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능소화
-김명인
주황 물든 꽃길이 봉오리째 하늘을 가리킨다
줄기로 담벼락을 치받아 오르면 거기,
몇 송이로 펼치는 生이 다다른 절벽이 있는지
더 뻗을 수 없어 허공 속으로
모가지 뚝뚝 듣도록 저 능소화
여름을 익힐 대로 익혔다
누가 화염으로 타오르는가, 능소화
나는 목숨을 한순간 몽우리째 사르는
저 불꽃의 넋이 좋다
가슴을 물어라, 뜯어내면 철철 피 흘리는
천근 사랑 같은 것,
그게 암 덩어리라도 불볕 여름을 끌고
피나게 기어가 그렇게 스러질
너의 여름 위에 포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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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에서였던가.
이마가 말갛고 곱게 양쪽으로 땋아내린 머리에 교복을 입은 태가 얌전한,
병색까지 희미하게 비쳐 더욱 신비롭던 그 소녀가 살던 집이
능소화로 뒤덮인 집이라는 표현때문에
정작 꽃은 보지도 못한 처지에서 능소화는 내게 그 소녀만큼 신비스런 꽃이 되었다.
한참을 지난 뒤에야 붙잡을 무언가만 있으면 기를 쓰고 올라가 짐을 부려놓듯
툭툭 던지는 그 주황빛 꽃이 능소화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능소화=신비'라는 공식이 굳어져 꽃이 곧 소녀요, 이야기 자체가 되었을 무렵이니
괜히 첫사랑을 보듯 아련한 눈빛으로 가볍게 한 번씩 목례를 하고 지나다닐밖에.
윗부분에 집중적으로 꽃이 피는 까닭에
다리보다 얼굴쪽이 무거운 능소화는 균형이 안 맞는 것 같으면서도
나름대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일사불란한 아름다움이란 언젠가는 질리게 된다는 걸 얘는 어쩌면 이렇게 일찍도 알았을까?
지기 시작한 그 꽃들마저 농염하게 유혹을 해대니
산만한 능소화에게 정신이 팔려 어제는 길을 가다 한참동안 붙들려있었다.
능소화야, 다음 여름에 다시 만나 또 사랑을 해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