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낡은 선풍기
-안도현
저 낡은 선풍기
참 가련타
가전제품 수리 전문점 앞에서
먼지를 백발처럼 뒤집어쓰고
깨진 프로펠러를 달고
구질구질한 내장을 다 내보이며
쓰러질 듯 술취한 듯 비척거리며
겨우 고철 덩어리 냉장고에 기대어 서 있는
명예퇴직한 저 선풍기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고
멈추고 싶으면 멈추는
저 낡은 선풍기 때문에
나, 눈물이 핑 돈다
머리 깎고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아침마다 넥타이를 매지 않아도 되는
다달이 봉급에서 세금을 떼이지 않아도 되는
자주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는
민방위 소집에 응하지 않아도 되는
기름 넣고 세차할 차 한 대도 없는
저 선풍기는
좋겠다
다시는 콘센트에 손가락을 집어 넣어
찌릿찌리릿 몸을 떨어야 할 필요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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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를 볼 때
용의자나 피해자의 나이가 거론되는 걸 무심히 넘겼다가
1~2초 뒤에야 깜짝 놀랄 때가 있다.
42세 한 모씨, 40세 김 모씨..
처음에는 중년의 아줌마나 아저씨를 떠올렸다가
그게 바로 내 나이임을 직감하는 순간이다.
나이를 세월의 깊이만큼 먹지 못하고
그저 겅중겅중 뛰어서 숫자 상의 나이로 먹은 것 같은,
그래서 누가
"너, 나잇값 좀 해라!"
호통을 치면 눈물 찔끔난다
불면증에 시달렸다가 깜빡 잠든 새에
내 나이에다 누가 자기 나이를 덧붙여 놓고 도망간 것일까?
붙여 놓은 나이들은 뱃살에 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거울을 보면 분명코 내 모습도 낡은 선풍기와 다르지 않지만
나는 오늘 아침도 바란다.
낡아서 그르렁대며 돌아가는 게 버거워도
찌릿찌리릿한 아찔함을 맛보며 계속
콘센트에 손가락 집어 넣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