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이성복
비는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땅을 쪼으려 내려오다 바닥에 닿기
전에 드러눕는다 자해공갈단이다
비는 길바닥에 윤활유 들이부은 듯
아스팔트 검은빛을 더욱 검게 한다
하늘에서 내려올 땐 무명 통치마였던
비는 아스팔트 바닥 위를 번칠거리며
흐르다가 하늘을 둘러싸는 여러 다발
탯줄이 된다 아, 오늘은 늙은 하늘이
질퍽하게 생리하는 날 누군가 간밤에
우주의 알집을 건드린 거다 아니다,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알집 두터운 벽이
스스로 깨져 무너져 쏟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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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나'에 대한 소개를 하기 마련이지만
가끔씩은 '남'을 관찰해보고 소개를 대신 해주는 것도 좋다.
어제, 나를 너무나 잘 아는 한 사람으로부터
나에 관한 것을 보고받았다.
나 스스로는 굉장히 주제 파악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모르는 부분도 많아서
사각지대를 못 보는 운전자와 비슷하더군.
그 친구가 한 말 중에 아직도 머릿속을 맴도는 건
'당신은 이제 왜 라고 묻고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이제 나니까 라고 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이제 당신입니다.'
그래, 어쩌면 나도 자해공갈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스스로에게 변상을 요구하는 바보같은 자해공갈단.
이제 그런 짓은 그만 두고 착하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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