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컨택트 사회는 비대면이지만 오히려 더 촘촘한 감시와 통제가 가능할 수도 있다.- P184

사람이 사람을 통제하는 시대는 끝났다. 사람이 사람을 통제한다는 발상도 유효하지 않은 시대다.- P184

통제가 아닌 관리와 보호를 위해서 사람이 아닌 기술의 힘을 빌릴 방법에 대해 고민이 필요한 시대인 건 분명하다. 언컨택트 사회의 딜레마다.-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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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갑자기 자신의 복음 경험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직접적 공격과 그들의 경험을 선명하게 상기시키는 내용으로 넘어간다. 3:1의 강렬한 표현은 청중의 관심을 끌려는 수사적 목적에 부합한다. 또한 여기에는 상황에 대한 바울의 평가가 반영되어 있다. 바울이 보기에, 주술 따위의 외부 힘이 꾀어낸 것이 아니라면, 자신들이 이미 하나님 백성에 소속되었다는 사실을 갈라디아교인들이 그렇게 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3:1b은 바울이 가르친 내용과 형식에 대해 중요한 단서를 제시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 전한다(고전 1:18, 23; 2:2도 보라)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기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눈앞에 밝히 보인다"라는 말은 갈라디아 교인 중에 누가 그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자리에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바울의 선포가 그 사건을 생생하고 강력하게 그들 앞에 제시했다는 뜻이다.

3:2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 자신의 성령 경험에 대해 예리하게 질문한다.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을 언급한 첫 번째 경우인데,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용어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성령은 이미 그들에게 논박할 수 없는 경험의 일부다. 성령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5절), 사적인 경험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에서 표현된다(5:13-26).

바울은 여기서 성령에 관해 가르치지는 않는다. 긴급한 질문은, 성령이 누구고 어떤 일을 하시느냐가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떻게 성령을 받았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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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술은 자전적 내력을 세세하게 회상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행위에 시종일관 초점을 맞춘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가진 회담을 전하는 1:18-24에서도 동일한 관점이 유지된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결국 갔다고 인정하지만, 이런 양보마저 게바와 야고보 두 사도만 거명함으로써 그 의미가 축소된다.

바울의 사도직의 기원에 대한 회고적 진술은,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교회를 핍박했다는 언급과 함께 끝난다. 이제 바울은 자신이 전에 박해자였고 이제는 사도로 활동한다는 것에 대한 유대 지역 교회의 증언을 언급한다(1:23).

유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사실(24절)은 자신의 사도직이 인간적 출처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직접 온다는 바울의 주장을 확인하는 데 일조한다.

어떤 계산법이든 이 예루살렘 여행이 중요한 이유는, 여행이 빈번했기 때문이거나 바울이 권위자들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고, 바울이 이미 하나님에게서 부여받은 사도적 임무를 예루살렘 권위자들이 확증해 주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행 자체가 계시의 결과로 이루어졌다(2:2).

바울은 예루살렘의 합법적 지도자들을 "거짓 형제들"과 구별하지만, 이 만남에 대한 그의 보고 방식은 그가 두 집단 모두와 독자적임을 강조한다. 그는 "거짓 형제들"에게 전혀 복종하지 않았지만, 그가 인정한 지도자들도 그의 복음 이해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유대교 율법을 철저히 따르던 이들이 이방인들과의 식사를 곤란하게 여긴 이유는, 이방인과의 교제가 본질적으로 반대할 일이어서가 아니라, 차려진 음식이 음식법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갈등의 정확한 본질이 무엇이든, 바울이 판단하기에 이런 행동은 복음 자체에 대한 공격과 다름없었다. 게바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은, 식탁 교제 곧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하는 식사가 계속되려면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유대 음식법을 따라야 한다고 요구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바울은 이런 반대 때문에 예루살렘 지도자나 친밀한 동맹자들과 맞서는 상황에 처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저항한다. 그는 자신의 타협 거부를 갈라디아인들이 모방해야 할 모델로 은근히 제시한다.

2:7에서 바울이 "무할례자에게" 전한 복음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전한 복음을 구별한 것은 내용상의 구별이 아닌 청중의 구별이다.

바울의 사도직에 부여된 유일한 요구는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는 것인데(2:10), 이는 예루살렘의 궁핍한 신자들을 가리킨다(롬 15:26을 보라; 참고. 행 11:27-30; 요세푸스 『고대사』 20.51-53, 101).

이 요구와 바울이 이 요구를 열심히 수행했다는 보고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유대 전통은 공동체 안의 약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기 때문에, 가난한 자에 대한 보살핌은 서로 친숙한 관계로 결속되어 있다는 인식을 보여 준다.

수사학적 측면에서, 이 회고 단락은 자신의 사도직이 인간 권위자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유래했다는 바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추가 증거를 제시한다.

바울은 자신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승인을 구했다고 인정할 때조차, 여전히 그들의 지위가 자기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고 주장하고(2:6), 그들이 자신의 사역을 전적으로 지지했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예루살렘 권위자들에게 복종하는 동시에 그들과 거리를 둔다.

바울은 율법과 그리스도를 상호 배타적 영역으로 이해한다.

율법과 그리스도가 칭의에 상호 보완적이라고 이해하는 교사들에게 맞서, 바울은 율법과 그리스도가 상반되고 그리스도에게만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고 단언한다.

전통에 대한 열심을 포함하여 바울이 이전에 소중하게 여긴 모든 것이 그리스도 때문에 죽었고(참고. 빌 3:2-11), 그의 새로운 삶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동으로만 배타적으로 정의된다.

갈라디아서의 나머지 내용은, 바울이 이 급진적 가치 재평가를 순전히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그 영향력이 개개인 신자를 넘어서는 복음 자체의 필수 요소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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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세계의 주요 종교에 속하는 유대교의 경전(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이라 부르는 것)과 기독교의 경전을 포함하고 있으며, 두 종교의 생명줄과 같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 안에서,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말을 건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듣고 있다.

성경 없이는 서구 사회의 기초, 형성 전승, 성격, 가치관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경은 서구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많은 나라들이 성경에서 비롯된 기본 원리들에 기초하여 세워졌다

성경에 관한 올바른 지식 없이는 세계의 가장 위대한 미술과 음악과 문학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성경은 셀 수 없이 많은 은밀하고 영웅적인 행동과 희생적인 섬김의 삶이 유래한 근원이자 영감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많은 성경 본문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혹한 행동과 야만적이고 편협한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기독교 교회가 급성장하는 세계의 여러 지역, 특히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는 성경을 새롭고도 흥미로운 방식으로 재발견하고 해석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그만큼 친숙한 성경의 한 가지 특징은 그 안에 매우 다양한 유형의 글들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 안에는 법률 규범, 역사적 서사, 운문, 시편과 잠언, 예언 신탁, 묵시적 환상, 복음서, 서신이 있다.

이 모든 장르들은 그 각각의 부요함을 설명하기 위한 상세한 연구가 필요하며, 66권의 문서들 모두?외경과 위경은 물론이고?에 대한 무수한 주석과 특별한 연구가 이어져 왔다.

성경이 참으로 중요한 책임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증거는 성경이 인류 역사상 출간된 그 어떠한 단권 서적이나 전집류보다도 훨씬 더 많이 이차 문헌들이 생겨나게 했다는 점이다.

성경 연구는 새로운 발견들과 접근 방법들을 매개로, 그리고 아주 상세한 차원에서든 아니면 전체적 그림의 차원에서든 단순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옛 가정들에 대한 신선한 평가를 끊임없이 요청하는 통찰들을 매개로 신속한 변화가 이뤄지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편지 첫머리에서 갈라디아 교회 수신인들의 행동에 크게 놀랐다고 밝힌다(1:6). 얄궂게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이후 이 편지 자체가 여러 세대의 독자들을 놀라게 하고 당혹스럽게 했다.

편지의 격앙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해 고심하는 어머니로 자처하고(4:19) 자신이 방문했을 때 보여 준 그들의 따뜻한 관심을 회상한다(4:15).

갈라디아서의 중심 단락(3장과 4장)은 이방인이 모세의 율법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한다.

갈라디아 교회들이 어디에 있었든, 이들이 이방인의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염두에 두는 걸로 충분하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디에 거주했든, 바울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곳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엄청난 상황 변화가 있었다.

편의상 ‘교사들’(편견이 담긴 ‘적대자’나 오해를 부르는 ‘유대주의자’보다 바람직한 용어다; Martyn 1997a: 117)이라고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그리스도인 집단이 바울 뒤에 와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확연히 다른 복음 해석을 제시했다. 이 교사들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이방인이 이스라엘 백성의 온전할 일원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이 자격을 얻기 위해 이방인 남성은 할례를 받고 모든 이방인 회심자는 모세 율법의 규정을 지켜야 한다.

이를 복음의 수정이나 보완이 아니라 복음의 왜곡이라고 받아들인 바울은 신랄한 비난으로 응수한다.

바울은 교사들에게 맞서기 위해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는 진술, 갈라디아 교인들의 경험, 성경 해석을 내놓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 악한 세대"(1:4)에 뚫고 들어와 "새[롭게] 창조"(6:15, 새번역)를 일으키셨다는 사실을 갈라디아인들에게 상기시킨다.

모세 율법은 옛 시대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방인은 모세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을 뿐만 아니라결코 모세 율법을 지켜서도 안 된다. 유대 율법을 따르는 것은 열등한 충성,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충성을 의미한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 곧 다른 사람이 부여한 어떤 사명을 수행하도록 공식 책임을 맡은 사람으로 규정한다(또한 롬 1:1; 고전 1:1; 고후 1:1을 보라). 바울은 이중 부정(인간적 수단이나 인간적 출처에서 유래하지 않았다)과 이중 긍정(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왔다)으로 이 사명의 기원을 강조한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소극적 변명이 아니라 적극적 진술에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한 분 하나님에 의해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단일성을 철저히 확증하는 이 편지를 시작하면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오직 예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상기시킨다.

중요한 신학적 주장이 이 편지 첫머리에서 두드러진다. 먼저, 복음은 하나님에게서 기원한다.

하나님의 뜻이 복음을 형성했고, 그분이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셨다

둘째, 예수님은 인류의 해방을 가져오려고 인류의 죄를 위해 "자기 몸을 주신" 하나님의 대리인이시다.

셋째, 하나님과 예수님의 행위는 종말론적 행위다. 성경을 비롯한 다른 유대 저자들은, 창조 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분투하는 악을 하나님이 끝장내실 미래의 때를 예견했다

바울의 견지에서, 하나님의 개입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바울은 다른 서신들의 관례에서 크게 벗어나, 인사말에서 감사(예. 살전 1:2-10을 보라)가 아니라 책망으로 즉시 넘어간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탈선을 노골적으로 신랄한 언어로 꾸짖는다.

그들은 자기들을 부르신 그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다(1:6). 그렇지만 바울은 사실상 복음을 전복시키려고 의도하는 교사들을 향한 가장 거친 표현을 남겨 둔다(7절)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두 차례나 선언한다(8-9절).

바울은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면 그런 동기는 대수롭지 않다고 주장한다

로마서 14-15장에서 그는 날카롭게 대립하는 견해를 가진 그리스도인 집단 사이에 관용을 촉구한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위기 상황에 놓인 쟁점이 너무 심각해서 그런 관대함을 고려할 수 없다고 믿는다.

1:6-10은 바울이 교사들과 그들의 입장에 관용을 베풀 수 없다고 여기고 있음을 보여 주면서, 또한 그런 이유에 대해 적어도 한 가지 단서를 제공한다. 바울의 견지에서는 하나의 복음만 존재한다

교사들이 내세우던 주장과 달리, 그들은 단지 바울을 수정하거나 보완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이 더 이상 복음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것을 제시했다

갈라디아서 첫머리에서 두드러진 인간의 작용과 하나님의 작용 사이의 대조가 10절에서 다시 등장한다(11-12절도 주목하라).

다른 곳에서처럼 여기서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르고(NRSV의 각주를 보라; 또한 롬 1:1; 빌 1:1을 보라), 그런 만큼 그의 유일한 책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또한 살전 2:4을 보라).

1:11-12에서 바울은, 인사말에서 자신의 사도직의 기원과 관련해서 주장한 내용을 확장하여, 1:11부터 2:21까지 이어지는 회고 기사를 시작한다. 바울이 다른 서신에는 비슷한 내용이 전혀 없는 이 자전적 진술을 넣은 이유 중에 하나는 자기변호일 것이다

바울은 교사들이 훼손한 자신의 권위를 되찾아야만 했다.

아마 더 중요한 이유는, 이 회고적 진술이 권면의 기능도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 진술은 교훈을 준다. 바울이 나중에 신자들이 다른 곳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주장할 때(3:28)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들이 이 특이한 실존에 있음을 신뢰하라고 촉구할 때,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삶을 언급하며 그런 논점의 기초를 놓는다.

자신의 복음이 배운 것이 아니라는 바울의 주장은, 자신이 받은 전승을 전해 주었다고 구체적으로 단언하는 고린도전서 11:2이나 15:1-3과 모종의 긴장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들 본문에서는 바울이 주의 만찬과 부활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이 다른 기독교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애쓴다.

바울은 자신의 "유대교"(Judaism) 전력을 증거로 대면서 회고적 진술을 시작하는데(1:13), "유대교"는 이 시대에 드문 단어였다. 마카베오서에서 이 단어는 안티오코스 4세의 핍박 기간에 유대교의 율법과 관습에 충성했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나온다(마카베오2서 2:21; 8:1; 14:38; 마카베오4서 4:26). 바울의 충성은 교회를 파괴하려는 시도에서 입증되었다(고전 15:9; 빌 3:6; 참고. 행 8:1-3; 9:1-2; 22:3-5; 26:9-11). 바울은 열심에 있어서 다른 동료들보다 두드러졌다(『요세푸스의 생애』 7-11장의 비슷한 설명을 보라).

1:15-17은 긴 문장 하나로 구성되는데, 바울은 전통에 열심이었던 이전 삶에서 새로운 복음 선포자의 소명으로 움직여 간 과정을 설명한다(참고. 롬 10:2). 이 구절의 언어는 이사야 49:1("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과 예레미야 1:5("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의 언어를 닮았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처럼, 바울은 오직 하나님이 자기에게 그렇게 하도록 작정하셨기 때문에 사도로 봉사한다.

1:15-17은 12절에서 이미 단언한 내용을 내러티브 양식으로 설명한다. 즉 인간 대리인들이 바울에게 사도의 임무를 가르치지 않았다. 바울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아라비아로 갔기 때문에 그런 지시를 받을 수 없었다.

1:17에서 다마스쿠스를 언뜻 언급하는 것은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바울의 회심 이야기와 접촉점을 제공한다. 물론 이런 언급 자체가 질문을 야기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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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일기를 읽으며, 나는 늘 고여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조금씩 흘러왔음을 깨닫는다. 언젠가 지금의 절망도 바다에 몸 풀 날 있겠지.
아무리 느려도 흐르기만 한다면.

다음번에 마음이 지옥이 되면 그땐 꺼내 보겠어. 작은 새장인지 커다란 울산 바위인지 꺼내 보면 알겠지. 어쩌면 이쑤시개보다 작을지도 몰라. 고 작은 게 쿡쿡 쑤시는 걸 못 참고서 난 죽는다고 울었는지도 몰라.

몸만 아픈 게 아니야. 삽질이란 게 참 이상해. 하다 보면 마음이 막 아파. 내가 왜 이러고 있나,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나, 분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아.

근데 또 그래서 막 삽질을 하게 돼. 그러다 보면 산만 한 흙더미가 다 옮겨지고 커다란 구덩이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지. 잠깐은 뿌듯해. 하지만 오래가진 않아. 왜 이 짓을 했는지 여전히 모르겠거든. 왜 사는지 모르겠는 것처럼 영 모르겠거든.

세상은 빛나는 졸업장 앞에 예의를 지키지만 나는 생의 어둠 속에서 만난 "작은 빛들"에게, 그 빛을 밝혀 준 이들에게 예의를 지키고 싶어요.

내가 넘어지지 않고 예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모두 그들 덕분이니까요.

마음이 굳어 버린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 봐야 괜한 노여움이나 살 줄 알기에 다들 입을 닫는다. 몸이 굳는 것보다 그게 더 무섭다. 내 마음이 굳는 것, 굳은 내 귀가 두려워 사람들의 입이 굳는 것.

세상에서 제일 지키기 힘든 법, 그러나 안 지키면 너도 나도 다 죄수가 되고 마는法(법): 사랑법.

어디 시만 그런가. 잘하려고 기를 써도 안 될 때가 있는가 하면 아무 생각 없이 한 것이 뜻밖의 결실을 맺기도 한다. 마치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보기 싫은 사람만 자꾸 마주치듯이. 그래서 괴롭지만 그래서 살맛이 나기도 하는 것처럼.

요즘은 맛난 것만 골라 먹든 고소한 생선 알을 통째로 집어 먹든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때는 안 하던 배앓이를 툭하면 하는지. 왜 식구들의 왕성한 식욕이 걱정스럽던 그때의 가난한 밥상이 이리도 그리운지.

그래, 앞으론 나도 눈치 보지 않겠어. 이렇게 써도 되나 저렇게 살아야 하나, 이리 힐금 저리 흘금 하지 않겠어. 살인, 강도, 강간, 사기, 탈세, 뇌물, 야합……. 뭐 이런 나쁜 짓만 아니라면 어때, 나 하고 싶은 대로 한번 해 보는 거야.

그런다고 누가 뭐라 하진 않겠지, 큰일이 나지도 않을 거고, 군소리를 좀 듣거나 지금보다 조금 더 외로워질지는 모르지만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겠지, 괜찮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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