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의 새로운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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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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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아버지의 해방일지

◎ 지은이 : 정지아

◎ 펴낸곳 : 창비

◎ 2022년 12월 28일, 초판 20쇄, 268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이 책이 작년 서점가를 잠식했을 때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표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고 두 번째는 제목 때문이다. 손석구가 나와서 좋았는데 내용이 엉망으로 흘러가더니 나중에는 짜증이 났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연상된 탓이다. 내게는 일종의 동류로 취급되어 보기도 전에 삭제된 꼴이다. 그랬는데 이웃들이 하나둘 좋다는 평이 나왔고 결정적으로 친구가 올린 리뷰가 나를 움직였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7쪽

첫 문장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와, 이게 뭐지? 아버지가 죽은 것은 특별할 게 없으나(인간이면 누구나 죽음을 맞게 되어 있으므로) 그 뒤를 따라 붙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가 인상적이다. 머리를 '부딪혀서'가 아니라 '박고'란다. 분명 의도했다는 얘긴데 무슨 이유일까 궁금증을 유발하는 아주 영특한 출발이다.

두 장을 넘어가기도 전에 나는 환호했다. "새농민이 원제 김을 매라고 하면 풀이 암만, 허고 그때꺼정 잘도 지둘레주겄소. 새농민이 뭐라거나 말거나 풀이 나먼 난 대로 뽑아야제, 워디 농사가 문자로 지어진답디까?" (8쪽) 농업잡지 <새농민>의 정보에 따라 농사를 짓는 아버지를 향한 어머니의 일갈이다. 언뜻 이기호가 떠오른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구례에서 태어났다는 작가소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구례, 내가 좋아하는 곳인데!

말이 살아있는 글은 마음을 잡아챈다. 사투리를 쓰지 않는 지역에서 오래 살아온 나는 태생적으로 주어져야 했을 뭔가를 빼앗긴 기분이 들어 억울하다. 마치 사투리를 쓸 줄 알면 사람 마음을 더 잘 표현할 수 있고, 그만큼 글을 더 잘 쓸 수 있기라도 하듯 말이다. 그런 나에게 오늘 <다산, 어른의 하루 일력>이 한방 먹인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마음부터 수련해야 한다."라고. 흥.

시작은 아버지가 죽었다, 인데 죽음에 따르는 무거움 없이 무심하게 지난 날들을 회상하고 있어 박장대소를 하며 읽었다. 특히나 자신을 묘사하는 부분에 이르면,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인물일까 궁금증이 더해진다.

학교에서나 관공서에서나 고아리, 내 이름을 말하면 아유,

이름이 참 예쁘네, 얼굴도 참……하면서 나를 쳐다보았고

이내 말줄임표가 뒤따랐다. 나는 아리라는 이름 따위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딱 벌어진 어깨에 소도 때려잡을 듯 강건한

육체를 지닌, 그러니까 혁명전사의 딸에 참으로 걸맞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흔한 경숙이 혜숙이 같은 이름이었다면 감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당황과 모멸의 순간을, 나는 당신들의 청춘을 기념하고자 했던 부모 덕분에 어쩔 수 없이

감당하며 살아왔고, 살아내는 중이었다.

30쪽

이렇게 신나게 웃기던 그녀가 예상치 못한 순간들에 급소를 겨낭해서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든다.

"신우형, 복례누이, 복희누이, 상욱아. 총을 쏠 때마다 손이 떨려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네. 총구를 하늘로 겨눠도 재수 없으면 떨어지는 내 총알에 누군가 죽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 누구도 내 총에 죽는 일만 없기를 날마다 기도한다네. 부디 살아서 돌아오시게. 살아서, 꼭 살아서, 다시 만나세." (49쪽)

형이 아버지와 빨치산 동료였던, 자신은 수도사단 소속으로 지리산에 파견된 박선생이 비닐에 꽁꽁 싸서 미군 전투 식량과 함께 묻어두었던 편지다.

-아버지는 난생처음, 자식에게 돈을 요구했다. 고작 삼만원을. 자식이든 남이든 절대 신세 지지 않는다는 평생의 원칙을 깨뜨리게 만든 것이 고작 삼만원, 이것이 늙은 혁명가의 비루한 현실인 것이다. 삼십만원을 보냈다. 이 정도가 이 대학 저 대학 기웃거리는, 늙은 혁명가보다 나을 것 없는 빨치산의 딸의 비루한 현실이었다. (54쪽)

사회주의자인 부모 밑에서 자란 아리, 빨치산의 딸이라는 이름을 쓰고 연좌제에 묶여 고통을 받아야 했던 그녀와, 친척들의 아픔은 또다른 작가를 불러냈다.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는 작가에 이름을 올린 이문구와 김성동. 그들도 연좌제로 인해 아픈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이다.

“빨갱이 새끼…. 그렇다. 나는 사람들이 침뱉고 발길질하고 그리고 아무나 찢어죽여도 좋은 빨갱이 새끼였던 것이다. 나는 왜 빨갱이 새끼로 태어났을까. 그때처럼 아버지가 미웠던 적도 없다. 아버지는 어쩌자고 사람들이 침뱉는 빨갱이가 되어가지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풀기 빠진 헛바지처럼 주눅들게 만드는 것일까….”(김성동, <엄마와 개구리>

그러나 시대가 변해서일까. 연좌제로 사랑하는 사람과도 헤어져야 했던 아리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여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어릴 때 엄마보다 아버지를 더 좋아했던 그 소녀는 아버지가 감옥에 간 후 사이가 틀어져버렸지만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남아 있는 듯하다.

-그런데 기실 어머니의 사회주의란 첫사랑, 좀 더 풀어쓰자면 여자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세상, 가난한 자도 인간 대접받는 세상에 불과했다. 신자유주의 대한민국도 그 정도는 해준다. 그러니까 어머니에게 사회주의란 그저 지나간 첫 남자가, 지나갔음으로 가장 그리운, 뭐 그런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21쪽)

-"자네 혼차 잘 묵고 잘 살자고 지리산서 그 고생을 했는가? 자네는 대체 뭣을 위해서 목심을 건 것이여!" (61쪽)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 아버지는 잘 못 참는 사람이다. (68쪽)

-아버지는 십대 후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여든둘 된 노동절 새벽,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짊어졌다. (76쪽)

-한편으로 아버지는 입만 열면 옳은 말하는 잘나고 똑똑한 양반, 또 한편으로는 잘나서 빨갱이짓 하다가 집안 말아먹은 양반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고씨 집안의 자랑인 동시에 고씨 집안 몰락의 원흉인 것이다. (90쪽)

-아버지는 백운산에 가장 오래 있긴 했지만 이산 저산 떠돌며 48년 겨울부터 52년 봄까지 빨치산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사년뿐이었다. 고작 사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옥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252쪽)

자신의 집 일보다는 동네 일을 먼저 처리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죽었다. 장례식을 치르면서 아리는 아버지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181쪽)

그리하여, '빨치산의 딸이라는 천형에 가난까지 물려받은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한데 빨치산이 입은 세상의 온갖 은혜까지 물려받고 싶지'. (187쪽) 던 아리지만 아버지와 관계를 맺었던 수많은 이들을 만나면서 아버지의 세상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바짓가랑이에 붙은 먼지 한톨조차 인간의 시원이라 중히 여겨 함부로 털어내지 않았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마침내 그 시원으로 돌아갔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참으로 아버지답게. 마지막까지 유머러스하게. 물론 본인은 전봇대에 머리를 박는 그 순간에도 전봇대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민중의 한걸음, 한걸음이 쌓여 인류의역사를 바꾼다는 진지한 마음으로 아버지는 진지하게 한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다만 거기, 전봇대가 서 있었을 뿐이다. 무심하게, 하필이면 거기. 이런 젠장. (16쪽)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249쪽)

결국 아버지의 유골은 수목장하려던 것을 변경하여 평생 살아온 반내골 노인정 앞에, 젊은 시절 뛰어다니던 개울에, 오거리 슈퍼 앞에, 고등학교 아이와 맞담배를 태우던 골목에, 시간을 죽이던 삼오시계방에, 술을 마시러 갔던 하동댁 가게가 있던 자리에 뿌린다.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며 돌아다니시라고, '아버지의 유골이 강가 높은 바위 어딘가 딱 달라붙어 황톳물 무시무시 넘실거리는 날, 그 황톳물에 실려 새 길을 열어젖히기를.'(260쪽) 바라면서.

개관사정(蓋棺事定)이라던가. 사람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된다고 했다. 살아서 빨치산이었던 아버지는 죽은 뒤 사람들 마음속에 '좋은 사람'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인연은 아리에게 또 좋은 인연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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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푸른숲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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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 지은이 : 슈테판 츠바이크

◎ 옮긴이 : 안인희

◎ 펴낸곳 : 푸른숲

◎ 2022년 12월 27일 첫판 14쇄, 691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알쓸인잡'에서 작가 김영하가 이 책을 언급했을 때 두 번 생각해보지도 않고 바로 구입했다. 전기작가로서의 츠바이크가 대단하다는 이야기는 몇 번이고 들었던 것이니, 이 책을 통해 또다른 그를 만나볼 기회로 삼아야 했다. 그리하여 단편소설가로서의 츠바이크를 애정하는 내게 이 책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또다른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중요한 건 700쪽에 가까운 이 책이 소설만큼 재미있다는 것이다. 발자크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가 말하는 것을 녹음하고, 그의 활동을 카메라로 담은 것 같이 생생하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책은 미완성이다. 1945년 12월, 그의 친구였던 리하르트 프리덴탈이 슈테판 츠바이크의 원고들을 정리하며 책을 낸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작품의 스타일과 분위기를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간혹 페이지들이나 삽입문들이 빠져 있는 경우에는 예전의 판본들이나 그가 남긴 작업부분에서 찾아서 보충했다. 거친 구상으로만 남아 있는 마지막 장들은 내가 고쳐 썼다. 그밖에도 나는 앞에 언급한 별책과 쪽지와 메모들에 들어 있는 광범위한 자료들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츠바이크가 인용한 발자크 판본들에서 도움을 구했다.' (686쪽)

이 작품은 광범위하게 구상되었고, 그는 때때로 두 권짜리 책이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발자크의 ≪인간희극≫작업과 마찬가지 사태가 벌어졌다. 이 작업은 끝을 보지 못한 것이다. 발자크의 작품과 기록에서 그의 침착하지 못한 어떤 요소가 평전(評傳) 쪽으로도 전염되었던 것 같다.

683쪽

좋아하면 닮는다더니 이런 것까지 닮을 줄이야. 아무튼 츠바이크가 죽은 뒤 친구인 리하르트는 성실하게 일을 해주었고 그 결과 우리는 훌륭한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리하르트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츠바이크의 평전 중 최고라고 평한다는 이 책을 놓쳤을 게 아닌가. (이래서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

츠바이크에 대한 리하르트의 애정도 그렇지만 발자크에 대한 츠바이크의 애정도 대단하다. 이런 애정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근사한 평전은 아마도 나오지 못했으리라. 이 책 전체가 그를 위한 찬가이나 (물론 비뚤어진 애정을 과시하지는 않는다. 잘못도, 아쉬움도 빠지지 않았다.)두드러지는 몇 가지를 꼽아보자면,

-돈을 벌기 위해 그는 소설공장을 가동시켜 자신의 이름과 야망을 팔았다. 주문하는 대로 생산하는 글들은 저질이었다. '이 모든 일이 오로지 자신감의 결핍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 자신의 내적인 소명을 전혀 짐작도 못한 데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린다. (96쪽)

-뒷계단 문학의 뻔뻔스러움,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음, 심각한 감상주의는 발자크 소설에서 완전히 떨어져나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문필업 공장 시대에 버릇이 된 저 유동성, 날조, 유들유들함은 그의 문체에 치명적인 것으로 남았다. (96쪽) 그리고 그 결과는 이렇게도 나타났다. '어떻게 해서라도 식품창고로 뚫고 들어가려고 애쓰는 굶주린 들쥐의 식품창고의 유혹적인 향기가 자신의 내장 속까지 타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극단적인 노력도 그를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게 해주지 않았다.' (103쪽)

-진짜 발자크는 20년 동안 수많은 희곡, 단편소설, 기고문들 말고도 거의 모두 극히 중요한 74개의 소설들을 썼고, 이 74개의 소설들 안에서 수많은 풍경들, 집들, 거리들과 2천 명의 인물들을 가진,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낸 바로 그 사람이었다. (235쪽)

-그의 동시대 사람들 중 누구도 그의 진짜 본질을 알지 못했다. 동화 속의 유령들이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은 이 지상세계를 오직 한 시간 동안만 그림자처럼 스쳐지나갈 수 있듯이, 발자크에게도 오직 짧은 순간만 자유의 숨결이 허용되어 있었을 뿐, 그는 언제나 다시 노동의 감옥 속으로 되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260쪽)

-그것은 이미 쓰인 소설들과 나란히 아직 쓰이지 않은 소설들을 하나 하나 거론하고 있으며, 그것을 읽고 있노라면 소포클레스의 사라져버린 희곡들과,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목록들을 읽을 때 못지않은 슬픔을 느끼게 된다. (564쪽)


 

발자크는 그럭저럭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미란 사람이 낳자마자 집밖으로 내보내 만 네 살이 될 때까지 돌봐주지도 않고, 돌아와서도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눈치를 보게 하고, 일곱살이 되었을 때는 기숙학교로, 다시 돌아온 뒤에도 어머니의 냉대 속에 힘들게 생활하다가 열여덟의 나이에 집을 나가게 된다. 어머니가 나이 차 많은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오노레와 동생은 미워하고 애인이었던 마르곤 씨와의 관계에서 낳은 두 아이에게만 애정을 가졌다는데 참으로 어미 자격 없는 사람이다.

만약 어릴 때 양친의 사랑을 듬뿍 받았더라면 그가 나이 많은 여인들에게서 애정을 갈구했던 것이나, 남들 눈을 찌푸리게 만들었던 생활패턴 같은 것들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발자크가 스물두 살에 만난 드 베르니 부인은 마흔 여섯이었다. 어쩌면 어린시절 내내 냉담했던 어머니를 대신할 사람으로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마흔 살의 여자는 당신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스무 살 여자는 아무 일도 안 한다.'(127쪽)


-그녀는 내게 어머니, 여자친구, 가족, 동반자, 충고자였다. 그녀는 나를 작가로 만들었고, 젊은 나를 위로해주었으며, 내게 취향을 마련해주었고, 누이처럼 함께 울고 웃었다. 그녀는 언제나 고통을 진정시켜주는 선량한 꿈처럼 나타났다…….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124쪽)

-특히 누구보다 좋은 친구인 쥘마 카로는 몇 번이고 그에게 차라리 금장식이 달린 펜 깎는 칼과 보석이 박힌 산책용 지팡이 따위 몇 가지를 포기하고, 그렇게 지나치게 성급한 생산으로 골수를 손상시키지 말라고 충고하곤 했다. (403쪽)


-일에 녹초가 되고, 의무에 시달리고, 빚에 억눌리고, 언제나 다시 '폭풍우 같은 삶'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면서 그는 끊임없이 자기에게 어머니, 누이, 애인, 도움의 손길이 되어줄 여자, 드 베르니 부인이 형성기에 해주었던 역할을 해줄 여자를 찾고 있었다. 언제나 다시금 찾도록 만든 것은 모험 욕구도, 감각성도, 에로티시즘도 아니었고 정반대로 정열적인 휴식의 욕구였다. (201쪽)

-수많은 사람들과 일시적으로 알고 지냈지만 발자크는 서른 살에 이미 완성된 내면적인 인간관계를 더이상 확장하지 않았다. 오직 단 한 명의 인물, 한스카 부인만이 뒷날 여기 덧붙여져서 그의 생애의 중심점이자 진정한 심장이 되는 것이다. (222쪽)

사랑과 마찬가지로 그의 삶은 엉망이었다. 정열적으로 일을 한 만큼 돈이 따라주었다면 그가 평생 빚쟁이들을 피해 다닐 일도 없었을 텐데, 투자와 사업에 대한 근거없는 자신감이 그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럴 때는 신은 공평하다고 해야겠지? 그토록 훌륭한 작품을 주는 대신에 형편없는 경제감각을 그에게 주었으니.

-3년 동안의 사업가 활동에서 얻게 된 10만 프랑의 빚은 그에게 시시포스의 돌이 되었다. 그는 일생동안 근육을 거의 망가뜨리면서 이 돌을 꼭대기로 굴려올리곤 했지만, 언제나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생애 최초의 이 잘못은 그를 언제까지나 채무자로 남도록 운명지었다. (152쪽)

-그는 돈을 버는 법과 잃는 법, 소송을 거는 법과 경력을 쌓는 법, 낭비하는 법과 절약하는 법, 다른 사람을 속이는 법과 자신을 속이는 법을 알았다.'(154쪽)

-운명은 그의 안에 있는 정치가가 자신의 재능을 장관실에 팔아넘길 가능성을 차단하였고, 사업가 발자크가 투자를 통해서 꿈꾸던 재산을 얻을 기회를 거절하였으며, 그가 추구하던 부유한 과부들이 그에게로 갈 길을 모두 가로막았다. 운명은 초기에 그가 가졌던 언론계에 대한 정열을 모든 신문잡지에 대한 혐오감과 구토로 바꾸어버렸다. 그를 되쫓아보내 책상 앞에 붙잡아두기 위해서였다. 이 책상에서부터 그의 천재성은 의회, 증권거래소, 우아한 소비생활의 좁다란 영역이 아니라 전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183쪽)

-아직 쓰이지도 않은 소설들이 언제나 미리 팔리고 저당에 잡혀 있었다. (248쪽)

-글을 쓰는 손인 오른손이 끈질기게 되취된 듯이 빠른 속도로 일한 것을, 낭비하는 손인 왼손이 마구잡이로 없애버렸다. (391쪽)

-발자크가 자신의 환상을 작업으로 바꾸면 그 환상은 그에게 수십만금과 그밖에도 불멸의 작품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가 환상을 돈으로 바꾸려고만 하면 빚만 쌓이고, 그 결과 수십 배, 수백 배의 노동이 대가로 돌아왔다. (482쪽)

-그는 시계며 도자기, 그림들, 가구들만을 수집한 것이 아니라 삶이 자기에게 거절한 것도 수집하였다. 한가한 시간들, 여자와의 산책, 이국의 풍경 속에서 아무에게도 위협받지 않는 긴 사랑의 밤들, 귀족 숭배자들의 경탄 등이었다. (605쪽)


 

대책없는 인물이었던 그는 어떤 이미지를 남겼을까?

-그는 굵은 허리를 한 키가 작은 젊은 남자였다. 재단이 나쁜 옷을 입은 결과 그의 허리는 더욱 굵어보였다. 모자는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그것을 벗고 그의 얼굴이 나타나자마자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오직 그의 얼굴만을 보았다. 그를 보지 못한 사람은 전혀 짐작할 수 없다. 그가 어떤 이마와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온통 광채로 뒤덮인 넓은 이마, 달변만큼이나 인상적인 황금빛 도는 갈색 눈, 코는 두텁고 네모졌고, 입은 엄청나게 컸고, 상한 이를 가지고 있음에도 언제나 웃느라고 벌어졌다. 두둑한 콧수염을 기르고 머리카락은 매우 길어서 어깨 너머로 떨어져내렸다. '(169쪽)

-그에게 푸른 앞치마를 둘러주고 남프랑스 어떤 술집의 판매대 뒤에 세워놓고 보면 이 선량하고 쾌활한 남자를, 손님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그들과 유쾌하게 지껄여대는 글도 못 읽는 술집 주인과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194쪽)

-농부의 손자이자 시민의 아들이고 구제불능 천민인 발자크는 신체의 생김새만 해도 귀족적인 풍모나 태도를 희망할 수 없는 처지였다. 궁정 재단사 뷔송도, 황금단추들도, 뾰족한 주름장식도 이 건장하고 살찐 붉은 뺩을 가진 천민, 큰소리로 말하고 대포알처럼 모임으로 뛰어들어오는 이 사람에게 고귀한 겉모습을 만들어줄 수는 없었다. (228쪽)

연예인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꽤 괜찮은 사람 같은데 조금만 자제하거나, 자신을 가꿀 줄 알면 참 좋을 텐데 하는. 발자크도 그랬던 것 같다. 낭비벽이 조금만 없었더라면, 광대짓을 하는 걸 그만 뒀더라면, 잘 알지도 못하는 사업에 뛰어드는 일은 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그것이 모두 발자크인 것을 어쩔 것인가. 츠바이크의 말대로 고난 속에서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냈으니 그런 고난이 있었다는 것이 다행일밖에.

-분수의 물처럼 생각들이 내 이마에서 떨어져 내려와야 한다. 그것은 완전히 무의식적인 과정이다. (237쪽)


 


-종이와 펜 말고 그는 세 번째 작업도구인 커피 포트를 어디든 가지고 다녔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커피 만드는 일을 맡기지 않았다. 이것은 누구도 이 검은 독성 물질을 그토록 채찍질하는 강도로 준비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244쪽)

-오랜 심장병. 그것은 밤의 작업과 커피의 사용 혹은 남용을 통해서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자연적인 인간이 가지는 잠의 욕구를 이겨내기 위해서 커피로 도피해야 했다. (247쪽, 친구이자 의사였던 니카르가 밝힌 사망원인)

발자크는 1850년 8월 18일과 19일 밤 사이에 죽었다. 그의 어머니만이 곁에 있었다. 발자크가 마지막까지 공을 들여 결혼에 성공했던 한스카 부인은 그에게 냉담했다. 그녀는 그보다 그가 보낸 편지를 더 좋아했던 것이다. 만일 그녀가 발자크에게 드 베르니 부인처럼 헌신적인 사랑과 재물을 주었더라면 그는 좀 더 오래 살았을까? 그와 뒤늦게 친구가 되었던 빅토르 위고가 조사를 읽는 가운데 발자크는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빅토르 위고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시대에는 온갖 허구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됩니다. 눈길들은 지배자들의 머리를

향하지 않고 정신적인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 중 하나가 사라지면 온 나라가 진동합니다. 민족의 장례식이지요. 오늘 재능을 가진 한 남자의 죽음을 보는 고통입니다. 국가적인 장례식이지요. 천재의 작별을 슬퍼함입니다. 발자크라는 이름은, 신사 여러분, 미래에 우리 시대를

알리는 빛나는 흔적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664쪽)

이런 마음가짐이 있었기에 그 무수한 고난 속에서도 장난기가 발동했고, 다시 일어나 훌륭한 작품을 썼으리라. 예전에 읽었던 『고리오 영감』이나 『골짜기의 백합』도 다시 읽고 싶고, 츠바이크가 최고라고 극찬했던 단편들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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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칵 눈물이 나더니 멈추지 않는다. 난감하다.

아버지는 난생처음, 자식에게 돈을 요구했다. 고작 삼만원을, 자식이든 남이든 절대 신세 지지 않는다는 평생원칙을 깨뜨리게 만든 것이 고작 삼만원, 이것이 늙은혁명가의 비루한 현실인 것이다. 삼십만원을 보냈다. 이정도가 이 대학 저 대학 기웃거리는, 늙은 혁명가보다 나을 것 없는 빨치산의 딸의 비루한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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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말 혹은 침묵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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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그들의 말, 혹은 침묵

◎ 지은이 : 아니 에르노

◎ 옮긴이 : 정혜용

◎ 펴낸곳 : 민음사

◎ 2022년 4월 14일 1판 2쇄, 202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끊어지고, 쓰다 말고, 뒤틀리고, 누구의 목소리인지 명시되지 않은 채 앞뒤 설명 없이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건너뛰는,

비문의 경계에 서 있는 문장들이 엉망진창 뒤엉킨 상태로 나뒹군다. 구사하는 어휘 역시 반듯한 표준어와는 거리가 멀다.

비속어, 청소년 사이에서 유행하는 은어, 준말.

옮긴이의 말 중에서. 199쪽

딱 이렇다.

이와 더불어 옮긴이는 이 작품의 매력이 '안의 서사 자체보다는 표면에서 진행되는 청소년의 실패한 첫사랑과 그 이면에서 이루어지는 실패한 글쓰기가 어우러지며 빚어내는 완벽한 이중주에 있다.'(199쪽) 라고 하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책은 지루했고, 짜증나며, 거북했다. 그래도 청소년기 아이가 겪는 성에 대한 호기심과 부모에 대한 경멸을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솔직하게 표현한 것에는 별 세 개를 얹었다.

-칙칙한 유년기 내내 '그것'만 생각했는데, 말짱 꽝이라면, 더구나 죽을 게 뻔했다면, 예를 들어 전쟁 통이라면,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 달려들었을 거다. 학교 친구들, 정 안 되면 보조 교사 프랑수아에게라도.(15쪽)

-그녀가 뭔가 흥미로운 말을 입에 올렸던 게 대체 얼마나 오래전이었던가. 7월 초에, 먹고 자고 내게 필요한 것들을 얻어낼 때를 제외하면, 사실상 어머니가 필요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32쪽)

-그들은 의심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부모란 그들이 바라는 자식의 장래 모습만을 바라보며 걷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일에 대해서 그렇듯이 졸보기가 되거나, 어쩌면 그들은 눈을 뜨기까지 시간이 필요한지도. (144쪽)

-그들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처녀를 고수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그리고 사회는 부숴 버려야 해. 난 오늘과 마찬가지로 햇볕이 침대를 비추던 어느 날 그걸, 자유를 보았는데, 그 자유라는 것, 그건 코딱지만도 못한 거였나 보다. 그들 역시 규범을 갖고 있었고, 난 그걸 몰랐다. (153쪽)

-내가 찾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7월 이래로 벌어졌던 그 모든 일이 왜 일어났는지, 왜 이제는 정말로 못 참겠는지, 이러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인데, 그런 내용은 애정 문제를 다루는 상담 편지에 나와 있지 않다. (167쪽)

가난한 가정의 모범생 안, 중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고등학교 입학을 기다리고 있는 그 기간에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남자와 자볼까. 하는 것이다. 그러다 대학생인 마티외와 경험을 하게 되면서 그 주위를 맴돈다. 그가 자신의 친구와 만났던 것을 아는 안은 자신도 마티외의 친구인 얀과 섹스를 하면서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마티외는 그녀를 남의 손을 탄 물건 취급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주인공은 집중도 못하고 수업이 어렵기만 하다. '이제는 온갖 일이 다 겁나고, 마음속에 아주 모호한 뭔가가, 마치 구름이 낀 것 같다. 작문 과제를 절대 마치지 못할 텐데, 교사는 내게 빵점을 주겠지.'(191쪽)

아니 에르노의 다음 작품『세월』이 기다리고 있는데 솔직히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아무리 노벨상을 받은 작가라지만 (그래서 훌륭한 작품인 것이 입증이 되었겠으나) 내 취향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는 어떤 것도 내게 울림을 주지 못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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