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의 신학
John Koening 지음, 김기영 옮김 / 한국장로교출판사(한장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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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같은 인생입니다. 붙들었다 생각할 때 이미 저만치 멀리 가 있습니다. 기쁨의 순간은 찰나입니다. 슬픔은 오래도록 계속됩니다. 이 시간 이곳에 안주하고 싶을 때, 또 다른 곳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떠밀려 움직이는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은 환대입니다. 그 어떤 것도 따지지 않는 활짝 열린 품입니다. 냉담한 세상에서 가장자리에 밀려난 우리지만, 그곳에서 따뜻함을 느낍니다. 예상치 못한 환대는 차가워진 마음에 불을 지펴줍니다.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줍니다.



실패의 공간, 눈물의 시간은 환대의 공간으로 변모합니다. 그곳에 함께 함이 있습니다. 잔잔한 웃음이 있습니다. 처절하게 홀로 울었던 시간은 이제 부둥켜안고 함께 울어주는 공간으로 변했습니다. 그렇게 고통과 아픔은 그저 좌절과 포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희망과 연대를 허락합니다.



점처럼 흩어진 시대. 각자의 삶이 공동의 대의보다 중요한 시대입니다. 자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하다 보니 타인의 아픔이나 상황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이웃을 품어주고 안아주는 환대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성경에서 줄곧 강조하는 환대가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존 퀴니그(John Koenig)는 신약성경에서 '환대'라는 주제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윤리에 있어 중요한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예수의 사역, 바울의 선교, 누가-사도행전에 나오는 초기 공동체의 구조에 대한 연구를 통해, '환대'와 '나그네와의 교제'에 대해 강조합니다.



나그네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환대를 경험하는 시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그네인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안아주십니다.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나그네를 사랑해야 합니다. 맞아주어야 합니다. 따뜻하게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성경 곳곳에서 우리들에게 나그네를 환대하고 대접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매우 신비로운 일은 나그네를 영접하였을 때 빈곤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무의식중이라도 나그네를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에게 새로운 차원의 역동이 주워집니다.



교회의 가장 큰 세 축제는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오순절입니다. 신기하게도 이 모든 절기는 나그네로 오신 그분을 맞이하는 시간입니다. 구유에 누우신 아기, 엠마오로 가는 길에 나타난 그분, 성령의 바람. 이 모두 신비로운 방문자요, 우리에게 새로움을 선물해 주시는 나그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맞이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하나님의 풍부하심은 우리의 품을 넓게 만들어줍니다. 그리하여 깨어지고 분리된 사회를 하나 되게 하며, 화해하게 합니다. 우리는 환대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그곳에서 진정한 축제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워진 우리는 나그네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어떤 불평등과 소외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온 나그네를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서로를 접대하고 환영할 때에 우리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며, 맛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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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사순절 - 부활절을 향한 여행
알렉산더 슈메만 지음, 박노양 옮김 / 정교회출판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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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사순절은 어떤 의미인가요? 부활절을 기대하며,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고, 그 흔적들을 더듬어보는 시간일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주, 깊이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서의 고난과 순종, 겸손의 발걸음을 마주하게 됩니다.



개신교에서의 사순절은 그 기간을 지키지 않는 교단이 있을 정도로 그 의미가 축소되어 있습니다. 거의 개인의 묵상이나 개인적인 절제 정도에서 그치고 있습니다. 교회나 교단 차원에서 이 시기를 적극적이며 보다 풍성하게 보내려고 하는 움직임은 잘 찾아보기 힘듭니다.



정교회는 다른 교회들에 비해 다양한 전례를 품고 있습니다. 교회가 분열되기 전부터의 예배 전통을 지금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기에 교회 역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전통들이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사순절은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정교회 신학과 전례를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에,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이름인 알렉산더 슈메만(Alexander Schmemann), 그는 이 책 『대 사순절』을 통해 사순절의 신학을 명확하고도 폭넓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 안에 담겨 있는 영적인 의미까지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정교회에서의 전례 전통은 직접 경험해 보아야 보다 분명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러한 전례 전통은 하나의 의식마다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슈메만은 대 사순절의 깊은 의미와 더불어 그 삶에 보다 의식적으로 참여하길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집필합니다.



정교회에서의 전례 전통은 각 개인이 영적 여정을 해 나갈 때 홀로만 존재하지 않음을 깨우쳐 줍니다. 전례의 여러 형식들과 그 정신을 통해 특별한 기간은 보다 공동체적으로 각 개인에게 다가갑니다. 분명한 목적지를 알려주고, 그 과정을 충실하게 보내는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슈메만은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절기인 부활절을 기대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길로 사순절을 정의합니다. 그리하여 사순절은 "부활절이 목적지인 하나의 영적인 여행이다"라고 강조합니다. 부활절과의 관계를 이해해야만 사순절을 깊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를 통해 만나게 되는 정교회의 사순절 절기는 가장 경건한 예배서를 통해 현재도 지속되며,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부활절로 인도되는 교회의 기간인 사순절 예배서(뜨리오디온)는 영적인 사다리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점점 더 고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절 전례를 통해 올바른 것을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바른 목표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참된 갈망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 정의와 생명에 대한 갈망입니다. 자신에게 갇혀 있어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겸손을 배웁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겸손이 마치 영광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대립시킵니다. 하지만 진정한 영광은 겸손일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은 어떤 외적 영광이나 자기 과시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완전하시기에 그분은 영광이시며 겸손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겸손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참회하게 됩니다. 진정한 뉘우침은 어떠한 만남으로부터 발생합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 인한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만난 뒤에 진정한 고백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바로잡아야 참된 회개가 가능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교제, 생명의 아름다움입니다.



더불어 우리가 사순절에 배울 수 있는 것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철저하게 죄악 가운데 빠져 있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이며 용서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자 교회의 진정한 사명입니다. 사랑과 용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빛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순절에 금식이나 절제를 먼저 떠올립니다. 한편으로 맞지만 적확하지는 않습니다. 사순절의 목표는 외적인 강제 조항들을 우리에게 부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이 영적인 현실에 개방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향한 배고픔과 목마름을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를 부드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절 전례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합니다. 온전한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며, 그 빛을 잠시 엿봅니다. 부활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현실 가운데 흩뿌려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힘겹고 어렵지만 또렷하게 하나님만을 향해 나아가며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여러분의 사순절은 어떠한가요? 시비를 가리는 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풍성한 영적 전통을 맛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부활의 여정을 공동체가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한지를 경험하며,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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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하는 삶 - 도로시 데이, 평화와 애덕의 83년
로버트 콜스 지음, 박현주 옮김 / 낮은산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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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복음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모든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선합니다. 폭군의 통치가 아닙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라고 표현하는 신학자(몰트만)도 있습니다. 어떠한 표현이든 하나님의 선한 다스림은 모든 영역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을 때 가장 처음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샬롬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평화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전쟁이 없더라도, 부강한 나라는 여전히 약한 나라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속박합니다. 진정한 샬롬은 모든 관계의 화목을 전제로 합니다.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친밀하게 어우러집니다.


결국 복음을 전하는 곳에는 샬롬이 뒤따르게 됩니다. 복음을 믿는 공동체는 화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메시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평화, 화해, 정의, 환대의 삶을 사는 것이 곳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삶을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된 삶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세상의 한복판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사람들입니다. 그중에 한 명이 도로시 데이(Dorothy Day)입니다.


도로시 데이의 삶을 직간접적 목격하여 기록한 이 책 『환대하는 삶』의 저자 로버트 콜스(Robert Coles). 그는 도로시 데이와의 만남을 서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녀와의 감동적인 만남을 통해 저자는 그동안 자신이 쌓아왔던 자만심과 오만, 특권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저자는 도로시 데이와의 영적 교감과 대화를 통해 그녀의 삶을 회고합니다. 도로시 데이의 젊은 시절은 자유 자체였습니다. 매우 급진적이었던 그녀는 어떤 면에서 방탕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 이후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던지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급진주의 신문 '가톨릭 일꾼'을 펴냈습니다. 이를 통해 그녀는 대접하는 사람과 대접받는 사람의 구분을 없애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그녀는 '환대의 집'을 엽니다. 이를 통해 진정한 나눔을 실천하여, 작은 부분부터 평화를 일구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녀는 힘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되고자 했습니다. 평화를 빼앗긴 자들에게는 칼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아픔과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는 삶이었습니다. 말로만이 아닌 몸을 통해 사랑을 드러내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드러내는 삶에서 극복하고 던져버려야 하는 것은 바로 '무관심'입니다. 공동체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무심함인 것이죠. 자신만을 위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아픔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배려나 공감을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도로시 데이는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더 높아지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세상 가운데서 낮아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람들 한가운데로 들어가 그들과 부대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함께하며, 위로하며, 기꺼이 자신을 던졌습니다.


참으로 헌신적이었지만, 매우 진실한 사람이었던 도로시 데이. 그리하여 논쟁거리도 많지만, 우리는 그녀의 삶을 통해 베풀고 나누며, 샬롬을 위해 자신을 던진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자신의 온몸을 던진 사람과 마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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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만난 사람들 -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벤 위더링턴 3세 지음, 김은총 옮김 / 감은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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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이후에 삶이 변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만남이 인격적이라면 그 변화의 폭은 더욱 큽니다. 상대방이 힘이나 명예, 권력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그 사람이 진심으로 바라봐 주었기 때문입니다. 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함께해 주고, 위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한 만남으로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가운데서 한줄기 빛을 발견한 것과 같습니다. 정말 막막하여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진심으로 대하는 한 존재는 새로운 힘을 줍니다. 살아갈 수 있게 하고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던져줍니다.



사람과의 만남도 그러할진대, 예수님과의 만남은 어떠할까요? 하지만 성경에서의 이야기는 멀게만 느껴집니다. 우리의 시대와 문화와 다르기에 느껴지는 이질감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혹은 그동안 읽고 들었던 것들로 인한 선입견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게 당시의 상황과 배경까지 풀어서 설명해 주는 벤 위더링턴 3세(Ben Witherington III)는 이 책 『예수를 만난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내면과 여러 상황들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이야기를 각색하여 소설처럼 적어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배경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보다 더 쉽게 그때 당시의 상황을 그려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자를 통해 성경의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나게 되며, 그들을 통해 예수님을 다시 한번 만납니다.



우리는 저자를 통해 본문에 새롭게 다가갑니다. 그동안 수없이 봐온 텍스트였지만 그 안에 생동감이 더해집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저마다의 실존적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전인격적인 어려움에 처했던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아픔은 육체적인 고통 이상이었습니다.



육체적인 회복 불능의 상태는 정서적인 냉대, 종교적 낙인, 사회적인 소외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저마다의 서사 가운데 더 이상의 희망을 보이지 않는 듯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말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가장 절박한 순간입니다.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총체적 어려움 가운데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그 어떠한 것도 우리에게 참된 기대를 주지 못합니다. 전 존재를 아우르는 치유가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우리에게도 새로운 만남이 필요합니다. 진정 우리를 깊이 아시며, 우리를 진심으로 아껴주시는 분과의 만남은 우리를 치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성경의 인물이 되어 봅니다. 약하고 부족하고, 죄인이라 여겨지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의 고통은 우리가 처한 고통과 비슷합니다. 우리 또한 너무도 아팠습니다. 참된 평안을 주시며, 자유를 주시는 주님과의 만남에서 우리 또한 참된 해방을 경험합니다. 이제야 우리는 온전한 변화를 선물로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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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신학 - 그리스도교적 종말론의 근거와 의미에 대한 연구 몰트만 선집 1
위르겐 몰트만 지음, 이신건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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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나 현실을 바라볼 때 좌절하게 됩니다. 언제 세상이 옳은 방향, 좋은 방향으로 변화될지에 대한 기대까지 사라지게 만듭니다. 여전히 세상은 잔혹하고, 전쟁은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각자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의 사소한 실수는 크게 부각시키며,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합니다.


자본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회는 새로운 계급이 형성됩니다. 사회적 제도로 인한 계층 구조는 아니지만, 부자와 가난한 자의 위치는 점점 더 멀어집니다. 가진 자는 현대 사회에서 더 많은 힘을 얻고, 그 힘을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힘없는 자는 더 이상의 희망조차 잃어버립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존재합니까?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 합니까? 오히려 세상에서 교회가 지탄받는 모습에 가슴이 답답합니다. 어떻게 이러한 난관을 뚫고 나아가야 할지 난감합니다. 신학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세계적 석학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그는 현대 사회의 문제 앞에 잠잠하지 않습니다. 풀 수 없는 실타래 같지만, 성경과 신학을 통해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는 『희망의 신학』을 통해 '희망'이 사라진 것만 같은 세상에 큰 경종을 울립니다. 


몰트만은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을 핵심에 두기를 원합니다. 자칫 변두리에 머물러 있던 종말론을 중심으로 가져오기를 원합니다. 이 책을 자신의 조직신학 시리즈 중에서 제일 처음 집필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우리가 희망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이유를 몰트만은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하나는 오만과 절망이요, 더 강력한 것은 현재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몰트만은 파스칼, 괴테, 헤겔, 니체, 파르메니데스, 키르케고르, 에브너에 이르기까지 헬라적인 현재 개념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몰트만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엘(EL)이 아니라 야웨(JHWH)라고 강조합니다. 즉, 현재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전망을 제공해 주시는 새로움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극적으로 안셀름의 유명한 명제인 '지식을 추구하는 신앙'을 변용하여 '인식을 추구하는 희망'이라고 주장합니다.


기독교의 모든 선포와 그리스도인들의 실존과 교회는 종말론적 성격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미래의 문제"를 기본 문제로 삼습니다. 이러한 종말론에 대한 관점에 기초하여, 몰트만은 1장에서 현대신학자들이 취한 종말론의 무역사성을 비판합니다. 


몰트만이 말하는 종말론은 역사적 종말론입니다. 역사적으로 종말론을 이해하자는 것이지요. 이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예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현실을 해명하려 합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해석이 아닌 역사의 변혁을 원합니다. 그렇기에 기독교의 종말론은 하나님의 약속된 미래를 향한 기다림과 희망의 이론입니다. 


몰트만은 “희망에 관한 이론으로서의 종말론”의 근거를 예수의 부활과 현현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이제 몰트만은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을 “약속의 하나님”으로 파악하고, 하나님의 계시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약속으로 이해함으로써 그의 종말론적 사고를 심화시킵니다.


판넨베르크의 역사신학과 함께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도 “역사”의 차원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은 개인의 영혼은 물론 세계사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몰트만은 판넨베르크처럼 보편사로서의 역사 해석에 관심을 두기보다, 하나님의 약속된 미래를 향한 역사의 변화에 관심을 가집니다.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차원을 회복하고자 하는 몰트만은 역사에 의해 종말론이 폐기되거나 종말론에 의해 역사가 폐기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몰트만에 의하면 종말을 기다리는 희망을 통해 새로운 역사가 세워집니다.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있어 역사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대한 희망으로 인해 열립니다.


몰트만은 마지막으로 이러한 희망의 신학을 어떻게 현실에 적용할지에 대해 고민합니다. 현대사회가 그리스도 공동체에 기대하는 역할이 있지만, 그러한 역할에 잠식당하거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그리하여 저자는 교회가 새로운 탈출을 감행해야 하며,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바빌론 포로 생활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목적은 자신만을 위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부활한 자의 통치로 살아가며, 죽음을 극복하고 생명과 공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자의 다가오는 통치로부터 살아가야 합니다. 


'세계를 위한 교회'는 하나님의 뜻과 소원대로 세계를 위해 봉사하며, 세계 안에서 활동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야 합니다. 진정한 공의와 평화, 자유와 존엄성은 종말론적인 기대 지평 안에서 일어납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야 합니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을 세세하게 파악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철저하게 개인화되어 있고 내세 지향적인 모습으로 현실에서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세계의 교회에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들 또한 종말론적 기대 가운데서 우리의 소명을 충실하게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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