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도

-임영조

 

마음속 성지는 변방에 있다

오늘같이 싸락눈 내리는 날은

싸락싸락 걸어서 유배가고 싶은 곳

외투 깃 세우고 주머니에 손 넣고

건달처럼 어슬렁 잠입하고 싶은 곳

이미 낡아 색 바랜 시집 같은 섬

-오이도행 열차가 도착합니다

나는 아직 그 섬에 가본 적 없다

이마에 '오이도'라고 쓴 전철을

날마다 도중에 타고 내릴 뿐이다

끝내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묻어둔 여자 같은 오이도

문득 가보고 싶다, 그 섬에 가면

아직도 귀 밝은 까마귀 일가가 살고

내내 기다려준 임자를 만날 것 같다

배밭 지나 선창가 포장마차엔

곱게 늙은 주모가 간데라 불빛 쓰고

푸지게 썰어주는 파도소리 한 접시

소주 몇 잔 곁들여 취하고 싶다

삼십여 년 전 서너번 뵙고 타계한

지금은 기억도 먼 나의 처조부

吳利道 옹도 만날 것 같은 오이도

내 마음 자주 뻗는 외진 성지를

오늘도 나는 가지 않는다, 다만

갯벌에는 나문재 갈대꽃 피고 지고

토박이 까치 무당새 누렁이랑 염소랑

나와 한 하늘 아래 부디 안녕하기를.

 

********

갑자기 어딘가로 휭하니 달려가고 싶은 밤

전철로도 갈 수 있는 근교를 뒤지다가

손가락 사이에 들어온 것이

오이도와 하늘공원, 선유도, 월미도.

자주 가는 월미도는 제쳐두고

한 번도 안 가본 하늘공원과 선유도를 접어 놓으니

남은 건 오이도 뿐.

답답할 때마다 동생 불러

잘 먹지도 않는 조개구이를 겁나게 시켜놓고

그저 연탄불이 지글지글 태우는 조개는 바라만 보고

소주만 들이켜도 이층집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검은 바다가

훌륭한  안주가 되어주던 곳.

 

12시가 가까운 시각 탓인지 비가 오는 지금,

동네는 너무나 조용하다

빗소리가 불러온 그리움 탓에 조개가 벌어지는 순간의 탄성과

소주의 알싸한 맛이,

바닷바람이 그립다.

 

오이도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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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풀

-임영조

 

이 세상 어디를 가든

땡볕 피할 그늘 하나 없는 곳

가도 가도 목타는 곳이 사막이다

발 뻗고 쉴 곳 없는 사막에서

이따금 내가 만난 풀들은 왜

표정조차 뻣세고 가시 많은 것일까

무시로 경을 치는 모래바람 속

몸 둘 바를 몰라 쩔쩔매는 선인장

믿을 것은 그래도 자신밖에 없다고

온몸에 가시바늘 세우고 산다

뿌리까지 흔들리는 멀미 속에서

중심 잡고 악착같이 살아애지

남에게 함부로 씹히지 말아야지

무게를 덜고 오기로만 버티는

낙타풀은 몸이 온통 가시다

바람에 벼린 서슬 푸른 적의다

사막에서 내가 만난 풀들은 대개

뾰족하고 의심이 많다, 나도 가끔

가시 돋친 말을 뱉는 낙타풀이다

내가 뱉은 가시에 내가 찔리는.

 

**

내가 만나는 사막도 그리 다를 게 없다

날 위한 오아시스 하나 없고

그나마 만나는 풀들은 내게 독만 들이댄다

그게 서러워서 난 나대로

가시를 만들었는데

슬픈 가시는 도리어

나를 찌르고 만다

기어이, 죽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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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다

-이선식

 

비가 오면 나는 젖는다

온몸으로 비를 받아들인다.

지상의 모든 것들이 젖고

섣불리 날던 새들도 모두

둥지 속에 깃들 때

젖는다는 건

 

까맣게 잊고 살았던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어두운 방으로 돌아와

거미줄을 걷고 때묻은

창문을 닦는 것이다.

조신하고 앉아서

거울 속에서 내다보고 있는

표정 없는 사람과 바라보기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가라앉고 시간의 흐름마저

고요해질 때

떡잎을 열고 발아하는

무독성의 새순과 만나는 시간이다.

 

****

장마 때, 청바지 자락이 바닥에 쓸려 흠뻑 젖은 채로

남의 집 문간을 넘는 일이  힘겹게 느껴진 게

언제적 일이냐는 듯 난 지금 비를 또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비를 기다리는 것은 젖기 위함이 아니라

남들이 젖는 걸 바라보기 위함이었어.

 

나무나, 풀들이나, 미처 거두지 못한 빨래들이나,

얌전하게 매만졌던 머리들이 금세 풀죽는 모습이나,

허겁지겁 내놓았던 물건들 위로 씌운 비닐들에 통통거리며 튀는 물방울이나,

차들 때문에 완벽하게 동이째로 젖는 아스팔트나,

우산을 써도 피할 수 없는 남들의 사각지대를 보는 걸

나 스스로 즐기고 있었더란 말이지.

 

비를 맞아 비와 함께 하나가 되곤 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어느새 나이가 들면서는 그도 환경 탓이라며 안 하게 되더라.

매번 그렇게 아쉬워하면서 지냈는데

어라..시간이 곱절이 지나니까 말야.

실제로 비를 맞는 것만이 비에 젖는 게 아니었어.

체로키 인디언들이 말하듯 영혼의 마음과 육체의 마음이 따로 있어,

내 영혼의 마음이 비와 교감을 하는 게 가능했지.

 

'까맣게 잊고 살았던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비가 또 오면

난 내 방으로 다시 들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또 고민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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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낡은 선풍기

-안도현

 

저 낡은 선풍기

참 가련타

가전제품 수리 전문점 앞에서

먼지를 백발처럼 뒤집어쓰고

깨진 프로펠러를 달고

구질구질한 내장을 다 내보이며

쓰러질 듯 술취한 듯 비척거리며

겨우 고철 덩어리 냉장고에 기대어 서 있는

 

명예퇴직한 저 선풍기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고

멈추고 싶으면 멈추는

저 낡은 선풍기 때문에

나, 눈물이 핑 돈다

 

머리 깎고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아침마다 넥타이를 매지 않아도 되는

다달이 봉급에서 세금을 떼이지 않아도 되는

자주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는

민방위 소집에 응하지 않아도 되는

기름 넣고 세차할 차 한 대도 없는

저 선풍기는

좋겠다

 

다시는 콘센트에 손가락을 집어 넣어

찌릿찌리릿 몸을 떨어야 할 필요도 없는

 

*******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를 볼 때

용의자나 피해자의 나이가 거론되는 걸 무심히 넘겼다가

1~2초 뒤에야 깜짝 놀랄 때가 있다.

42세 한 모씨, 40세 김 모씨..

처음에는 중년의 아줌마나 아저씨를 떠올렸다가

그게 바로 내 나이임을 직감하는 순간이다.

나이를 세월의 깊이만큼 먹지 못하고

그저 겅중겅중 뛰어서 숫자 상의 나이로 먹은 것 같은,

그래서 누가

"너, 나잇값 좀 해라!"

호통을 치면 눈물 찔끔난다

불면증에 시달렸다가 깜빡 잠든 새에

내 나이에다 누가 자기 나이를 덧붙여 놓고 도망간 것일까?

붙여 놓은 나이들은 뱃살에 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거울을 보면 분명코 내 모습도 낡은 선풍기와 다르지 않지만

나는 오늘 아침도 바란다.

낡아서 그르렁대며 돌아가는 게 버거워도

찌릿찌리릿한 아찔함을 맛보며 계속

콘센트에 손가락 집어 넣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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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이성복

 

비는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땅을 쪼으려 내려오다 바닥에 닿기

전에 드러눕는다 자해공갈단이다

비는 길바닥에 윤활유 들이부은 듯

아스팔트 검은빛을 더욱 검게 한다

하늘에서 내려올 땐 무명 통치마였던

비는 아스팔트 바닥 위를 번칠거리며

흐르다가 하늘을 둘러싸는 여러 다발

탯줄이 된다 아, 오늘은 늙은 하늘이

질퍽하게 생리하는 날 누군가 간밤에

우주의 알집을 건드린 거다 아니다,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알집 두터운 벽이

스스로 깨져 무너져 쏟아지는 것이다

 

****

보통은 '나'에 대한 소개를 하기 마련이지만

가끔씩은 '남'을 관찰해보고 소개를 대신 해주는 것도 좋다.

어제, 나를 너무나 잘 아는 한 사람으로부터

나에 관한 것을 보고받았다.

나 스스로는 굉장히 주제 파악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모르는 부분도 많아서

사각지대를 못 보는 운전자와 비슷하더군.

 

그 친구가 한 말 중에 아직도 머릿속을 맴도는 건

'당신은 이제 왜 라고 묻고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이제 나니까 라고 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이제 당신입니다.'

 

그래, 어쩌면 나도 자해공갈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스스로에게 변상을 요구하는 바보같은 자해공갈단.

이제 그런 짓은 그만 두고 착하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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