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입니까 사계절 1318 문고 62
창신강 지음, 전수정 옮김 / 사계절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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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 깊은 구절

정말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싶은 게 사람 노릇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바로 지금이 그랬다. 적어도 개로 살아갈 적에는 이렇게 구차하게 굴 일이 없었는데.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나야 고양이야 - 기타무라 사토시 지음 |조소정 옮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유정 옮김

이것이 인간인가 -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시간을 벌 목적으로 짐승처럼 달리면서 오줌을 눈다. 5분 후에 빵이 배급되기 때문이다. 빵, 그 성스럽고 거무스레한 조각 말이다. 옆 사람의 손에 들린 것은 너무나 크게 보이고, 내 손에 들린 것은 눈물이 날만큼 작다...빵이 배급되고 소비되는 그 짧은 몇 분 동안 온 블록에는 고함, 싸움, 욕설이 난무한다.'프리모 레비가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그려내는 인간의 모습이다. 수용소 생활은지극히 극단적인 경우라 예외로 치더라도,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를 보는 것은 단순히 이 책 안에서만의 일은 아니다.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파렴치하고 패륜적인 사건들을 보면서 그 누가 인간은 모든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소리를 감히 할 수 있을까? 많은 부분을 학습에 의존하는 것이 인간이니 학습의 영향이 크다고 해야 겠는데 어느 곳에서도 인간답게 살지 말라는 교육을 하지 않는 걸로 봐서는 파괴적인 부분 역시 본능적인 것이라고 해야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자 전중환은 《오래된 연장통》에서 '인간이라는 동물은 보편적인 도덕 본능을 진화시켰다. 오랜 세월에 걸친 자연선택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도덕 본능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옳고 그른지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게끔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내재된 여러 본능 중에서 나쁜 것만을 스스로 취사선택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하나? 그러니 이런 인간세계에 도착한 개는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지극히 평범한 토종견인 나. 죽음을 눈앞에 둔 할아버지가 창구에 데려가 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자 창구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를 길이 없다. 유달리 식탐이 강했던 작은 형이 가족의 상징인 큰 이빨을 부러뜨리고 집을 떠나고 난 뒤에 외로움과 쓸쓸함, 두통에 시달리다가 시멘트로 둘러싸인 도시 지하 배수관 속에서 우연히 분홍지렁이를 만나 그녀가 알려준 대로 창구를 찾고 그곳을 향한 동경은 시작된다. 분홍 지렁이라니. 분홍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기 때문인가? 다리가 없거나 다리가 많은 것들에 대한 지독한 혐오감이 잠시 사라진 채 분홍지렁이를 끝까지 여자애로 인식했으니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이빨이 나오면서 심해진 두통을 창구에서 흘러드는 음악으로 치유하면서 창구에 대한 혹은, 창구 너머 인간세상에 대한 동경은 깊어간다. 그러던 중 연분홍빛 지렁이가 죽어 선물로 그녀의 외투를 받았는데 예지력도 따라온다. 결국 집에서 쫓겨나고 연분홍빛 지렁이의 목소리를 따라 홀리듯 인간세계로 들어가버린다.그리고 변화. '나'는 이제 사람이 되었다. 달리기가 차보다 빠른, 개를 닮은 잘 생긴 남자 아이가 된 나(큰 또즈)는 '엄마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되면서 또즈, 샤오샤오, 후셩과 함께 좌충우돌 인간으로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그리고 분홍지렁이를 떠올리게 하는 여자아이 류웨가 지어준 ' 홍메이 아젠(붉은 눈썹)'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두 번째의 변신인 셈이다. 체육 선생 우다오가 바로 작은 형이라는 사실를 앎과 동시에 맞는 작은형의 죽음과 또 밝혀지는 다른 진실들 앞에 홍메이 아젠은 감당하기가 힘들다. 자꾸만 류웨를 찾게 되지만 그녀에게 그들 종족의 생명이 십오년 뿐이고, 인간 세계에서 하루가 한 달 분의 생명임을 알게 된다. 무릉도원에 들어간 나무꾼이 며칠밖에 있지 않았지만 인간 세계에 나와보니 수십년이 흘렀더라..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를 보러 왔던 누나도 떠나고 그에게 생명을 나눠주고 류웨도 떠난 뒤 홍메이 아젠은 어딘가 있을 것 같은 류웨를 찾아 다시 떠난다. 세 번째 변신.

'누나, 우리의 생명은 정말 소중한 거야.'죽어가는 누나를 붙들고 홍메이 아젠이 했던 이 말을 듣는데 학대당하고 버려지는 유기견들의 모습, 차에 깔린 동물들의 시체, 심지어는 정육점에 걸어놓은 고기들까지 떠올랐다.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건 아닐 테지만 연쇄반응까지야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나타나는 법이니 유치한 감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긴 수명을 선물처럼 받은 인간들에게 《나는 개입니까》라고 묻는 평범한 토종견인 내가 '정말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싶은 게 사람 노릇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토로하는 것에 공감한다. 지금 세상은 사람 노릇이나 동물 노릇이나 못해먹을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입니까'를 스스로 물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 노릇이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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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오는 날의 약속 (문고판) 네버엔딩스토리 12
박경태 글, 김세현 그림 / 네버엔딩스토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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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가끔 하시는 말씀이 있다.

"우리는 죽으면 병원에 시신기증을 하기로 했다. 나이가 들어 고장난 데가 많아서 장기야 쓸 데가 없을 테지만 시신을 기증하면

학생들이 공부할 때 도움이 된다고 하니 얼마나 좋으냐. 죽으면 썩기밖에 할 게 없는 몸인데 좋은 일 할 수 있어서 그러자고 했다.

너희는 아무 걱정 마라."

기증증서까지 보여주시면서 생각날 때마다 몇 번씩 얘기를 꺼내시는데 사실 들을 때마다 섭섭하고 슬프다.

장기기증이야 나도 하려고 마음 먹은 일이니 괜찮지만 시신기증이라니!

몇 번을 들어도 감당 안 되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표제작인 <첫눈 오는 날의 약속>보다 <아이별 천사의 눈물>이 내 눈길을 끈  건 이런 연유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병으로 목숨을 잃은 아이는 천사가 되어 슬퍼하는 엄마를 보러 매일 성당을 찾고, 마리아님과 이야기를 나눈 뒤

죽기 전에 장기를 나누어준 다른 친구들의 꿈속에 들어가 엄마가 다니는 성당으로 찾아와달라고 한다.

성탄절 날 아침, 그 아이들을 통해 진주를 보게 된 엄마는 아이가 천사가 되어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깨닫고 행복해진다.

짧고 간단한 이야기지만  진주를 통해 새 생명을 얻은 아이들과 부모들이 모두 성당에 모였을 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 모두를 진주라고 생각하세요. 우리는 진주 몸을 나눠 가졌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슬퍼하세요.

진주가 엄마 걱정을 많이 해요. 어쩌면 진주는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 보고 있을 지도 몰라요.'(36쪽)

 

조금씩 정리를 하고 있기도 했지만. 찾지 않아 풀이 무성하게 우거지고 비와 바람에 무너지려는 묘를 쓰는 것보다야 마음 속에 묻어두고 영원히 기억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이 옳은 결정을 하셨다는 걸 인정하자고 스스로를 달래고 있는 참이다.

이렇게 어두운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따뜻한 느낌인데 내 경우와 맞물리다보니 어두운 이야기처럼 되어버렸다.

 

다른 책들에 붙어서 들어온 녀석처럼 수줍게 책들 사이에 가려져 있던 놈.

작아서 손에 감기는 맛은 좋지만 잘 나가는 책들에 끼워주는 덤 같은 인상을 가진 책.

그래서 읽는 것도 늦어졌지만 바보 철승이나 첫눈 오는 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사를 때려치우고 달려간 붕어빵 장수 아저씨,

순댓국집 할머니를 좋아하게 되어 이젠 외롭지 않을 할아버지, 모르는 아이를 위해 기도를 해줄줄 아는 할머니,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는 섬마을 소년 훈이 등 따뜻한 열 편의 이야기를 만난 행복은 더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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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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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 깊은 구절

열병은 핏속에 숨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꿈속에 숨어 있었다.

열병은 피를 사랑했고 할아버지는 꿈을 사랑했다.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허삼관 매혈기 -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우리나라에서 수혈이 시작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인데 언제나 피가 모자랐기 때문에 처음에는 매혈을 통해 공급받다가 1975년 매혈금지법이 제정되면서 헌혈을 통한 공급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주사 맞는 일은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헌혈을 가끔 하러 간다. 전혈의 경우 기껏해봐야 최대 400ml 가량을 뽑을 뿐이니 크게 힘들지도 않을 뿐더러 피를 뽑으려고 주먹을 폈다 쥐었다를 반복하는 그 짧은 순간 고요가 마음에 들거니와 끝난 후 의자에 앉아 초코파이와 우유를 마시는 것도 특권 같은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상쾌해진다. 뭐, 물론 내가 하는 헌혈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갸륵함도 흡족하고.





그런데 한동안 그런 즐거움을 느끼질 못했다. 헌혈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혈액검사에서 남에게 나눠주기는커녕 나 스스로 쓸 피도 부족하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야 했다. 지금이야 당연하게 생각되는 이런 검사들이 가난한 그 시절 중국에서 행해질 리 없었고 위생에 대한 몰개념은 한 마을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비극의 출발점이 된다. 어느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비위생적인 헌혈 바늘 사용으로 인한 에이즈 집단 감염 사건을 소설화한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릿한 피 냄새와 먼지 냄새, 가난의 냄새가 덕지덕지 붙어서 코를 얼얼하게 만든다.





매혈이 불러온 죽음은 끈질기고 독하다. 병에 걸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 사랑하고 싶어하고 자리에 연연하여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하고, 맛있는 음식, 좋은 옷을 탐내는 모습은 안쓰럽다.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져 나무들이 모두 베어지고 관이 비싼 값에 팔리고 남이 써놓은 묘지안에서조차 관을 도둑맞는 지경에 이르면 사람이 사는 게 아니라 죽은 사람들이 삶을 지배하는 셈이다. 이렇게 된 것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당에서 교육국장이 내려와 마을 안에서 선생님으로 통하며 존경을 받는 인물인 할아버지에게 매혈을 독려하며서 시작된 것이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고 학교 안에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아 하면서 학교 안에서 사는 인물인 할아버지는 책임을 통감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사죄를 하고 무슨 일이든 기꺼이 돕고자 하지만, 실제로 피를 팔게 한 큰 아들 딩후이는 그 상황에서도 요령껏 배를 불리며 살기 바쁘다.





작중 화자인 '나'는 열병에 걸린 마을사람들이 분풀이로 죽인 딩후이의 어린 아들로 아무런 원망이나 미움도 없는 상태로 담담하게 이 끔찍한 시간들로 우리를 끌고 가, 할아버지가 꾸는 꿈과 딩씨 마을의 이야기 속으로 밀어 넣는다. 죽은 아이가 하는 말을 우리가 듣는 셈이니 열병으로 죽은 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기엔 그가 딱인듯도 싶다.


할아버지가 꾸는 꿈은 딩씨마을의 꿈이다. 희망적인 꿈이 아니라 바로 현실로 드러날 꿈. 현실과 경계가 불분명한 꿈. 그래도 마지막에 할아버지가 꾸는 꿈은 희망을 담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을 경배할 줄 모르는 인간을 모두 멸망시킨 뒤 데우칼리온과 퓌라 만이 남아 '얼굴은 가리고 옷을 벗고 이 신전에서 나가 너희 어머니의 뼈를 등 뒤로 던지'라는 신탁을 받고 돌을 뒤로 집어 던져 인간들을 만들었던 그것과 닮았다. 열병으로 모두 죽고 없어진 한 마을이, 나쁜 꿈을 한바탕 꾸고 난 중국이 새로운 기운으로 다시 물들기를 바라는 작가의 열망이 담겨 있다.





할아버지는 드넓게 펼쳐진 평원 위에 한 여인이 손에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버드나무 가지에 진흙을 묻혀 높이 흔들고 있었다. 한 번 흔들자 땅에 수많은 진흙 인간들이 생겨났다. 다시 한 번 진흙을 묻혀 흔들자 또다시 땅 위에 수천 수백의 진흙 인간이 생겨났다. 쉬지 않고 진흙을 묻혀 쉬지 않고 흔들어댔다. 땅 위에 온통 진흙 인간들이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진흙 인간은 비오는 땅에 물방울만큼이나 많았다. 할아버지는 새롭게 펄쩍펄쩍 뛰기 시작하는 평원을 보았다. (4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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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살, 비밀과 거짓말 푸른도서관 37
김진영 지음 / 푸른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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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문제는 해결하지 않으면 언제나 문제로 남아








어두운 부분을 애써 드러내려고 노력했는데, 그런 부분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하고 자꾸만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도 통제하지 못하는 도벽 때문에 식당에서 번번이 쫓겨나는 엄마와 막노동을 하는 아빠, 노는 아이지만 예쁘고 인기 많은 예주에게 꼬리를 잡혀 문구점에서 도둑질을 하게 된 하리는 우울하다. 게다가 좋아하는 성민이는 다른 아이에게 관심이 있다. 예주와 문구점에서 시디를 훔치려다 붙잡히면서 이야기는 시작되는데 엄마의 도벽을 알게 되고, 성민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그동안 몰랐던 가족을 이해하게 되면서 예주와의 도둑질은 과감히 멈춘다.

 

중학교 2학년 아이들의 생활을 보여주려고 작정한듯 '지대 미안'이라든가 '당빠 지금 도서관으로 빨랑 와' '찌질하지 않다' '뽀대나게 옷을 잘 입는다' 같은 표현이 남발되고 있는데 왠지 욕을 처음하는 아이들을 보듯 어색하게 느껴졌다. 서로 맞지 않는 톱니바퀴들을 어거지로 돌려 삐거덕 소리가 요란하게 나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작가의 성향이 다르니 단순비교가 힘들겠지만 비슷하게 불량하고 힘든 시기를 겪는 <완득이>를 읽을 때는 그 아이의 생활 자체에 감정이입이 쉬웠는데 이 책은 끝까지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좋은 것, 행복한 일만 보여줄 수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니 이런 소외된 아이들을 다루는 것이야 환영할 일이다. 이야기 속에서 하리가 서점에서 자기와 비슷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찾듯 어떤 누군가는 자기와 비슷한 이야기를 보면서, 그 아이가 어두운 현실을 벗어난 것에 기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냥 의도만으로 남는다면 연쇄반응으로  나오게 되는 울림이 적을 테니 기댈 어깨조차 찾을 수 없지 않을까. 


어두운 부분을 애써 드러내려고 노력했는데, 그런 부분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하고 자꾸만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도 통제하지 못하는 도벽 때문에 식당에서 번번이 쫓겨나는 엄마와 막노동을 하는 아빠, 노는 아이지만 예쁘고 인기 많은 예주에게 꼬리를 잡혀 문구점에서 도둑질을 하게 된 하리는 우울하다. 게다가 좋아하는 성민이는 다른 아이에게 관심이 있다. 예주와 문구점에서 시디를 훔치려다 붙잡히면서 이야기는 시작되는데 엄마의 도벽을 알게 되고, 성민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그동안 몰랐던 가족을 이해하게 되면서 예주와의 도둑질은 과감히 멈춘다.

 

중학교 2학년 아이들의 생활을 보여주려고 작정한듯 '지대 미안'이라든가 '당빠 지금 도서관으로 빨랑 와' '찌질하지 않다' '뽀대나게 옷을 잘 입는다' 같은 표현이 남발되고 있는데 왠지 욕을 처음하는 아이들을 보듯 어색하게 느껴졌다. 서로 맞지 않는 톱니바퀴들을 어거지로 돌려 삐거덕 소리가 요란하게 나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작가의 성향이 다르니 단순비교가 힘들겠지만 비슷하게 불량하고 힘든 시기를 겪는 <완득이>를 읽을 때는 그 아이의 생활 자체에 감정이입이 쉬웠는데 이 책은 끝까지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좋은 것, 행복한 일만 보여줄 수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니 이런 소외된 아이들을 다루는 것이야 환영할 일이다. 이야기 속에서 하리가 서점에서 자기와 비슷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찾듯 어떤 누군가는 자기와 비슷한 이야기를 보면서, 그 아이가 어두운 현실을 벗어난 것에 기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냥 의도만으로 남는다면 연쇄반응으로  나오게 되는 울림이 적을 테니 기댈 어깨조차 찾을 수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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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로의 특별한 세계 청소년문학 보물창고 8
프란시스코 X. 스토크 지음, 고수미 옮김 / 보물창고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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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은 구절

올바른 건반은 옳은 소리를 내고, 틀린 건반은 틀린 소리를 내요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토미를 위하여(청소년문학4) - 곤살로 모우레 지음 |송병선 옮김


멀리로 여행을 갔다가 몇 년 만에 집에 돌아온 사람이 제 집을 낯설어하는 것처럼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언제나 과거형으로 쓴 글을 봐서 그럴까? 현재형으로 진행되는 문장들이 너무 어색해서 처음 몇 분간은 쉽게 적응하지 못한 내 눈이 책 언저리만 빙빙 도는 것을 따라 집중하지 못하는 내 생각도 빙빙 돌아다니기만 했다. 작가가 일부러 그리 쓴 것인지 번역하는 사람이 그렇게 해놓은 것인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짜증이 슬슬 나기 시작할 무렵, 마르셀로가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어서 다른 사람과의 소통에 약간의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을 알고 난 후로는 오히려 그런 부분들이 마르셀로의 현재 상태를 잘 나타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간사하기도 하지.


게다가, '나무가 내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를 정말 나무인 줄로 착각하고 패터슨을 사람 이름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저지르기도 했으나 멋진 세퍼드 '나무'를 만나고 패터슨이 마르셀로가 다니던 학교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길거리에서 마주쳤는데 죽어라고 생각나지 않아서 대충 얼버무리고 헤어진 친구 이름이 어느 한 순간 '파밧!'하고 떠오르듯 강렬한 기쁨을 맛볼 수 있었으니 착각이라는 것도 가끔은 할 만하다.





나도 마르셀로에게 옮기라도 한 것처럼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재스민과의 교감을 통해 서서히 이루어지는 마르셀로의 성장과 함께 법률회사에서 벌어지는 소송을 잘 버무려놓아 이 일이 어떻게 마무리될 것인가 사뭇 긴장되기까지 하니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름 그대로 아투로와 오로라로 부르고 자신을 지칭할 때조차 3인칭으로 부르는 아이. 열일곱살의 마르셀로는 소리는 없지만 언제고 필요할 때면 내면의 음악을 느낄 수 있다. 여름방학동안 패터슨 학교에서 조랑말을 훈련시키게 되길 고대했으나 변호사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법률회사 우편실에서 일을 해야 하는 가련한 처지가 된다. 거기서 만난 아름다운 재스민과 천천히 친구가 되고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발견했는데 아버지가 소송중인 사건의 피해자임을 알게된다. 그리고 그애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과 아버지가 다칠 수도 있다는 걱정 사이에서 고민을 하게 되고 마침내 내린 결정은 마르셀로를 한 발 더 현실세계에 가깝게 만든다. 확고한 미래를 계획하게 된 마르셀로는 그래서 행복하다.





활자로 박혀 있어 결코 들릴 리 없는 짐노페디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이 들리고, 보이지 않는 법률회사 우편실과 버몬트 재스민의 집이 보인다. 아버지 동업자 아들인 웬델은 지나치게 혐오스럽고 동물적인 근성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되어 순수한 마르셀로의 모습이 더 돋보이는 역할을 해준다. 역시 악인이 있어야 영웅도 빛나는 법이다. 보이고 들리는 이 모든 것들이 이 책을 영화처럼 느끼게 해주었다. 또 한 가지, 인지장애를 가진 친구들을 친근하게 느끼게 해주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한다. 자꾸만 까먹는 뇌에 그들은 우리와 가진 것이 조금 다를 뿐이라는 것을 또 각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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