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런 힘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사랑하고자 하는 힘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그저 아이가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껏 아이를 키운 지난날을 절대 잊지 마세요.
고통은 자신이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을 붙잡고 살아갈 때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변화시킬 수 없는 상대를 고치려고 하면 할수록 그 고통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들을 먼저 하면 됩니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겠지요.
‘아버지’라는 단어는 이중적 혁명의 메시지와 예수님의 사명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이것은 출애굽의 메시지이며, 폭군과 압제자들이 마땅히 두려워할 메시지다. … 이 혁명은 아들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 이 혁명은 세상이 치유되도록 세상의 아픔을 나누고 그 아픔을 짊어지는 메시아를 통해, 그 메시아의 백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행위는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것은 모험이며 도전이다.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는 이 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고 서명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실제로 예수님이 누구였고 누구인지 이해하는 출발점에 있는 문제로서, 아버지라는 단어는 이스라엘의 소명, 특히 이스라엘의 구원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는 해방의 희망을 붙잡는다는 뜻이었다. 이제 노예들은 아들이라 불렸다.
남과 같지 않으면 불안해하면서도, 남과 다르게 자기를 구별하고 싶은 이중적 욕망 속에서 삶은 숨 가쁘다. 연령에 따라 욕망의 스펙트럼이 빚어내는 무늬만 다를 뿐, 사회 거의 모든 계층 속에 내면화된 욕망의 얼개는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