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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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루소의 이 책은 다종 아카데미에서 제시한 질문에 대해 답하는 형식으로 짜인 논문이다. 다종 아카데미의 질문이란 이렇다.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

 

이 질문은 두 개를 묻고 있다. 첫째, 불평등의 기원, 둘째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 이 글에서는 루소가 각각의 질문에 어떻게 답변하고 있는지를 통해 루소의 논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

루소에 따르면, 다종 아카데미가 내놓은 이 질문은 애초부터 잘못된 질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에 대해 지식이 전무한 상황에서 자연법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자연법을 따르는 자연인이 무엇인지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소는 제1부에서 자연 상태의 인간은 어떠했는지를 논의하는 것부터 논문을 시작한다. 여기서 루소가 이해하는 자연법이란 원래부터 그러한 것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루소에 따르면, 자연 상태의 인간, 즉 어떠한 문명도 이룩하지 않았던 미개인 상태의 인간은 자신의 신체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었고, 건강하여 어떠한 의술이나 약도 필요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무리를 이루지 않은 채 홀로 지냈으며, “자신의 진정한 필요만을 느꼈고, 눈으로 보아 흥미롭다고 여겨지는 것만쳐다보았기에, 자신의 신체적 능력이 자신의 필요나 욕망을 채우지 못한다고 불행해지는 일도 없었다. 그는 자족하는 삶을 살 줄 알았던 것이다. 또한, “타인을 해치고 싶은 마음보다는 타인에게서 입을지 모르는 피해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데 더욱 신경을 쓰고 있었으므로 위험한 분쟁에 휩싸일 우려가 없었다.” 그러므로 자연 상태의 인간은 불행하지 않았고, 어떠한 불평등의 상태에도 놓이지 않았다. 오히려 문명의 진보 속에 살고 있는 인류보다 더 나은 처지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루소가 말하는 자연 상태의 인간이란 역사상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존재이다. 그의 이러한 탐구는 역사적/실증적 탐구라기보다는 전적으로 루소의 추론과 사고실험에 의존한 가상적 탐구이다. 현대 고고학 연구가 증거하고 있는 것은, 선사시대에도 인간들의 파괴적 싸움이나 불평등의 양상은 현대와 마찬가지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원시사회와 문명사회의 전쟁 양상을 비교했을 때, 살상률이나 구성원의 전쟁 참가율은 원시사회 쪽이 더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또한 토지와 가축의 소유권, 인간관계, 물질적 부 등에 의해 원시 수렵채집 사회나 농경사회에서도 불평등이 있었다는 것이 사회인류학이나 고고학계의 견해이다. 요컨대, ‘자연 상태의 인간은 말 그대로 루소의 머릿속에서나 존재하는 가정뿐인 셈이다.

(참조: https://blog.naver.com/felix47/221888780489 )

 

사실상 루소의 논의는 불평등의 진정한 기원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기보다는 불평등의 본성을 해명하는 데 더 집중한 작업이다. 다시 말해, ‘자연 상태의 인간이란 불평등 상태의 인간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를 통해 불평등을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인가?

루소는 불평등을 두 종류로 나눈다. 첫째, “나이·건강·체력의 차이와 정신이나 영혼의 자질 차이등 자연적인 것에 의해 정해지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다. 둘째, 특권자들에 의해 성립되어 일종의 약속에 좌우되고, 사람들의 동의로 정해지거나 적어도 용납되는 도덕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다. 그는 자연적 불평등으로 인한 차이가 사회적으로 제도화되고 고착화되어 차별로 이어지면서 불평등이 자리 잡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루소는 신체적 불평등은 문제시하지 않는다. 이는 자연적 인간에게서도 발견된다. 문제는 정치적·도덕적 불평등, 혹은 신체적 불평등이 후자의 불평등으로 이행하게 된 과정이다. 그에 따르면, 신체적 불평등과 정치적·도덕적 불평등은 그 자체로는 특별한 관계는 없다. 그렇다면, 불평등의 기원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습관의 산물이거나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채택하는 여러 가지 생활 양식의 산물이라고 루소는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루소가 정치적·도덕적 불평등에 내린 정의를 자세히 봐보자. 그것의 주요 요소는 약속’, ‘동의’, 그리고 용납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약속과 동의가 생긴 것이야말로, 이미 자연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증거이다. 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권이다. 더 부유한 사람, 더 존경을 받는 사람, 더 권력을 가진 특권자들에 의해 인간 사이의 불평등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자연이 법에 굴복했다.

 

루소는 이 과정이 세 단계에 걸쳐서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불평등의 진행을 따라가 보면, 법과 소유권의 설정이 제1단계이고 행정 권력의 제도화가 제2단계이며 합법적인 권력에서 독단적인 권력으로 변화하는 것이 제3단계임을 알 수 있다.”

 

 

- 불평등의 진행

고립된 개인으로서 존재하던 자연 상태의 인간은 어느 순간 상호간의 약속과 그로 인한 이득을 깨닫게 되었다.” , 그는 이제 무리를 지어 생활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 상태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도덕이 도입되기 시작했으니, 개인의 신체적 우월함, 루소의 표현을 따르면 신체적 불평등이 더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이상한 도덕이 생겨난 것이다. “노래를 가장 잘 부르고 춤을 가장 잘 추는 사람, 얼굴이 잘생기거나 힘이 센 사람, 재주가 가장 뛰어나거나 언변이 가장 좋은 사람은 존경을 받았다. 이것이 불평등을 향한, 그리고 동시에 악덕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우월함을 대중적으로 확인받고자 하는 명예욕이 생김과 동시에 사회를 이루게 된 인간이 혼자서 두 사람 몫의 양식을 차지하는 것이 유리함을 알아차리게 되자마자, 평등은 사라지고 소유가 도입되고 노동이 필요하게 되었다.” 힘이 센 놈은 더 많이 가질 수 있다. 재간이나 재주가 많은 이도 노동에 비해 더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부와 소유의 차이가 생겼다. 농업과 야금술 등 기술의 진보는 인류의 불평등과 인간 소외를 심화시켰다. 기술이 발달하여 생산성이 높아지자 토지를 소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간극은 더 벌어지고 마침내 부유한 자는 남을 지배하게 되었다. 사회와 법률은 이러한 소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구히 고정시키고 교활한 횡령을 당연한 권리로 확립시켜 그 후 온 인류를 몇몇 야심가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과 예속과 비참에 복종시켰다. 결과적으로 자연적 불평등이 차별로 이어지면서, 제도는 왜곡되고, 누군가는 독점적으로 안락을 유지하나, 절대다수는 생존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펼쳐지게 되었다.

 

최초의 사회적 불평등에서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발생하고, 이후에 강자와 약자의 상태가 발생했다면, 정치상의 불평등이 극단적으로 흐르게 된 결과가 전제군주제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한 명의 우월한 이가 지배자로 군림하여, 그와 다른 이들 사이에는 주인-노예의 상태가 성립된다. 주인의 의지에 대한 복종 외에는 그 어떤 법률이나 정념도 사라져버린 이러한 사회는 두 번째 자연 상태로, “이것이 바로 불평등의 마지막 도달점이며, 우리가 순환을 마감하면서 이르게 되는 출발점이자 종점이다.”

 

이상의 불평등의 기원을 추적한 루소가 다종 아카데미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최종적으로 결론 내린다. “불평등은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인간 능력의 발달과 정신의 진보에 따라 성장하고 강화되며 소유권과 법률의 제정에 따라 안정되고 합법화된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실정법에 따라서만 인정되는 도덕적 불평등은 그것이 신체적 불평등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경우에는 언제나 자연법에 위배된다는 결론도 나오게 된다.···자연법을 어떻게 규정하든, 어린애가 노인에게 명령하고 바보가 현명한 사람을 이끌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마저 갖추지 못하는 판국인데 한줌의 사람들에게는 사치품이 넘쳐난다는 것은 명백히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렇다면, 자연 상태로의 회귀가 불평등에 대한 최종 해결책일까? 그렇지 않다. 우선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도 그런 얘기는 언급된 적 없다. 무엇보다 루소 자신이 자연 상태로의 회귀가 불가능함을 잘 알았다. “인간의 본성은 결코 후퇴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소는 장 자크를 심판한다>).

 

다시 루소의 언급을 잘 봐보자. 루소에 따르면, 인간이 사회를 이루면서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도덕 규범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것은 지식이든, 물리적 힘이든, 특기나 재력이든 무언가 우월한 사람이 존경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노력을 통해 존경을 받았다. ‘지위가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지위 기반 사회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루소가 불평등을 구분하며, 문제시했던 특권에 의한 정치적·도덕적 불평등이다. , 루소는 사회가 특권적 지위를 독점하는 소수에 의해 운영되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사회를 운영하는 원리를 전혀 다르게 만들어야만 한다고 보았다. 사회를 기반하는 원리는 무엇이어야 하며,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 이것이 <사회계약론>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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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념과 이해관계 - 자본주의의 승리 이전에 등장한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논변들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노정태 옮김 / 후마니타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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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서양 지성사를 관통했던 초기 자본주의 옹호론의 역사를 복원해냈다.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기껏해야 도덕적으로 관용된 이런 행동에서 어떻게 벤저민 프랭클린의 의미에서의 소명이 형성되었던 것일까?”라고 물었듯이, 중세까지만 해도 가치척도에서 낮은 위치에 있었던 돈벌이는 어떻게 벤저민 프랭클린에 이르러서는 소명으로까지 인식되었던 것일까. 이는 그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다른 이데올로기에 대해 승리한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 이야기는 훨씬 복잡했고, 에둘러 갔다.”

 

서양 지성사에서 인간의 파괴적 정념을 막기 위해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제시되었다. 첫째, 국가나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에 의존하여 강제력과 억압에 호소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이 이러한 방법을 제시했다. 또 다른 해법은, 정념을 제어하여 그 정념들이 복리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게 한다는 발상이다. 버나드 맨더빌에 의해 상세하게 전개된 이와 같은 발상은, 18세기 헤르더와 19세기 헤겔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헤겔의 이성의 간지개념이 표현하고자 한 것도, 인간은 자신의 정념을 추구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세계-역사적인 어떤 고차원적 목적에 봉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해법은 서로 다른 정념을 구별하여 서로 싸우게 하거나, 무해한 정념을 통해 다른 정념을 길들이는 방식이었다. 이것이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소재이기도 하며, 프랜시스 베이컨과 스피노자에게서 비롯된 이 아이디어는 두 세기를 풍미했지만 지금은 잊혀진 한 이상이다.

 

17~18세기는 대내외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질서가 배치되었던 시대였다. 구체적으로 말해 군주의 변덕과 자의적인 통치, 그리고 모험적인 대외 정책등으로 사회가 무너질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공유되었다. 그런 시대정신 속에서 가장 매력적인 대안으로 비춰졌던 것이 바로 정념과 이해관계의 대립이었다. 이해관계란, “사람들이 열망하는 것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되, 그런 열망이 추구되는 방법에 대한 숙고와 계산의 요소를 의미했다.” 바로 이 계산분별력이 당시 학자들이 주목한 요소였다. , 무질서한 통치로 인한 사회의 붕괴를 막으려는 시도 속에서 인간의 탐욕 추구, 다시 말해 이해관계는 분별력과 효율성의 계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추구할 만했으며, 이것이 다른 정념을 저지하는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정념의 조련사로서 이해관계가 가장 칭송받았던 부분은, 인간의 행위에 방향성을 부여하여 정념을 따르는 인간의 행위를 항상적이고 예측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성조차 정념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데 반해, 이해관계가 가져다준 이러한 항상성과 예측가능성은 당시의 지성계를 흥분시켰고, 이것이 초기 자본주의 옹호론의 핵심이었다. 가장 변덕스러운 정념인 탐욕은 이제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작용”(데이비드 흄)한다는 그 보편성 때문에 칭송받게 된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추구한다면, 정의상 이해관계는 거짓말을 하거나 자신을 속이지 않을 것이니, 그 속담의 말뜻 그대로 그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잘 추구해 갈 것이다또한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도 이익을 주는데, 왜냐하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은 마치 전적으로 덕을 갖춘 사람처럼, 완전히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방침에 따라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 때문에 흄은 획득에 대한 사랑으로 쾌락에 대한 사랑으로 억누르는 것을 옹호했다.

 

인간의 사적 이익 추구가 긍정적인 것으로 변신했기에, 따라서 이윤 추구 행위도 긍정되었다. 이것이 온화한 상업론이다.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했던 말은 온화한 상업에 대한 선구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온화한 풍속이 있는 어느 곳에서나 상업이 있다는 것, 그리고 상업이 있는 어느 곳에서나 온화한 풍속이 있다는 것은 거의 일반적인 규칙이다.” 몽테스키외는 이런 식으로 상업의 확장이 인간의 거친 정념을 제어하여 군주의 자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근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이해관계가 인간의 거친 정념을 온화하게 하듯이, 상업행위는 군주의 거친 통치를 부드럽게 해줄 것이다. 정념(탐욕)으로서 정념(권력욕)을 대항한다는 견제의 원리가 이렇게 관철된 것이다. 이러한 대항하는 정념의 원리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헌법에 중요한 지적 토대가 되었으며, 삼권분립에 중요한 지적 토대를 쌓았다.

 

그러나 정념으로서 정념을 대체한다는 이상은 애덤 스미스에 의해 완전히 종결된다. 비록 애덤 스미스 역시 개인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활동을 경제학적으로 강력히 정당화했지만, 그는 경제발전이나 상업을 통해 정치제도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경제와 정치는 독립적이었다. 스미스가 미친 더욱 강력한 영향은, 인간의 모든 정념을 “‘재산의 증식에 대한 욕구로 정리하면서 더 이상 정념과 정념이 대항한다거나 정념으로서 정념을 길들인다는 생각을 무력화했다는 것이다. 그가 <국부론>에서 정념과 이해관계가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인류의 평균적인 사람들의 행태까지 고려했던 스미스로서는 정념과 이익이 대립적이기보다는 동의어 관계로 보였던 것이다. 이로써 이해관계와 탐욕으로 다른 파괴적 정념을 다스리려는 시도는 종말을 맞이하고, “스미스 이후 학술적이고 정책적인 논쟁은 주로 사회의 구성원 각자 자신의 복지를 추구하도록 내버려 둘 때 일반의 복지가 가장 잘 달성된다는 스미스의 전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그리고 한 시대의 이상은 곧바로 이해가 안 될 정도는 아니지만,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는 논변으로 잊혀지게 되었다.

 

이들의 생각이 위험할 정도로 순진한 낙관론이라는 것을 삼척동자라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 자본주의 옹호론을 현대에도 볼 수 있다. 가령 케인스는 18세기 이전의 논변을 거의 동일하게 되풀이하고 있다. “돈벌이와 사적인 부의 소유 기회가 존재하는 것이 인간의 위험한 성향을 비교적 무해한 방면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 또한 슘페터 역시 자본주의의 핵심을 합리성과 위험회피성으로 보았다. 하지만 19세기에 사적 이익 추구가 극한에 다다랐을 때의 온화하지 않았던 사회상과 온화한 상업이 한창 논의되던 때조차 노예무역이 절정에 달했던 자본주의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과연 정념과 이해관계의 대립은 정말 실현가능한 대안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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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리어왕 : 펭귄북스 오리지널 디자인 특별판 펭귄북스 특별판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태원 옮김, 조지 헌터 판본 편집, 스탠리 웰스 책임 편집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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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왕은 자신의 왕국을 세 딸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느긋한 여생을 보내려고 한다. 왕국을 나누어주기 전에 리어왕은 그의 딸들에게 공통된 질문을 던진다. “누가 짐을 가장 사랑한다 말하겠느냐?”

 

폐하, 저는 말로써 전달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폐하를 사랑합니다. 폐하는 시력보다, 공간보다, 자유보다 더 소중하십니다.” 첫째 딸 거너릴의 대답이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가장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도 사로잡을 모든 쾌락을 거부하고 오로지 아버지의 사랑 속에서만 즐거움을 찾겠습니다.” 둘째 딸 리건의 대답이다.

 

안타깝게도, 제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입까지 끌어낼 수 없습니다. 폐하를 사랑합니다만, 자식의 도리에 따른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막내 코딜리어의 대답이다.

 

이 대답이 왕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코딜리어는 자신의 사랑이 자신의 말보다 더 크다는 것을 확신했지만, 왕은 오직 말로써 자식들의 마음을 판단했다. 그는 코딜리어의 솔직함을 오만함으로 보고, 그녀에게 상속될 유산과 상속 권한을 박탈한다. 코딜리어는 그녀의 진정한 내면을 알아본 프랑스왕의 아내가 되어 왕국을 떠난다.

 

빈 공간을 울릴 만한 요란스러움이 없는 낮은 목소리라고 가슴이 비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충신 켄트 백작이 충언을 올리지만, 그도 리어의 나라에서 영원히 추방되고 만다.

 

하지만 그가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오자마자, 그를 누구보다도 사랑한다던 두 딸은 자신의 아버지를 홀대하기 시작한다. 두 딸의 변심에 충격을 받은 리어왕은 폭풍우 치는 바깥으로 쫓겨나고, 자신의 어리석음에 미쳐버린다. 결국 리어왕의 복권을 위해 코딜리어는 군대를 일으키지만, 감옥에 갇힌 채 죽고 만다.

 

어찌하여 개나 말이나 쥐는 살아 있는데 너는 숨을 쉬지 않느냐? 너는 다시 못 오는구나. 결코, 결코, 결코, 결코, 결코.” 리어왕은 차가운 시체가 되어버린 딸을 보며 오열한다. 곧이어 그도 죽는다.

 

맥베스가 자신의 탐욕을 극한까지 추구하다가 파멸했다면, 리어왕의 비극은 맹목으로서 시각 단절 때문에 발생한다. 그는 코딜리어의 진심을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다가 충신과 사랑하는 딸을 내쫓고 아첨꾼과 기회주의와 탐욕의 화신들만을 왕국에 남겨둔다.

 

작품 초반에 리어왕이 세 딸에게 던진 질문을 생각해보자. 그는 아버지라는 위치와 왕이라는 위치가 다른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담보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런 질문을 던졌던 것이고, 코딜리어의 진심에 분노했던 것이다. 자신만을 아는 리어왕의 생각이 그의 맹목을 만들었고, 결과적으로는 이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그는 더 이상 떨어질 수도 없는 자리까지 가서야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는다. 이제 그는 자신의 맹목을 자각하고 왕의 자리에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광경들을 보게 된다. 첫째 딸과 둘째 딸의 본색, 세상의 부조리함, 자신과 같이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억울함, 권력의 본질, 그리고 사실 자신과 타인은 본질적으로 똑같은 인간이었다는 사실.

 

이렇게 볼 때, 리어왕의 비극은 자신을 연단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을 다 겪고 나서야 볼 수 없는 것까지 볼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고,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코딜리어를 잃고 나서야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리어왕><길가메시 서사시><일리아스>처럼 저항할 수 없는 운명에 분투하는 영웅적 개인을 그리지 않는다. 인간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이 이 작품의 출발점이다. 거기에는 한없이 절망하고 고민하며, 방황하는 인간 군상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지 인간은 맹목적이며 어리석은 존재라고 결론 내리지 않고, 그런 맹목을 뛰어넘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자신을 상대화하여 자신을 벗어나 다른 존재와 함께 삶의 고통을 나누고 겪으며 살아가는 삶이다. 이를 통해 이 비극은 우리의 윤리적 삶에서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타인과 진정으로 함께하려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밝힌다. 리어왕은 죽기 직전에 코딜리어를 본다. 자신의 지위만을 보던 사람에서 드디어 타인을 보고 자각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이로써 그는 지혜와 사랑을 얻는다.

인간이 이것밖에 안 되는가? 그를 잘 살펴보아라. 너는 누에가 만든 비단도, 짐승의 가죽도, 양모도, 고양이의 향수도 누린 적이 없다. 하, 여기 세 사람은 겉치레라도 하고 있는데, 너는 사물 그 자체구나. 문명의 편의에서 배제된 사람은 너처럼 그저 불쌍하고, 헐벗고, 다리 둘 달린 짐승일 뿐이야. 벗자, 벗어, 빌린 것들을! (3막 4장)

"넝마옷 사이로 보이는 악행은 크게 보이는 법이지만, 법복과 털외투는 그 모든 것을 감춰주지. 죄에 황금 칠을 하면 강력한 정의의 창도 상처 하나 못 입히고 부러지는 것이다. 누더기로 무장하면, 난쟁이의 지푸라기도 꿰뚫을 수 있다. 아무도 죄짓지 않았다. 아무도 없다, 없어. 내가 윤허한다." (4막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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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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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자 강명관의 이 책은 의사, 도적, 탕자, 술집, 무뢰배 등 시시하고 자질구레하며, 어떤 책 제목처럼 시시콜콜한 주제들을 다룬다.

 

저자는 민족이나 민중처럼 추상적이고 거대화된 담론들을 비판하며, “작고 시시한 이야기들로부터 과거 인간들의 리얼리티한 삶과 내면을 복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해보겠다.

 

이런 것들을 통해 역사를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언제부터인가 알 수 없지만, 이런 사소한 코드들이 거대한 이야기에 가려진 또 다른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7)

 

그의 사론을 알 수 있는 다른 부분도 인용해보겠다. “존재했던 다양성과 구체성을 지워버리고 오로지 단일한 중심만을 내세워 대상을 왜곡시킴으로써 애써 중심을 닮게 하는 권력이야말로 중심적 담론의 독재가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정치독재보다 더 근원적인, 정치독재를 가능하게 하는 독재의 기원이 아닐까? 민족이나 근대, 민중 등 거대한 중심적인 코드를 보면서 늘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15) 탁월한 지적이다.

 

따라서 그는 어떠한 교훈적, 목적의식적, 기념비적 역사도 거부하고, 시시한 것들을 통해 변화하는 인간을 해명하고자 한다. 이 책의 목차에 나온 주제들이 그의 이러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수단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이, 이런 류의 책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은, 거창한 사론에 비해 정작 본문은 단순한 잡다한 정보 위주의 책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 책 제1수만 백성 살린 이름 없는 명의들: 민중의는 그저 그런 에피소드 모음 정도였다.

 

그리고 다른 장들도 크게 다른 것은 아니라서, 에피소드 모음집보다는 조금 낫지만, 앞서 말한 그의 사론을 지탱할 만한 무게감은 부족한 편이다. 이 책은 우선 조선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는 질문을 충족시키는 데 활용할 수 있다.

 

또 다른 활용법이 있다. 저자는 이후에 매우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쳤는데, <조선의 뒷골목 풍경>에서 살짝 언급되거나, 부분적으로 다루어진 관심사와 문제의식이 확장된 저술들이 많다.

 

가령 서설에서 그가 기존의 거대 역사 담론을 비판하며 기존의 기피했던 주제야말로 역사 속 인간을 더 잘 이해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때 들었던 예시가 열녀담론이었다. 그의 이러한 관심사는 <열녀의 탄생>(돌배개)에서 구체적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은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소명출판)에서 더 자세히 전개되고, <조선 풍속사 1~3>(푸른역사) 등도 유사한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에서 제기된 문제들이 이후에 더욱 확장되고 구체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또 다른 활용법은 다른 저서에서 확인되는 저자의 문제의식을 이 책을 통해 압축적이고 개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겠다물론 그런 자질구레한 수고를 기울이고 싶지 않다면, 각자 관심사 따라서 저자의 아무 책이나 읽어도 무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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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6-19 0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갖고 있는 책인데 리뷰 보고 순위 앞으로 왔어요^^
잘 봤습니다. 별 3개에 대한 리뷰가 읽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하네요.^^

김민우 2021-06-19 09:51   좋아요 2 | URL
아 저한테 별점3개면 제 기준으로 적극 권장할 책은 아니지만, 한번 정도는 읽어볼만한 책입니다 ㅎㅎ 다루는 소재가 재밌으니,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전쟁과 기억 그리거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전쟁은 두번 치러진다는 발상으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전쟁은 처음에는 전쟁터에서 싸우고, 두 번째로는 기억 속에서 싸운다.- P15

모든 국가와 민족은 내가 ‘자신만을 기억하는 윤리‘라고 이름 붙인 것만 받아들인다. 이러한 윤리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베트남인들은 미국인들보다 여성과 시민을 더 많이 기억하고, 반면에 미국인들은 비교적 자발적으로 적에 대해 더 많인 기억한다. 그리고 양쪽 다 상실, 우울, 쓰라리 그리고 분노의 분위기를 풍기는 남베트남인들을 외면하려 한다.- P21

타자를 기억하는 윤리는 더 관습적인 윤리인 자신만 기억하는 윤리가 변화해야 가능하다. 자기편에서만 생각하는 것에서 더 많은 타자를 기억하는 것으로 범위를 확장한다. 그렇게 해서 가깝고 친한 사람과 멀고 두려운 사람의 경계를 허문다. 윤리적 스펙트럼의 양쪽 끝에서 끝까지, 즉 자신만을 기억하는 윤리에서부터 타인을 기억하는 윤리에 이르기까지를 탐구하면서, 나는 기억 속 전쟁에 등장하는 인물들, 즉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 병사와 시민, 다수자와 소수자 그리고 승자와 패자, 그리고 양극단과 범주들 사이에 속하는 많은 이들을 한 줄로 늘어세워 보았다. 전쟁은 많은 것을 포괄한다. 전쟁은 한 나라 안에 있는 다양한 지역의 삶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을 단순히 전투라고만 생각하고 그 주체를 기본적으로 남성 병사들로만 상상하면, 전쟁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전쟁기계의 장점을 활용하기 힘들다.- P22

기억 윤리는 전쟁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는 2진법 부호이다. 쉽게 세상을 우리 편과 반대편 그리고 선과 악으로 나누어 동맹을 구축하고 적을 공격대상으로 삼는다.- P24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와는 다른 윤리로 타자를 기억한다. 적과 피해자들, 약자와 소외된 이들, 주변인들과 소수자들, 여성과 어린이들, 환경과 동물들, 멀리 있는 이들과 악마로 낙인찍힌 이들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이 책에서 탐색하고 논의하는 것은 복합적인 기억 윤리이며, 자신과 타자를 둘 다 기억하고자 애쓰는 공정한 기억이다.- P25

공정한 기억은 약자와 정복당한 자, 소수자, 적 그리고 잊힌 자들을 회상하는 것으로 부정적 정체성 정치에 반대한다. 공정한 기억에서 단지 스스로를 윤리적으로 돌아보는 것만으로는 과거에 대한 성찰로 부족하다. 동시에 타자도 윤리적으로 떠올려야만 한다. 양쪽 모두에게 윤리적 접근이 필요하다.- P31

기억과 망각의 기본적인 변증법은 우리의 인간성을 기억하고 비인간성을 잊는 것이다. 역으로 상대의 비인간성을 기억하고 인간성을 잊는 것이기도 하다. 그 대신 공정한 기억은 윤리적 기억에서 변증법의 마지막 단계를 요구한다. 자신의 기억을 상대방의 기억으로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 내부에서 비인간성이 어떻게 서식하는지 보고 기억하는 윤리적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성을 연구하는 일은 동시에 비인간성을 연구하는 일이다.-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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