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의 생활과 문화에 위화감을 느낀 소세키는 자신의 문학관을 배양한 동양과 서양은 문학에 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두 서양이 표준이라면 동양의 문학은 부정되고 오로지 서양인의 흉내를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다." (220~221쪽, 해제)


"나는 비로소 '문학이란 어떤 것일까'하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자력으로 만들어내는 것 외에는 나를 구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완전히 타인본위로 뿌리 없는 개구리밥처럼 그 근처를 아무렇게나 방황하고 있었으니 모두 허사였다는 사실을 겨우 알았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타인본위라는 것은 자신의 술을 타인에게 마시게 하여 품평을 듣고는 이치에 맞건 안 맞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른바 남 흉내 내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57쪽, 나의 개인주의)

자신의 생애를 메이지라는 시대 상황에서 분리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 소세키는 자신의 생애를 통해 압도적인 열강의 압력에 항거하며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세계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다. 즉 그는 메이지 일본의 특징인 ‘국가주의‘가 인간의 자유와 독립을 억압하는 것에 반대하고 개인주의 도덕의 확립을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 P217

자기본위를 설명하고 개인주의 입장을 공언한 소세키가 자유를 수반한 의무와 타인의 개성과 자유의 존중을 강조한 것은 개인주의에 대한 세상의 오해를 고려해서였지만 한편으로는 청중인 학습원의 학생들 입장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서 개인주의는 악이라고 비난받았지만 권력자의 횡포에 대해서는 관용적이었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국가주의가 찬미되었었다. - P232

<나의 개인주의>에서는 "자기 개성의 발전을 완수하고자 생각한다면 동시에 타인의 개성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지만 이것은 자기 권력을 사용하는 자는 그에 수반하는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의미와 함께 대국의 폭력을 경계하고 상호 상대국의 주권과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한 표현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독일이나 일본의 무법적인 형태를 비판하는 의미이기도 했던 것이다. - P234

<점두록>에서는 전쟁의 비참함과 무의미함과 군국주의를 논하며 독일의 군국주의를 낳은 트라이치케의 사상을 해부, 정치와 사상, 문학에 대해 조명했다. 이 연재 에세이는 소세키가 최후에 남기고 싶었던 평화의 메시지였으며 - P234

언제나 상대를 제압하려 하는 군국주의는 내셔널리즘의 자연적 귀결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무서운 희생과 파멸, 문명의 황폐를 야기한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계속 추구하던 소세키는 인류에게 파멸을 초래한 군국주의의 행방을 주시, 그것을 헤쳐나가는 인간 본연의 자세를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 P238

지금까지 소세키론의 상당수는 이 소세키의 사회성과 전투성을 간과하고 있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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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6월쯤이면 한국전쟁 관련 서적이 많이 출간되고, 5월이 되면 5.18민주화운동 관련 서적이 많이 출판된다. 알라딘 신간 목록을 보며, 5.18 관련 책이 많아진 것을 보고 어느덧 5월이 되었음을 느꼈다. 또 한편으로 숙연함이 동시에 따라온다. 지난달, 리뷰대회의 열풍을 타고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이 상당한 화제의 중심이었다. <피에 젖은 땅>은 우리에게 그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비극을 왜 기억해야 하며,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같은 메시지를 적용할 수 있다. 희생자와 희생자의 가족들이 아직 살아있으며, 아직 5.18을 둘러싼 문제들이 해결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5.18을 기억하고 현재로 불러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5월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또 하나 일어났던 달이다. 바로 박정희와 육사 출신 생도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5.16군사정변이다. 올해가 군사정변이 시작된지 꼭 50년째더라. 박정희 정부는 장장 19년 동안 정권을 유지하며, 한국 사회에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깊은 흔적을 남겨 놓았다. 그가 죽고, 그 정권이 무너진지 40년도 훨씬 지났지만, 여전히 그 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여기서는 5.18/박정희 시대 관련으로 읽어볼만한 책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 5.18민주화운동

김영택, <5월 18일, 광주>

노영기 <그들의 5.18>

저자 김영택은 동아일보 기자였는데, 80년에 취재차 광주로 갔다가 5.18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다. 이후 그는 5.18운동 연구에만 매진했는데, 5.18 자체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이 책은 평생에 걸친 저자의 연구 성과가 담겨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5.18 민주화운동은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충분할 정도이다. 꼭 읽어볼 책이다.


노영기의 책도 기본적으로 5.18의 전 과정을 담고 있는데, 차이점은 보안사 등 신군부 측 자료들을 방대하게 분석한 것이 특징이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소설가 황석영이 책임 주필로 참여한 책으로, 당시 광주시민들의 증언을 통해 5.18운동을 재구성하였다.

이미 85년 초판이 출간되어 지하 베스트셀러로 유명했던 이 책은 이미 고전적 반열에 올라 그 자체로 역사적 가치가 상당하지만, 직접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꼭 읽어볼 책이다.

김영택의 책에서도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전달되는데, 학술적 언어가 아니라 시민의 증언을 복원한 이 책에서는 그때의 모습이 처절할 정도로 가슴 아프게 묘사된다.







강풀, <26년>/한강, <소년이 온다>

5.18을 소재로 한 작품 중에서 강풀의 <26년>과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매우 인상깊게 읽었다.

강풀의 만화는 5.18 자체보다는 그 이후 희생자와 그 가족의 상처와 원한에 더 포커스를 맞춘 작품이다. 5.18로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 주인공들이 전두환(작중에서 '그 사람'이라고만 지칭됨)을 암살하려는 내용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41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그 사람'과 현재 상황에 분노하게 된다.


한강의 이 소설은 6개의 서로 다른 6개의 시점을 통해 5.18을 재조명한다. 마지막에는 저자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도 나온다. 사투리까지 구현하며 일종의 증언록과 같은 형식의 이 소설은 5.18의 상황을 그대로 복원한다기보다는 그 안에 있던 개인의 내면과 목소리에 더 집중한다. 읽기 힘들 정도로 생생한 심리묘사를 담고 있지만, 강렬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작년에는 회고록이 주로 출판된 느낌이었다면(<호텔리어의 오월노래>, <5.18 푸른눈의 증인>), 

올해는 윤상원 열사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 윤상원 열사는 5.18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했던 인물로, <투사회보>라는 소식지를 발행하여 5.18 당시 언론의 기능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진압군에 의하여 30살의 나이로 사망한 윤상원 열사의 생애를 조망한 책들이 꽤 출판되었다.



<윤상원 평전>의 저자 김상섭은 5.18 당시 윤상원과 함께 투사회보 제작과 시민군 활동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이런 저작의 이력을 보면, 이 책은 평전일 뿐 아니라 저자의 회고록이기도 할 것 같다. <윤상원 일기>는 윤상원이 직접 남긴 1차 사료라는 점에서 중요하고, 그의 아버지인 윤석동의 일기 역시 그렇다. 아직 이 책들을 읽지는 않았지만, 역시 또 하나의 의미있는 책들이 나왔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참고로, <녹두서점의 오월>은 윤상원/김상집 등이 투사회보를 제작하여 배포하고, 항쟁 방향을 두고 회의하였던 거점인 녹두서점에 대한 증언록이다. 녹두서점을 운영하던 김상윤, 그의 부인 정현애, 김상윤의 남동생 김상집 이 세 가족의 증언이 담겨져 있어 이 책도 함께 읽어볼 책이다. 
















- 박정희 시대

전인권, <박정희 평전>

박정희 생애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읽어볼 만한 책이다. 조갑제닷컴, 기파랑 등에서 나오는 박정희 전기는 너무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는데,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은 최대한 연구자의 중립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박정희의 생애를 복원한다. 

강정인의 <한국 현대 정치사상과 박정희>는 박정희 정치 사상을 분석하였다.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저명한 한국현대사 연구자 서중석이 쓴 한국현대사 책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쓴 책이고, 제목처럼 사진 자료도 많아 어려운 책은 아니다. 박정희 정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내용들은 이 책을 참고하면 되겠다.










 정광민, <김일성과 박정희 경제전쟁>

 박정희 정부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화두는 단연코 경제성장일 것이다. 한국의 경제성장이 박정희 덕분이었냐, 대중의 힘이었냐 같은 주제보다는 박정희 경제 정책이 어떤 것을 추구했고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집중한 책을 소개하겠다.

정광민의 <김일성과 박정희 경제전쟁>이다. 이 책은 김일성과 박정희의 경제발전 정책을 체제/이념 면에서 비교 연구한 책이다.


이 책과 함께 <뉴딜, 세 편의 드라마>도 읽어볼 만한 책이다. 히틀러, 무솔리니, 루즈벨트가 어떤 수사를 통해 경제정책을 운용했는지에 집중해서 읽으면, 박정희-김일성과 어떤 공통점이 보인다.



한국정치연구회 편, <박정희를 넘어서>

1. 박정희와 그 시대를 넘기 위하여 / 연구 쟁점과 평가
2. 박정희신드롬의 양상과 성격 - 정해구
3. 박정희신드롬의 정치적 기원과 그 실상 - 정상호
4. 유산된 민주화, 경쟁의 부재와 통합의 빈곤 - 정상호
5. 왜곡된 정당정치와 지역균열 - 현재호
6. `반체제운동`의 전개과정과 성격 - 이광일
7. 지역균열의 구조와 행태 - 박상훈
8. 동원된 민족주의와 전통문화정책 - 전재호
9. 개발독재는 불가피한 필요악이었나 - 김용복
10. 기회포착의 정치가와 세계체제의 `국면들` - 김동택
11. 한미관계, 종속과 갈등 - 김창수
12. 한일관계, 왜곡된 밀착 - 김용복


IMF 때 나온 책이라 조금 오래되기는 했지만, '박정희 시대 그 이후'라는 주제로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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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1-05-18 05: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김민우 2021-05-18 14:2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

mini74 2021-05-18 1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청소년들에게 소년이 온다 나 26년은 고마운 책, 조금은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 준것 같아 고마운 책들.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어요. 고맙습니다 *^^*

김민우 2021-05-18 14:26   좋아요 1 | URL
저한테도 되게 고마운 책들이었죠 ㅎㅎ 다른 책들도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 책을 통해 필자가 제시하려는 주장은 단순하다. 개화당은 처음부터 외세를 끌어들여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사회를 근본적으로 혁신하려고 한 역모집단 또는 혁명비밀결사였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1871년 신미양요를 전후해서 오경석과 유대치가 김옥균을 포섭함으로써 결성되었으며, 그 사상적 기원 또한 의역중인의 철저한 현실 비판과 과격한 사회변혁사상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 P7

집권세력에 의해 추진된 문호개방은 기본적으로 당시 국제정세에 순응해서 기존의 권력구조와 질서를 유지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에 반해 개화당의 정치적 목적은 어디까지나 외세를 끌어들여서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사회를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양자는 본질적으로 정적의 관계에 있었다. - P11

개화당의 사상적 기원을 북학파의 종장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에게서 구한 기존의 통설은, 일본인의 입장에선 자발적 부역자라고도 할 수 있는 개화당에게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식민사학과 1960년대 이후 조선사회의 주체적/내재적 근대화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을 그 소명으로 삼았던 민족사학의 의도치 않은 합작으로 이루어진 신화에 불과하다. - P12

개화당과 가장 큰 관계가 있었던 것은 기술직 중인이다...그중에서도 핵심은 의역중인이었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폐쇄적인 혼인관계를 형성하고 또 요샛말로 하면 서로 자제들이 과외교습을 해주면서 기술직을 독점적으로 세습했다...하지만 아무리 많은 재산과 고상한 식견, 뛰어난 재주가 있더라도 의역중인은 조선사회 안에선 출세와 활동이 제한된 한계인일 뿐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을 벗어나 중국의 명망 높은 문사 및 관리들과 신분 차별 없이 인간적인 교유를 나누는 데서 더할 나위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개화당이 같은 조선인보다 서양인이나 일본인을 더 신뢰해서 스스럼없이 자신들의 정체와 음모를 털어놓고 도움을 청한 데는 이러한 중인의 계급적 심성이 일정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 P15

개화당은 수백 년 동안 누적되어 화석처럼 단단하고 난마처럼 얽힌 조선사회의 온갖 폐단을 척결하고, 무능하고 무지하고 몰염치하면서도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지키는 데는 놀랄 만한 능력과 단결력을 발휘하는 양반들의 폐쇄적 카르텔을 깨뜨리기 위해선 비상한 수단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조선 후기의 수많은 민란과 역모사건 중에서도 개화당의 그것이 단연 이채를 발하는 것은, 그 수단을 임진왜란 이후 누대의 원수인 일본이나 전통적으로 금수로 멸시해 온 서양의 힘에서 구한 사실에 있다. - P376

개화당의 근본 목적은 후쿠자와 유키치류의 문명개화, 즉 서구화나 근대 문물의 수입에 있지 않았다...‘개화‘라는 말은 원래 이 비밀결사가 갖고 있던 고유한 문제의식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갑신정변을 공모한 후쿠자와 및 고토와의 유대를 상징하는 기능을 했을 뿐이다. 후쿠자와가 설파한 ‘개화‘와 개화당이 생각한 ‘개화‘의 의미는 반드시 같지만은 않았으며, 또 같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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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희생은 한국 노동계급 형성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수백만명의 노동자들, 그들의 가슴속에 저항과 반항의 정신을 심어주었고, 그때까지 집단적인 목표를 위해 노동자들을 고취하고 동원할 수 있는 성스러운 상징과 존경할 만한 전통이 없었던 한국의 노동계급에 강력한 상징을 제공했다. 이 사건은 또한 급속한 수출주도형 산업화과정이 만들어낸 노동문제가 산업영역에서 감추어진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긴장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폭발적인 요소가 된다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한국에서 산업노동자들이 사회적 갈등과 사회변혁의 핵심세력으로서 역사의 장에 들어선 것이다. - P112

청계피복노조의 뒤를 이어 자주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서너개의 주요한 투쟁이 1970년대에 발생하였다. 흥미롭게도 이런 노조건설 투쟁의 대다수는 여성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이 시기 잘 알려진 두 가지 사례는 1972년, 원풍모방과 동일방직이라는 두 개의 대규모 방직공장에서 일어났다. - P116

여성노동자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는 점을 떠나서 노동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노조활동가와 교회조직 간의 긴밀한 결합이었다. 거의 예외없이, 여성 노동운동가들은 진보적인 교회지도자들의 보호 아래 조직된 소그룹활동이나 노동자야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던 사람들이다. (중략) 중소기업에 고용된 여성들이 주도한 1970년대 자주노조운동이 주로 수도권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이 지역에 노동지향적 교회활동이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 P117

고용주는 자주노조를, 특히 외부조직과 연계된 것으로 의심받는 노조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자주노조의 설립이나 어용노조의 개혁시도를 막고자 했다. 노조결성을 막지 못했을 때, 회사측의 다음 전략은 독립노조를 어용노조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흔히 사용한 방법은 여성중심의 민주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남성노동자들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 P123

회사에 매수당했다는 것 이상의 더 깊은 이유가 있었다. 여성 노조활동가들에게 동정적이었던 한 남성의 고백처럼, 남성들이 여성이 주도하는 노조지도부를 지지하지 않은 것은 "남자들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여성 노조지도부를 지지하는 몇 명의 남성들은 동료 남성노동자들에 의해서 배척당했고, 노조활동에서 물러나거나 결국은 여성노동자들의 믿음을 배반해야 했다. 분명히 뿌리깊은 성차별 이데올로기가 주된 장애물이었다. - P132

한국 민주노동운동과 노동계급 형성의 기반을 제공한 것은 용감한 여성노동자들의 개척자적인 역할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970년대 남성노동자들의 역할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분신자살을 통해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킨 사람은 결국 남성재단사인 전태일이었고, 최초의 자주노조를 조직해서 민주노조운동으로의 길을 열어준 사람들도 전태일의 동료인 평화시장의 남성재단사들이었다. 또한 유동우와 방용석 같은 다른 남성노동자들도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민주노조운동의 횃불을 든 것은 여성노동자들이었다. - P141

1970년대와 1980년대 초 한국 노동운동에서 여성노동자들이 보여준 예외적인 역할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나는 경공업 여성노동자들과 진보적인 교회조직 간에 형성된 긴밀한 연계에 그에 대한 대답이 있다고 믿는다. (중략) 만약 교회조직들이 노동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더라도 여성노동자들이 한국 노동운동에서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인가 하는 것은 흥미로운 질문이다. 추측컨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 P145

배제적 국가조합주의 노동통제체제는 노동자들이 공식적인 노조조직 외부에서 출구를 찾도록 강요했다. 그 시점에서 기독교지도자들과 지식인집단들은 국가의 무서운 억압을 무릅쓰고 노동운동을 지원하고자 했다. 교회조직들은 1970년대 노동계급운동의 발전에 몇가지 뚜렷한 기여를 하였다. 무엇보다도 진보적인 교회들은 노동자들이 모여서 그들의 문제와 관점을 공유할 수 있는 피난처와 사회적 공간을 제공했다. - P151

우리는 투쟁의 실제 주체가 누구였는가에 대해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교회조직이 아니라 여성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의 놀랄 만한 연대활동을 가능케 한 것은 잔인한 노동조건과 그들의 노동경험 그리고 공통의 사회적 배경에 바탕을 둔 강한 유대감이었다. 교회지도자와 지식인들의 역할은 구조적으로 결정된 잠재성을 현실로 전환하는 촉매제 역할이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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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 일본의 근대를 이끌다 살림지식총서 583
방광석 지음 / 살림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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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에게는 두 가지 상반된 평가가 가능하다. 한편으로 그는 근대 일본의 기획가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그가 근대 일본 체제에 미친 영향을 지대하다. 그는 근대 일본의 헌법 체제와 의회를 완성시켜 근대적 일본에서 근대적 입헌정치가 실현될 수 있게 하였다. 또 한편으로 한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토 히로부미는 제국주의자요 침략의 원흉이다. 제국주의자이자 일본 근대의 설계자로서의 면모가 동시에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자로서 이토의 행보는 다음과 같다. “1905년에는 한국과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하고 190512월부터 19096월까지 3년 반 동안 초대 한국통감으로 있으면서 이른바 보호통치를 주도하며 식민지화의 길을 닦았다. 야마가타,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 강경파에 비해 점진적인 한국침략정책을 펼쳤다.” 더 나아가 보호통치가 파탄에 이르면서 한국병합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1880년대 이후부터 대외문제를 통해 국내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저자는 “‘팽창주의자또는 대국주의자’”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내가 더 주안점을 두고 읽었던 것은, 입헌정치를 완성한 기획가로서 이토이므로, 제국주의자 이토에 대해서는 자세히 정리하지는 않겠다. (이에 대해서는 한상일의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겠다)

 

이토 히로부미는 천황과 내각의 결합을 강화하여 정부의 권위를 확고히 하려고 하였다.” 그는 천황의 권위를 활용하려 했던 것이지 천황이 능동적 군주로 등장하는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천황의 권위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메이지유신을 주도했던 사쓰마 조슈 중심의 번벌정권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방패였다. 오랫동안 천황이 직접 다스린 적 없었던 일본의 전통에서 이토는 기존 체제의 유지와 지배의 효율성이라는 관점에서” “입법권을 의회에 부여하고 있으나 행정권은 오로지 국왕의 수중에있던 프러시아 입헌론에 관심을 기울였다.

 

메이지 14년의 정변 후, 입헌론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토는 유럽의 입헌제도를 조사하기 위해 주위의 권유를 받아들여 유럽으로 떠나게 된다.” 거기서 슈타인의 국가유기체설을 접하고, 자신이 바라던 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입헌제의 수립과 국가기구 개혁론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일본으로 귀국한 이토는 본격적인 입헌제 돌입에 앞서 몇 가지 개혁을 진행한다. 이는 첫째 유럽의 전통적인 귀족과 같은 정치적 사회적 세력을 만드는 것이었고, 둘째 기존의 태정관제를 대신할 내각제도의 수립에 착수했다.”

 

개혁을 마치고 내각총리대신에 내정된 이토는 헌법제정에 박차를 가한다. 1889년 완성된 대일본제국헌법에서 이토는 천황을 국가체제의 중심으로 편입시킨다. 흠정헌법의 성격을 띤 이 헌법에서 이토가 생각한 천황은 유럽의 기독교와 같은 위치였다. 유럽에서 기독교를 문명의 요소로 내걸었기 때문에 일본을 문명화할 종교를 천황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토는 기독교적 신과 근대적 주권자의 형상을 결합하여 근대적 천황의 형상을 새롭게 발명하였다.

 

그러나 이토는 천황을 징치적 실권을 지닌 통치자보다는 번벌정부를 인정하고 헌법의 규정을 충실히 따르는 조정자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에게 천황이란, 아직 영국식 의회정치로 나아가기에는 미숙했던 일본의 정치를 점진적으로이끌 원로들의 실권과 통치를 인정해주고 보장해주는 방패였다. 결국 대일본제국헌법은 기존 지배구조를 보장하기 위해 군주제와 입헌제를 교묘하게 결합한 것이다.” 실제로 천황대권을 행사한 것도 천황이 아니라 메이지유신 때부터 활동한 이토와 같은 정치 원로들이었다. 그는 비록 천황의 역할을 헌법 규정을 따르고 번벌을 인정하는 조정자로 여겼지만, “19세기 말 이후 교육칙어·국가신도를 기반으로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형성되는데 그 기틀을 마련한 것도 이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토의 시도는 원로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던 당시에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원로들이 차례차례 죽고, 1930년대 여러 대내외적 상황이 맞물리면서, 이토의 원래 의도와 계획은 사라지고 천황은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았다.

 

일본의 근대는 이토에 의해 빠르게 서양 근대의 정치 체제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많은 부분 서양의 제도를 받아들였어도, 서양의 제도나 사상이 가지는 본질적인 정신적 가치나 의식이 없었다. 표면적인 근대화에 머물렀던 이토의 체제는 민중을 억누르고 지배층 위주로 진행되었으며”, 1930년대 이후 군부의 폭주와 내셔널리즘의 분출 속에서 너무도 쉽게 무너지고 군국주의의 길로 가게 되었다.

 

이 책은 서문에서 이토의 전 생애를 실증적이고 객관적으로 추적하여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시도하였다고 밝힌다. 그러나 문고본 분량에 얼마나 그 목표가 달성되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이토가 스승 요시다 쇼인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그 둘의 관계는 무엇인지 불분명하고. 국가유기체설 같은 중요한 개념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나 상세한 설명이 없어 이토의 근대 천황제와 국가유기체설 사이의 관계가 모호하다. 이는 이토 유키오의 <이토 히로부미>(삼인)가 더 참고가 될 듯하다. 또한 통감 시절과 관련된 얘기는 일반적인 대한제국 침탈 과정이 주로 서술되어 있어 이토의 정치적 의도나 조선통치관 등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한편으로 방광석의 책은 분량이 제한적이라 너무 많은 내용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증적 탐구균형 잡힌 이해를 내거는 책에서 이러한 서술상의 불균형과 누락은 너무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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