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볕 

                            -장석남

 

우리가 가진 것 없으므로

무릎쯤 올라오는 가을풀이 있는 데로 들어가

그 풀들의 향기와 더불어 엎드려 사랑을 나눈다고 해도

별로 서러울 것도 없다

별 서러울 것도 없는 것이

이 가을볕으로다

그저 아득히만 가는 길의

노자로 삼을 만큼 간절히

사랑은 저절로 마른 가슴에

밀물 드는 것이니

그 밀물의 바닥에도

숨죽여 가라앉아 있는

자갈돌들의 그 앉음새를

유심히 유심히 생각해 볼 뿐이다

그 반가사유를 담담히 익혀서

여러 천년의 즐거운 긴장으로

전신에 골고루 안배해둘 뿐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 없으므로

가을 마른 풀들을

우리 등짝 하나만큼씩만

눕혀서 별로

서러울 것 없다

 

 

**

 

그게 벌써 몇 년 전의 일인지

기억도 안 나게 오래된 일도 아니면서 바득바득 무릎걸음으로 다가드는 것도 아니라

어중간한 딱 그만큼, 흡사 '반보기'를 하는 그 풍습처럼

여기서 반, 거기서 반만큼 와서 만나고 헤어지던 엄마와 딸들처럼

가슴 먹먹하며 따뜻하고 아릿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그 여행이 떠오른다.

 

 

무화과에 쏟아지던 볕과 

담벼락을 하도 꼭 쥐어 금세 무너뜨리고야 말 것 같은 기세등등한 담장이와

목마른 나그네가 한 방울이라도 얻어먹으려 해도 서걱거리는 소리외에는

더 이상 줄 게 없어뵈던 마른 풀들,

구멍 숭숭 뚫린 그 속으로 연탄집게를 들이밀어도 다 받아줄 것 같았던

연밥무더기와 수면 위로 흐르던 그 고요들이 생각난다.

혼자 했던 여행.

혼자라서 더 좋았던 그 여행.

 

서걱거리는 풀들 사이로 들어가 혼자 사랑하는 체

130가지 체위도 만들어보고

음란스러운 상상이라도 해볼 걸 그랬다.

다시 만나러 가면 그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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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하나 

-김춘수

 

 

어제는 슬픔이 하나

한려수도 저 멀리 물살을 따라

남태평양 쪽으로 가버렸다

오늘은 또 슬픔이 하나

내 살 속을 파고든다.

내 살 속은 너무 어두워

내 눈은 슬픔을 보지 못 한다.

내일은 부용꽃 피는

우리 어느 둑길에서 만나리

슬픔이여,

 

 

**

 

산적을 만들 때 고기를 이리저리 잘 꿰어야 삐져나오지 않고

구웠을 때도 볼품이 있다. 내가 하는 걸 잘 보기라도 한 걸까?

감기 기운 하나가 산적꼬치가 되어 내 몸을 이리저리 꿰고 있는데

아무래도 쉽게 빠져나오지 않고 깊숙하게 들어올 모양이다.

덕분에 손님을 치르느라 바빠서 잊고 있던 것들,

얌전히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슬픔이며 우울함들이

조금씩 위로 올라와 좋았던 기분이 대신 내려간다.

올라가는 게 있으면 내려가는 게 있는 게지.

 

내 슬픔이여,

까닭모를 슬픔이라고 쓰고 싶지만

실은 까닭은 다 있는 법.

말로 뱉어버리면 뱉는 순간 먹물이 터져버린 오징어처럼

온 몸을 지저분하게 점령할까 싶어 참는다.

너는 그냥 다시 가라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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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아침에 일어날 때면 습관처럼 중얼거린다.

"잘 잤니?"

내가 내게 건네는 인사다.

한동안 내가 들었던 가장 많은 충고가 '너 자신을 사랑해라'였으나

들을 때뿐으로, 나는 나를 제일 미워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그러다보니 가뜩이나 험한 인상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입에서 나오는 소리도 바락바락 쥐고 문질러야 하는 아욱을 닮아

나도, 남도 지치게 만들었다.

 

이제는 그만 할 때다.

이만큼 나이를 먹었으면 달라질 줄 알아야 지능을 가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그리하여, 나는 조금씩 나를 사랑하기로 하였으나 쉬운 일은 아니어서

늘 미워하다가 사랑하다가를 반복하는 중이다.

갈 때는 꼭 이렇게 쓰고 싶다.

정말로 나를 사랑하면서 살았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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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질 

                         -송찬호

 

아가야, 우선 식탁을 짜고

둥글고 하얀 접시를 짜고

멀리서 떠도는 너희 아버지의

모자와 모자 위의 구름을 짜고

그리고 아버지의 닳고 닳은 구두를 짜고

 

아가야, 네게는 무엇을 짜줄까

그래,네가 갖고 싶은 것

그 무언가를 담을 수 있도록

커다랗게 너의 몸을 짜주마

 

 

**

 

바늘을 이용한 모든 것들은 나를 떨게 한다.

주사는 말할 것도 없고 바느질, 뜨개질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지금도 단추가 떨어지거나 어디가 뜯어지면 밖에서 볼 때

민망하지 않을 정도로만 대충 꿰매는 일조차 식은땀이 날 지경이다.

그런 일은 잘 하게 태어난 사람이 하면 된다는 게 내 주의다보니

엄마나 동생들이 괴롭힘을 당하는데 매번 투덜대면서도 기꺼이 해주어

내 고통을 덜어주니 나는 참으로 복도 많다.

 

나에게 바느질 잘 하는 유전자는 하나도 물려주지 않은 우리 엄마는

어릴 때부터 곧잘 뜨개질로 스웨터나 조끼, 가방, 모자, 장갑 등을 떠서

우리에게 안겨주곤 했는데 사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싫었다.

남들처럼  앙고라라고 불리던 털이 복실복실하고 세련된 스웨터를 사주면 좋으련만

투박한 빨강이나 색색깔이 골고루 들어간 색동 스웨터를 떠주시니

싫단 소리도 못하고 가을부터 겨울까지 입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름 패셔너블한 옷들이었는데 희귀성이란 걸 모를 때라

그저 친구들과 비슷한 옷이 탐났었는데 지금은 그때 떠주셨던 꽈배기 무늬가

전체적으로 들어간 벽돌색 스웨터가 입고 싶다.

눈이 어두워 이제는 뜨개질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 바늘을 놓으신 게

벌써 십 년은 된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개 정도는 기념으로 남겨두는 건데..

버리기 좋아하는 습관때문에..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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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

                                         -황동규

 

 

베란다 벤자민 화분 부근에서 며칠 저녁 울던 귀뚜라미가

어제는 뒤켠 다용도실에서 울었다,

다소 힘없이.

무엇이 그를 그곳으로 이사가게 했을까,

가을은 점차 쓸쓸히 깊어가는데?

기어서 거실을 통과했을까,

아니면 날아서?

아무도 없는 낮시간에 그가 열린 베란다 문턱을 넘어

천천히 걸어 거실을 건넜으리라 상상해본다.

우선 텔레비 앞에서 망설였을 것이다.

저녁마다 집 안에 사는 생물과 가구의 얼굴에

한참씩 이상한 빛 던지던 기계.

한번 날아올라 예민한 촉각으로

매끄러운 브라운관 표면을 만져보려 했을 것이다.

아 눈이 어두워졌다!

손 헛짚고 떨어지듯 착륙하여

깔개 위에서 귀뚜라미잠을 한숨 잤을 것이다.

그리곤 어슬렁어슬렁 걸어 부엌에 들어가

바닥에 흘린 찻물 마른 자리 핥아보고

뒤돌아보며 고개 두어 번 끄덕이고

문턱을 넘어

다용도실로 들어섰을 것이다.

아파트의 가장 외진 공간으로......

 

......오늘은 그의 소리가 없다.

 

 

**

 

가을이 깊어지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던 귀뚜라미 소리는

아파트 단지 안으로 진입하는 그때 최고조에 달한다.

하루종일 고생하셨군요, 라든가

집으로 돌아오니 편안하니? 라든가

어서오세요 고단하지요? 라든가

제 소리를 자장가 삼아 푹 주무세요. 등의 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래, 그래. 대답해주고 11층으로 올라오면

건성으로 대답한 걸 귀신같이 알고는

11층까지 소리가 다시 따라온다.

정말이죠?

내 얘기 잘 들으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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