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능소화

                      -김명인

 

주황 물든 꽃길이 봉오리째 하늘을 가리킨다

줄기로 담벼락을 치받아 오르면 거기,

몇 송이로 펼치는 生이 다다른 절벽이 있는지

더 뻗을 수 없어 허공 속으로

모가지 뚝뚝 듣도록 저 능소화

여름을 익힐 대로 익혔다

누가 화염으로 타오르는가, 능소화

나는 목숨을 한순간 몽우리째 사르는

저 불꽃의 넋이 좋다

가슴을 물어라, 뜯어내면 철철 피 흘리는

천근 사랑 같은 것,

그게 암 덩어리라도 불볕 여름을 끌고

피나게 기어가 그렇게 스러질

너의 여름 위에 포개리라

 

 

**

어느 책에서였던가.

이마가 말갛고 곱게 양쪽으로 땋아내린 머리에 교복을 입은 태가 얌전한,

병색까지 희미하게 비쳐 더욱 신비롭던 그 소녀가 살던 집이

능소화로 뒤덮인 집이라는 표현때문에

정작 꽃은 보지도 못한 처지에서 능소화는 내게 그 소녀만큼 신비스런 꽃이 되었다.

 

한참을 지난 뒤에야 붙잡을 무언가만 있으면 기를 쓰고 올라가 짐을 부려놓듯

툭툭 던지는 그 주황빛 꽃이 능소화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능소화=신비'라는 공식이 굳어져 꽃이 곧 소녀요, 이야기 자체가 되었을 무렵이니

괜히 첫사랑을 보듯 아련한 눈빛으로 가볍게 한 번씩 목례를 하고 지나다닐밖에.

 

윗부분에 집중적으로 꽃이 피는 까닭에

다리보다 얼굴쪽이 무거운 능소화는 균형이 안 맞는 것 같으면서도

나름대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일사불란한 아름다움이란 언젠가는 질리게 된다는 걸 얘는 어쩌면 이렇게 일찍도 알았을까?

지기 시작한 그 꽃들마저 농염하게 유혹을 해대니

산만한 능소화에게 정신이 팔려 어제는 길을 가다 한참동안 붙들려있었다.

능소화야, 다음 여름에 다시 만나 또 사랑을 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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