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의 덕목 - 개정판
하비 맨스필드 지음, 이태영 외 옮김 / 말글빛냄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이 책은 마키아벨리에 관한 논문과 평론들의 묶음이다. 여러 논문을 집대성한 것이라고는 하나 이 책은 하나의 대주제 아래 묶여 일관성을 띠고 있다. 그 대주제란 "자기 자신의 사상 속에 중심적 인물로 존재하는 마키아벨리", 곧 "마키아벨리의 '자기 자신이 군주라는 기묘한 암시'"이다. 이 '기묘한 암시'는 저자의 고유한 발견은 아니다. 저자는 미키아벨리를 연구하면서 "스트라우스가 전반적으로 제시하는 것과 수많은 구체적인 논점들 중 일부를 철저하게 뒤따랐다." 저자 하비 맨스필드는 레오 스트라우스를 사숙한 학자로서, 맨스필드의 정치철학은 스트라우스에게서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이 사실은 이 책의 논지나 마키아벨리에 대한 저자의 관점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레오 스트라우스를 비롯한 스트라우시언들은 근대의 정치학을 경멸하고 고대의 정치철학을 지향한다. 이들이 보는 정치철학은 덕이 있는 가치판단의 학이라 정의할 수 있는데,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정치철학은 정치적인 것들의 본질에 대한 의견을 정치적인 것들의 본질에 대한 지식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이다"(<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 이런 관점에서 가들은 고대의 정치철학을 덕의 정치철학으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크세노폰 등을 덕의 정치철학자로 규정한다. 가치를 중시하는 정치철학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근대 정치학을 최초로 정초한 정치사상가가 바로 마키아벨리이며, 홉스와 로크가 이를 계승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마키아벨리) 혁명은 우리 시대의 언어로 대강이나마 표현하자면, 종교의 보호를 받은 덕목으로부터, 세속주의로 인해 정당화되는 사리사욕으로의 변화로 정의될 수 있다. 그 혁명은 또 다시 우리 시대의 언어로 표현하면 '근대성'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2.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은 고대 정치철학과 비교했을 때 그 전모가 드러난다.

(1) 인간론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인간을 요약하자면 공화주의 시민이 아니라 군주이며, 군주의 최고 정점은 '혼자가 되는 것essere solo'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인간은 무엇보다 폴리스라는 공동체 속의 인간이었다. 이들은 정체(politeia, regime)를 우선적으로 얘기하면서 정체의 목적은 인간성의 완성이라는 조화로운 목적을 지향한다고 본다. 그렇기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정치철학은 최고의 이상적인 정체에 대해 논의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은 폴리스에 대한 목적론적 정의로 시작한다. "우리는 모든 폴리스가 어떤 종류의 공동체이고, 모든 공동체는 어떤 좋음을 위해서 구성된다는 것을 관찰한다...모든 공동체들을 포괄하는 이 '공동체'는 가장 으뜸가는, 다시 말해 모든 좋음들 중에서 최고의 좋음을 목표로 한다. 이것이 폴리스라고 불리는, 즉 폴리스적 삶을 형성하는 공동체이다."(1252a1~6)

마키아벨리는 이 같은 관점을 뒤집는다. 그에게 인간은 '시민'이 아니라 군주이며, 더이상 공동체 속 시민이 아니라 '혼자가 되는 것'을 이상적인 인간랑으로 삼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공동체의 지향점인 이상향을 얘기하는데, 이는 개개 시민의 도덕적 분별을 중시한 입장이다. 마키아벨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교활성(astuzia)"이다. 그가 보는 인간은 이해타산적 필요에 따라 움직이며 "획득에 대한 필요성"이야말로 인간 무엇보다 군주의 결정적인 행위동기이다.

(2) 실천학과 이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학과 실천학의 목적이 결정적으로 다르다며, 실천학은 무엇인가를 행하거나 만들기 위한 학문이고 이론학은 사고하고 정의하고 알기 위한 학문으로 분류하였다. 그가 '도덕적 덕'과 '지적 덕'을 구분한 것은 이런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철학자의 덕목은 행위와 동떨어진 사상이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며 좀 더 완벽하고 자족적이다. 그의 진리는 생각의 결과로 나타나는 진리, 실효적 진리인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론학과 실천학의 구분을 폐기한다. 그의 사상 안에서 양자는 하나로 통일되어있으며, 이제 무엇인가를 알고 사고하능 것은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집약한 표현이, <군주론> 15장에서 나오는 '실효적 진리, Verita Effettuale'이다.

(3) 덕(virtù)
마키아벨리의 정치학 이해는 '비르투'라는 개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덕'이라는 단어 자체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아레테 등으로 쓰였던 오래된 개념이지만, 마키아벨리는 이 개념을 뒤바꾸어 버린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덕 자체를 위해, 덕스러움을 위해 덕스러운 행위가 행해진다고 봤다면,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덕이란 결코 그 자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 존재해야만 하고, 그 최종목표는 획득이다." 획득을 목표로 하는 덕은 '필요'에 기반한다. '필요에 의한 획득'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억지로라도 악을 행하게 이끈다. 덕의 정치적인 측면은 군주로 하여금 물려받은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무장을 획득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덕은 인상적이어야 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외양과 결과만을 보기에 군주는 덕스러워 보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인상적인 것으로서의 덕은 "지속적인 가능성으로서의 악덕을 필요로 한다." 덕과 악덕의 대조를 통해 덕은 실효적으로 효과를 드러내며, 이 대조를 이루게 하려면 이 둘 모두를 실천해야 한다.

(4) 신군주
"마키아벨리에게는 단 하나의 시작이 있다. 즉, 필요다. 인간의 모든 제도는 신이나 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것 없이 시작된다...우리는 벌거벗은 채로, 보호받지 못한 채로, 불안한 채로, 그저 두려워하며 시닥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로서의 인간을 강조했기에, 그의 논의는 군주로 응집된다. 마키아벨리와 그의 신군주들은 새로워야 한다. 이 새로운 군주의 덕은 타고난 품성이 아니며, 유가에서 말하듯 내면의 수양을 통해 길러지는 것도 아니다. 이는 '획득에 의한 필요'에 따라 성립된다. 군주는 필요에 직면하여 자신의 덕을 보여야 한다. 그 덕은 언제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 덕목은 군주가 '신하와 친구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그들은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것이다." 덕의 발휘에서 중요한 것은 '인상'이다. 신군주는 외양의 결과로써 미움이나 경멸을 피하면서 실효적 진리를 추구한다. 이를 위해 "아니모animo, 즉 살아 숨쉬는 정신을 가져야만 한다...이는 역설적이게도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의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하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자기 방어의 정신이다. 냉정한 이성은 단독으로 신중한 행동을 수행하기에 충분하지 않아서 붙같은 기질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마키아벨리의 덕 개념은 고대 로마에서 기인한다. "로마의 덕목은 정치와 전쟁에 존재한다. 이는 철학이나 종교에 대한 지적 또는 명상적 덕목이 아니다." 플라톤의 철인 군주는 사물의 본질에 대한 명상적 관조로써 획득한 지혜로 통치한다. 아니모를 가진 군주는 사색하지 않으며 획득의 필요에 따라 행동한다. 여기서는 더이상 인간성의 완성을 지향하는 고대 정치철학의 자취는 볼 수 없다. 근대의 정치은 이렇게 고대의 덕을 폐기하며 이를 획득과 필요로 대체한다.


3.
이 책의 원제는 <Machiavelli's Virtue>로, Virtue는 마키아벨리의 핵심 술어인 비르투의 역어이며, 한국어판 역자들은 이를 다시 '덕목'으로 옮겼다. 그러나 '덕목'보다는 일반적으로 사용된 역어인 '덕'이나 '역량'과 같은 단어가 더 적절했을 것 같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22-05-07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Redman 2022-05-08 11:3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러블리땡 2022-05-0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Redman 2022-05-08 11:3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러블리땡님! 예상하지 못했네요 ㅋㅋ
 

구질서에 대항하는 적들을 품위 있고 느리면서도 효율적인 방법들로 파괴한 시대, 칼라일과 쇼펜하우어로 하여금 외딴 문명들이나 이상화된 과거로 도피하게 하고 자기 시대에 대한 최대의 적인 니체를 히스테리와 광기로 몰고 간 어지러운 시대에 오직 마르크스만이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자신을 지켰다. - P41

미래에 다가올 조화로운 사회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을 바탕으로 내적 고요함을 견지한 채 천상에서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는 고대의 선지자처럼, 마르크스는 자기가 모든 방면에서 본 쇠퇴와 파멸의 징후들을 증언했다. - P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옥스퍼드 세계사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외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도판과 함께 읽는 옥스퍼드 역사 시리즈'The Oxford Illustrated History 중 세계사 편이다. 엮은이가 얼개를 맞추고 그에 맞추어 각 분야의 저명한 학자들이 참여하여 한 두장씩 쓰는 식으로 구성되었다.

역자 이재만은 다음과 이유로 이 책을 추천한다. "세계사는 과거의 변천에 관한 새로운 연구 성과를 담아내기 위해 일정한 간격으로 새로 쓰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새로운 성과를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655p)

그렇다면 단순히 가장 최근에 출판되었단 사실(원저는 2019년에 출판되었다)을 제외하고, 이 책의 무엇이 새로워졌을까? 역사 연구에서 새로움은 새로운 사료의 발견이나 새로운 생각에서 나온다. 이 책의 경우 후자에 더 주목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다시 이재만의 말을 옮겨본다. "과거에는 역사의 주된 내용이 인간의 활동, 특히 문명인의 활동이었다면, 이제는 그 범위가 넓어져 문명 이전 인간은 물론이고 우주, 지구, 환경, 기후, 생명체, 질병 등 비인간 동인들까지 포괄하기에 이르렀다.•••요컨대 현재 알려져 있고 추론할 수 있는 과거의 거의 모든 변천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서술할 만한 주제가 된 것이다. 이 책은 이런 역사관의 변화를 반영하는 최신 세계사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654p)

비교를 위해 윌리엄 맥닐의 <세계의 역사>(이산)와 비교해보자. 이 책의 제1부는 "고대 문명의 탄생과 성립"을 다룬다. 고대 문명의 발상부터 서술한 것이다. 이는 이전 세대 역사서들의 관행적 서술이었다. 맥닐의 책이 가장 평이한 관점에서 쓰인 세계사 책이지만, 아직 '문명인의 활동'을 역사의 주요 내용으로 삼았다. 반면 <옥스퍼드 세계사>의 제1부는 "빙하의 자식들: 인류의 전 세계적 확산과 문화적 발산의 시작 - 약 20만 년 전부터 1만 2000년 전까지"로 시작하여 역사 서술의 시기와 대상이 맥닐보다 확장되었음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이렇게 역사를 문명 그 이전 인류의 초창기까지 끌어올린 것뿐만 아니라 역사 서술의 범위에 생태적 요인까지 포함된 것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다. 각 챕터는 환경사 전문가가 환경 배경을 짚은 다음, 다른 저자들이 해당 기간의 문화, 사상, 예술, 정치 등을 다룬다. 서술의 중심이 문명이 아니게 되어 이 책에서는 서구중심주의나 문명중심주의적 담론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전 지구적 생태, 기후, 환경 변화에 주목함으로써 이 책은 진정한 세계사(global history)의 가능성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이 책을 읽고 난 후 더 깊은 공부를 할 때 알아야 할 기본 내용들을 잘 요약 정리한 것은 더 첨언할 필요도 없다.

또한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그동안 놓치기 쉬웠던 역사 속 자연과 인간 사이의 긴밀한 상호작용을 생각할 수 있다. 할슈타트 태양극소기, 계절풍, 엘니뇨 등 기후계의 변동과 질병은 문명의 흥망을 좌지우지하였다. "인류의 조건은 기후 '최적기'와 위기(청동기 시대의 오랜 기후 최적기 이후 기원전 3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가 번갈아 나타나는 대순환을 경험했다. 앞서 언급한 사회들은 모두 기원전 1200년경 전 지구적 위기로 고통받았을 것이다. 단연 중요한 요인은 비교적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는 태양 '극대기'와 '극소기'에 따라 변화하는 태양의 에너지 복사량이었다." (213p) 저자들의 이런 관점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역사를 공부할 때 세계사 연표에 새로운 항목이 추가되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바로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어느 기후 시대였는지다. 기후는, 더 나아가 자연은 개개인의 생활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외부 요인이다. 특히나 이 부분은, 역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을 겪은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줄 것이다.

모든 역사 책이 그렇듯이, 이 책도 언젠가 시간의 흐름을 타 낡은 것이 될 테고, 또 새로운 세계사 책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동안은, 한 권 분량으로 이 책을 대체할 만한 세계사 책은 보기 어려울 것 같다. 메리 위스너-행크스의 <케임브리지 콘사이스 세계사 >와 더불어 꼭 읽어볼 만한 세계사 책이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22-03-13 18: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추천해 주신 역사책은 넘 좋았습니다.
언제나 믿고 읽습니다. ^^
역사학과 전공하신 거 아니신지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ㅎㅎ

Redman 2022-03-13 18:31   좋아요 3 | URL
예 역사학과 출신입니다 ㅎㅎ 바로 맞추시는군요 ㅋㅋ

북다이제스터 2022-03-13 19:33   좋아요 3 | URL
전 경영학 전공했습니다만 추천해드릴 책이 단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합니다. 부럽기도 하고요. ^^
경영학은 다 사기라고 생각듭니다. ㅠㅠ
하여튼 앞으로도 좋은 책 소개 🙏 많이 부탁드립니다. ^^

Redman 2022-03-13 20:52   좋아요 3 | URL
데카르트는 신학이나 인문학이 아니라 당대에 별로 대접 못 받고 천대받던 과학 같은 학문이 더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데카르트의 정신을 받아들인다면 경영학이나 회계학원론을 공부하는 게 맞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한 적이 있었습니다 ㅋㅋ
이 책도 북다이제스터님께 좋은 독서 경험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ㅎㅎ

얄라알라 2022-03-13 2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민우님께서는 역사를 깊게 공부하시는 구나 추측했지만
이제까지 제 맘대로 북다이제스터님께서는 사회학이나 철학쪽 공부하시는 분이시겠구나....

헛짚었네요^^ 두 분의 서로 응원하시는 훈훈한 대화 읽고 조용히 못 지나갔네요ㅎㅎ

서니데이 2022-04-09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Redman 2022-04-09 08:5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행복한 하루 되세요!
 



황정은, 백의 그림자, 민음사, 2010

아우구스티누스, 성염 옮김, 고백록, 경세원, 2016

마사 누스바움, 박용준 옮김, 시적 정의, 궁리, 2013







문학이 정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혹자는 문학의 규범적 당위성이나 문학의 사회정의적 기능을 주장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다. 언어라는 반성적 도구를 매개로 한다 해도 인간의 정서에 무매개적으로 호소하는 문학을 즐기면 되지, 좋은 게 좋은 것이고 아니면 말 것이지, 굳이 문학에 정의 같은 거창한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있을까? 나는 앨런 블룸의 다음 말을 덧붙이고 싶다.

 

도덕적 현상을 간파하지 않는 정치학이 미숙하고, 정의를 향한 정열에 의해 고무되지 않은 기술이 시시콜렁하다.” (<셰익스피어의 정치철학> ‘정치철학과 시’)

 

정의를 향한 정열에 의해 고무되지 않은 기술’, 즉 정의에의 열정이 없는 예술은 시시콜렁하다. 이런 예술은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감각도 없는 몰가치적 미학주의, 탐미주의에 빠져 있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시시콜렁한 예술의 사례를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문학에 대해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한 적은 없지만, <고백록> 3권에서 좋은 문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고백을 한다.

 

거기서는 고통 자체가 곧 쾌락인 셈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상야릇한 광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누구든 그런 감정에서 덜 치유된 사람일수록 저런 것에 더 휘말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몸소 겪을 적에는 불행이라 하고 남들과 함께 겪을 적에는 동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가 아닌, 꾸며낸 연극을 보고 슬퍼하는 동정이란 대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불쌍한 사람을 두고 아파하는 사람은 사랑의 본분을 수행하고 있다고 불만하지만, 정말 순수하게 동정심을 품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아파할 대상이 아예 없는 편을 차라리 좋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백록>, 성염 역. 3.2.2~3.2.3.)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린 시절 비극적 연극을 관람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슬픈 이야기를 보며, 캐릭터들의 비극적 처지에 동정을 보내며 눈물을 훔쳤다. 이것은 비극을 통한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의미하는 바를 세심히 읽어보면 그때 그가 연극을 본 목적은 감정의 정화가 아니라 그저 아파할 대상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 위해서였으며, 그가 본 연극들도 관람객들에게 어떻게든 눈물을 쥐어 짜내려 하는 연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물에 대한 가학적 학대를 통해 동정심과 쾌락이라는 양립되기 어려운 두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현상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적인 호의라고까지 부른다. 이런 동정과 쾌락은 연극을 다 보고 나면 사라지는 휘발적 감정이다. 현실에서 진정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비판한 로마의 연극들과 달리, 좋은 문학은 우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의 좋음에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태도를 함양하게 해준다. 문학은 우리 앞에 이름을 가진 타인을 불러온다. 문학은 개별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다. 그들의 내러티브를 들려주고, 그 내러티브 속에서 타인의 처지에 공감하게 하고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문학에서 마주친 타인을 통해 우리는 인습적으로 받아들이던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고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켜 현실의 사회적 약자와 타자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한다. 궁극적으로 그들과 연대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하는 원천을 제공한다. 여기에 문학의 사회적 쓸모가 있다. 이상은 마사 누스바움의 이론을 요약한 것이다.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는 누스바움이 규정한 공적 삶을 위한 문학에 완벽히 부합한다. 나는 이 글에서 신형철의 해설의 일부 논점을 철저히 따르면서, 이를 보여주고자 한다.

 

제목의 의미에 대한 내 생각을 밝히며 논의를 시작하겠다. ‘백의 그림자에서 ()’이란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제목은 모든 사람의 그림자혹은 모든 사람은 그림자를 지고 있다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림자는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며, 그것의 의미에 대해 죽음, 절망이나 한() 등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다. 그림자의 상징을 이해하기 전에 소설에서 그림자가 나오는 장면 몇 개를 추려보자.

 

장례식이 끝난 후 어머니는 한동안 병원에 머물러 있다가 그림자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그림자는 어머니 등에 달라붙은 채로 이미 상당히 자라서 뭐라 말할 수 없이 짙은 빛깔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달라붙어 있다 보면 그림자가 어머니에게 붙은 건지 어머니가 그림자에게 붙은 건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68p)

 

공원 주변으로 상가가 재정비되면서 부근의 상점들과 더불어 사라졌다, 오무사 노인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가늘고 홀쭉한 그림자 하나가 어딘가로 이어진 채로 며칠 그 부근을 서성거리는 듯하더니 어느 날 그마저 사라졌다.” (109p)

 

그림자는 마치 하나의 독립된 개체처럼 분리되어서 움직인다. 그런데 그림자가 일어나는 순간들을 보면, 하나같이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극적인 슬픔을 느꼈을 때라는 공통점이 있다. ‘어머니는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 그림자를 경험했다. 오무사 노인은 자신의 가게와 자신이 일하던 상가가 재개발로 없어져 삶의 터전을 빼앗기면서 그림자가 일어났다. 그림자가 분리되는 현상은, 현실의 폭력과 고통이 극한에 달해 주체가 더 이상 이를 견딜 수 없을 때 나타난다. 이를 고려한다면, 이 소설의 제목은 모든 사람이 겪는 극단의 불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를 반증하듯, 그림자 분리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 거의 모두 겪는 현상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때마다 그 인물들이 그림자가 분리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불행들을 이야기한다. 비정한 시스템의 압박 속에서 삶의 터전을 강제로 빼앗기고, 소중한 사람을 잃고, 그리고 이 모든 그림자를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에 휩싸였을 때. 그림자가 일어난다. 그림자는 이 모든 요소를 포괄한다.

 

이 소설은 이처럼 현실을 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큰 고통과 불행을 겪은 인간을 소설화하기 위해 저자는 치열한 방법론적 투쟁을 전개한다. 그림자는 그런 고민에서 나온 듯하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묘사할 때 개별적 불행의 단독성에 주목하기보다는 무수히 많은 불행들을 얘기한다. 하지만 <백의 그림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고통중 하나로 종속시키기를 거부하면서 모든 인물의 사연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이런 불행의 일반화에 저항하고 불행의 단독성을 보존한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마사 누스바움은 자신의 문학 이론에서 묘사의 풍부함 등의 이유로 사실주의 소설을 극찬한다. 그러나 사실주의 소설만큼 묘사가 자세하지는 않으나, 황정은의 소설과 문체, 그리고 그 기저에 깔린 일반화에 대한 저항의식은 분명 사실주의 소설의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묘사를 대체하고도 남는다.

 

여 씨 아저씨. 그는 도심에 있는 전자상가에서 앰프 수리점을 경영하고 있다. 그는 해외에 있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항상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살아왔던 기러기 아버지다.

 

유곤 씨도 있다. 그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여 씨 아저씨의 수리실을 방문한다. 그의 아버지는 유곤이 12살 때 건설 현장에서 압사당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림자에 짓눌리고, 그때부터 그도 그림자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곽 씨 아저씨는 여 씨 아저씨와 비슷한 연배로, “소방관이었는데 은퇴하고서는 영 마음 붙일 곳이 없다면서 그즈음 자주 수리실을 찾아왔다.”

 

오무사 노인도 있다. 그는 전자상가에서 몇십 년 동안 전구 가게를 운영했다. 그는 사람들이 전구를 사가면, 사간 개수에서 꼭 하나를 더 넣어준다. 깨지기 쉬운 전구이기에 가다가 깨질 수 있겠다는 걱정에서 그런 것이다. 그는 손님 한 명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우하며 배려한다.

 

이런 사람들이 이 소설에 나온다. 여기에 무재 씨가 나오고 은교 씨가 나온다. 앞서 말했듯이, 문학은 개별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개별적인 단독자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가 이 소설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도, 그러한 각자의 역사와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다. 작가의 관심은 비단 인물뿐만이 아니다. 이 소설의 주된 공간적 배경은 전자상가이다. 작가는 이 상가를 그냥 하나의 상가로 묘사하지 않는다. “나는 도심에 있는 전자상가에서 일하고 있었다. 가동과 나동과 다동과 라동과 마동으로 구별되는 상가는 본래 분리되어 있었던 다섯 개의 건물이었으나 사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여기저기 개축되어서 어디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얼핏 봐서는 알 수 없는 구조로 연결되어 있었다.”(29p) , , , , 마의 다섯 개 동으로 분리되어 있고 수 차례의 개축 공사로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이 전자상가. 굳이 각 동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저자는 소설 속 인물들이 사는 공간의 내력을 독자에게 각인시킨다.

 

이러한 태도는 소설 말미에 전자상가 가동 철거 소식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반응과 대조된다. 그들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으로 살고, 한 개인, 한 가족의 내력이 있는 공간에 대한 예의를 보이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죽고 나면 전구는 다 어떻게 되나. 그가 없으면 도대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알까.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모두 버리지는 않을까. 오무사에 다녀오고 나면 이런 생각들로 나는 막막해지곤 했는데, 수리실을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 수리실과 여 씨 아저씨를 두고 이것과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서 나는 그때마다 수리실의 내력을 생각해 보고는 했다.” (104p)

 

삶의 터전을 철거한 것으로도 모자라 사람들은 이 공간에 슬럼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극도로 무례한 언어적 폭력을 가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슬럼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대해 무재 씨는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때 무재의 대사는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부분이다. “나는 아버지 곁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길게 자른 순대를 베어 먹었고요. 손에 기름이 밴다고 순대 밑동에 신문지를 감아서 내어 주던 모습이나, 집으로 돌아갈 때 동전 몇 개를 쥐여주던 모습이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한데요. 지금 생각해 보면 장사를 어떻게 했을까 싶을 만큼 말도 서툴고 여러모로 서툰 점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함께 순대를 먹으며 앉아 있다가도 사람이 지나가면 슬쩍 일어나서 무어을 찾느냐고, 뭐가 필요하냐고 말을 걸곤 했어요. 어린 마음에도 나는 이렇게 호객하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 당황스럽고, 사람들이 그가 하는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지나가는 것이 싫어서 종종 울었거든요. 이유도 말하지 않고 우니까 못됐다고 혼도 많이 났지만 나는 그냥 속이 상했을 뿐이었고요. 그런 속을 모르고 혼을 내니까 더 속이 상해서 더 울고 더 혼이 나고, 하다 보면 아버지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있었어요. 그렇게까지 되고 보면 나는 더 울 수가 없어서 아버지 곁에 그냥 서 있었고요. 돌아가신 지가 오래라 그런 기억이란 희미해질 법도 한데 도무지 그렇지가 않아서,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113~115)

 

무재의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 전자상가는 가, , , , 마동이 있다. 다섯 개의 동은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여러 사람들의 추억과 역사가 깃들어있다. 사람이 사는 공간이다. 하지만 바깥사람들이야 그런 것 알 바 없다. 어차피 밀어버릴 곳,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으니, 공간과 사람들이 가진 개별성을 삭제하고 슬럼이라고 간단하게 규정해버리는 것이다. 황정은의 방법론이 주체들이 가진 고유성과 차이를 드러내면서 그 개별성을 보존한다면, ‘슬럼과 같은 언어는 그러한 차이를 손쉽게 박탈해버리고 고유의 이름을 제거한다. 전자상가가 슬럼이 되어버리면서 그 개별적 단독자들은 이름 없는 비존재가 되어버렸다. 오만하며 무례하기 짝이 없다. 무감각한 언어 사용의 폭력성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당장 철거되는 것은 다섯 개의 건물 중 가동 하나뿐인데도, 기사 제목이 일률적으로 전자상가 철거로 마치 상가 전체가 사라지고 말았다는 듯 구상된 것을 두고는, 그런 식으로 미리 상권을 죽여서 이후의 일을 쉽게 도모하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109p) 언론에 진짜 그런 목적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누구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직시해야 할 의무가 있는 기자들의 이런 행태는 분명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보이지 않은, 무례한 것이다. 이들의 기사는 전자상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개개인에 주목하지 않으며, 당연히 그 불행의 단독성이나 고유성에는 침묵한다. 이들에게 전자상가의 사람들이란 기사의 소재거리에 불과하다. (오늘날 사회적 현안에 대한 언론의 태도는 어떤지 비판적으로 반성해볼 문제이다)

 

그러한 폭력의 결과는 망각이다. “마침내 가동을 밀어내고 남은 자리엔 재빠르게 공원이 조성되었다.” (109p)

 

황정은 작가는 이러한 무감각한 언어의 폭력성과 오류, 무례함, 망각에 맞서 방법론적으로, 언어적으로, 시적으로 싸운다. 이 작가가 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비정한 비윤리적 시스템, “난폭한 이 세계”(171p)이다. 이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난 뒤, 우리는 세계가 좀 덜 폭력적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소박하지만 전복적인 소망의 투영이 무재와 은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숲속에서 길을 잃고 자신의 그림자를 따라가는 은교를 무재가 붙잡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림자가 일어서더라도, 따라가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는 거예요.”(20p)라고 무재 씨는 말한다. 결말에서는 제1장처럼 두 사람은 길을 잃지만, 그 분위기는 다르다.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노래할까요.” 여전히 약자에게 난폭한 이 세계에서 둘은 희망을 놓지 않는다. 무재와 은교의 순수한 사랑, 배려는 작가의 소망처럼 좀 따뜻한 세상을 느끼게 해준다. 그들의 사랑 앞에 나는 책을 덮은 뒤 홀린듯이 노트북을 틀어 무언가라도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황정은 작가는, <백의 그림자>는 문학이 해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것을 보여준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2-03-11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백의 그림자‘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해 주셔서 글 잘 읽었습니다^^
문학의 역할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보여주며 우리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 제가 너무 회의론에 빠진 것 같아요.
백의 그림자가 과연 모든 사람의 그림자인지도 잘 모르겠고,
결국 그 그림자는 ‘자신의 그림자가 짙고 집요할수록‘ 더 잘 이해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몇 년전 백의 그림자 읽을 때 너무 좋아 눈물이 났던 기억이 나요~~

Redman 2022-03-12 08:17   좋아요 1 | URL
자신의 그림자가 짙고 집요할수록 더 잘 이해되는 것 같다는 그 말씀에 저도 동감합니다 ㅎㅎ 멋진 해석이십니다.
그림자의 의미로만 여러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거 같네요. 너무 좋아서 한동안 여운에 잠길 거 같습니다

서니데이 2022-04-09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이하라 2022-04-09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Redman 2022-04-09 09:0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님!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비극의 탄생>은 그리스 비극의 기원과 몰락에 대한 고전 문헌학적인 탐구를 넘어서, 음악과 비극이란 무엇이고 진정한 아름다운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예술 철학적 탐구이고, 세계의 궁극적 근거는 무엇인지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이며,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이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탐구이고, 논리적인 지성에 입각한 학문을 진리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로 내세우면서 비극적인 음악과 신화를 비하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래의 서양 형이상학과 이러한 형이상학에 입각한 서양 역사와의 대결이기도 하다. - P295

아울러 이 책은 니체 자신의 사상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아도 니체가 나중에 전개하게 되는 영원회귀 사상과 힘에의 의지의 사상, 그리고 관점주의 철학의 단초를 이미 담고 있다. <비극의 탄생> 이후 니체의 사상 전개는 <비극의 탄생>에서 이미 제시되고 있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경험과 근본 이해를 쇼펜하우어적인 개념도식이 아니라 사태 자체가 요구하눈 개념에 따라서 재해석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 P29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9o8p7h6i5s4t 2022-03-11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번을 읽었는데도 참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

Redman 2022-03-11 13:29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전 해제민 읽었는데 벌써 어질어질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