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입으로 걷는다 웅진책마을 8
오카 슈조 지음, 다치바나 나오노스케 그림, 고향옥 옮김 / 웅진주니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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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쯤이었나.

자장가를 불러주듯 흔들어주는 버스를 타고 반 쯤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 잠에 취해 있는데

흡사 옷 보따리로 보이는 한 여자 아이와 엄마가 버스에 올랐다.

소매는 너무 길어서 한 쪽은 두세 번쯤 접었으나 한 쪽은 접어올리는 것을 잊었는지

손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곳에서도 한참을 아래로 내려간 끝에서 대롱대롱 흔들리고,

바지 위에 모직 치마를 한 번 더 입혔는데 그날 날씨는 그리 춥지 않은 터여서 땀을 흘리고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에 이르렀는데, 숱이 별로 없는 머리카락을 덮은 모자는 또 얇아보이는 분홍색이어서

어쩌면 저렇게 딸 옷차림을 이상하게 했을까, 자신은 정상적으로 입은 엄마를 보며 혼자 투덜대고 있었다.

차 안에는 사람들이 그닥 많지 않아서 아이의 말소리가 다른 사람들을 짜증나게 할 정도도 아니었는데

 뭐라고 자꾸 질문을 해대는 딸을 귀찮다는 듯, 조용히 하라 이르기만 하는 엄마는 낯설었다.

저 나이 또래 여자 아이들과 엄마의 모습하곤 너무나 동떨어진 행동이었다.

 

몇 정거장을 더 지나 내리려고 아이의 손을 우악스레 움켜쥔 엄마가 행여 누가 볼 세라

모자를 다시 푹 눌러씌우는 걸 보고야 가슴이 철렁했다.

앉아 있을 때 보이지 않던 반대쪽 얼굴이 눈에 띄었는데, 눈썹부터 눈 주위까지가 온통 시커먼 털 투성이었던 것.

예쁜 여자 아이 얼굴이 저러니 얼마나 속상할까.

그렇게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과 동시에, 아직 약도 개발되지 않아 평생을 저리 살아야 할 텐데

감추고 산다고 감춰질 것이며 아이가 명랑하고 쾌활하게 생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나에게 닥친 일이 아니라서 이렇게 쉽게 말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 순간 '오토다케 히로타다'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나 활짝 웃는 표정인 그가 장애를 딛고 얼마 전 선생님이 되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내 가슴이 얼마나 뿌듯하던지.

팔과 다리가 없어 전동휠체어에 의지해 살아가면서도 장애를 부끄러워 하지 않고 도전적이며 의욕적이라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던 그 사람.

사회적인 인식 차이겠지만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눈은 사뭇 다르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육체적인 장애는 모든 일에 장애가 되어버리는 우리에게

'오토다케 히로타다'의 이야기나 이번에 본 <나는 입으로 걷는다>의 다치바나의 밝은 인상은 부러움이다.

장애를 다룬 이야기 대부분이 너무나 우울해서 사실 몇 권 읽은 후엔 비슷한 책들을 보고 싶지 않았는데

이 책은 정말 쾌활하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다치바나가 침대 차를 타고 친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아무 쓸모도 없다는 자조적인 기운을 벗어버린다.

침대차를 집밖에 내어놓고 아무런 걱정도 없이 집안으로 들어가는 씩씩한 엄마와

입만 가지고 친구네 집을 찾아가는 태평스런 다치바나의 모습은 닮고 싶다.

모든 사람들이 장애는 조금 불편할 뿐이라는 걸 말이 아닌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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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나는

-최승자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너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

'개같은 가을이'라는 시에서 보여주었던 그녀의 독한 기운이

이 시에도 조금쯤 뻗어 있지만

왠지 나는 그녀가 안간힘을 쓰며 팔을 뻗는 거 같아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오..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나보다 한참이나 먼저 태어나신 분한테

그것도 문단의 한 자락을 걸치고 있는 분한테..

낄낄..

그러나, 시를 읽는 건 독자의 몫이다.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건

마지막 두 문장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건,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이 시를 고른 건 요새 읽고 있는

<백년 동안의 고독> 때문이다.

책이 없어져서 다시 사야만 했지만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마르께스..대단한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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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

-김춘수

 

새벽 네시

이불 밖으로 나온

콧등이 시리다

세계의 모든 아침이 다

발을 멈추고 나를 본다

먼저 핀 시로미 꽃이 한데서

입술을 떨고 있다고.

 

****

어릴 때에도 나는 낮밤이 바뀌어

엄마를 무척 힘들게 했다는데

다 큰 지금도

밤에는 잠을 자기가 싫고

아침이 부옇게 밝아올 때쯤이면

짧은 잠이나마 푹 자고 싶으니 참..

 

아침 일찍 일어나 이것저것 하리라던 계획은

어제 저녁 새로 얻은 책을 좀 보느라 늦게 잔 것을

핑계로 또다시 잃어버린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맞은 오늘 아침

무척 춥다

꽃샘추위

눈까지 내리시는데

이 눈이 내가 볼 꽃들을 얼리지 않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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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零下 十三度

零下 二十度 地上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零下에서

零上으로 零上 五度 零上 十三度 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

더벅머리에 순하게 웃고 있는 황지우 시인은

이제 흰 머리가 더 많아 희끗희끗해져버렸고

이 시집 또한 1989. 2. 21의 날짜를 달고

아주 낡은 집처럼 변해버렸다.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이 말이 자꾸만 내 입속을 빙글빙글 맴돈다.

나는 무엇으로 조혜원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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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흥

-정몽주

 

봄비가 가늘어 듣지 않더니

밤중에는 자그마한 소리로 들리는구나

눈 녹아 앞 개울 물이 불어나겠네

풀들이야 얼마나 돋아났을까

 

******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선죽교에서 목숨을 잃은 고려 충신..

 

새벽녘에 나는 빗줄기를 느꼈다

실제로 비가 왔다는게 아니라 꿈속에서 비가 들었다.

가늘은 빗소리에 잠이 깨어

몽롱한 중에도 창문을 열고 진짜로 비가 오나

한참을 졸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봄을 기다리고 있다.

누른 빛이 점점 사라지고 온 천지가 푸른 빛으로

충만해질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내 나이를 닮은 누른 빛은 잠시 잊고

남들처럼, 아이들처럼 푸른 빛을 받아

내 영혼도, 내 팔다리의 관절들도

조금은

푸릇푸릇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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