여 그리도 자주 아스팔트 보강 공사를 하는 거겠지

어제 못 잔 탓인지 집으로 오는 길이 유난히 힘들었다
꾸벅꾸벅 졸다가 마을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오는 약 100미터가 그리 길 수 없었다
길이 구부러지며 울퉁불퉁해지며 내게 그러더군
"야, 임마..몸무게 줄여"
터벅터벅 걷는 발걸음이 마음에 안 든 모양이다
하기야, 늦은 저녁을 위에 넣고 있었더니 무거운 게지
허둥지둥 소화를 시키려고 뱃속이 갑자기 꾸루룩 거리기 시작한다
길이야 뭐라고 하건 말건 조용히 있을 일이지.
이 놈들은 주인인 나보다 길이 무서운가 보다.

마지막 발걸음 끝에 길에게 나는
내일은 길너머를 그리워하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반드시 길 위에서만 그리움을 갖고 있겠노라고 다짐했다
그걸 위안으로 들은 걸까
길은 내게 집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지금 난 무사히 집에 들어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튀밥에 대하여
-안도현

변두리 공터 부근
적막이며 개똥무더기를 동무 삼아 지나가다 보면
난데없이 옆구리를 치는 뜨거운
튀밥 냄새 만날 때 있지
그 짓 하다 들킨 똥개처럼 놀라 돌아보면
망할놈의 튀밥장수, 망하기는커녕
한 이십 년 전부터 그저 그래 왔다는 듯이
뭉개뭉개 단내 나는 김을 피워올리고
생각나지, 햇볕처럼 하얀 튀밥을
하나라도 더 주워 먹으려고 우르르 몰리던
그때, 우리는 영락없는 송사리떼였지
흑백사진 속으로 60년 대며 70년 대 다 들여보내고
세상에 뛰쳐나온 우리들
풍문을 듣고 있지, 지금 누구는
나무를 타고 오른다는 가물치가 되었다 하고
누구는 팔뚝만한 메기가 되어 진흙탕에서 놀고
또 누구는 모래무지 되고 붕어도 잉어도 되었다는데
삶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제대로
나는 가고 있는지, 가령
쌀 한 됫박에 감미료 조금 넣고
한없이 돌리다가 어느 순간 뻥, 튀밥을 한 자루나 만들어 내는 것처럼
순식간에 뒤집히는 삶을 기다려오지는 않았는지
튀밥으로 배 채우려는 욕심이 크면 클수록
입 안에는 혓바늘이 각성처럼 돋지
안 먹겠다고, 저녁밥 안 먹겠다고 떼쓰다
어머니한테 혼나고 매만 맞는 거지


**
요즘은 먹는 일에 무지하게 집착을 하는 듯 보인다.
하얀 튀밥.

내가 살던 옛집에는 다락이 있었다.
내가 사랑해마지않던 공간.
잡동사니가 가득 채워진 그곳을 깨끗이 치우고
거길 내 방으로 명명했었지.
퀴퀴한 냄새가 나기도 하고,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면 쥐도 간간 돌아다니는.
거긴 내 낮잠 공간이기도 하고, 책을 읽는 도서관이었으며
되지도 않는 시를 짓는 작업실이기도,
겨우내 떨어지지 않는 사과궤짝과 귤 박스 등속이 자리잡은 곳이었다.
그리고 튀밥도..
하얀 튀밥을 소쿠리에 가득 담아 혀로 핥아 먹는 맛이란.
처음엔 숟가락으로 퍼먹기도 하다가
두 손 가득 퍼먹다가 질리면 그렇게 혀로 핥아 먹었다
예외없이 입안이 깔깔해지고
여기 시처럼 엄마한테 밥 안 먹는다고 꾸중 듣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튀밥은 끊이지 않은 걸 보면
그 시절 간식거리가 별로 없던 걸 엄마도 이해한 것 같다

하도 쓸고 닦고 해서 반들반들 하던
다락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
그 계단이 튀밥과 함께 떠오른다.

오늘, 이른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골목 어귀 세워진 튀밥 장수 아저씨의 수레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하얀 튀밥이 쏟아져 나왔다
달려가 한웅큼 집어 입 속으로 털어 넣고 싶은 유혹을 간신히 참으며
돌아섰다. 아쉽다.

로또에 대한 꿈을 아직 접지 않은 나는
내 삶이 튀밥처럼 부풀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얀 김이 무럭무럭 나며 '주인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렇게 묻는 지니를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징어
-박라연

나도 살아 있는가
내가 내 염기를 확인하고 싶을 때
그때 나는 너를 씹는다
세상의 가시나무가
단지 가시의 기분 하나로
천성이 부드러운 잎새를 흔들 때
그때 우리는 뼈 없는
오징어 너나 씹는다
씹을수록 쓸쓸한 나그네살이
더 이상 씹을 것이 없을 때
씹는다 바다에 두고 온
그대 삼각의 고뇌까지도


***
오징어 먹을 때 귀때기는 사실 먹지 않는다
다른 곳보다 조금 더 짜기도 하려니와
뭐랄까..오징어가 아닌 다른 것을 먹는 듯한 분위기가 난다.
이를테면, 치맛단 같은..

어제 만두를 만들다가 남은 속으로 완자를 만들어 먹었다
김치, 두부, 고기, 계란, 숙주나물 들이 들어간 완자는
아이들에게 더 인기가 있다.
평소에 김치를 즐겨먹지 않던 우리 아들도 아이들과 더불어
왁자지껄 먹느라 정신이 없다.
어떻게 하면 한 개라도 더 먹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우리들(나와 내동생들)은
씨익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쁜 놈들. 지들 입 속으로 뭐 하나 넣기를 왜 그리 힘들어하는지..

부침을 만들 땐 늘 그렇지만
이번에도 역시 부침옷으로 쓰인 계란이 남았다
재료들이 들락거려 그 맛까지 배어버린 계란은 부쳐 놓아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오징어 귀때기처럼.
슬그머니 드시는 건 역시 우리 엄마다.
아이들이 먹지 않는 걸 거둬드시는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참, 이상하지.
난 아들이 먹다 남긴 것도 절대로 안 먹는데
게다가 맛있는 건 나부터 챙겨 먹는데..
이러니, 좋은 엄마가 될 턱이 있나
무늬만 엄다다. 그래도 아들 입에 뭐 들어가는 건 흐뭇하다. 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