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다
-이선식
비가 오면 나는 젖는다
온몸으로 비를 받아들인다.
지상의 모든 것들이 젖고
섣불리 날던 새들도 모두
둥지 속에 깃들 때
젖는다는 건
까맣게 잊고 살았던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어두운 방으로 돌아와
거미줄을 걷고 때묻은
창문을 닦는 것이다.
조신하고 앉아서
거울 속에서 내다보고 있는
표정 없는 사람과 바라보기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가라앉고 시간의 흐름마저
고요해질 때
떡잎을 열고 발아하는
무독성의 새순과 만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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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때, 청바지 자락이 바닥에 쓸려 흠뻑 젖은 채로
남의 집 문간을 넘는 일이 힘겹게 느껴진 게
언제적 일이냐는 듯 난 지금 비를 또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비를 기다리는 것은 젖기 위함이 아니라
남들이 젖는 걸 바라보기 위함이었어.
나무나, 풀들이나, 미처 거두지 못한 빨래들이나,
얌전하게 매만졌던 머리들이 금세 풀죽는 모습이나,
허겁지겁 내놓았던 물건들 위로 씌운 비닐들에 통통거리며 튀는 물방울이나,
차들 때문에 완벽하게 동이째로 젖는 아스팔트나,
우산을 써도 피할 수 없는 남들의 사각지대를 보는 걸
나 스스로 즐기고 있었더란 말이지.
비를 맞아 비와 함께 하나가 되곤 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어느새 나이가 들면서는 그도 환경 탓이라며 안 하게 되더라.
매번 그렇게 아쉬워하면서 지냈는데
어라..시간이 곱절이 지나니까 말야.
실제로 비를 맞는 것만이 비에 젖는 게 아니었어.
체로키 인디언들이 말하듯 영혼의 마음과 육체의 마음이 따로 있어,
내 영혼의 마음이 비와 교감을 하는 게 가능했지.
'까맣게 잊고 살았던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비가 또 오면
난 내 방으로 다시 들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또 고민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