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회고적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여, 삶의 모든 국면이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필연적 계기요 은총이었음을 고백하는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서이다.

 

<고백록>은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었으나(in te) 허영과 정욕에 빠져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소외된 상태(extra te)에서 다시 회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in te) 구조를 가지고 있다.

 

2614절은 이 책 전체의 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영혼이 당신을 등질 때에는 외도를 하는 것이고, 당신을 떠나서 순수하고 청정한 것을 찾더라도, 당신께로 돌아가지 않는 한, 결코 찾아내지 못합니다.”

 

이러한 구조를 염두에 둘 때, <고백록> 11장의 유명한 문장이 더욱 명확하게 이해된다. “당신을 향해서(ad te) 저희를 만들어 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을 합니다.”

 

인간의 본래적 삶은 하나님을 향해서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인간 실존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부터도 빗겨난 존재가 된다. 이러한 소외가 인간 실존이 느끼는 불안감의 근본적 원인이다. 따라서 불안과 소외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시 인간의 본래적 삶, 즉 하나님을 향한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회심을 통해서 가능하다.

 

위의 내용을 도식화면 다음과 같다.

 

1) 본래 신 안에 있는 존재(in te)

2) 신으로부터 멀어짐.

3) 회심, 그리고 신을 향해

4) 신 안에 있는 존재(in te)

 

셋째 단계를 통해 넷째 단계, 다시 신 안에 있게 된 존재는 자각적 정신의 여부에 따라 차이가 난다. , 본래 신 안에 있는 존재는, 아직 신의 존재도 신의 사랑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회심을 통해 다시 신앙으로 돌아간 존재는 자기의 의식 속에 신의 존재와 신의 사랑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첫째 ‘in te’에서 둘째 ‘in te’로의 변화는 질적으로 고양된 상태로의 변화이다.

 

10~13권은 신의 사랑을 자각적으로 인식하게 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조적 내면 성찰이 이어지고 있다. <고백록> 서두에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을 합니다라고 한 아우구스티누스는 13권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원한 생명의 안식일에 당신 안에서 쉬게 될 것입니다.” (13.36.51)

 

 

-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우리 인생길의 한중간에서

나는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기에

어두운 숲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ché la diritta via era smarrita.” (지옥 1.1~3)

(출처는 digitaldante.columbia.edu)

 

어두운 숲으로 번역된 말은 ‘selva oscura’이다. 이는 나무가 매우 빽빽하게 있는 숲을 가리킨다. 서구 사상사에서 이 말은 더 나아가서 신의 은총조차 미치지 못한, 완전히 버림받은 상태를 말한다.

 

단테가 이 단어를 썼을 때, 그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나 은총의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절망과 고통을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지냈어야만 하는 자신의 절망스러운 심정을 한 단어로 집약하여 총체적으로 보여준 이미지가 바로 어두운 숲’, ‘selva oscura’인 것이다.

 

시속의 어두운 숲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윽고 자신이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음을 깨닫게 된다. 눈을 들면,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행성의 빛살에 둘러싸인 언덕의 등성이가 보인다. 빛의 언덕은 당연히 어두운 숲과 대비된다. 그런 점에서 빛의 언덕어두운 숲의 절망과 대비되는 희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이미지는 이후 그의 저승 여행을 이끄는 동력이 된다.

 

이를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지옥> 1~3행의 상황은 본래 신 안에 있었다가 신으로부터 소외된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단테의 저승 여행 과정은 회심을 통한 질적인 고양의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안내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한 단테는 천국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가 되고, 그의 여행도 끝이 난다.

 

여기 고귀한 환상에 내 힘은 소진했지만,

한결같이 돌아가는 바퀴처럼 나의

열망과 의욕은 다시 돌고 있었으니,

태양과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 덕택이었다.” (천국, 33.142~145)

“A l’alta fantasia qui mancò possa;

ma già volgeva il mio disio e ’l velle,

sì come rota ch’igualmente è mossa,

l’amor che move il sole e l’altre stelle.”

 

 

- 르네 데카르트 <성찰>

데카르트가 살던 17세기는 일반위기의 시대라고 불린다. 기상이변,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진영 사이의 대규모 살육전 등 복잡하고 혼돈한 시대상황이 그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스티븐 툴민의 <코스모폴리스>의 한 단락을 인용해보겠다. “오늘날에는 1605~1650년의 기간이 안락한 번영의 세월이기는커녕 유럽사에서 가장 불안정했던 시기, 심지어는 광란으로 점철되었던 시기로 간주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우리는 근대과학과 근대철학을 여유와 풍요의 산물로 간주하는 기존의 견해를 따르기보다는 거꾸로 그것들을 동시대의 위기에 대한 반응들로서 취급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이러한 일반위기의 시대에 사상가들은 확실한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데카르트도 확실성의 추구라는 시대적 경향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그는 혼란한 시대에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이며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를 물었던 것이다.

 

<성찰>6개의 성찰로 구성되어 있다. 1성찰에서 그는 감각과 감각의식 등 기존의 의견에서 확실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모두 불확실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데카르트는 그 유명한 악마의 가설까지 주장하여 모든 반박의 여지를 차단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회의를 끝마친 뒤에 불안해한다. 그 어떤 참된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자신이 난국의 암흑 속에서 지내는 것은 아닐까하고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심 속에서 의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설령 유능하고 교활한 기만자가 집요하게 나를 항상 속이고있어도, ‘속는 나가 존재해야 속임수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

 

이로부터 데카르트 인간론의 제1테제를 도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정확히 말해 단지 하나의 사유하는 것(res cogitans), 즉 정신(mens), 영혼(anima), 지성(intellectus) 혹은 이성(ratio)”이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사유하는 나를 자각하는 나의 정신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것이다. 이로써 그의 회의는 종결되고, 이제부터는 자신의 발견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내가 정신의 눈을 나 자신으로 향하면, 나는 불완전한 것이고,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바라는 것임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또한 내가 의존하는 있는 것은 이 더욱 큰 것을 모두 무한정적으로, 또 가능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무한하게 갖고 있으며, 이것이 신임을 이해하게 된다.”

 

관념은 더 상위의 관념에서 유래하는바, ‘의 관념은 불완전하고 유한한 인간에게서는 유래할 수 없다. ‘의 관념의 원인은 신이다. 그러므로 유한한 인간이 완전하고 선한 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신이 실존함을 증거한다. 신의 관념 속에 완전성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악령의 속임수는 불가능하다. 사기와 기만은 결함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은 한마디로 말해 자신의 유한함을 철저히 자각한 바로 그때 신의 존재를 알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이 신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유사하다.

 

그뿐만 아니다. 그 체계적 완성도가 <고백록>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기는 하지만, <성찰>의 구조 자체도 <고백록>의 구조와 매우 유사하다. 처음에 데카르트는 외부 세계에 대해 그 어떤 확실한 것을 찾지 못해 난국의 어둠속에 있었다. 대상 세계는 의심스러운 것이기에 그는 대상 세계를 보장해주는 기제로서의 신에게로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신에 도달함으로써 대상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불안감은 없다.

 

3성찰을 마무리하면서 외부 세계를 보장해주는 신을 발견한 그의 벅차오르는 감정을 봐보자. “나는 여기서 잠시 머물러 이 완전한 신을 명상하고 그의 속성을 음미하며, 황홀감에 눈을 먼 정신이 그 힘이 닿는 데까지 이 비할 수 없는 장대한 빛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찬양하며 숭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장엄한 신의 명상 속에 내세의 더할 나위 없는 지복이 있음을 우리가 신앙을 통해 믿듯이, 이와는 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런 성찰을 통해 현세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을 누리고 있음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어둠은 사라지고 장대한 빛의 아름다움이 남았다. 의 이미지 자체도 다분히 아우구스티누스적이다.

 

<고백록> 8권 회심의 장면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구절의 끝에 이르자 순간적으로 마치 확신의 빛이 저의 마음에 부어지듯 의혹의 모든 어둠이 흩어져버렸습니다.”


 

 

-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을 자기 회피, 소외, 그리고 타락함으로 규정한다. 그가 무엇을 문제 삼는지 봐보자.

 

현존재는 원초적인 현사실적 삶의 경향, 즉 자기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경향과, 세상에 동화되면서 자기 자신을 떠나는 경향으로 인해 끊임없이 좌절을 경험한다. 하이데거는 현사실적 삶이 세계에 동화되는 과정에서 점점 더 자신에게서 낯설게 되는 한 퇴락에의 경향은 [자기 자신에게서] 낯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인간 실존의 불안과 소외는 자기 자신을 떠나는 경향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서구의 형이상학과 데카르트의 유산인 근대 인식론에 대한 거부와 비판에서도 볼 수 있다. “형이상학은 세계--존재인 인간을 앞서 규정함으로써, ‘실존혹은 현사실적 삶의 영역에서 고유한 원초적 경험이 갖는 가능성을 제거한다. 그 영역은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우리의 가장 고유한’, 즉 우리의 가장 본래적인 혹은 본연의 영역을 의미한다.”

 

세상과 동화되어 자신의 본래적 영역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발생한 인간 실존의 소외는, 따라서 다시 원초적 현사실적 삶의 경향을 회복해야 한다. 그가 현상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현상학만이 경험의 바탕을 근원적 직접성 속에서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근원적 본래성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소외되고 불안해하는 인간이 다시 본래의 영역으로 돌아가 이를 극복한다는 하이데거의 사유 구조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유사해 보인다. 물론 하이데거는 기독교의 종교적 내용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기독교 사상의 현상학적 측면과 의의에 관심을 가졌지만, 20대 중반의 하이데거는 가톨릭과 결별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키르케고르 등의 개신교 문헌을 탐독했다. 하이데거와 아우구스티누스의 관련성을 주장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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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생태환경사
김동진 지음 / 푸른역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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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에서 새로운 연구가 나오는 경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새로운 사료가 발견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생각이 나오는 것이다. 이 말을 곰곰이 곱씹으면, 우리는 역사학 연구에서 역사가가 수행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 역사가는 사료를 비판적으로 연구하면서 객관적 사실을 규명하는 한편, 동시에 이러한 실증적 차원을 넘어 역사적 맥락의 재구성을 통해 그러한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하고 밝혀내는 것이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E.H.카가 규정한 역사의 핵심(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로서의 역사)이 된다.

 

다시 말해, 역사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자의 역할은 단순히 기록된 역사를 읽고 사료의 내용을 정리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 고고학의 예시를 든다면, 새로운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당장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른 유물이나 다른 부족의 문화를 연구하여 그 용도나 사용방식 등이 규명되었을 때에야 그것은 의미 있는 고고학 연구의 재료로 사용될 수 있다. 역사학에서 사료도 고고학의 유물과 같다. 가령 정조의 <홍재전서>에 이런 내용이 있다. “근래에 개간한 화전이 푸르던 산을 온통 덮었다.” 아무 정보도 없이 이 구절 하나만으로, 혹은 정조가 이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홍재전서>에서 어떤 컨텍스트 하에서 정조가 이 말을 했는지, 그 말을 한 배경은 무엇인지, 이 구절과 비교할 만한 다른 사료가 존재할 때 비로소 이 구절은 유의미한 정보로 가공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맥락이 부여됨으로써 사료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역사가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시점을 확정하여 역사적 맥락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 속에서 사료와 역사적 사건을 위치시킴으로써 그 의미를 평가할 수 있다. 역사가가 어떤 맥락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한 사료와 사건은 전혀 다르게 평가되고 서술된다(쉬운 예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명칭에 대한 논쟁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언어로써 표현하면 내러티브적 서술 방식이 채택되며, 이는 곧 역사 서술은 발단과 결말을 가진 플롯을 통해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탁월한 역사책이란, 그저 사실을 나열하거나 밝힌 책이 아니며 설득력 있는 역사적 내러티브를 만들고 제시한 책일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내용을 전제하고 이 책을 살펴보자.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생태환경이라는 관점에서 조선 시대를 바라보았다. 저자가 생태환경적 관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공유된 역사 전통 중 대다수는 15~19세기에 새롭게 창조된 기억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기억이 생태환경을 구성하는 여러 요인의 변화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필요한 자원의 대부분을 주변 자연환경에서 얻어야 했던 사람들이 창조한 문화는 생태환경에 크게 의존하기 마련이었다.” 한반도 생태환경의 제반 특성과 변화 양상은 20세기 이전 한반도 주민의 삶을 강력히 규정하였던 중요한 요소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주목한 생태환경은 야생동물과 가축 같은 거시생태, 농지 개간, 산림과 범람원(이 책에서는 범람원 대신 무너미라는 순화된 용어를 사용), 미생물과 같은 미시생태이다. 저자는 아직 생태환경을 통해 역사를 이해하려는 연구는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자신의 연구의 새로움과 필요성을 역설한다. 따라서 이 책의 우선적 목표는 생태환경사적 방법론을 한국사에 접목한 성과를 소개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우리는 저자의 목표대로 읽는 것보다 저자가 어떠한 새로운 시각과 맥락을 서술하는지, 구체적으로 한반도의 생태와 조선 시대 사람의 활동이 어떻게 상호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저자가 이러한 새로운 역사적 관점에 걸맞은 새로운 역사상을 제시했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저자가 말하는 생태환경사란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놀랍게도 저자가 직접적으로 생태환경사 연구의 정의를 언급한 부분이 없어, 프롤로그에서 관련 부분을 모두 찾아서 요약해야 하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 생태환경사란 인간과 자연환경의 관련성을 깊이 연구하는 것으로, “자연과학 분야에서 성취된 생명 현상에 대한 이해 심화와 연구방법론의 진전을 역사학 연구에 접목하려는 시도이다. 생태환경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넘어 인간과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를 맺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비인간 생명체의 관계와 그러한 관계 맺음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적 조건에 대한 탐구역시도 생태환경사의 주제에 포함된다. 이를 볼 때, 저자는 인간에 의한 환경파괴를 의식하면서 인간과 자연환경의 균형관계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서로 관련된 내용이 많은 1~3부부터 요약해보자. 저자에 따르면, 한반도의 생태환경은 15~19세기 들어 획기적으로 변했다. 이 시기는 한국사에서 조선 시대에 해당한다. 조선 시대 들어 산림이나 야생동물의 생태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조선의 국가 운영 이념 때문이었다.

 

조선은 산림천택의 이익을 백성과 함께 누린다산림천택 여민공지(山林川澤與民共之)’의 이념을 택했다. 또한 식량을 가장 많이 생산할 수 있도록 중농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일부 국가적으로 봉금(封禁)된 지역을 제외하고는, 백성과 일반 사족이 산지와 범람원 지역으로 들어가 농지를 개간하여 살기 시작했다. 국가도 이 흐름에 합세해 천방(川防)을 설치하여 논의 면적을 늘렸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은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개와 닭이 서로 호응하여 우짖고’, ‘밥 짓는 연기가 서로 이어지는경관으로 바뀌었다.”

 

이와 같은 활동은 야생 생태계에 큰 영향을 초래했다. 호랑이와 표범과 소의 사례를 통해 그 변화 양상을 관찰해보자. 숲과 범람원을 개간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야생동물과 맞서야 했음을 의미했다. 특히 범람원 지역은 평탄하고 기름진 곳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야생동물이 서식했다. 조선 정부는 이러한 야생동물의 위협에 대응하여 “‘착호갑사(捉虎甲士)’라는 전문 군사를 양성하여 운영하였다. 지방에서도 자체적으로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군사를 두었다. 사냥의 성과를 확인하고 강제하기 위해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을 바치게 했다. 농지의 확대와 전문 사냥 군사의 활동으로 활동 영역이 점점 축소된 호랑이와 표범은 17세기 이후에는 극적으로 개체 수가 줄어 20세기 결국 멸절되었다. 5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수가 줄었던 범과 표범과는 달리 농사에 꼭 필요했던 소의 개체 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매일 500여 마리가 도살된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할 때, 조선 후기에 소는 대략 100만 마리 이상 사육되고 있었으며, 이는 조선 초기와 비교할 때 30~40배 이상 늘어났다.

 

농업 확대의 또 다른 영향력은 지리 환경의 변화이다. 조선 초기에는 주인 없는 황무지 등을 개간하여 농지 면적을 확대하였다. 그와 동시에 관개면적을 늘리는 정책에도 집중했는데, 여러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이 바로 천방, 즉 보를 쌓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가와 지방 단위 수령을 비롯하여 사족과 일반 백성도 천방을 건설하여 논과 밭을 늘려나갔다. 그러나 천방 개간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17세기 무렵에는 천변에서 개간할 수 있는 땅이 고갈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변화는 화전 개발에 불을 당겼다.” 양란 혼란 속에서 화전을 통한 산림 지역 개간은 새로운 가업 경영의 기반이 되었고, 화전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결국 19세기에는 화전으로 개간된 토지와 일반 평지의 땅과 다를 바 없다는 기록까지 등장했다.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두고, 앞에서 인용한 <홍재전서>의 기록을 다시 봐보자. 이는 화전으로 인해 황폐해진 산림 환경을 한탄해 하는 구절로 해석할 수 있다. 평지와 화전의 면적이 비슷하다는 말까지 나올 만큼 화전의 문제가 심각했다면, “화전이 늘어나고 숲이 줄어드는 만큼 종 다양성이 줄었다는 결론도 도출할 수 있다. “산림이 씻겨 내려가면서 새와 짐승들이 몸을 숨길 곳이 없어졌고, 강원도에서 많이 나던 인삼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았다.” 화전은 그 자체로 심각한 산림 파괴 문제였다.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이 책 1~3부는 어느 정도 신선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나름의 관점도 없지는 않은 듯하여 각 챕터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옴니버스식이라 구성이 다소 느슨한 것은 단점이다. 이는 목차를 봐도 알 수 있는 것인데, 저자가 체계적인 서술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그런지 유사한 내용이 여러 장에서 반복적으로 나오기도 하고, 서로 연결된 내용이 아예 다른 챕터에서 서술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도 아니라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모호하고, 저자의 서술이 그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될 가능성만 커졌을 뿐이다.

 

4미시생태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다소 잡다한 정보를 지루하게 나열하고 있다. 4부는 누룩, 김치 같은 발효 식품, 전염병 등 지엽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이들 주제를 하나로 꿰어 통일된 서사로 만들어주는 역사관이나 역사상은 부재한다. 4부에 포함된 1~3장은 각각의 내용들이 지나치게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래서일까? 된장이나 고추장 등이 과연 역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또 다른 역사상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4부의 내용은 그저 흥미로운 옛이야기로 전락하고 만다. 차라리 제4부는 일종의 부록이나 자료집처럼 이용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조선 시대의 환경과 인간의 상호 영향은 나름 잘 설명하여 한국사 연구 성과와 최근 발굴된 각종 자료를 생태환경사라는 연구 방법론으로 재결집하여 한국 생태환경사의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목표는 이루었을지 모르나, 이를 통해 새로운 역사상이나 또 다른 역사적 내러티브를 제시하는 데는 실패했다. 생태환경사라는 또 다른 역사를 추구하는 분야를 소개하면서, 정작 또 다른 역사가 없는 것이다. 단적으로 프롤로그에서도 관련된 내용을 볼 수 없다. 저자는 생태환경사 연구는 근대 과학이 확립한 방법론으로서 분석주의, 이분법, 기계론적 세계관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지향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생태환경사는 역사학을 더욱 역사학답게만든다느니,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한다느니, “새로운 역사 이해와 인간의 삶을 더욱 풍부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느니 하는 기능적 설명은 많지만, 이들 모두를 총괄하는 생태환경사의 테제는 보기 어렵다. 이러한 사실부터 저자가 체계적 저술을 염두에 두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역사학자는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니라 체계적 학자여야 한다.

 

이 책은 사서는 읽을 만한 책이다. 이 책을 사서 읽는 것은 우선 여러 정보를 정확하게 얻는다는 만족감을 줄 수 있다. 또한, 이후 저자가 더 발전된 저서를 출간하기를 기대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저자의 새로운 저서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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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북사랑 2021-07-23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김민우님 서재에 들르면, 제가 평소 스쳐 지나가도 몰랐을 좋은 책들이 새로 올라오네요^^

김민우 2021-07-23 13:5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 제 관심사가 역사 분야라 역사 책에 더 관심이 가네요
 
필사의 기초 - 좋은 문장 베껴 쓰는 법
조경국 지음 / 유유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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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에는 필사를 해보기로 했다. 정규 학기가 끝난 지 한 달 정도 지났고, 계절학기까지 어제 마무리되었으니 남는 것이 시간이다.

 

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하비 맨스필드가 번역한 영역본 <군주론>(The Prince)‘Introduction’을 필사할 생각이다.

 

본격적으로 필사하기에 앞서 <필사의 기초>라는 제목의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보았다. 이 책은 필사의 매력과 방법, 그리고 필사를 갓 시작한 나 같은 초보들을 위한 구체적인 조언들을 담고 있다. 어떻게 보면, 필사의 세계로 독자를 초대하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저자는 2필사를 사랑하는 몇 가지 이유에서 필사의 매력들을 소개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필사는 내 정신을 부산스럽게 하는 잡다한 것으로부터 벗어나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과 필사를 통해 차분한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필사는 가장 느린 독서이다. 필사를 하면, 단 한 문장도 빠짐없이 꼼꼼히 읽을 수 있고 쓰면서 문장의 의미까지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필사는 책을 가장 차분하게, 그리고 꼼꼼하게 읽는 방법이다. 필사는 많은 책을 너무 빨리 읽는 나의 단점을 보완해줄 수 있는 활동이다.

 

3장에서 저자도 이와 같은 점을 덧붙인다. “필사는 가장 순수한 독서라 생각합니다. 책을 이룬 문장의 활자를 그대로 써서 옮기며 곱씹는 행위죠. 더디고 고통이 따르기도 합니다만 어떤 독서법보다 큰 만족감을 줍니다.” (39p)

 

이러한 필사는 단순히 남의 글을 베껴 쓰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글을 쓰기 위한 디딤돌이 된다. 좋은 문장을 옮겨 적으며 그 문장을 음미하고, 이를 통해 좋은 문장에 대한 감을 잡는다. 이러한 작은 실천들이 모이고 모여서 자신의 것이 되고, 자신의 글을 위한 밑바탕이 될 수 있다.

 

저자는 초보 필사자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와 이들을 위한 매우 구체적인 조언(필사와 필기구, 필사와 글씨체 등)도 아낌없이 말해주고 있다.

 

저자도 필사가 굳이 만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책 읽는 습관이 있어야 하고, 필사 이전에 책의 내용을 충분히 숙지해야 한다. 그래서 책을 먼저 한 번 읽고 필사할 만한 곳을 표시해두었다가 일독하고 난 뒤에 필사하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큰 공책을 여러 권 살 필요가 없다. 그러면 오히려 공책을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에 필사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처음에는 휴대하고 다니기 편한 메모 수첩 같은 작은 걸로 시작해 필사의 습관을 기르는 좋다고 한다. 그래서 틈틈이 짬이 날 때, 좋은 문장이나 아이디어를 완성된 문장의 형태로옮겨 적고, 그렇게 한 권의 노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채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옮겨 적는 것이 어느 정도 손에 익으면, 자신이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한 글만 모은 노트를 따로 만드는 것도 좋다.

 

6~8장은 글씨체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글씨가 자유민주주의처럼 생긴 나에게 작은 위로를 준 장이었다. 필사를 할 때, 반드시 아름다운 글씨로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악필이더라도 글씨체는 부가적인 문제일 뿐, 우선 전체를 제대로 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필재가 없어도 끈기 있는 편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시간이 지날수록 두터워집니다. 내가 필사하는 문장이 의지하고 양보하며 실수와 결함을 감싸 주며 간신히 이룩한 성취임을 깨닫는 순간, 악필에 대한 고민보다 필사의 즐거움이 더 크게 다가오겠죠.”

 

11장은 저자가 읽은 것 중 필사에 대해 다룬 글을 모아둔 것이다. 12장은 저자가 추천하는 필사할 만한 책과 필사할 때 참고할 만한 책을 나열했다. 13장은 문구에 대한 저자의 애정과 추천하는 문구류로 채워져있다. 여기서 문방구 덕후의 냄새가 많이 났다.

 

저자가 책과 필사를 정말 좋아한다는 게 느껴졌고, 오랜 필사로 단련된 차분함이 글 전체적으로 느껴져서 좋았다. 두께도 얇아서 금방 읽을 수 있다. 필사를 해보고 싶다면, 한 번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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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1 17: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21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북사랑 2021-07-21 17: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필사를 하고 싶어도, 제 악필에 제가 놀라서 ㅋ˝필사가 가장 순수한 독서 행위˝ 뜨끔해서 갑니다.

김민우 2021-07-21 20:28   좋아요 2 | URL
저도 참 지독한 악필입니다.. ㅋㅋㅋ

scott 2021-07-21 17: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필사를 하는 순간 만큼은 스맛폰 손에서 내려 놓게 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데

어째서 저는 필사!를 마음 먹는 순간, 문구류와 필기구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인가 ???ㅎㅎ

서예를 다시 시작 하려고 마음 먹었는데 오늘 중! 복 기여코 37도까지 올라가네요

민우님 건강 잘 챙기세요 ^ㅅ^

김민우 2021-07-21 20:27   좋아요 1 | URL
scott님! 중복날 더위 조심하세요 ㅠㅠ 서예를 하시는 군요! 멋진 취미이십니다 ㅎㅎ

mini74 2021-07-21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씨가 자유민주주의 ㅎㅎ 저는 혁명적인 글씨체입니다. ㅎㅎㅎ 저는 20대때 기형도시집을 필사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저 요약 정도나 ㅠㅠ 필사하고 싶어지는 책이네요 **^*

김민우 2021-07-21 20:26   좋아요 2 | URL
저도 부분부분 외우고 싶어지는 글이 많았네요 ㅎㅎ
 
신곡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단테의 <신곡>은 단테가 쓴 인간 구원의 서사시다.

R.W.B. 루이스는 <신곡>의 주제를 한 남자가 자기 자신을 찾으며 성장해가는 여행으로 간명하게 정리해낸다. 물론 이 외에도 단테가 물려받은 문화적 전통에 대한 시적 탐구베아트리체에 대한 장편의 헌시로도 규정하지만, 나는 <신곡>을 읽으며 단테의 자기를 찾는 여행, 다시 말해 자기 구원의 서사시로 이해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이 작품의 첫 3행을 읽고서이다.

 

우리 인생길의 한중간에서

나는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기에

어두운 숲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지옥, 1.1~3)

“MIDWAY upon the journey of our life

I found myself within a dark forest,

for the straightforward pathway had been lost.”

(영어 번역의 출처는 digitaldante.columbia.edu)

 

서양 고전 문학에서 화자가 로 설정되면 주의해야 한다. 는 이 시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단테를 지칭할 수도, 아니면 이 책을 읽는 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첫 행에서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를 썼으므로, 후자로 해석함이 타당해 보인다. 아무튼 는 길을 잃어버려 는 지금 어두운 숲속을 헤매고 있다. ‘는 이 숲을 스스로 벗어나보려 하지만, 표범(음란), 사자(오만), 암늑대(탐욕)가 자신을 방해하여 더더욱 태양이 침묵하는 곳으로밀려났다. 절망에 빠진 그는 그 순간 한 안내자의 도움으로 그 숲을 벗어나 빛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이 시는 저승 여행의 구조를 이루고 있으나, 인간의 행위와 행복에 대한 관심은 매우 보편적인 주제이다. 이 시는 중대한 심리적 위기가 어떻게 해결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된다. 그 심리적 위기란, ‘올바른 길을 잃어버린 것으로 표현되듯이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인생의 허무함 등 다양한 경험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단테의 여정은 잃어버린 올바른 길을 다시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단계는 지옥이다. 지옥에서 단테는 하나님을 떠나 죄인들의 공간이다. 단테는 이러한 지옥에서 수많은 인물과 만나며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뜻을 깨닫는다. 이는 지옥 3곡의 유명한 지옥문에서 암시되어 있다.

 

정의는 높으신 내 창조주를 움직여,

성스러운 힘과 최고의 지혜,

최초의 사랑이 나를 만드셨노라.” (지옥, 3.4~6)

“JUSTICE URGED ON MY HIGH ARTIFICER;

MY MAKER WAS DIVINE AUTHORITY,

THE HIGHEST WISDOM, AND THE PRIMAL LOVE.”

 

죽음도 없고 영벌과 슬픔만 있는 지옥은 역설적으로 창조주의 정의’와 최초의 사랑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즉 지옥은 창조주의 정의가 실현된 공간이다. 지옥에 갇힌 이들은 현실 세계에서 하나님의 올바름을 실천하며 살지 않았다. 단테의 지옥은 하층부로 내려갈수록 더욱 정신적인 죄악을 저지른 이들이 있는데, 단테는 모든 죄악 중에서 배반을 최악으로 두었다. 배반 중에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배반이 가장 최악의 죄이다. 신앙심이 있어도 현실 세계에서 불의를 저지르는 이들은 하나님을 배반한 존재이고, 그들이 가는 곳이 지옥의 최하층이다. 결국 단테는 지옥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올바름을 구현하는 데에 있음을 시사한다.

 

올바른 길을 잃고 방황하던 단테는 지옥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깨닫는다. 그리고 지옥에서 하나님의 의를 깨달은 단테는 연옥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연옥은 지옥과 천국의 중간적 존재로서, 연옥에서는 인간은 불로써 자신의 죄를 씻어내고 천국에 올라갈 수 있다. 지옥의 불이 영원의 불이라면, 연옥의 불은 죄인의 정화를 위한 순간의 불이다.’ 단테는 이곳을 지나며 본격적으로 천국에 오를 준비를 한다. 9곡은 이러한 단테의 정화 과정을 상징적 비유를 들어 표현한다.

 

우리는 그곳으로 다가갔는데 첫째 계단은

새하얀 계단으로 너무 깨끗하고 맑아서

나의 모습이 그대로 안에 비쳐 보였다.

둘째 계단은 어둡기보다 검은색인데

거칠고 메마른 돌로 되어 있었으며

가로와 세로로 온통 금이 가 있었다.

그 위에 얹혀 있는 세 번째 계단은

마치 핏줄에서 튀어나오는 피처럼

새빨갛게 불타는 반암(斑岩) 같았다.” (연옥, 9.94~102)

 

역자의 주석을 활용하면, 첫째 계단은 자신의 양심에 비춘 자기반성을, 둘째 계단은 죄의 고백을, 그리고 마지막 셋째 계단은 죄의 형벌을 채우려는 의지를 상징한다. 이 세 계단을 오르면서 단테는 회개를 통해 죄를 벗고 질적으로 고양된다. ‘새빨갛게 불타는 반암과 같이.

 

그러나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안내자인 베르길리우스가 아니라 새로운 인물이 있어야 했다. 그리스 로마 문화의 전통을 상징하는 베르길리우스가 퇴장하고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새롭게 인도한다.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아 천국에 올라선 단테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인간적 한계를 초월한다. 항성천, 원동천을 지나 최고천까지 올라간 단테는 맑고 날카로운 눈을 회복해야 한다. 은 단테의 한계를 벗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눈이다. 마지막 안내자로 등장하는 베르나르두스의 거룩한 말을 통하여 성모 마리아의 사랑까지 깨달은 단테의 의지와 열망은 하나님의 사랑과 합치하게 된다.

 

단테의 여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해보자. 올바름, 희망(혹은 소망), 그리고 사랑. 이 삼요소가 갖추어졌을 때 단테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구원이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이러한 <신곡> 전체의 주제와 구조는 각 편의 마지막 문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마침내 나는 동그란 틈 사이로 하늘이

운반하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고,

우리는 밖으로 나와 별들을 보았다.” (지옥, 34.137~139)

 

나는 그 성스러운 물결에서 돌아왔고,

새로운 잎사귀로 새롭게 태어난

나무처럼 순수하게 다시 태어났으니,

별들에게 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연옥, 33.142~145)

 

여기 고귀한 환상에 내 힘은 소진했지만,

한결같이 돌아가는 바퀴처럼 나의

열망과 의욕은 다시 돌고 있었으니,

태양과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 덕택이었다.” (천국, 33.142~145)

"Here force failed my high fantasy; but my

desire and will were moved already—like
a wheel revolving uniformly—by

the Love that moves the sun and the other stars."

 

원문으로 보면, 모든 편의 마지막 단어는 (stelle)’로 끝난다. 단테는 지옥을 나와 별을 쳐다보았고, 연옥을 오르며 그 별들에 다가갈 희망을 가지고, 천국에서는 그 별을 움직이는 사랑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과 함께단테의 여정도 끝난다. 절망의 순간 단테를 다시 올바른 길로 이끌어준 존재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번역자 김운찬은 해제를 “<신곡>은 고전들 중의 고전이라 말할 수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단테를 연구하는 사람이, 그것도 움베르토 에코의 제자라는 사람이 쓴 문장치고는 너절하다. 다음 문단으로 오면 더 난감해진다. “<신곡>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저승 여행 이야기다. 작가이자 주인공인 단테가 살아 있는 몸으로 일주일 동안 지옥과 연옥, 천국을 여행하며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신곡>의 핵심을 단순히 저승 여행담으로 보는 것은 이 작품이 지닌 의미를 잘 전달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 나 역시 <신곡>을 잘 알지 못하지만, 번역자의 해설은 이 감동적인 작품을 지탱하기에는 너무 가볍다는 생각이 든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늘 심각하게 대두되는데, 그 원인이 꼭 일반 대중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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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1-07-14 13: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신곡>의 지옥편은 <오뒷세이아> <아이네이스>의 저승편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인상을 깊게 받았습니다. 김민우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고대 그리스/로마의 전통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저승으로의 하강 이미지 뿐 아니라 빛의 세계로의 상승이 무엇보다 필요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곡>의 완성이 천국에서 마무리 지어지는 것을 통해 단테는 ‘신의 나라‘ 완성을 희망했고, 그러한 희망을 보고 후대에서 그를 ‘최후의 중세인‘이라 부르는 것은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김민우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김민우 2021-07-14 19:18   좋아요 1 | URL
아 제 중언부언한 글보다 겨울호랑이님의 이 해석이 훨씬 더 통찰이 느껴지네요!! 탁월한 견해신 것 같습니다! 다음에 신곡을 읽을 때 저도 겨울호랑이님이 말씀한 부분을 더 집중해서 읽어봐야겠습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1-07-14 14: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단테의 신곡이 어려워 읽기에 무척 힘들다고 하는 책인데 김민우님의 리뷰는 신곡 입문으로 너무 좋습니다.
이 글로 신곡에 좀 더 접근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김민우 2021-07-14 19:17   좋아요 1 | URL
너무도 감사하고 기쁜 말씀이십니다 ㅎㅎ 신곡 읽기 응원합니다!!
 

제인 오스틴, 윤지관, 전승희 옮김, 오만과 편견, 민음사, 2003




제인 오스틴은 근대에 벌어지는 인간의 내면과 행동 변화를 결혼과 연애라는 한정된 주제 속에서 날카롭게 포착하고 표현해낸 작가이다.

 

<오만과 편견>에서는 엘리자베스 베넷과 다아시와 더불어 여러 커플이 나오는데, 자연스럽게 이 커플들은 서로 대비된다. 그중에서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의 결혼 동기는 엘리자베스와 가장 크게 차이가 난다.

 

샬럿은 상대방에 대해 아무런 애정이나 호감도 없지만, 상대의 경제적 배경과 자신의 사회적 위치 등을 고려하여 콜린스와 정략결혼을 한다. 당대의 통념상 결혼은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쓰였고, 여성에게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여기에 사랑과 같은 개인적인 요소는 개입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상대방의 외모나 경제력, 집안과 같은 외적인 요소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한마디로, 엘리자베스는 정략결혼을 반대한다. 그녀는 자신이나 자기 집안의 경제적 여건을 향상시킨다고 가치관도 맞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었다. 콜린스가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했을 때 이유와 그녀의 거절 이유를 비교해보면 명확해진다.

 

재산 대신 엘리자베스가 요구하는 것은 서로의 애정과 상호존중, 동등한 위치가 바탕이 된 관계였다. 그렇다고 작가 제인 오스틴이 무조건 낭만적 사랑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의 여동생 리디아가 위컴과 벌인 돌발적인 사랑의 도피행각을 부정적으로 본 것이 대표적이다. 재산과 낭만적 사랑, 그 사이 어딘가에서 결혼은 균형을 맞춰야 한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는 서로에게 좋지 않은 첫인상을 가졌다. 다아시는 그녀의 가족이 천박해서 싫었고, 엘리자베스는 그런 다아시의 오만무례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다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에 대한 위컴의 근거 없는 비난과 루머를 아무 의심 없이 사실로 받아들였으므로, 그녀의 편견은 더 강해졌다. ‘오만은 다아시를, ‘편견은 엘리자베스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아시가 자신의 오만함을 내려놓고 그녀를 진실하게 대했을 때, 그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편견과 오해가 풀렸을 때, 그리하여 서로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이 둘은 결혼을 약속하는 사이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스토리를 통해 제인 오스틴은 결혼의 중요 조건으로서 애정과 상호존중이라는 매우 현대적인 요소를 부각한다.

 

별 기대 없이 읽었다가 그만 푹 빠져서 읽었다. 1995년 BBC 드라마와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영화까지 다 보고 말았다.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 <설득> 등도 읽어봐야겠다. 내친김에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다른 여성 작가의 작품도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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