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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생긴 저녁

-장석남

 

보고 싶어도 참는 것

손 내밀고 싶어도

그저 손으로 손가락들을 만지작이고 있는 것

그런 게 바위도 되고

바위 밑의 꽃도 되고 蘭도 되고 하는 걸까?

아니면 웅덩이가 되어서

지나는 구름 같은 걸 둘둘 말아

가슴에 넣어두는 걸까?

 

빠져나갈 자리 마땅찮은 구름떼 바쁜

새로 생긴 저녁

 

*******

 

연이어 장석남의 시다.

아마도 며칠은 그러리라..

 

오늘 수업을 갔다가 이런 글귀를 발견했다

굉장히 다정다감한 아버지인 것 같은

3학년 남자애의 아버지 글씨로 책상 앞에 붙여진 종이조각.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인 동시에

앞을 비추는 광명이라야 한다

타오르는 사람은 흔하다.

그러나 불길이 꺼지면

무엇에 의지할 것인가

 

흠..

아주 흔하디 흔한 이 글귀가 새삼 마음을 울렸다

역시, 요즈음의 나는 나이를 실감하는 중이다.

 

'사랑'이라는 화두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이에 나는 '사랑'속에 갇혀

나 스스로 미로를 만들고 있었다

 

이젠 실타래를 내게 던져줄 사람을 찾는 일은

그만 둘 테다

돌아 나오기 보다 미로를 부술 작정이다.

 

가슴에 넣어둔 많은 것들을 다 흘려보내고

내 가슴은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해야만 할 일'로 채워야 한다.

 

손가락 머뭇거림도 이제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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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비린 사랑 노래 2

-황동규

 

오늘은 안개비가 내리다 말고

다시 공중으로 올라갔습니다

먼지 너무 많아 땅을 채 적시고 싶지 않았을까요.

많은 사람 속에서 안 보이는 사람이 되어

거리를 걸을 때 그중 편안합니다.

두리번대며 상점 속을 살피기도 합니다.

얼마 안 가 안개비도 나를 피하겠지요.

그때 나는 내 몸 적실 비를 찾아

계속 사람 속을 헤매겠습니다.

 

******

 

나는 정말 미시령이 좋다

그것도 장마철의 미시령.

너무 위험해서 출입금지 자주 되는 그곳이.

멀미도 많이 하면서 구불구불한 그 길을 올라갈 때마다

느껴지는 아슬아슬함이 좋다

죽음 앞까지 왔다갔다 하는 그네를 탄 기분..

이 시가 들어있는 시집이 바로

<미시령 큰바람>이다.

 

미시령을 느껴보고 싶어서

이 시집을 펼쳐들면

어디에고 미시령은 없다

바람 뿐이다.

 

너무 추워져서 옷깃을 여미고 있다

여기도 외로움이 난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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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나는 아이들에게 한 번 읽어본 건 세월이 조금 흐른다음

꼭 다시 읽어보라고 자주 말한다.

아직 시의 맛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시를 읽으라는 건 고문이고

좋게 읽은 동화책을 그리 읽으라 한다.

 

난 옛날에 읽을 책이 없어서 같은 책을 몇 번씩 읽곤 했는데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지금도 가끔 그런 일을 한다.

그러기에 제일 좋은 건 역시 시집이다.

주머니에 집어 넣고 다닐 수도 있는데다가

내 책꽂이에서  손이 제일 잘 닿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내가 가끔 우울해질 때나 너무 힘들다고 여겨질 때

보는 몇 권의 시집 중 한 권이다.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묵묵히 강둑에 앉아

잘못들이 덕지덕지 묻은 내 손을 강물에 넣고

흐르는 강물 속에 떠내려가는 그것들을

아무 생각없이 보는 내가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조금 가벼워지는 것이다.

오늘 무게를 줄여야 할 일이 있어서 ^^

이렇게 내 잘못들을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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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리

-최승호

 

등황색 초롱 안에 들어 있는 빨간 구슬, 꽈리의 껍질을

벗기면서 오래 간직되었던 열매의 처녀성을 본다.어떤

보석 세공사도 이렇게 씨앗을 품은 빨간 구승릉 만들지

는 못했을 것이다.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다만 자기

실현의 아름다운 작업에, 날이 궂으면 겸손을 갖고, 날이

좋으면 온 힘을 다해 온 꽈리에게, 찬사를 보낸다.

 

***********

최승호의 이 시집<반딧불 보호구역>은 온통 자연 속이다.

갖가지 곤충들이 등장하고 꽃이며 나무들이 지천이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옛날 우리집에도 꽈리가 자라고 있었다.

어느날엔가 동그란 구슬을 감싸고 있던 집이 살며시

열리면서 뒤집히는 걸 보고 있는데 엄마가

"이걸로 예쁜 소리를 낼 수 있는 거 아냐?"

그러셨다.

내가 알 리가 있나.

속안에 든 것들을 없애고 나면 꽈르르..끼리릭 하는 소리가

난다고 하셨는데 아무리 해도 찢어지기만 할 뿐

그 예쁘다던 소리가 안 나서 몇 개의 꽈리만 버린 기억이 난다.

꼭 들어보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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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숲이 있는 뒤란

-문태준

 

처음 이곳에 대나무숲을 가꾼 이 누구였을까

푸른 대나무들이 도열한 창기병 같다

장독대 뒤편 대나무 가득한 뒤란

떠나고 이르는 바람의 숨결을

공적(空寂)과 파란(波瀾)을 동시에 읽어낼 줄 안 이

누구였을까

한채 집이 할머니 귓속처럼 오래 단련되어도

이 집 뒤란으로는 바람도 우체부처럼 오는 것이니

아, 그 먼곳서 오는 반가운 이의 소식을 기다려

누군가 공중에 이처럼 푸른 여울을 올려놓은 것이다

***

 

글쎄..

특별이 이 시가 당기는 건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하나라도 들어있으면

나는 금세 끌리고 마는지라.

오늘은 대나무숲에 꽂혔다..과녁을 정확히 맞춘 10점 만점이다.

그리고 이 구절.

'바람도 우체부처럼 온다..'

그렇지.

어릴 적 우리집 우편함은 늘 내게로 오는 우편물로

가득했다.

파란 우체함을 덜컹 열었을 때 낯익은 필체가 눈에 뜨이면

나는 참으로 행복했었다.

지금은 이메일로 대신하기 때문에

이슬에 약간 젖어 글씨가 번지거나

더 두툼해진 그 촉감도 느낄 수 없고

언제 편지가 오려나 자꾸만 덜컹대며 우편함을 열어보는

조바심도 없어져버렸다.

그래서일까..빨간 우편함을 자전거 뒤에 매달고 가는

우체부 아저씨를 보아도 설렘이 없어졌다

슬픈 일이다.

 

오늘은 바람이 오는 길을 유심히 지켜봐야겠다

내 어릴 적, 늘 웃는 인상이시던 둥근 얼굴의 그 우체부아저씨를

다시 볼 수 있을 지도 모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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