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복숭아 나무 곁으로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 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기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 꽃과 분홍 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이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 꽃과 분홍 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 나무 그늘에서

저녁이 오는 소리 가만히 들었습니다

흰 실과 검은 실을 더는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

 

집에서 학교로 가는 길은 족히 다섯 정거장은 되는 거리였다

길 옆으로 나즈막한 산들이 있어

계절이 바뀌는 걸 실감할 수 있었던 길

비가 오면 질척해진 흙길에 운동화가 더러워지고

차가 한 대만 지나가도 먼지에 인상을 찌푸려야 했지만

힘든 줄도 모르고 다니던 비포장 도로

덕분에 걷는 것에 습관이 들어 지금도 걷는 일 하나는 익숙한.

 

초등학교 5학년.

벌써 외로움이니 우울함이니 하는 감정에 휩싸여서

다른 친구들과 묻어 낄낄대며 가기보다

혼자 조용히 길가 꽃잎이나 나무들, 흙덩이 바라보며

가는 걸 즐겼던 내게

봄이 될 무렵 과수원에 줄지어 있던 복숭아 나무들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가지만 남아 초라해진 나무보다

꽃이 활짝 피어 화려한 나무보다

열매가 그득하게 매달려 군침 삼키게 했던 나무보다

잎이 나기 직전의 나무를 제일 좋아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나무 전체가 봄이 왔음을 축하하는 듯

수액을 꼭대기까지 끌어올려 가지 끝부분까지 불그스름해진

그 모습은 너무 애교스러워서

나 여기 있으니 햇볕 듬뿍 달라는 표시 같기도 하고

이제 드디어 시작이다 전투 준비!

하는 소리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겨우내 추워 동상걸린 발들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여

얼음을 떨궈내는 듯 보이기도 한 그 모습에 반해

학교 가는 일도 잊고 한참을 그 자리에 못박혀 바라보기도 했었다

 

지금은 복숭아 나무를 보는 대신

열매만 덩그렇게 나와 있는 좌판 위 복숭아를 보며

그 시절의 생각을 떠올릴 뿐이다

한가롭게 걸을 수 있는 길도 사라지고

내가 살던 집도 사라져

다시 그런 풍경을 갖기는 어렵지만

복숭아 나무 얘기만 나오면

그때 발가벗은 그 나무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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專門家
-기형도

이사온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이 집 담장들은 모두 빛나는 유리들로 세워졌다

골목에서 놀고 있는 부주의한 아이들이
잠깐의 실수 때문에
풍성한 햇빛을 복사해내는
그 유리담장을 박살내곤 했다

그러나 얘들아, 상관없다
유리는 또 갈아끼우면 되지
마음껏 이 골목에서 놀렴

유리를 깬 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이상한 표정을 짓던 다른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곧 즐거워했다
견고한 송판으로 담을 쌓으면 어떨까
주장하는 아이는, 그 아름다운
골목에서 즉시 추방되었다

유리담장은 매일같이 깨어졌다
필요한 시일이 지난 후,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충실한 그의 부하가 되었다
어느 날 그가 유리담장을 떼어냈을 때, 그 골목은
가장 햇빛이 안 드는 곳임이
판명되었다, 일렬로 선 아이들은
묵묵히 벽돌을 날랐다.

*****

우리 동네 이름은 무궁화마을이었다.
지금은 부천에 가면 라일락마을이니, 행복한 마을이니,
다정한 마을이니 하는 동네 이름이 낯설지 않지만
그 당시만 해도 우리 동네 이름은 특이한 축에 속했다.
딱 마흔 두 가구가 사는 그 마을에서 우리 집은 18호였다.
처음엔,
무슨 집에 호수가 붙어져 있냐고, 죄수 번호 같다고 했는데
지어질 무렵 경찰주택이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우리 동네는 도둑이 없었다.

어릴 때 여느 애들과 똑같이 놀기를 좋아했던 나는
보자기 하나 목에 두르고 늘 담장에서 뛰어내리는 모험을 즐긴 나는
햇빛 어룽어룽 반짝거리는 큰 길보다는
조금 어두컴컴하고 음침한 듯 보이는
서늘한 골목에서 논 기억이 많다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 입구에는
커다란 복숭아나무가 있었고
집집마다 심어 놓은 무궁화나무가 삐죽 머리를 내놓고
밖을 정찰하고 있었다
늘 문을 열어두고 살아서 숨바꼭질을 할 때도
남의 집, 우리 집 차이를 두지 않고 들락거려
술래가 된 아이는 반 나절을 꼬박 찾아다니기도 했는데..
이렇게 유리담장을 한 골목이 있다면 무얼 하고 놀았을까?
낙서하기 딱 좋게 생겼으므로 크레파스로 떡칠을 했을 수도,
거울을 써서 반사하기 놀이를 했을 수도,
그래도 제일 하고 싶은 건 역시
그 유리를 깨뜨리는 일이었을 것 같다.
유리가 와장창 깨지는 그 통쾌한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괜찮다. 얘야.
유리를 다시 끼워야 하는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도 어린 시절 그렇게 노는 걸 좋아했음에도
노느라 자기 할 일 못하고 늦게 돌아다닌 아이에게 화가 나서
매를 대고 화를 참지 못해 죽비가 깨지도록 상을 내리쳤다.
상에도 흠집이남고 죽비는 박살이 났다.

나는 우울한 기분인데 아이는 벌써 어제 일은 잊은 얼굴이다.
밥을 먹으면서 뭐라 해야 하나 고민만 하다가
그냥 학교에 보냈다.
나는 전문가가 되려면 멀었다
부모가 되는 일,
아이를 키우는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일이다.

오늘은 기다렸다가 이 말을 꼭 해야겠다.
괜찮다. 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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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집

-이윤학


제비가 떠난 다음날 시누대 나무 빗자루를 들고
제비집을 헐었다. 흙가루와 함께 알 수 없는
제비가 품다 간 만큼의 먼지와 비듬
보드랍게 가슴털이 떨어진다. 제비는 어쩌면
떠나기 전에 집을 확인할 지 모른다
마음이 약한 제비는 상처를 생각하겠지
전깃줄에 떼지어 앉아 다수결을 정한 다음날
버리는 것이 빼앗기는 것보다 어려운 줄 아는
제비떼가, 하늘 높이 까맣게 날아간다.

****

‘버리데기’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의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나 버려진 아이.
논도 갈아주고, 온 산의 나무도 다 해주고,
흰 빨래는 희게 검은 빨래는 검게 해주고
패랭이 쓴 총각에게 아들 세 명까지 낳아준 후에야
시약산의 약물을 받아 가져올 수 있었던 여인네. 버리데기
아이들과 함께 인형극으로 꾸며봤다
무대를 꾸미고 젓가락 끝에 인형을 붙이고 나면
어김없이 ‘흥부와 놀부’가 떠오르는 건 무슨 이유일까
한 장의 천을 둘러쓰고 앉았던 힘없는 흥부와
날씬한 꼬리 치켜들고 맵시있게 걷던 제비가 떠오르는 거다.
처음 해본 연극이라 그랬을까?

제비..
얼마 안 있으면 날아오고
저마다 집을 지으려고 부산을 떨겠지.
우리 집에도 제비집이 있었다.
마당이 너른 그 집에는 해마다 제비가 찾아오곤 했는데
눈이 어둔 나로서는 그 제비가 작년에 왔던 제비인지
알 길은 없으나
우리집 속 제비집은 여전히 그대로 방을 비워둔 채였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햇볕을 피해야 할
빨래들을 널어두는 공간에

하필이면 그 기둥 밑을 노리고 제비는 집을 지었다.
하얀 빨래에 똥 싸는 걸 질색했던 엄마는
커다란 빗자루를 들어 집을 헐어버리셨는데
명당자리라고 여겼는지 제비들은 여간해선 포기를 몰랐다.
결국,
아빠가 널따란 판자를 구해와 넉넉하게 밑을 대준 다음에야
엄마도 같이 사는 걸 허락하셨다.

얼룩덜룩한 제비알도 훔쳐보고
정말이지 흥부네 집에서처럼 추락한 제비도 올려줘보고
삐이이쪽쪽. 이렇게 명랑한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깨기도 했는데.

지금은 제비집 구경한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잊은지 너무 오래 되었다.

이번 봄에 제비가 오거든 반갑다고 인사나 해야겠다.
얼른 와라, 제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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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깃들여

-정현종

 

나무들은

난 대로가 그냥 집 한 채

새들이나 벌레들만이 거기

깃들인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까맣게 모른다 자기들이 실은

얼마나 나무에 깃들여 사는지를!

 

****

 

"언니, 오늘 쉰다며? 나랑 같이 경원이 옷 사러 가자."

다섯 살이 되는 조카 경원이는 유난히 치마에 대한 애착이 크다.

어린이집으로 데리러 간 엄마와 나를 보더니

"이모, 경원이 치마 사러 갈 거예요?" 이런다

"그래. 치마 사러 가자. 예쁜 잠옷이랑"

송내역에 내려 투나에 갔더니 너무 예쁜 옷들이 많다

아장아장 걸을 무렵 아이들에게 잘 어울릴 듯한 니트들.

 

치마는 결국 못 사고 바지와 가디건,

도톰한 니트 몇벌을 사갖고 돌아서는데

집을 나서면서 들었던 얘기가 영 마음에 걸렸다.

니 아버지가 네가 사준 청바지만 그냥 입더니

결국 무릎에 구멍이 나서야 버렸잖냐

내가 시장에서 사준 청바지는 보기 싫다고 입지도 않더니

그거 버리고 나선 입을 게 없어서 그랬는지 그 옷도 입으시더라.

 

다시 올라가 청바지를 골랐다.

"사이즈 36있어요?"

예쁜 디자인의 바지는 그렇게 큰 사이즈가 없단다.

우리 아빠는 배가 좀 나와서 36입어야 하는데

결국 몇 군데를 돌다가 뱅뱅에 가서야 하나 찾았다.

세일을 해서 이만 원(조카 녀석 옷은 십만 원이 넘었는데)에

한 벌을 사서 갖다 드렸다.

 

"청바지 있는데 뭘 또 사왔냐?"

그러시면서도 한 번 입어보세요 하니까 얼른 입으신다.

청바지 입으신 폼이 참 근하하다.

우리 아버지는 올해 일흔 두살이 되신다.

너무나 깔끔하고 풍채가 좋으셔서

무슨 옷을 입어도 참 잘 어울리신다.

길이를 너무 짧게 자르지 마시라고 신신당부를 하고서

어제 먹기로 했던 잡곡밥과 나물을 배부르게 먹고 왔다.

 

이만 원짜리 청바지에 흐뭇해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시집간 딸에게 오곡밥과 나물을 챙겨주시는 엄마를 보면서

내가 깃들여 사는 곳은 우리 아버지라는 나무

우리 엄마라는 나무가 아닐까 생각했다

끊임없이 퍼주는 나의 나무. 결국 밑둥만 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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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신현림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
신현림 시인은 아이를 데리고 혼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시에서는 매운 냄새가 난다.
울기를 억지로 참을 때 코끝이 매운 그런 냄새

눈물을 흘리되 소리가 있어야 울음이 완성된다.
내가 눈물을 흘리며 내는 소리는 대화에 가깝다.
눈물은 흐르는 대로 그냥 놔두고 대화를 한다.
누구와 하느냐는 무엇 때문에 우는가와 연관이 있다.
내 울음은 종종 누구 때문에 일어나서
항상 다른 사람과 중얼거리며 대화를 하는 걸로 끝이 난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조금 풀린다.

누군가가 그런 나를 본다면 미쳤다고 할 지도 모른다
아무도 없는데 혼자 중얼거리고 울고 있으니..
이제는 나도 눈물이 아닌 울음을 울고 싶다.
엉엉 울다가 꺼이꺼이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고 싶다.
그런 후에는 내게도 길이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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