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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이야기 ㅣ 비룡소 걸작선 29
미하엘 엔데 지음, 로즈비타 콰드플리크 그림, 허수경 옮김 / 비룡소 / 2003년 3월
평점 :
<끝없는 이야기>, 미하엘 엔데 지음, 비룡소 펴냄
엄청난 양에 압도당하고 엄청난 이야기에 압도당했다.
거의 700쪽에 가까운 이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다만 아쉬운 건
환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구분하기 위해 잉크의 색깔을 달리 해서
자주빛과 쑥색의 글자들이 내 눈을 너무 혹사시켰다는 사실이다.
보는 동안 내내 눈이 침침해진 것 같아서 몇 번이고 눈을 문질러야 했다.
'올바른 이름만이 모든 존재와 사물들에 실재성을 준단다.
틀린 이름은 모든 것을 비현실적으로 만들지. 그것이 거짓이 하는 일이다.'
환상세계를 다스리는, 아니 상징적인 의미인 여제가 한 말이다.
점점 사라지고 있는 환상세계를 구하기 위해 새로운 이름을 기다리는 여제라..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는 일이 새삼스레 굉장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지금 부르고 있는 이름들
이를테면, 사과나 책상이나 과자나 바다나 강이나 산 같은..
이런 이름들은 올바르기 때문에 실재성을 주는 거라고?
이 책에서 이름은 굉장한 의미를 갖는다.
여제는 새로운 이름을 얻지 않으면 환상세계까지 모두 파괴될 지경이고,
그녀를 구하러 갔던 인간 세계의 그는 자신의 이름까지 모두 잊은 뒤에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이쯤에서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시 하나.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책에서 주인공인 그는 변화를 너무 원하다가
자기 집에 있는 모든 사물들부터 시작해서 모든 단어를 바꿔버리고 만다.
그리고 나서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게 되어
더욱 외로운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는 사물의 올바른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물들로부터 외면을 당한 게 아닐까..
끝없는 이야기에는 본체에 엄청나게 많은 곁가지 이야기들이 산재한다.
그 이야기들은 하나 같이 끝을 맺지 않고 나중에 다시 들려주겠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아무래도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세헤라자드가 왕에게 아침마다
이야기를 해주면서 내일 아침에 다시 해주겠노라고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과 닮았다.
그런 묘한 기운이 참 좋다.
만약에 뭔가 재미난 동화를 쓰고 싶다면 그가 쓰다만 이야기들에 살을 붙이기만 해도
아주 훌륭한 책이 될 것 같은 신나는 느낌이 온다.
아무튼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이야기를 씹지도 않고 삼키는 돼지가 되었다.
그래서 무지 뚱뚱해졌지만 이 포만감이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