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카이 마코토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각인시킨 영화는 <너의 이름은.>이다. 이 영화는 무수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대재난 앞에서 느끼게 되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런 점이 통했는지, 그의 첫 장편 데뷔작은 일본 영화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으며, 한국에서도 크게 흥행하여 그 해 당연 최고 화제작 중 하나였다. 성공적인 데뷔 이후 공개한 두 번째 장편 작품인 <날씨의 아이>에서는 기후 재난을 다루었지만 박평식 평론가의 말처럼 "황홀하게 뜬구름 잡"는 영화가 되어버렸다. 감독의 개성은 강해졌으나 작품성은 약해졌다. 곳곳에서 감지되는 전작의 흔적과 단점들은 감독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에 비해 이번 <스즈메의 문단속>은 <너의 이름은.>과 비슷하다. 감독의 색깔은 옅어졌지만 대중성이 올라갔고 작품적으로도 전보다는 나아졌다.

신카이 마코토가 신작에서 택한 주제는 재난, 특히 지진이다. 이는 그리 놀랄 만한 선택은 아니다. 운석 재해를 등장시킨 <너의 이름은.>의 정신적 밑바탕에도 지진, 더 정확히 말하면 동일본 대지진이 있기 때문이다. <너의 이름은.>은 가상의 재해와 환상적 장치를 통해 동일본 대지진을 은유적으로 암시하며, 그때 이후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집단 치료를 시도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거대한 재난을 경험한 인간에 대해 예술은,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중요한 미학적 질문을 던진 <너의 이름은.>의 정신은 <스즈메의 문단속>으로 이어지며, 감독은 주제의식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 스즈메는 우연히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을 열게 된다. 이 문을 열면 미미즈라는 재앙의 신이 나오는데, 미미즈가 땅에 떨어지면 큰 지진이 발생한다. 스즈메는 이 재앙의 문을 닫기 위해 소타와 여행을 떠난다.(여기서 영화는 로드무비의 성격을 띤다) 먼저 이 여행의 성격을 규정해보자. 스즈메와 소타의 여행은 거대한 힘에 맞서는 모험 서사이며, 일본 전통 설화에서 유래한 듯한 모티프가 섞여 제의의 성격도 동시에 띤다. 재앙의 문은 규슈, 고베, 에히메, 도쿄 등 일본 전역에 걸쳐 있으며, 문이 있는 장소는 과거 온천으로 유명했던 마을이거나, 산사태로 무너진 학교, 폐쇄된 놀이공원 등 재해로 인하여 더 이상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다. 이곳으로 가는 것조차 만만치 않지만, 미미즈라는 위험한 존재를 막기 위해 그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은 웬만한 용기가 있어도 불가능하다. 문을 닫기 위해서는 어떤 주문을 외우며 열쇠로 문을 잠가야 한다. 소타의 가문은 대대로 이 문을 관리하고 닫는 역할을 담당한 '토지사' 집안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여정은 스즈메의 귀향 서사이다. 여행의 최종 종착지는 이와테현으로, 이곳은 스즈메가 어린 시절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곳이자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일본 동복부 연안에 위치한 지역이다. 스즈메는 어머니가 재해로 사망한 곳에 어머니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감독은 이 시점부터 동일본 대지진의 기억을 선명하게 상기시킨다. 당시 너무나 어린 아이였던 스즈메는 사건 당시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스즈메는 현재 일본의 10대, 20대 초반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동일본 대지진은 2023년을 기준으로 12년이 지났다. 현 중고등학생은 이 사건을 잘 기억하지 못할 것이며, 그보다 어린 이들은 아예 이런 사건이 있다는 것조차 실감하지 못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폐허가 된 장소들을 반복해서 비춰주면서 재해로 인해 파괴된 일상의 공간과 그 공간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비추며 이들에 대한 애도를 표한다. 이를 생각하면, 왜 감독이 문이라는 소재를 택했는지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재난의 문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이다. 이 문을 열면 저승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들어가지는 못한다. 그날 아침,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는 '다녀왔습니다'가 되지 못했다. 재난은 생과 사를 너무나 철저하게 갈라놓는다. 스즈메가 문을 닫기 전에 들려오는 사람들의 대화소리는 그 일상을 파괴하는 재앙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너의 이름은.>이 재난을 막고 다시 연결되려는 타키와 미츠하의 간절함에서 영화의 에너지를 형성한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의 주안점은 재난을 막는 것 자체에 있기보다는 재난이 갈라놓은 일상 세계의 회복에 있는 것 같다. 이 지점에서 스즈메의 여정의 제의적 성격은 내면화되어 스즈메 개인의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제의가 되며, 이는 영화 밖으로도 확장되어 커다란 재난을 겪은 이들을 위로하려는 하나의 거대한 의례가 된다. 마지막에는 이런 주문을 외운다. "목숨이 덧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항상 곁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희는 기원합니다. 앞으로 1년, 앞으로 하루, 아니 아주 잠시라도 저희는 오래 살고 싶습니다. 용맹하신 큰 신이여. 부디 부탁드리옵니다." 이 대사를 통해 이 영화 자체가 하나의 의례가 된 것만 같다.(실제 이동진도 이렇게 평한다) "다녀오겠습니다." 모든 역경을 뚫고 여정을 마무리하는 한 소녀의 이 말이 참 아름답다.

어떤 상처로부터 치유된다는 것은 그것을 잊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특히 그것이 집단적 차원으로 발생하였다면 더욱 그렇다. <너의 이름은.>이 개별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을 지적한 데 이어, 현실의 사건을 직접 호명하여 어느 작품보다 더 직접적으로 현실에 개입하는<스즈메의 문단속>은 장소와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을 기억해야 함을 지적한다. 단순한 기억을 넘어 성장 서사로서의 희망까지 보여준다. 그것이 감동을 자아낸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역시나 유난히 서사에 취약한 신카이의 약점이 고스란히 노출되며, 그래서 후반부로 가면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제대로 따라가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전작보다 서사로 승부를 보려는 의도는 확실히 좋게 느껴졌으며, 감독의 진정성은 보는 이의 정서를 자극하여 공감을 이끌어낸다. 어느 모로 보나 관객이 신카이 마코토의 이름에 기대하는 바를 확실히 충족시켜준 작품이다. 한때 신카이 마코토에게는 호소다 마모루와 함께 '포스트 미야자키'로 촉망 받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 누구도 포스트 미야자키가 아니며 그렇게 되지 못함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신카이 마코토가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하고 주목할 만한 감독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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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 - 《국가》 탐구 우리 시대, 사상사로 읽는 원전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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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 시대 사상사로 읽는 원전' 시리즈의 제 2권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이어 플라톤의 <국가>를 해설한 책이다. 시리즈의 제목은 저자의 문제의식(우리 시대)과 방법론(사상사)을 함축하였고, 시리즈 출간사는 이 제목의 의미를 더 풀어서 설명하였다. 한 문장으로 말하면, 저자는 대한민국의 정치체제를 정의하는 술어인 민주공화정을 이해하고자 사상사적 방법을 통해 정치사상의 고전을 읽고 해설하는 것이다.


왜 <국가>를 읽어야 할까? 이 책은 고전 중에서도 절대 고전이니 당연히 읽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답도 가능하지만, 저자의 문제의식을 따라 생각해보면 21세기 대한민국 사람이 기원전 헬라스 세계의 텍스트를 읽는 것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데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플라톤은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민주주의의 반대자가 아니다. 플라톤은 당대 현실을 비판하면서 참된 민주정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 철학자였고, 그 결과물이 <국가>인 것이다.


<국가>는 '많은 사람의 쾌락'과 '평판'을 논의하여 시민이 곧 주권자인 민주정에서의 정치적 문제들을 겨냥한다. 이는 군주에게만 관심을 가지는 다른 정치사상 텍스트와 차이나는 부분이다. 플라톤은 시민이 민회에 직접 참여하여 폴리스를 이끄는, 그래서 오로지 민주정체에서만 일어날 수 있었던 정치적 문제들을 지적하고 그 처방을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국민이 주권자임을 표명하는 민주정체 국가에서 <국가>는 그 어떤 정치사상 텍스트보다 더 적실성을 갖는다.


이 책을 읽으며 교정해야 할 오해는 <국가>를 단순히 이상국가론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국가>의 배경 시기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후반기이었으며 아테나이 내 당파들 사이의 내전이 심각했던 기원전 411년 전후이다. 공동체가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던 때를 배경으로 삼아 플라톤은 인간과 정치체제의 올바름을 묻는다. 올바른 정치체제를 캐묻는다는 점에서 이상적이나, 플라톤의 생각은 현실국가를 정치학적 관점에서 비평하면서 아테나이의 정치를 검토하고 반성한 뒤에 내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이상국가론이기 이전에 현실 정치에 대한 비평서이다.


즉, <국가>는 회고적 관점에서 당대 정치체제의 문제점을 캐묻고 올바른 인간과 국가란 무엇인지를 이론적으로 사유하고 현실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 정치 비평서이다. "원전의 내용을 살려 인용문 형식으로 서술"한 저자의 요약문과 "시대적 상황, 술어들에 대한 설명, 관련 참고 서적에서 뽑아낸 주해와 출처, 다른 사상가들과의 비교"를 포함한 저자의 충실한 강독을 통해 이런 사유가 텍스트 전반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 파악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일차 문헌을 읽음으로써 나의 문제의식을 키워 나의 독법을 만드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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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21
매슈 레이놀즈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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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이론에 해박하고 드라이든, 포프, 베르길리우스 등 고전 문학과 일본문학에도 정통한 것으로 생각되는 저자가 쓴 번역 입문서인 이 책은 "사유의 재연(再演)"으로서의 번역이 가지는 다채로운 측면을 다룬다. '사유의 재연'은 역자 이재만의 후기에서 등장하는 말이지만, 이는 저자의 번역관의 핵심과도 맞닿아 있다. 번역은 원전 텍스트와 저자의 복잡한 정체성 중에서 특정한 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때 번역자가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은 "독자를 저자에게로 움직이든지 아니면 저자를 독자에게로 움직이든지" 하나다. 이를 현대 번역 연구의 용어로 표현하면, 번역은 "이국화(foreignizing)" 혹은 "자국화(domesticating)"이며, 두 개를 혼합한 것일 수도 있다.

저자는 단테 <신곡>에 대한 도로시 세이어즈와 롱펠로의 번역을 비교하며 예시를 든다. 단테의 <신곡>은 철학적, 문화적, 신학적 사유의 깊이뿐 아니라 A-B-A/B-C-B의 각운이 반복되는 3운구법의 형식을 엄격하게 지켜 형식적으로도 치밀한 작품이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3운구법 형식의 대가 단테를, 롱펠로는 소박한 문체의 작가 단테에 주목하였다. 그래서 세이어즈는 3운구법의 형식을 그대로 살려 <신곡>을 번역하였다. 그 대신 세이어즈의 번역은 원전 텍스트에 없는 단어나 표현을 추가하여 원문의 문체나 뉘앙스가 달라졌다. 반대로 롱펠로는 <신곡>의 소박한 문체와 느낌을 살리는 번역을 택했고 그 대신 3운구법의 형식을 포기하였다. 이때 둘의 차이는 저자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했는지이다.

또 하나 염두에 둘 것은 이국화와 자국화 전략의 혼합이다. 두 번역가는 어떤 부분에서는 원저에 가깝게 번역하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자유롭고 단테를 독자에게로 움직이는 방식을 택했다. 원천 텍스트에 단일한 고정된 정체성이라는 것은 없다. 이국화나 자국화 한 가지 전략만으로는 원전을 완전히 재현할 수 없다. 완전히 이국성을 재현한 번역은 번역을 하지 않은 것과 같다. 자국화 전략만을 사용하면, 원전 텍스트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번안'이나 '개작'이 될 것이다. 번역은 이국성을 모조리 제거하지도, 온전히 남겨두지도 않으면서 그 사이를 오고 간다. 번역은 원전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그대로 옮기는 작업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번역은 번역자가 원전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이국화와 자국화를 어떤 정도로 사용할지를 오롯이 결정하는 선택의 예술이다.

대다수 독자는 번역을 비평할 때 주로 오역 잡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이런 오역 지적 중 가장 무책임하고 무익한 말은 '차라리 원서를 읽으라'는 말이다. 책의 내용을 받아들인다면, 생산적인 번역 비평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단순한 오역 잡기 대신 번역자는 원저자와 원전을 어떻게 생각하였고, 이국화와 자국화를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따져 묻는 일일 것이다. 이때 독자는 명맥한 오역이 아닌 한 같은 텍스트가 얼마나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지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역자의 해석이 번역 동기를 자질구레하게 늘어놓거나 영양가 없는 번역의 고충을 토로하기 일쑤인 역자 후기를 평가할 때도 유용한 지표가 되겠다.

번역에 관해 혼란스러웠던 사유를 정리할 수 있는 책이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번역 사례(고대 중국의 불경 번역, 근대 일본, 성서 번역 등)를 돌아볼 수 있는 책이다. 목차를 보고 아무 곳이나 펼쳐서 읽어도 좋지만, 번역의 본질, 방법론을 저자의 주장을 토대로 간명하면서도 핵심을 제대로 요약한, 기품있는 '역자 후기'부터 읽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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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23-03-04 0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번역에 대해서 이 글을 통해 한 수 배우고 갑니다. 이 책 반드시 읽어야 할 듯.

김민우 2023-03-04 09:33   좋아요 0 | URL
저자의 통찰이 어마어마합니다 ㅎㅎ

초란공 2023-03-04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산적인 번역 비평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단순한 오역 잡기 대신 번역자는 원저자와 원전을 어떻게 생각하였고, 이국화와 자국화를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따져 묻는 일일 것이다.“라고 쓰신 부분에 눈길이 머무네요. 언젠가 한번은 번역서의 오역에 대한 지적을 해보았을테니 독자로서 뜨끔하기도 합니다.^^; 책 소개글 잘 읽었습니다!

김민우 2023-03-04 09:37   좋아요 1 | URL
오역 지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요. 다만 대다수는 비아냥거리는 투죠.. 독자도 책의 완성에 기여한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항다고 생각합니다

추풍오장원 2023-03-04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역이라고 지적하긴 쉽죠. 근데 글을 읽는 자신의 역량도 한번 생각해 봐야 하겠죠...
 
몽유병자들 -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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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들>은 전쟁이 왜 일어났느냐보다는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까지의 복잡한 과정을 추적한 책이다. 저자는 특정 역사적 사건이나 행위자가 전쟁의 원인이라는 가설을 내놓는 대신 전쟁 결정을 내리게 된 핵심 행위자들의 선택과 그들의 긴밀한 상호작용의 연쇄를 집요할 정도로 촘촘하게 파헤쳤다. 전쟁과 같은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사건은 선행조건 위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구조는 역사적 국면 속에서 행위자간에 형성되는 ‘연결 국면(conjuncture)’에 의해 사건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어떻게 행위자의 의식, 결정과 상호작용이 어떤 식으로 연쇄반응을 보이고 이것이 어떠한 구조 위에서 어떠한 과정을 통해 결정적 사건으로 이어지는지를 파악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으며, 이 책은 바로 그러한 과정을 파악하는 틀과 사례 분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용한 책이다.

1914년 7월 위기는 전쟁의 원인을 하나로 특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정도로 이 위기는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7월 위기를 복잡하게 만든 요인은 먼저 똑같이 중요한 자율적 행위자 5개국(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프랑스, 러시아, 영국)과 이탈리아, 발칸반도의 국가와 오스만 제국 등 다양한 행위자들의 개입이었다. 그리고 다양한 국가들의 외교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할 때 드러나는 의사결정 과정의 불투명성도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각자의 상이한 이해관계를 가진 국가들이 상호작용하는 것 자체로도 복잡한데, 의사결정 과정이 불투명하여 상대국의 외교적 제스쳐는 의도와 정반대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모두가 전면적 파국의 가능성을 예측했으나, 당대 유럽의 정치체제가 지닌 구조적 원인 때문에 손발이 안 맞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와 파국은 필연적이었을까? 1부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이 난다. “이런 일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가 언젠가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소소하지만 희망적인 조짐이었다.” 이때만 해도 ‘희망적인 조짐’은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희망은 끝이 나고 전쟁으로 이어진 것일까?

2부 “분열된 대륙”은 이 희망이 파국의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던 요소들을 거론한다. 첫째, 영국-프랑스-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삼국 동맹이라는 두 개의 동맹 그룹으로 양극화된 유럽의 외교 체제가 있었다. “유럽 지정학적 체제의 양극화는 1914년에 발발한 전쟁의 결정적 전제조건이었다.” 여기에 발칸 위기, 왕정하에서 분열된 주권 구조, 위험의식을 낮추어 위험 수준을 높인 데탕트 등이 7월 위기의 전제조건이었다. 그러나 특히 주목할 것은 심성구조의 변화이다. 사람들은 존재하는 것을 관찰하여 현존하는 상황이 정상적이고 윤리적 필연성을 구현한다는 추정을 내린다. 이 추정은 고정불변하지 않으며 상황이 변하면 따라 변화한다. 새로 발생한 상황이 역으로 상황 인식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격변이나 혼란기에는 사람들은 재빨리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여 재빨리 규범적 성격을 부여한다. 이러한 “사실적인 것의 규범적 힘”이 유럽의 핵심 의사결정권자들을 지배하였다. 이 힘이 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전쟁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는 숙명론을 지탱하는 심성구조를 낳았다. 불가피성의 서사는 대안은 전혀 전쟁을 막을 수 없다는 숙명론적 호전주의로 가는 길이었다.

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심성 구조가 원인을 알 수 없는 편견과 두려움과 결합하면서 행위자들의 결정은 전쟁의 가능성을 더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편견, 공포로 점철된 “구성된 서사”는 하나의 새로운 가상현실을 만들어 각국의 공식 정신을 형성했다. 영국은 가상의 적국의 위협과 침공의 공포를 주기적으로 조장하였다. 과거에 프랑스와 러시아에 그러했고, 이제는 독일이 영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적국이나, 그 독일의 위협 행위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언급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의식에는 독일에 대한 적대감, 러시아에 대한 위협에서 기인하지 않는 선제적 조치, 슬라브 민족을 이끈다는 역사적 사명감이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관료의 의식은 실제 사태와 어긋나 있었다. 독일은 7월 위기 내내 분쟁 국지화 정책을 고집하였고, 전쟁을 대외적 위협이나 불가피한 사태로 언급하기는 했으나, 러시아 관료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군사적 위협은 없었다. 독일은 분쟁을 국지화할 수 있다고 낙관했다. 사태를 언어에 맞추고, 잘못된 정보에서 기인한 러시아의 핵심 행위자들은 부분동원령을 선포했다. 이는 기만이었다. 부분 동원일지라도 이는 독일과의 전면적 충돌을 야기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전면전은 피할 수 있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러시아의 동원령에 다급해진 독일은 선전포고를 하였고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찾아왔다.

제3부와 결론을 읽으면 하나의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다. 1914년의 위기를 만들고 전쟁까지 불러일으킨 핵심 행위자 중 누구도 이러한 결말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국가는 전쟁이라고 하는 전면적 파국의 가능성만큼은 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복잡한 요인이 결합하여 전쟁의 가능성은 현실이 되었다. 피해망상 수준의 편견에 매몰된 이들은 러시아처럼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착각하면서 위험수준을 높이는 결정을 반복했다. 마치 몽유병자처럼 모든 국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쟁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는 “주요 인물들 모두가 연기 나는 총을 쥐고 있다. 이렇게 보면 1차 세계대전 발발은 범죄가 아닌 비극이었다.” 오늘날에도 되풀이되는 위기 속에서 이 책은 현재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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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정치사상사 산책 - 소크라테스에서 샌델까지
우노 시게키 지음, 신정원 옮김 / 교유서가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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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노 시게키의 <서양 정치사상사 산책>은 정치사상과 사상가들의 핵심을 뽑아내어 간결하고 명확하게 정리해낸 정치사상사 입문서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사상가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폴리비오스, 키케로, 그리스도교 정치사상, 아우구스티누스, 솔즈베리의 존과 아퀴나스, 마키아벨리, 루터와 칼뱅, 존 밀턴, 홉스, 해링턴, 로크, 몽테스키외, 계몽주의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정치사상가, 루소, 에드먼드 버크, 해밀턴 등 미국의 정치사상, 헤겔, 토크빌, 밀, 사회주의와 마르크스 등 필수적인 사상가는 모두 다루었다고 볼 수 있으며, 자유주의나 공화주의 같은 중요한 사조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더불어 'Key Word'와 'Key Person'에는 본문에서 나오는 개념과 사상가들에 대한 보충 설명이 들어가 있다. 혼자서 혹은 여러 명이서 정리해가며 읽기 좋은 책이다.



'프롤로그'는 정치사상사를 서술하는 저자의 관점과 방법이 잘 녹아들어가 있다. 우노는 진정한 의미의 '21세기의 정치사상사'를 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진정한 21세기의 정치사상사를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우노는 고대 그리스에서 근현대 유럽과 미국으로 이어지는 직선적 역사상을 보편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고, 유럽의 역사적 개성과 특성에 집중한다. 이는 이 책의 제목이 <'서양' 정치사상사 산책>인 데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목차 구성도 이런 저자의 관점을 볼 수 있다. 목차를 보면, 처음에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사상'을 다룬 뒤, 고대 로마, 중세 유럽, 르네상스, 17세기 잉글랜드, 18세기의 정치사상, 미국혁명과 프랑스의 혁명, 19세기의 정치사상, 20세기의 정치사상으로 내용이 이루어져 있다. 도식적이고 기계적인 시대 구분이기는 하지만, 반대로 각 시기별 역사적 상황에 따라 정치사상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구분이기도 하며 서양 역사의 특성(정치적 다원성, 세속권력에 독립적인 종교권력)에 집중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는 정치사상의 역사를 "'고전'을 끊임없이 읽어온" 인문주의 전통으로 정의하며, 그중에서도 정치에 초점을 맞춘 '정치적 인문주의'(civic humanism)에 집중한다. 즉, 사상가들이 어떤 고전을 읽고 거기에서 얻은 관점이나 사고법으로 당대의 현실과 겨루었던 역사를 정치사상사로 규정한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정치사상사란 고전이 성립되고 후대에 이 고전을 독해하여 자신이 사는 현재에 적용하고 다시 새로운 고전이 탄생한 역동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독법은 정치사상 텍스트와 그 컨텍스트를 동시에 다루어야 함을 함의하는데, 이는 그 자체로 정치철학과 구분되는 정치사상 연구의 특징을 잘 집약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사상사 서적답게, 이 책은 필요한 역사적 배경도 입문서 수준에서 잘 정리하여 서술한다.(특히 '잉글랜드 내전'을 보라)



정치사상사 공부가 처음인 이들은 이 책을 여러 번 읽고 나오는 개념을 따로 정리하여 익숙해진 다음 앨런 라이언의 <정치사상사>(문학동네)나 회페의 <정치철학사>(길)와 같이 더 심화된 책으로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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