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서도 아름답게

 

                        -곽재구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먹은 풀꽃 한 송이

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어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장이 토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토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한 송이의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리로

우리 눈뜨고 보는 하늘에 피어날 수 있을까.

 



***

오래도록 못 만난 모양이다.

바람과 햇볕이 서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사뿐사뿐 주위를 맴돌며

재회의 춤을 춘다.

바람도 술렁거리고 뜨거운 햇볕도 일렁이는 이런 날엔 빨래가 제격이다.

몸 한 군데가 모래 든 고무신마냥  서걱거려도

끙차..일어나 빨래를 털어 널면 도망갔던 기운도 되돌아오는 듯

잠깐이나마 피돌기가 빨라진다.

팔을 붙잡고 헤어질까 저어하여 바지가랑이를 붙잡은 그들의 손을 

딱 끊어 탈탈 터는 내가 저들은 얼마나 얄미울까?

 

개운한 마음으로 돌아선 내 눈에 들어온  신문 헤드라인 기사

"아무 조건 없습니다" 안철수 깨끗한 양보

참 멋진 사람들이구나.

쭈그리고 앉아 기사를 읽다보니 마음이 언짢다.

 

김기현 한나라당 대변인은 "며칠 간 국민을 혼란시킨 강남 좌파

안철수 파동은 단일화 쇼로 막 내렸다" 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이용섭 민주당 대변인은 "야권통합을 위한 큰 진전" 이라며

안 원장의 양보와 박 변호사의 출마를 반겼다. -한겨레-

 

내 편과 네 편을 갈라 서로 상대방이 하는 짓은 다 나쁜 짓이라고 단정짓는 일부터 삼가하면

훨씬 괜찮은 나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자리에 가면 다 똑같아지는 모양이다.

서로 어깨를 쳐주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해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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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능소화

                      -김명인

 

주황 물든 꽃길이 봉오리째 하늘을 가리킨다

줄기로 담벼락을 치받아 오르면 거기,

몇 송이로 펼치는 生이 다다른 절벽이 있는지

더 뻗을 수 없어 허공 속으로

모가지 뚝뚝 듣도록 저 능소화

여름을 익힐 대로 익혔다

누가 화염으로 타오르는가, 능소화

나는 목숨을 한순간 몽우리째 사르는

저 불꽃의 넋이 좋다

가슴을 물어라, 뜯어내면 철철 피 흘리는

천근 사랑 같은 것,

그게 암 덩어리라도 불볕 여름을 끌고

피나게 기어가 그렇게 스러질

너의 여름 위에 포개리라

 

 

**

어느 책에서였던가.

이마가 말갛고 곱게 양쪽으로 땋아내린 머리에 교복을 입은 태가 얌전한,

병색까지 희미하게 비쳐 더욱 신비롭던 그 소녀가 살던 집이

능소화로 뒤덮인 집이라는 표현때문에

정작 꽃은 보지도 못한 처지에서 능소화는 내게 그 소녀만큼 신비스런 꽃이 되었다.

 

한참을 지난 뒤에야 붙잡을 무언가만 있으면 기를 쓰고 올라가 짐을 부려놓듯

툭툭 던지는 그 주황빛 꽃이 능소화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능소화=신비'라는 공식이 굳어져 꽃이 곧 소녀요, 이야기 자체가 되었을 무렵이니

괜히 첫사랑을 보듯 아련한 눈빛으로 가볍게 한 번씩 목례를 하고 지나다닐밖에.

 

윗부분에 집중적으로 꽃이 피는 까닭에

다리보다 얼굴쪽이 무거운 능소화는 균형이 안 맞는 것 같으면서도

나름대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일사불란한 아름다움이란 언젠가는 질리게 된다는 걸 얘는 어쩌면 이렇게 일찍도 알았을까?

지기 시작한 그 꽃들마저 농염하게 유혹을 해대니

산만한 능소화에게 정신이 팔려 어제는 길을 가다 한참동안 붙들려있었다.

능소화야, 다음 여름에 다시 만나 또 사랑을 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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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연못 

                           - 정복여

 

나무들은 제 그늘만큼의 연못을 품고 있다

스스로 빠져서 깊어지는,

멀리멀리 퍼져나가는 잎의 파문들,

저 물결 속으로 뿌리들 자란다

 

동쪽에서 뜨던 해가

서쪽으로 가다 나무 정수리에 올라

그늘이 곧 너의 연못이라고 전한다

그 마음을 받아 못 속을 가는 나무

미처 잘못 떨어진 낮별도 가라앉아

나무는 더욱 깊어지는 바닥을 간다

 

바람이 불어 물결이 휙 쓸린다

나뭇잎 몇몇이 지워지고

그 그림자 받아 안은 바닥의 한 부분이

뿌리의 안쪽에 닿아 있는 것이 보인다

나무들은 저렇듯 뿌리깊어

제 몸을 출렁이는 것이다

 

 

***



삼청동으로 올라가는 길은 걷기 딱 좋았다.

새들도 묵언수행을 하는지 되바라진 놈들만 이따금 존재를 드러낼 뿐

온 사위가 고요하고 부드러운 빛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선글라스를 안 가져온 걸 탓하며 손으로 차양을 만들며 걸어도

걷는다는 게 그저 좋아 신발을 뚫고 바닥에 닿으려는 내 발가락들의 힘을 받아

사람들이며 가게 구경에 정신없이 돌아가는 눈동자 덕분에 몸주인인 내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가게 주인이 주방장에게 아침부터 싫은 소리를 늘어놓았는지

음식은 전체적으로 조금 짰지만 데코레이션만은 아주 훌륭했던

코스 요리. 배 두드리며 달콤한 후식까지 다 먹고나자

삼청동은 그제야 숨어 있던 소리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쾌활하고 에너지 넘치는 바람이 닿는 것들과 모두 하이파이브를 하며

지나는 소리였다.

 

나뭇잎들아, 안녕!

기와조각들아, 안녕!

예쁜 언니 머리카락도 안녕!

이 천은 뭐야, 부드럽군 그래!

오호, 뜨거워. 차 지붕도 안녕!

이야, 넌 거기 숨어 있었구나. 돌멩이!

먼지 좀 닦아달라고 해, 간판!

 

이렇게 바람이 만들어내는 소리 속에서도 특히

나무가 출렁이며 만들어내는 연못 속에 푹 빠져있던 세 시간

어느 가을날의 삼청동은 사진 없이도 잘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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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 

 

                    - 김소연

 

 

 마음에도 두 개의 귀가 있다. 듣

는 귀와 거부하는 귀. 이 두 개의 귀

로 겨우 소음을 견디고 살아간다.

지구가 돌아가는 광폭한 소음은 듣

지 못하면서도 한밤중 냉장고가 돌

아가는 소음은 예민하게 듣는 몸의

귀처럼, 고막이 터지지 않을 정도의

소리들에만 반응하는 귀. 칭찬은 받

아들이고, 비난은 거부하는 귀.

물스러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

음의 귀. 고운 것을 향해 넝쿨처럼

뻗어나가는 마음의 귀. 호오惡를

각각 구별하는 귀 때문에 나는 나를

호위할 수 있지만, 그 때문에 나는

나를 안전하게 가둔다.

 

 

**

숨을 쉬고 피를 돌게 하고 근육을 움직이고

신경을 건드리는 온갖 자극에 반응해야 하는 내 몸이

가끔 게으름을 부려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내게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이명(耳鳴).

 

청하지 않은 객이니 언제 오더라도 좋을 리가 없다.

오늘 불쑥 내게 찾아오셨길래 물었다.

"언제까지 찾아오실겁니까?"

"위이이이이이이잉."

"그게 도대체 뭐란 말이오?"

"지이이이이이이잉."

"그건 또 무슨 말이신지?"

"도오오오오오오옹."

"똥?"

 

나도 분명히 호오惡를 구별할 수 있거늘

싫은 소리들은 그냥 내칠 수 있게 되려면

얼마만한 공력을 쌓아야 하는 것일까.

공중부양은 못 해도 부디 그 정도는 가르쳐줄

도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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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 이성복

 

 밤하늘 하도 푸르러 선돌바위 앞에

앉아 밤새도록 빨래나 했으면 좋겠다

흰 옥양목 쳐대 빨고 나면 누런 삼베

헹구어 빨고, 가슴에 물 한번 끼얹고

하염없는 자유형으로 지하 고성소까지

왕복했으면 좋겠다 갔다 와도 또 가고

싶으면 다시 갔다 오지, 여태 살았지만

언제 살았다는 느낌 한번 들었던가

 

***

 

기운이 빠지려고 한다.

준비할 건 참 많은데 혼자 하려니 흥도 안 나고..

이럴 땐 왁자지껄 친척들이 많은 집도 부럽다.

동서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지만

그래도 혼자 쓸쓸한 것보다는 사람 사는 맛이 나지 않을까?


빨래 같은 건 관두고 난 밤새도록 달구경하며

선들바람 부는 들판이나 거닐고 싶다.

추석이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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