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 인상 깊은 구절
열병은 핏속에 숨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꿈속에 숨어 있었다.
열병은 피를 사랑했고 할아버지는 꿈을 사랑했다.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허삼관 매혈기 -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우리나라에서 수혈이 시작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인데 언제나 피가 모자랐기 때문에 처음에는 매혈을 통해 공급받다가 1975년 매혈금지법이 제정되면서 헌혈을 통한 공급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주사 맞는 일은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헌혈을 가끔 하러 간다. 전혈의 경우 기껏해봐야 최대 400ml 가량을 뽑을 뿐이니 크게 힘들지도 않을 뿐더러 피를 뽑으려고 주먹을 폈다 쥐었다를 반복하는 그 짧은 순간 고요가 마음에 들거니와 끝난 후 의자에 앉아 초코파이와 우유를 마시는 것도 특권 같은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상쾌해진다. 뭐, 물론 내가 하는 헌혈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갸륵함도 흡족하고.
그런데 한동안 그런 즐거움을 느끼질 못했다. 헌혈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혈액검사에서 남에게 나눠주기는커녕 나 스스로 쓸 피도 부족하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야 했다. 지금이야 당연하게 생각되는 이런 검사들이 가난한 그 시절 중국에서 행해질 리 없었고 위생에 대한 몰개념은 한 마을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비극의 출발점이 된다. 어느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비위생적인 헌혈 바늘 사용으로 인한 에이즈 집단 감염 사건을 소설화한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릿한 피 냄새와 먼지 냄새, 가난의 냄새가 덕지덕지 붙어서 코를 얼얼하게 만든다.
매혈이 불러온 죽음은 끈질기고 독하다. 병에 걸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 사랑하고 싶어하고 자리에 연연하여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하고, 맛있는 음식, 좋은 옷을 탐내는 모습은 안쓰럽다.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져 나무들이 모두 베어지고 관이 비싼 값에 팔리고 남이 써놓은 묘지안에서조차 관을 도둑맞는 지경에 이르면 사람이 사는 게 아니라 죽은 사람들이 삶을 지배하는 셈이다. 이렇게 된 것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당에서 교육국장이 내려와 마을 안에서 선생님으로 통하며 존경을 받는 인물인 할아버지에게 매혈을 독려하며서 시작된 것이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고 학교 안에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아 하면서 학교 안에서 사는 인물인 할아버지는 책임을 통감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사죄를 하고 무슨 일이든 기꺼이 돕고자 하지만, 실제로 피를 팔게 한 큰 아들 딩후이는 그 상황에서도 요령껏 배를 불리며 살기 바쁘다.
작중 화자인 '나'는 열병에 걸린 마을사람들이 분풀이로 죽인 딩후이의 어린 아들로 아무런 원망이나 미움도 없는 상태로 담담하게 이 끔찍한 시간들로 우리를 끌고 가, 할아버지가 꾸는 꿈과 딩씨 마을의 이야기 속으로 밀어 넣는다. 죽은 아이가 하는 말을 우리가 듣는 셈이니 열병으로 죽은 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기엔 그가 딱인듯도 싶다.
할아버지가 꾸는 꿈은 딩씨마을의 꿈이다. 희망적인 꿈이 아니라 바로 현실로 드러날 꿈. 현실과 경계가 불분명한 꿈. 그래도 마지막에 할아버지가 꾸는 꿈은 희망을 담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을 경배할 줄 모르는 인간을 모두 멸망시킨 뒤 데우칼리온과 퓌라 만이 남아 '얼굴은 가리고 옷을 벗고 이 신전에서 나가 너희 어머니의 뼈를 등 뒤로 던지'라는 신탁을 받고 돌을 뒤로 집어 던져 인간들을 만들었던 그것과 닮았다. 열병으로 모두 죽고 없어진 한 마을이, 나쁜 꿈을 한바탕 꾸고 난 중국이 새로운 기운으로 다시 물들기를 바라는 작가의 열망이 담겨 있다.
할아버지는 드넓게 펼쳐진 평원 위에 한 여인이 손에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버드나무 가지에 진흙을 묻혀 높이 흔들고 있었다. 한 번 흔들자 땅에 수많은 진흙 인간들이 생겨났다. 다시 한 번 진흙을 묻혀 흔들자 또다시 땅 위에 수천 수백의 진흙 인간이 생겨났다. 쉬지 않고 진흙을 묻혀 쉬지 않고 흔들어댔다. 땅 위에 온통 진흙 인간들이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진흙 인간은 비오는 땅에 물방울만큼이나 많았다. 할아버지는 새롭게 펄쩍펄쩍 뛰기 시작하는 평원을 보았다. (4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