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임재 연습 (일러스트판) Reborn Classic 1
로렌스 형제 지음, 홍종락 옮김 / 사자와어린양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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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재빨리 선을 긋고 싶어 합니다. 명확한 답을 원하는 것이죠. 선 안쪽은 옳고, 바깥쪽은 그르다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행동이나 관계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가리려고 합니다. 나는 안전한 곳, 더 좋은 곳, 옳은 곳에 있으려고 합니다.



'거룩'에 대해서도 이런 점이 잘 드러납니다. '성'과 ' 속'의 구분 속에 거룩하지 않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을 '거룩'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이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여겨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하게 보면 그렇게 쉽게 '거룩'을 판가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이시니,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거룩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보여주시며, 모든 것이 주님 앞에 거룩하게 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거룩'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가운데 경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인 거룩한 것이 아닌 것이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은 거룩한 순간이며, 그 공간은 거룩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가 기도하고 찬양할 때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소요하는 일상이 하나님을 누릴 수 있는 때입니다. 그것을 무엇보다도 잘 보여주는 인물이 '로렌스 수사'입니다. 그의 『하나님의 임재 연습』은 일상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강력하게 보여줍니다.



그조차도 완벽한 인물은 아닙니다. 불안과 영적인 혼란을 그 또한 경험했습니다. 로렌스 수사는 그런 가운데 하나님과 늘 대화하기를 원했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머물기를 갈망합니다. 그 어떤 지식이나 행동이 아니라,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바랐습니다.



수도원에서 그가 경험한 하나님은 일상 가운데 함께 하신 분입니다.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할 때나 신발을 수선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득하게 느끼며 기쁨으로 그 일들을 감당합니다. 그의 쉼 없는 기도는 하나님과 늘 잇대어 있어 호흡과도 같은 삶의 일부였습니다.



그의 편지에서 만날 수 있는 가르침은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만족스러운지에 대한 고백입니다. 다양한 은혜의 방편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전심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매 순간 말이죠.



그러한 상태에서는 고난 또한 너끈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은 부정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그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합니다. 모든 삶의 경험은 그런 점에서 유익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런 삶을 산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행동, 일상의 습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놓지 않아봅시다. 늘 하나님과 함께 잇대어 있는 삶은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충만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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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타사르의 지옥 이야기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지음, 김관희 옮김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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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불편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영원토록 벌받게 하실까 하는 의구심입니다. 모든 만물과 인간을 위해 이 땅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내어드림으로 모두를 살리십니다.



그럼에도 그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없는 주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성경에서는 구원의 부분에 있어 모순되게 보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지만,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구원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하고자 했던 가톨릭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그는 '신학적 미학'이라는 신학 체계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보다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표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풍성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은 신비입니다. 발타사르는 이 책 『발타사르의 지옥 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을 강조합니다. 구원과 종말에 있어서도 무엇보다 그 사랑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단순한 낙관론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발타사르는 지옥이 없다거나 지옥이 비어있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심판관이 되실 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좌절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이 심판관이 된다는 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희망이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덮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을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어떤 법도 그 사랑 앞에 힘을 잃게 됩니다.



저자는 성경에서 경고와 희망을 동시에 말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그 어떠한 것도 가벼이 여길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구원받을 수 없음을 상기시키는 위협성 텍스트가 많이 있습니다. 구원과 종말의 문제에 있어 우리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희망은 언제나 정당화될 수 있음을 저자는 상기시켜줍니다.



지옥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지옥에 대한 묵상은 타인이 아닌 자신을 향할 때 정당화됩니다. 지옥이 가상의 그 무엇이 아니라, 지극히 합리적인 가능태라면, 우리는 최대한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철저하게 자신을 향해 있어야 해야 함에도, 지옥을 이야기할 때 자신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인물들이나 자신이 혐오하는 사람들을 향해 가차 없이 지옥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 중에 나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고백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런 점에서 지옥은 '나'와 '너'에 대한 명확한 선 긋기를 넘어서야 비로소 진지하게 논의될 수 있는 주제입니다.



발타사르는 바울과 모세의 기도를 예시로 들어 자신이 저주를 받더라도 다른 형제가 구원받기를 갈망한 믿음의 선진들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진정한 자유는 '나'를 뛰어넘어 '너'를 품에 안고 '우리'가 함께 구원받고자 열망하는 믿음임을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기대하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함없는 사랑 가운데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말입니다.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요청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덮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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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역사 - 하룻밤에 정리하는
로저 E. 올슨.애덤 C. 잉글리쉬 지음, 김지호 옮김 / 도서출판100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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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학문이든 그 학문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논리적인 체계로 보일 때가 있지만, 그러한 결과물을 얻기까지는 오랜 시간의 서사가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 학문을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학문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신학은 매우 독특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정의하고, 하나님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저 이미 드러난 흔적을 더듬어 보아 흐릿한 형상이라도 미루어 짐작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신학은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신학은 그 개념에 대한 체계적 정리도 필요하지만, 이 학문이 걸어온 발자취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떠한 배경 가운데서 그러한 개념이 형성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개념에 대한 공격과 그에 따른 방어의 역사를 이해해야 신학의 큰 그림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탁월하게 해낼 수 있는 분들이 로저 E. 올슨(Roger E. Olson)과 애덤 C. 잉글리쉬(Adam C. English)입니다. 역사학자로서 저자들은 그동안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신학의 역사를 풍성하게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저자들은 이 책 『신학의 역사』를 통해 간명하게 신학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이들은 신학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신학은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구원을 숙고한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에 대해 1세기 사도들이 선포하고 설명한 복음을 숙고한 결과물이기도 합니다(7)."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체계적인 교리를 형성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바를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여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논쟁과 투쟁 가운데서 더욱 명확하게 교리가 형성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가령, 내부로는 영지주의의 도전이 있었고, 외부로는 켈수스와 같은 이교도 저술가의 도전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접근 방법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믿음에 대한 도전을 가했습니다. 모순되어 보이는 신학의 근본에 대해 계속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초기 교부들과 변증가들은 신앙에 이의를 제기하는 도전 가운데서 자신들의 방식으로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옹호하고 변증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신학적 개념이 명확해지고, 새롭게 정의되는 교리의 형성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아직은 거칠고 불분명하여 여전한 긴장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이렇듯 이 책은 그리스도교의 신학과 그 역사를 교리가 아닌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얇은 책이지만 장구한 그리스도교 역사를 풍부하게 이야기합니다. 핵심적인 사상과 흐름을 훑어 나가다 보니 다른 목적지에서 헤맬 염려가 없습니다.



더하여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우리에게 적실한 신학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해진 도전은 무엇입니까? 그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언어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이러한 계속된 고민과 대답이 믿음의 선배들이 그토록 치열하게 우리에게 남겨준 신학적 유산에 대한 적절한 반응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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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최후 기도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지음, 문재상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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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분의 선물은 단지 그분의 사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모든 걸음들과 죽음의 순간까지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그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극심한 고통의 한 가운데를 지나시면서도 끝까지 우리들을 위하십니다. 영원 전부터 지속된 성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끊어질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성자는 성부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십니다. 그저 성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은 그런 점에서 십자가의 정수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기도는 그런 점에서 우리의 일상과 깊이 연결되며, 우리의 인생 전체를 하나의 큰 이야기로 묶어 줍니다. 예수님 안에서 용서받음으로 새롭게 태어나며,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살게 됩니다.



의사이자 영성 작가였던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Adrienne von Speyr)는 이 책 『예수의 최후 기도』에서 가상 칠언을 칠성사와 연결시킵니다. 그녀의 스승이었던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 조차 이러한 연결에 회의적이었던 것을 보면, 참으로 독특한 접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어려운 일을 탁월하게 해냅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성부 하나님뿐만 아니라 교회와 모든 인류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가상 칠언과 일곱 성사의 관계를 묵상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과거에 머물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유효한 말씀입니다. 여전히 십자가의 말씀은 교회를 형성하며,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의 여정 가운데 은혜의 방편인 성사와의 연결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십자가로 귀결되며,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을 필연적으로 가리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빛을 통해 복음을 새롭게 해석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리하여 다시금 우리를 하나님께 대면하게 만듭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성부 하나님과 만나셨습니다. 강도와의 만남, 요한과 마리아와의 만남, 병사들과의 만남, 군중과의 만남은 반복될 수 없는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터져 나온 예수님의 말씀은 단 한 번으로 유효한 말씀으로 끝나지 않고 충만함 가운데 지속되는 말씀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충만함이 교회의 충만함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으로 가득 차서 다시금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 순간으로 끝나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말씀과 성사를 통해 교회에 충만하게 넘쳐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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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 죽음 이후를 말하다
톰 라이트 지음, 박규태 옮김 / IVP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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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면밀하게 살피고, 논리적이면서도 경험적으로도 증명된다면 생각보다 쉽게 명확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비슷한 주장을 하게 되며, 서로의 주장을 인정합니다. 사실 여러 각론 중 그러한 주제가 극히 드물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격차를 줄이기 힘든 주제 중 하나는 종말론일 것입니다. 실제로 죽음을 경험했다면, 그것을 기록으로 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도래하지 않을 일에 대해 단언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다양한 주장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경험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기에 죽음 이후에 관한 신학적 지식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성경의 기록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점이 사실적인 기록이며, 어떤 점은 은유적인지에 대한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영국 성공회 주교이자 신약학자인 톰 라이트(Nicholas Thomas Wright). 그는 이 얇은 책 『톰 라이트 죽음 이후를 말하다』를 통해, 이미 널리 퍼진 잘못된 신학 지식을 바로잡아주기를 원합니다.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틀린 것을 정확하게 짚어주는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톰 라이트는 잘못된 교회력으로 인하여 생기는 오해를 바로잡고자 합니다. 저자는 교회력이 하나님의 구원 서사를 표현하는 아주 중요한 매개가 됨을 인정하며, 그렇기에 아주 세심하고도 신학적으로 합당한 근거 가운데서 교회력이 행해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미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도래이며,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늘과 땅의 하나 됨이며, 영혼과 몸의 하나 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같이 종말의 때에 우리는 전인격의 온전한 부활을 경험할 것입니다.



문제는 개개인의 죽음이 종말의 시간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생기는 오해가 참으로 많습니다. 흔히 '중간기'라고 이름 붙여진 이 기간에 대한 이해는 교파마다 매우 다릅니다. 심지어 동일한 교파에 있더라도 개개인마다 느끼는 죽음 이후에 대한 생각은 천양지차입니다.



중간기 이후(개인의 죽음 이후의 이후)가 세상의 끝이며, 그때에 우리가 온전한 부활을 경험한다면, '중간기의 성도는 어떤 상태에 있는가'하는 것이 신학의 오랜 과제입니다. 이는 성도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매우 현실적인 고민이자 물음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오용하는 '천국'은 이런 점에서 그동안 합의되어왔던 신학과 괴리가 있습니다. 마치 개인의 죽음 이후에 곧바로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처럼 가정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천국'은 '하나님 나라'이며,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천국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장소의 개념보다 어떠한 사실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 온 것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왕적 통치(다스림)를 의미합니다. 여전히 세상은 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주인이심을 선언하고 선포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전적인 다스림을 보여줘야 합니다. 죽음 이후에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누리라 강조합니다. 특히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해야 하며, 그러한 표지는 화목과 평화, 용서와 사랑, 정의 등입니다.



연옥 교리나 잘못된 천국에 대한 이미지 등은 이미 십자가에서 죄를 완전하게 이기시고 해결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헛된 수고로 만드는 일입니다. 다른 교리에 대한 비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기초 위에서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죽음은 모두에게 찾아옵니다. 경험해 보지 않았고, 명확하게 알 수 없기에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승리하신 우리 주님은 사망이 우리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 단언합니다. 누군가가 어디에 가리라는 심판자를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최후의 날이 있음을 기억하며 겸손하게 한 걸음을 내딛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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