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볕
-장석남
우리가 가진 것 없으므로
무릎쯤 올라오는 가을풀이 있는 데로 들어가
그 풀들의 향기와 더불어 엎드려 사랑을 나눈다고 해도
별로 서러울 것도 없다
별 서러울 것도 없는 것이
이 가을볕으로다
그저 아득히만 가는 길의
노자로 삼을 만큼 간절히
사랑은 저절로 마른 가슴에
밀물 드는 것이니
그 밀물의 바닥에도
숨죽여 가라앉아 있는
자갈돌들의 그 앉음새를
유심히 유심히 생각해 볼 뿐이다
그 반가사유를 담담히 익혀서
여러 천년의 즐거운 긴장으로
전신에 골고루 안배해둘 뿐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 없으므로
가을 마른 풀들을
우리 등짝 하나만큼씩만
눕혀서 별로
서러울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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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벌써 몇 년 전의 일인지
기억도 안 나게 오래된 일도 아니면서 바득바득 무릎걸음으로 다가드는 것도 아니라
어중간한 딱 그만큼, 흡사 '반보기'를 하는 그 풍습처럼
여기서 반, 거기서 반만큼 와서 만나고 헤어지던 엄마와 딸들처럼
가슴 먹먹하며 따뜻하고 아릿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그 여행이 떠오른다.
무화과에 쏟아지던 볕과
담벼락을 하도 꼭 쥐어 금세 무너뜨리고야 말 것 같은 기세등등한 담장이와
목마른 나그네가 한 방울이라도 얻어먹으려 해도 서걱거리는 소리외에는
더 이상 줄 게 없어뵈던 마른 풀들,
구멍 숭숭 뚫린 그 속으로 연탄집게를 들이밀어도 다 받아줄 것 같았던
연밥무더기와 수면 위로 흐르던 그 고요들이 생각난다.
혼자 했던 여행.
혼자라서 더 좋았던 그 여행.
서걱거리는 풀들 사이로 들어가 혼자 사랑하는 체
130가지 체위도 만들어보고
음란스러운 상상이라도 해볼 걸 그랬다.
다시 만나러 가면 그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