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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멀리 와 있네

-임영조

 

어딘가에 떨어뜨린 단추처럼

어딘가에 깜박 놓고 온 우산처럼

도무지 기억이 먼 유실물 하나

찾지 못해 몸보다 마음 바쁜 날

우연히 노들나루 지나다 보네

다잡아도 놓치는 게 세월이라고

절레절레 연둣빛 바람 터는 봄 버들

그 머리채 끌고 가는 강물을 보네

저 도도하게 흐르는 푸른 물살도

갈수록 느는 건 삶에 지친 겹주름

볕에 보면 물비늘로 반짝이는 책

낙장없이 펼쳐지는 大藏經이네

어느 한 대목만 읽어도 아하!

내 생의 유실물이 모두 보이고

어영부영 지나온 산과 들이 보이네

내 마음속 빈터에 몰래 심어둔

홀씨 하나 싹트는지 궁금한 봄날

거룻배 노 저어가 찾고 싶은 날

오던 길 새삼 뒤돌아보면 이런!

나는 너무 멀리 와 있네.

 

*****

내 생에서 놓친 건 과연 어떤 것들일까?
내가 가야했던 길.

나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

그리고 열정.

 

나도 내 생의 출발점에서 너무나 멀리 와 버렸다

돌아가기엔 늦었으니

지금 이 대목에서 다시 출발해야한다.

잃어버린 것도 많고

잊어버린 것도 많지만

남아 있는 그 생의 끝에서 또다시

놓친 걸 안타까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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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편지 6

                                      고정희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

 

그리움의 형태는 여러가지

 

요즘의 내가 느끼는 그리움은

대체로 지난 시간에 대한 그리움들이다.

그 시간들이 그리울 때마다

그 시절에 봤던 영화들을 떠올리고

그 시절에 내 책꽂이를 장식했던 책들을 떠올리고

그 영화를 함께 보았던 사람들과

그들의 행동방식,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 시절의 나를 담은 몇 장 안 되는 사진도 함께..

 

그리고 잠시 멍하게 앉아있는데

그게 바로 감전된 형태가 아닐까..

오늘도 감전되어 나는

움직일 수 없다. 그리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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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墨정원8

-대숲

 

                                       장석남

 

해가 떠서는 대숲으로 들어가고

또 파란 달이 떠서는 대숲으로 들어가고

대숲은 그것들을 다 어쨌을까

밤새 수런수런대며 그것들을 어쨌을까

싯푸른 빛으로만 만들어서

먼데 애달픈 이의 새벽꿈으로도 보내는가

 

대숲을 걸어나온 길 하나는

둥실둥실 흰 옷고름처럼 마을을 질러 흘러간다

 

***

 

이번 여행은 잠도 못 자고 차를 오래 타는 바람에 내겐 참 피곤하고

아릿할 만한 추억 한 개도 없이 너무도 밋밋했지만

내게 남은 몇 개 잔상 중 하나가 바로 대숲이다.

 

광주에서 구례로 가는 길에 스쳐가던 담양.

흩어지지 말라고 손으로 뭉쳐 던져두던 솜뭉치마냥

대숲이 그렇게 군데군데 수군대며 서 있었다.

머리끝만 염색한 머리카락이 남은 부시시한 여자애들처럼

녹색의 몸체에 노란 빛을 약간씩 갖고서..

 

나뭇잎을 다 떼어낸, 물건으로 만들어지 전에

대나무는 너무나 탄탄하고 억세 보여서 남자 같은 이미지라면

땅 위에 발을 딛고 이리저리 바람에 쓸리는 머리카락을

걷어올리는 내가 본 대나무들은 십대 여자애들처럼 명랑했다

 

그 숲에 달이 떠오르는 걸 보았으니 한 가지는 건질 게 있었네

이번 여행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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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으로 띄우는 편지

-고두현

 

봄볕 푸르거니

겨우내 엎드렸던 볏짚

풀어놓고 언 잠 자던 지붕 밑

손 따숩게 들춰보아라

거기 꽃 소식 벌써 듣는데

아직 설레는 가슴 남았거든

이 바람 끝으로

옷섶 한 켠 열어두는 것

잊지 않으마.

내 살아 잃어버린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빛나는 너.

 

***

봄이 오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봄이 오면 어떤 특별한 일이 생긴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겨울에서 봄이라는 작은 변화가

내게 가져다 줄 약간의 설레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계절을 고루 맛볼 수 있다는 축복 속에

내가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과 겨울이었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봄도 좋다.

그 생명 충만함이 더불어 나도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어서

참 좋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한 발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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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나는

-최승자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너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

'개같은 가을이'라는 시에서 보여주었던 그녀의 독한 기운이

이 시에도 조금쯤 뻗어 있지만

왠지 나는 그녀가 안간힘을 쓰며 팔을 뻗는 거 같아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오..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나보다 한참이나 먼저 태어나신 분한테

그것도 문단의 한 자락을 걸치고 있는 분한테..

낄낄..

그러나, 시를 읽는 건 독자의 몫이다.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건

마지막 두 문장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건,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이 시를 고른 건 요새 읽고 있는

<백년 동안의 고독> 때문이다.

책이 없어져서 다시 사야만 했지만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마르께스..대단한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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