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푸른숲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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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 지은이 : 슈테판 츠바이크

◎ 옮긴이 : 안인희

◎ 펴낸곳 : 푸른숲

◎ 2022년 12월 27일 첫판 14쇄, 691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알쓸인잡'에서 작가 김영하가 이 책을 언급했을 때 두 번 생각해보지도 않고 바로 구입했다. 전기작가로서의 츠바이크가 대단하다는 이야기는 몇 번이고 들었던 것이니, 이 책을 통해 또다른 그를 만나볼 기회로 삼아야 했다. 그리하여 단편소설가로서의 츠바이크를 애정하는 내게 이 책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또다른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중요한 건 700쪽에 가까운 이 책이 소설만큼 재미있다는 것이다. 발자크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가 말하는 것을 녹음하고, 그의 활동을 카메라로 담은 것 같이 생생하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책은 미완성이다. 1945년 12월, 그의 친구였던 리하르트 프리덴탈이 슈테판 츠바이크의 원고들을 정리하며 책을 낸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작품의 스타일과 분위기를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간혹 페이지들이나 삽입문들이 빠져 있는 경우에는 예전의 판본들이나 그가 남긴 작업부분에서 찾아서 보충했다. 거친 구상으로만 남아 있는 마지막 장들은 내가 고쳐 썼다. 그밖에도 나는 앞에 언급한 별책과 쪽지와 메모들에 들어 있는 광범위한 자료들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츠바이크가 인용한 발자크 판본들에서 도움을 구했다.' (686쪽)

이 작품은 광범위하게 구상되었고, 그는 때때로 두 권짜리 책이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발자크의 ≪인간희극≫작업과 마찬가지 사태가 벌어졌다. 이 작업은 끝을 보지 못한 것이다. 발자크의 작품과 기록에서 그의 침착하지 못한 어떤 요소가 평전(評傳) 쪽으로도 전염되었던 것 같다.

683쪽

좋아하면 닮는다더니 이런 것까지 닮을 줄이야. 아무튼 츠바이크가 죽은 뒤 친구인 리하르트는 성실하게 일을 해주었고 그 결과 우리는 훌륭한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리하르트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츠바이크의 평전 중 최고라고 평한다는 이 책을 놓쳤을 게 아닌가. (이래서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

츠바이크에 대한 리하르트의 애정도 그렇지만 발자크에 대한 츠바이크의 애정도 대단하다. 이런 애정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근사한 평전은 아마도 나오지 못했으리라. 이 책 전체가 그를 위한 찬가이나 (물론 비뚤어진 애정을 과시하지는 않는다. 잘못도, 아쉬움도 빠지지 않았다.)두드러지는 몇 가지를 꼽아보자면,

-돈을 벌기 위해 그는 소설공장을 가동시켜 자신의 이름과 야망을 팔았다. 주문하는 대로 생산하는 글들은 저질이었다. '이 모든 일이 오로지 자신감의 결핍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 자신의 내적인 소명을 전혀 짐작도 못한 데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린다. (96쪽)

-뒷계단 문학의 뻔뻔스러움,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음, 심각한 감상주의는 발자크 소설에서 완전히 떨어져나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문필업 공장 시대에 버릇이 된 저 유동성, 날조, 유들유들함은 그의 문체에 치명적인 것으로 남았다. (96쪽) 그리고 그 결과는 이렇게도 나타났다. '어떻게 해서라도 식품창고로 뚫고 들어가려고 애쓰는 굶주린 들쥐의 식품창고의 유혹적인 향기가 자신의 내장 속까지 타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극단적인 노력도 그를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게 해주지 않았다.' (103쪽)

-진짜 발자크는 20년 동안 수많은 희곡, 단편소설, 기고문들 말고도 거의 모두 극히 중요한 74개의 소설들을 썼고, 이 74개의 소설들 안에서 수많은 풍경들, 집들, 거리들과 2천 명의 인물들을 가진,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낸 바로 그 사람이었다. (235쪽)

-그의 동시대 사람들 중 누구도 그의 진짜 본질을 알지 못했다. 동화 속의 유령들이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은 이 지상세계를 오직 한 시간 동안만 그림자처럼 스쳐지나갈 수 있듯이, 발자크에게도 오직 짧은 순간만 자유의 숨결이 허용되어 있었을 뿐, 그는 언제나 다시 노동의 감옥 속으로 되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260쪽)

-그것은 이미 쓰인 소설들과 나란히 아직 쓰이지 않은 소설들을 하나 하나 거론하고 있으며, 그것을 읽고 있노라면 소포클레스의 사라져버린 희곡들과,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목록들을 읽을 때 못지않은 슬픔을 느끼게 된다. (564쪽)


 

발자크는 그럭저럭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미란 사람이 낳자마자 집밖으로 내보내 만 네 살이 될 때까지 돌봐주지도 않고, 돌아와서도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눈치를 보게 하고, 일곱살이 되었을 때는 기숙학교로, 다시 돌아온 뒤에도 어머니의 냉대 속에 힘들게 생활하다가 열여덟의 나이에 집을 나가게 된다. 어머니가 나이 차 많은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오노레와 동생은 미워하고 애인이었던 마르곤 씨와의 관계에서 낳은 두 아이에게만 애정을 가졌다는데 참으로 어미 자격 없는 사람이다.

만약 어릴 때 양친의 사랑을 듬뿍 받았더라면 그가 나이 많은 여인들에게서 애정을 갈구했던 것이나, 남들 눈을 찌푸리게 만들었던 생활패턴 같은 것들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발자크가 스물두 살에 만난 드 베르니 부인은 마흔 여섯이었다. 어쩌면 어린시절 내내 냉담했던 어머니를 대신할 사람으로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마흔 살의 여자는 당신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스무 살 여자는 아무 일도 안 한다.'(127쪽)


-그녀는 내게 어머니, 여자친구, 가족, 동반자, 충고자였다. 그녀는 나를 작가로 만들었고, 젊은 나를 위로해주었으며, 내게 취향을 마련해주었고, 누이처럼 함께 울고 웃었다. 그녀는 언제나 고통을 진정시켜주는 선량한 꿈처럼 나타났다…….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124쪽)

-특히 누구보다 좋은 친구인 쥘마 카로는 몇 번이고 그에게 차라리 금장식이 달린 펜 깎는 칼과 보석이 박힌 산책용 지팡이 따위 몇 가지를 포기하고, 그렇게 지나치게 성급한 생산으로 골수를 손상시키지 말라고 충고하곤 했다. (403쪽)


-일에 녹초가 되고, 의무에 시달리고, 빚에 억눌리고, 언제나 다시 '폭풍우 같은 삶'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면서 그는 끊임없이 자기에게 어머니, 누이, 애인, 도움의 손길이 되어줄 여자, 드 베르니 부인이 형성기에 해주었던 역할을 해줄 여자를 찾고 있었다. 언제나 다시금 찾도록 만든 것은 모험 욕구도, 감각성도, 에로티시즘도 아니었고 정반대로 정열적인 휴식의 욕구였다. (201쪽)

-수많은 사람들과 일시적으로 알고 지냈지만 발자크는 서른 살에 이미 완성된 내면적인 인간관계를 더이상 확장하지 않았다. 오직 단 한 명의 인물, 한스카 부인만이 뒷날 여기 덧붙여져서 그의 생애의 중심점이자 진정한 심장이 되는 것이다. (222쪽)

사랑과 마찬가지로 그의 삶은 엉망이었다. 정열적으로 일을 한 만큼 돈이 따라주었다면 그가 평생 빚쟁이들을 피해 다닐 일도 없었을 텐데, 투자와 사업에 대한 근거없는 자신감이 그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럴 때는 신은 공평하다고 해야겠지? 그토록 훌륭한 작품을 주는 대신에 형편없는 경제감각을 그에게 주었으니.

-3년 동안의 사업가 활동에서 얻게 된 10만 프랑의 빚은 그에게 시시포스의 돌이 되었다. 그는 일생동안 근육을 거의 망가뜨리면서 이 돌을 꼭대기로 굴려올리곤 했지만, 언제나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생애 최초의 이 잘못은 그를 언제까지나 채무자로 남도록 운명지었다. (152쪽)

-그는 돈을 버는 법과 잃는 법, 소송을 거는 법과 경력을 쌓는 법, 낭비하는 법과 절약하는 법, 다른 사람을 속이는 법과 자신을 속이는 법을 알았다.'(154쪽)

-운명은 그의 안에 있는 정치가가 자신의 재능을 장관실에 팔아넘길 가능성을 차단하였고, 사업가 발자크가 투자를 통해서 꿈꾸던 재산을 얻을 기회를 거절하였으며, 그가 추구하던 부유한 과부들이 그에게로 갈 길을 모두 가로막았다. 운명은 초기에 그가 가졌던 언론계에 대한 정열을 모든 신문잡지에 대한 혐오감과 구토로 바꾸어버렸다. 그를 되쫓아보내 책상 앞에 붙잡아두기 위해서였다. 이 책상에서부터 그의 천재성은 의회, 증권거래소, 우아한 소비생활의 좁다란 영역이 아니라 전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183쪽)

-아직 쓰이지도 않은 소설들이 언제나 미리 팔리고 저당에 잡혀 있었다. (248쪽)

-글을 쓰는 손인 오른손이 끈질기게 되취된 듯이 빠른 속도로 일한 것을, 낭비하는 손인 왼손이 마구잡이로 없애버렸다. (391쪽)

-발자크가 자신의 환상을 작업으로 바꾸면 그 환상은 그에게 수십만금과 그밖에도 불멸의 작품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가 환상을 돈으로 바꾸려고만 하면 빚만 쌓이고, 그 결과 수십 배, 수백 배의 노동이 대가로 돌아왔다. (482쪽)

-그는 시계며 도자기, 그림들, 가구들만을 수집한 것이 아니라 삶이 자기에게 거절한 것도 수집하였다. 한가한 시간들, 여자와의 산책, 이국의 풍경 속에서 아무에게도 위협받지 않는 긴 사랑의 밤들, 귀족 숭배자들의 경탄 등이었다. (605쪽)


 

대책없는 인물이었던 그는 어떤 이미지를 남겼을까?

-그는 굵은 허리를 한 키가 작은 젊은 남자였다. 재단이 나쁜 옷을 입은 결과 그의 허리는 더욱 굵어보였다. 모자는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그것을 벗고 그의 얼굴이 나타나자마자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오직 그의 얼굴만을 보았다. 그를 보지 못한 사람은 전혀 짐작할 수 없다. 그가 어떤 이마와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온통 광채로 뒤덮인 넓은 이마, 달변만큼이나 인상적인 황금빛 도는 갈색 눈, 코는 두텁고 네모졌고, 입은 엄청나게 컸고, 상한 이를 가지고 있음에도 언제나 웃느라고 벌어졌다. 두둑한 콧수염을 기르고 머리카락은 매우 길어서 어깨 너머로 떨어져내렸다. '(169쪽)

-그에게 푸른 앞치마를 둘러주고 남프랑스 어떤 술집의 판매대 뒤에 세워놓고 보면 이 선량하고 쾌활한 남자를, 손님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그들과 유쾌하게 지껄여대는 글도 못 읽는 술집 주인과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194쪽)

-농부의 손자이자 시민의 아들이고 구제불능 천민인 발자크는 신체의 생김새만 해도 귀족적인 풍모나 태도를 희망할 수 없는 처지였다. 궁정 재단사 뷔송도, 황금단추들도, 뾰족한 주름장식도 이 건장하고 살찐 붉은 뺩을 가진 천민, 큰소리로 말하고 대포알처럼 모임으로 뛰어들어오는 이 사람에게 고귀한 겉모습을 만들어줄 수는 없었다. (228쪽)

연예인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꽤 괜찮은 사람 같은데 조금만 자제하거나, 자신을 가꿀 줄 알면 참 좋을 텐데 하는. 발자크도 그랬던 것 같다. 낭비벽이 조금만 없었더라면, 광대짓을 하는 걸 그만 뒀더라면, 잘 알지도 못하는 사업에 뛰어드는 일은 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그것이 모두 발자크인 것을 어쩔 것인가. 츠바이크의 말대로 고난 속에서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냈으니 그런 고난이 있었다는 것이 다행일밖에.

-분수의 물처럼 생각들이 내 이마에서 떨어져 내려와야 한다. 그것은 완전히 무의식적인 과정이다. (237쪽)


 


-종이와 펜 말고 그는 세 번째 작업도구인 커피 포트를 어디든 가지고 다녔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커피 만드는 일을 맡기지 않았다. 이것은 누구도 이 검은 독성 물질을 그토록 채찍질하는 강도로 준비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244쪽)

-오랜 심장병. 그것은 밤의 작업과 커피의 사용 혹은 남용을 통해서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자연적인 인간이 가지는 잠의 욕구를 이겨내기 위해서 커피로 도피해야 했다. (247쪽, 친구이자 의사였던 니카르가 밝힌 사망원인)

발자크는 1850년 8월 18일과 19일 밤 사이에 죽었다. 그의 어머니만이 곁에 있었다. 발자크가 마지막까지 공을 들여 결혼에 성공했던 한스카 부인은 그에게 냉담했다. 그녀는 그보다 그가 보낸 편지를 더 좋아했던 것이다. 만일 그녀가 발자크에게 드 베르니 부인처럼 헌신적인 사랑과 재물을 주었더라면 그는 좀 더 오래 살았을까? 그와 뒤늦게 친구가 되었던 빅토르 위고가 조사를 읽는 가운데 발자크는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빅토르 위고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시대에는 온갖 허구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됩니다. 눈길들은 지배자들의 머리를

향하지 않고 정신적인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 중 하나가 사라지면 온 나라가 진동합니다. 민족의 장례식이지요. 오늘 재능을 가진 한 남자의 죽음을 보는 고통입니다. 국가적인 장례식이지요. 천재의 작별을 슬퍼함입니다. 발자크라는 이름은, 신사 여러분, 미래에 우리 시대를

알리는 빛나는 흔적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664쪽)

이런 마음가짐이 있었기에 그 무수한 고난 속에서도 장난기가 발동했고, 다시 일어나 훌륭한 작품을 썼으리라. 예전에 읽었던 『고리오 영감』이나 『골짜기의 백합』도 다시 읽고 싶고, 츠바이크가 최고라고 극찬했던 단편들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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