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첩을 좋아해야 할 시기에는 쳐다보지도 않았다가 나이가 들어 케첩의 맛이 빠졌다. 케첩이 이렇게 맛이 좋은데 지금까지 그 맛을 모르고 지내왔다니 나도 놀랄 일이다.


생선구이에도 케첩을 뿌려 먹으니 맛이 좋다. 케첩이 맛있다는 걸 왜 어렸을 땐 몰랐을까. 싶다가도 나의 입맛을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에는 비린내 나는 음식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시들해졌다. 그런 것을 보면 케첩에 별 관심이 없다가 근래에 맛에 빠진 것 역시 내 경우에서는 이상하지는 않다.


그래서 한 번은 케첩을 밥에 비벼서 계란 프라이를 올려서 같이 먹으니 이거 뭐야, 오므라이스 맛과 비슷한 것이다. 어렵게 밥을 볶아서 오므라이스를 만들 필요가 없을 만큼 맛이 거의 흡사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와사비에 빠져서 커피 빼고는 모든 음식에 와사비를 뿌려 먹었는데 좀 웃기지만 근래에는 케첩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오래전 초등학교 다닐 때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녀석의 이름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왜냐하면 그 녀석의 동생이 나를 잘 따랐다. 아버지가 있는 것 같았지만 아버지를 본 적은 없다. 녀석의 동생은 우리 집에서 같이 밥도 먹곤 했지만 친구 녀석은 자존심 때문인지 동생만큼 자주 우리 집에서 밥을 먹지 않았다.



민수와 민지


그 녀석의 이름을 민수라고 하고 동생은 민지라고 하자. 내가 기억하는 민수의 집 모습은 백열등에서 나오는 종교적인 옅은 빛과 손으로 만져질 것 같은 천장 모서리의 거미줄, 있으나 나오지 않는 티브이, 책보다는 옷가지가 걸려있던 책꽂이. 이런 모습이다. 5학년 때에는 민수와 매일 놀았다. 말라서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였는데 민수는 그래도 덩치는 컸다. 민수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탁구였다. 민수는 학교 탁구선수였다. 탁구만 열심히 하면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나오는 빵을 먹을 수 있었다.  


민수와 민지의 엄마는 어느 날 시장에 갔다 온다며 나가서 1년이 넘도록 시장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아버지도 엄마를 찾아 나선 지 6개월이나 지났다. 아직 어렸던 나는 집세가 뭔지, 학교를 계속 다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할 때였다. 나에 비해 민수는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다.


민수는 탁구를 잘 쳤고, 탁구를 잘 쳐야만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밥을 챙겨주는 엄마가 없기 때문에 살은 점점 빠졌다. 연습량은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민수는 늘 배가 고팠다. 그 허기를 달래준 것이 식빵과 케첩이었다. 그리고 라면이었다. 나는 집에서 김치를 그릇에 담고 라면을 몇 개씩 훔쳐서 민수네로 갔다.


곤로 같은 것에 냄비를 올리고 물을 붓고 라면을 끓였다. 말린 사과에서 나는 냄새 같은 석유의 향이 번지는가 싶더니 파란 불꽃이 올라왔다. 민수는 라면을 늘 4개씩 끓였다. 민지가 잘 먹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릇 안 라면에는 케첩을 뿌렸다. 민지와 나는 으 하며 얼굴을 찡그렸지만 민수는 맛있다고 했다.


민지는 내가 집에 놀러 오는 것을 좋아했다. 갈 때마다 김치, 라면과 함께 동화책이나 백과사전 같은 것들을 들고 갔기 때문이다. 민지는 책을 참 좋아했다. 민지에게 책 보는 게 그렇게 좋냐고 물어보면.


응, 오빠야, 내 책 보는 게 그래 좋데이. 우리 집에는 책 사줄 사람이 없으니까 책이 없다 아이가. 학교 도서관에는 일찍 문 닫는다고 나가라카데.


민지는 동화책을 보면서 라면을 먹었고 다 먹고 나면 엎드려서 책을 봤다. 내가 가져간 책은 그날 대부분 다 읽었다. 우리 집도 내가 어린 시절에는 가난이 관통하는 집이었지만 동화책만은 부모님이 어떻게든 사주었다. 하루는 어린 왕자를 들고 갔는데 민지가 그 책을 굉장히 좋아했다. 보통 하루 만에 다 읽어버리고 나에게 줬는데 그날은 하루를 더 보겠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민수가 나에게 말했다.


니, 저 책 저거 우리 민지주믄 안 되겠나.


그 말에 민지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았다. 사실 마음은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책은 내 동생의 책이었다. 책이 없어진 걸 알면 동생이 울고 불고 할 텐데. 그러다 보면 엄마에게 또 혼날 테고. 무엇보다 책을 어딘가에 줘버린다며 엄마가 화를 내는 것이 무서웠다.


단칸방에서 겨우 방 두 개로 이사를 한 우리 집은 아버지와 엄마가 못 배운 사람들이라 나와 동생은 그렇게 살게 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가득했다. 그런 분위기가 책은 원하는 만큼 마음껏 읽게 하겠다는 현실로 이어졌다. 동화책 전집, 위인전, 백과사전, 집에는 어린이가 볼 만큼의 책은 가득했다. 어머니에게는 책에 대한 애정과 애증이 반반씩 었었다. 내가 멈칫멈칫하자 민지가.


오빠야, 오빠야 나는 괜찮데이. 나는 이래 오빠야가 들고 오는 책 읽으면 된다 아이가.


그날 이후 어쩐지 나는 민수랑 서먹해졌다. 학교에서 마주쳐도 예전처럼 친숙함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탁구실 앞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엎드려뻗쳐해서 코치에게 두드려 맞고 있는 민수를 보게 되었다. 민수의 얼굴은 울분을 참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천 원짜리가 몇 개 있었는데 그날 민수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식빵에 케첩을 뿌려 나란히 앉아 먹었다. 그리고 민지를 위해서 맛있는 크림빵을 샀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민수는 그날 이후 탁구를 그렇게 연습하지 않아 보였고 그것으로 인해 어떤 사건이 일어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라면과 책을 들고 민수의 집에 놀러 갔는데 보통의 날과 달랐다. 민지는 울고 있었고 민수는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그 작은 모습은 그동안 버텨온 것이 와그르르 무너져있는 모습 같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쪼그리고 있는 민수에게 다가가 보니 민수의 머리가 꼭 쥐가 파먹은 것처럼 엉망이었다.


오빠야, 울 오빠야 머리를 주인아저씨가 막 잘랐데이. 엉엉.


나는 왜 그렇게 됐냐고 물었다. 왜 민수의 머리를 이렇게 잘랐냐고. 민지는 이미 눈물로 인해 얼굴이 쭈글쭈글해져서 나에게 말했다. 민수는 머리가 길어서 자르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방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머리를 잘랐다. 자른 머리카락을 민지가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 버렸는데 주인아저씨가 보고 화가 난 것이다.


야 이자슥아, 니 머리카락 방에서 잘랐나? 머리카락을 잘랐으면 쓰레기통에 버리야지 여게 버리면 우짜노 이 잡놈의 새끼야. 하수도 막히면 니가 책임질끼가. 너거 집 월세 벌써 몇 달이나 밀린 거 아나? 아버지 어데 가싯노!


죄송합니다.


너거 애비하고 애미는 도망갔는기라, 너거를 버렸다. 니 인자 탁구도 안 친다메. 니가 탁구를 계속 쳐야 학교에서 보조금이 나오고 집세를 낼꺼 아이가. 빨리 친척집에 연락해가 방을 빼라.


안 됩니더. 곧 엄마하고 아빠가 올깁니더. 울 엄마 돈 벌어가 곧 올깁니더. 그리고 아빠도 엄마 찾아서 같이 올겁니더. 울 엄마 아빠는 우리 안 버릿습니다.


이 자슥아, 너거 애비하고 애미하고 너거만 없었으면 벌서 갔을기라. 너거 어매가 너거를 버릿는지 너거만 모르제.


민수는 눈을 똑바로 뜨고 주인아저씨를 노려봤다. 민수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탁구실에서 엄마가 도망갔다고 놀리는 라이벌이 있었다. 그만 멱살을 잡고 코피를 터트리고 말았다. 코치에게 걸려 엎으려 뻗쳐서 다리가 붓도록 맞았다. 민수는 그날로 탁구를 그만두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참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미칠 것 같았다. 몸이 뜨거웠고 주인아저씨를 홉뜬 눈으로 계속 노려봤다. 그때 주인아저씨가.


이 자슥아, 니가 그래 노려보면 우짤 긴데. 당장 방 빼서 너거 동생하고 길거리에 나갈끼가. 와 그래 꼬라보노. 이 어린자슥이 벌써부터 어른 말씀하시는데 그런 눈으로, 이 새끼 안 되긋네.


아저씨는 집으로 들어가서 가위를 들고 나왔다. 머리를 자르려는 아저씨에게 민수는 대들었지만 힘이 달렸고 기운이 없었다. 화가 난 아저씨도 울분에 참지 못하는 민수의 머리를 마구 잘랐다. 머리카락이 옷으로 마당으로 떨어졌다.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은 민수의 자존심이고 민지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다. 목구멍으로 울컥하는 슬픈 눈물을 민수는 참아냈다.


며칠 뒤 여름방학을 맞이했고 방학에 나는 민수네 집으로 갔다. 하지만 집에는 민수와 민지는 없고 공백만 가득했다. 주인집 말로는 친척이 와서 데리고 갔다고 했다. 나에게 말이라도 해주고 가지. 나는 섭섭함을 넘어서 어떤 배신감이 들었다.


며칠 뒤에 집으로 편지가 한 통 왔다. 초등학생 답지 않게 예쁘고 바른 글씨체였다. 그것은 민지가 쓴 편지였다.


[오빠야, 오빠야 니 잘 지내고 있제. 우리는 큰 아빠 집으로 왔데이. 근데 좀 무섭다. 그래도 그 집의 주인아저씨랑 같이 있는 것보다 덜 무섭데이. 우리 오빠야가 오빠야 니 많이 보고 싶다고 한다. 내도 오빠야 니가 가지고 온 책도 읽고 싶다. 우리 오빠야 다시 탁구를 한 단다. 그래가 내한테 어린 왕자 책도 사준다고 약속했데이. 어린 왕자가 지구에 와서 많은 것을 발견하고 그랬잖아. 그래가 책 안 읽는 우리 오빠야한테 말했거든. 근데 우리 오빠야가 그라데. 내는 어린 왕자처럼 많은 것을 발견하지 못해도 친구 한 명은 발견했다고. 그래가있제 내가 우리 오빠야 대신에 오빠야 니한테 고맙다고, 인사할라꼬 편지했다 아이가. 여기서 거기에 놀러 갈라믄 차타고 엄청 가야한데이. 울 오빠야가 탁구 해가 일등 하면 오빠야 니한테 꼭 같이 가자고 하더라. 오빠야 니도 딴데 가지 말고 잘 지내고 있으레이.]


해가 정수리에 꽂혀 머리가 뜨거웠고 편지를 읽는 내내 눈시울도 뜨거웠다. 민수는 그렇게 온다는 약속을 했지만 영영 오지 않았다. 편지봉투에는 받는 우리 집 주소만 있었다. 그때 몹쓸 마음에 주지 못한 어린 왕자 책은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없어질 책이라면 그때 민지에게 줘버렸어도 되는 거였다. 이후로 나는 탁구대회가 티브이에 나오면 민수가 나올까 봐 봤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책을 좋아하던 민지를 지금 다시 만난다면 몇 권의 책을 권해 줄 수 있다.



그 녀석이 내도록 점심시간에 먹은 것이 케첩을 뿌린 식빵이었다. 요즘처럼 맛있는 우유식빵 같지 않았다. 텁텁하고 맛도 없는 그런 식빵이었다. 거기에 케첩을 뿌려 운동장의 벤치에 앉아서 몇 개씩 먹었다. 그 녀석은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가면 같이 앉아서 식빵에 케첩을 뿌려 주었다. 나는 그 맛도 없는 케첩 뿌린 식빵을 그 녀석과 나눠 먹었다. 그 녀석은 늘 인상을 쓰고 있었고 운동을 잘했고 덩치도 컸다. 한창 먹을 시기인데 그 정도 먹는 것으로는 아마도 모자랐을 것이다. 근래에 자주 케첩을 이것저것에 뿌려 먹으니 그때 생각이 난다.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으리라.


케첩은 그대로 어딘가에 뿌려 먹어도 맛있지만 뜨거운 음식에 풀어 먹어도 맛있다. 김치찌개나 짜글이나 특히 라면에 넣어 먹으면 맛있다. 이런 말을 하면 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이 우리나라 컵라면 도시락에 마요네즈를 뿌려 먹는 것이라고 한다. 맛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렇게 먹지 않아 봤기 때문에 생각으로는 이상하지만 맛은 좋다. 갈비찜이나 돼지고기를 삶을 때 쌍화탕을 넣으면 맛이 확 올라오는 것과 비슷하다. 뜨거운 라면에 케첩을 같이 끓여 먹으면 아주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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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한 대사가 가장 와 닿았던 영화가 남한산성이 아닐까 싶다.

어린 누리의 눈에 비친 대감 김상언은 유일하게 할아버지와 연결된 끈이었다. 이 전쟁만 아니었다면 할아버지와 민들레가 필 때 강가에 나가 꺾지를 잡고 놀았을 누리는 헤어져야만 하는 김상언이 미우면서 고맙기만 하다. 민들레가 필 때면 저를 다시 데리려 오시는 겁니까.라고 울먹이며 묻는 누리의 말에 그리하겠다고 말하는 김상언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만감이 교차한다.


김상언의 눈빛에서 누리의 할아버지를 죽여야만 했던 자신의 과오를 끝끝내 밝히지 못함을 용서해달라,

나는 그리 할 수밖에 없었음을 용서해달라,

너를 지켜주지 못함을 용서해달라,

나 보다는 날쇠의 곁에 있음이 너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을 한 나를 용서해달라.




나이가 들어서 서운한 말을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나이가 어리면 그렇지 않을까.

그렇다. 그렇지 않다.

요컨대 어린아이 때는 한 시간 전에 엄마에게 무차별 폭격으로 혼이 나도 한 시간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헤헤하며 엄마에게 붙어있다.


그렇다면 왜 나이가 들면 그럴까.


인간의 저장 공간, 즉 뇌 속의 저장 공간은 사건 기억을 저장하는 공간과 감정 기억을 저장하는 공간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데 이 저장 공간은 방대하여 기억하는 순서대로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갈수록 저장 공간은 점점 작아진다.


그러니까 아이 때는 저장 공간에 쌓일 사건과 감정이 별로 없기에 워낙 커서 다른 기억이 들어옴으로 지난 기억을 덮어버린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그 저장 공간이 퇴화되고 작아지면서 기억을 잃어버리는 능력까지 같이 감퇴한다. 이 감정 기억이 저장되는 공간을 편도체라고 한다.


교통사고를 당했거나 구타를 심하게 당하면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기는데 이것을 사건 기억이라고 하고, 이 사건 기억을 저장하는 공간을 해마라고 부른다. 편도체와 해마는 붙어있고 편도가 해마에 비하면 무척 작다.


한 예를 들어, 예전에 누군가(부모, 친구, 선생님)에게 학대로 심하게 상처를 받아서 잊지 못하고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아 마음을 다듬어서 상처를 준 사람을 시간이 흘러 찾아가서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상대방이 그때 내가 잘못했구나 미안하다고 용서를 해달라고 해서 용서가 될까, 하는 문제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구조가 있다.


우리는 ‘용서’라는 말을 왕왕 쓰지만 사실 용서는 어쩌면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상처를 심하게 받고 트라우마가 생긴 것은 지금의 상대방이 아니라 과거의 상대방에게 받은 상처이기 때문에 지금의 상대방을 만나서는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과거의 상대방을 삭제를 해야 용서가 가능하다.


상처는 아주 기묘해서, 상처를 안 줄 수는 있지만 상처를 안 받을 수는 없다. 친구가 어머니와의 다툼을 이야기하는 것도 친구는 상처를 줄 마음 없이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만약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엄마가 없다면 친구의 이야기는 상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용서란 무엇일까.

용서라는 것이 있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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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하는 수많은 음식을 하지 않게 하는데 9년 정도가 걸렸다. 부모세대가 물려받은 전통이라는 이 고난만이 가득한 노동을 줄이려고 마찰, 타협, 설득, 공감 같은 시도가 있었고 그 기간이 9년 정도 만에 올해 추석에는 음식을 아예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올해 구정까지는 음식을 했다는 말이다.


우리 집은 일 년에 명절을 합쳐 총 세 번의 제를 지낸다. 가족도 조촐하거니와 음식을 하는 그 중노동에 비해 전통을 앞세워 우리가 느끼는 그 정당함은 별로 없다는 것을 어머니에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힘들었다. 무엇보다 어머니는 나와 동생의 말보다는 친구들이나 옆집 아주머니의 말을 더 신뢰하는 편이다.


상다리 부러지게 음식을 차리는 이유를 물어보니 ‘누가 되지 않게, 다른 집이 봤을 때, 옛날부터 해 왔으니까’ 같은 이유가 있었다. 음식을 먹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이 먹는 건데 사람 수는 적은데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리면 후에 두고두고 꾸역꾸역 먹을 수밖에 없다.


보통의 집에서는 음식을 먹고 난 후에 남은 음식(이라고 부르는 식은 음식이나 나머지 음식)은 어머니들이 자신의 집에서 먹는 것에 반해 우리 집에서는 내가 잔반을 다 처리해야 한다. 특히 엄청난 나물과 딱딱해져 버린 생선을 먹어 치워야 하는데 참 별로였다.

전통이라는 문화가 부모세대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가 있으니 그게 악습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전통이라는 건 좋은 것, 해야만 하는 것, 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 옆집에서 보기에 누추하게 보여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이걸 바꾸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최초로 돌아가서 그때는 5년이면 될 줄 알았다.


상차림이 있다면 3분의 1씩 줄여가는데 3년씩 걸렸다. 이렇게 한 상 가득 명절에 음식을 차리게 된 건 그렇게 오래전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경제의 부흥기를 맞이해서 전통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국가차원에서 그렇게 분위기를 만든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대부분의 서민들이 먹고사는 문제로 허덕이기 때문에 너무 잘 차려서 명절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니 오래전 조상부터 이렇게 명절에 분에 넘치게 큰 상을 다 가릴 정도로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리는 건 아니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또, 엄청나게 흘러넘치는 음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살이 찌는 것도 생각을 해야 했다. 특히 남은 음식을 전부 때려 넣고 끓이는 전 찌개를 없애는데도 몇 년이 걸렸다.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어서 먹지 않았더니 자연스럽게 전 찌개를 끓이지 않았다. 그것도 다 먹어 없애야 하는 사람이 나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런 걸 먹지 않는다. 거기에 방송 같은 곳에서도 언젠가부터 전통상차림이 너무 과하다는 말을 하는 곳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머니들이 아침에 하는 방송을 철석같이 믿고 보기 때문에 아침에 병원에서 진찰하지 않고 티브이 생방송에 잔뜩 나온 의사들이 건강 어쩌고 하는 말을 듣는데 그중에서 몇몇 의사가 명절에 하는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공격적으로 밀어붙였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아버지이고 아버지가 좋아했던 음식 위주로 간단하게 차려서 제사를 지내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구색에 신경이 쓰인다면 한 접시씩 시장에서 만들어 놓은 걸 사 먹으면 된다. 그렇게 9년 동안 하나씩 하니씩 음식을 줄여 나갔다. 떠먹는 음식이 있는데도 탕국에, 찌개에, 고기에. 이래서는 음식이 공포스러울 뿐이다. 가족이 많다면 모를까 온 가족이 다 모여도 5명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조촐하게 음식을 하고 고요하고 편하게 보내는 명절이 우리에게 훨씬 나은 추석이다.


결국 9년 만에 이번 추석에는 아무 음식도 하지 않았다. 동그랑땡도, 송편도 요만큼씩 시장에서 사 먹었다. 어머니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렇게 사 먹는 동그랑땡과 송편이 훨씬 맛있다. 왜냐하면 요만큼 먹기 때문이다. 먹다 먹다 남아서 보기 싫을 정도의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절이라는 게 끝나고 나면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들린다. 행복하게 보내야 하는데 점점 그렇게 보내지 못하는 가족이 늘어난다. 참 이상한 일이다. 오전 라디오를 듣는데 사연으로 남편이 이번 명절에 시댁으로 친정으로 천 킬로미터를 운전했다며 고맙고 미안하다는 아내의 사연이 나왔다. 그러고 디제이가 자신도 모르게 바로 “보통 이 정도 거리면 번갈아가면서 운전을 할 텐데 말이죠”라고 하고서는 뒷수습을 하는 말투가 나와 버렸다.


명절에 음식만 줄여도 꽤나 편안한 연휴가 된다. 다 모여서 라면을 먹어도 맛있다. 추석에는 역시 컵라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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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동안 비가 오기도 했고 해가 쨍하게 뜨기도 했고 바람이 많이 불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체로 고요하고 조용하게 흘러갔다. 오징어 게임도 두 번이나 볼 수 있었고 보면서 놀랐고 재미있었다. 도박묵시록 카이지가 많이 떠올랐고 황동혁 감독도 카이지 외 여러 편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다. 명절 기간에 성룡 영화가 하긴 했다. 케이블에서 뱅가드를 했는데 감독인 당계례의 영화는 황당한 장면이 많기로 유명하다. 요컨대 전투 장면에서 엑스트라가 뒤에서 혼자 막 군무를 하는 모습을 그대로 영화에 담기도 한다. 성룡도 그걸 알면서 왜 이런 감독과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재미는 없었다.


영화를 보고 먹고 마시다가 저녁에는 또 조깅을 좀 했다. 조깅을 하면서 볼 수 있는 풍경이 늘 있고 또 그 풍경의 달리지는 모습을 계절에 맞게 볼 수 있고 그 모습을 폰 카메라에 담아 본다.

구름 속에 숨은 달이 얼굴을 보이기 위해 살며시 빛을 발하고 있다. 가만히 서서 이 신비의 장면을 바라보았다.

달이 구름 위로 모습을 살며시 드러냈다. 아마 달 위에 떠 있는 별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달은 별을 만나기 위해 구름 속에 편안하게 있기를 거부하고 위로 위로 얼굴이 나오는 것이다.

드디어 달이 별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별은 그 자리에 그대로여서 움직일 수 없으니 달이 별을 만나기 위해 위로 위로 날아간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이 자리에 두 발로 버티고 서서 저 신비한 장면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매일 같은 곳인데 매일 모습이 다르다. 인간과 똑같다. 인간도 매일 마음이 다르다. 남이 볼 때는 늘 비슷하게 보일지 몰라도.

바람이 없고 달빛이 강한 날에는 반영이 좋다. 좋은 카메라가 있었다면 반영 샷에 열을 올렸을지도 모른다. 반영 샷은 하늘의 모습을 수면으로 다시 볼 수 있어서 또 다른 모습이다.



또 하루가 지났다. 저 멀리 보름달이 보인다. 달의 그림자가 강물 위로 늘어진다. 그 위로 비행기가 추석맞이 비행을 한다. 모두 명절 잘 보내세요,라고 하는 것처럼. 고요하고 멋진 풍광이다.

15센티미터 정도의 물고기를 낚아 올리기에 무슨 고기냐고 물어봤다. 숭어 새끼야, 라며 바늘을 꺼내자마자 강으로 보내줬다. 어찌나 쿨하고 멋지게 보이던지. 15 센티미터면 보통 그대로 들고 가서 먹을 텐데. 아저씨는 그랬다, 이렇게 풀어주면 나중에 30센티미터가 될 게야. 아아 정말 그 한 마디가 너무 멋졌다. 짝짝짝.

또 다음 날이다. 평소에 달리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달렸다. 그래서 노을의 모습을 마주하고 달리게 되었다. 붉은 오렌지 빛의 향연이다. 저건 그래서 태양이다. 태양이 힘을 잃고 빛이 조금 연할 때, 이때 인물의 사진이나 영상을 찍으면 몹시 드라마틱하게 나온다. 빛이 머리를 타고 어깨 위로 떨어지는 모습을 잡아낼 수 있다. 영화로 치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황정민이 초반에 석양을 등지고 촬영한 장면이 있다. 굉장히 드라마틱하며 광고 같은 아주 멋진 장면이 이 시간대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이 시간에 촬영을 끝내지 못하면 다음 날 이 시간에 다시 촬영을 해야 한다. 자연은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에.

계속 달려 강 상류로 올라가면 낚시는 금지이기 때문에 물고기들을 아주 많이 볼 수 있다. 게다가 물고기들이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도 않는다. 오글오글 모여서 오히려 사람을 구경하는 것 같다.

도로가로 나와서 달리는데 삼만 원을 주웠다. 사진으로는 밝아 보이지만 어두운 곳으로 만 원짜리가 일렬로 한 장씩 떨어져 있었고 자동차들이 계속 밟고 지나가서 돈의 면이 오돌토돌하다. 아마도 자동차들이 밟아서 도로 바닥에 밀착되어서 날아가지도 않고 있다가 나에게 발견되었는지도 모른다. 암튼 이 돈으로 편의점에서 와인을 사 먹었다.

다시 다음 날이 되었다. 저 아웃포커싱이 된 부분은 저수지다. 그러니까 나는 바다와 강, 저수지 등을 주로 다니는 모양이다. 이곳의 산쓰장은 아주 잘 되어 있어서 몸을 풀고 있는데 무당당이가 꾸물꾸물 기어가기에 사진을 하나 찍고 이대로 두면 사람들에게 밟혀서 찍 눌려 죽을 것 같아서 저기 숲으로 보냈다.

저 끝이 바다다. 동네 자랑이다. 바닷가에 살면 바다는 매일 본다. 어쩌다 보는 바다보다 매일 봐야 바다의 재미를 알 수 있다.

너무 잘 먹은 탓에 달리는 게 힘들어서 걷는 중이다. 지는 해를 등지고 있어서 다리가 키다리 아저씨 같네. 또는 공포 영화 속 젓가락 귀신같기도 하네.

와, 이 그러데이션을 보라. 하늘이라도, 파란색이라도 이렇게나 층을 두고 여러 색이 있다. 재스민 블루, 옐로 블루, 퍼머낸트오랜지블루, 딥 스카이 블루.

그리고 뒤를 돌면 석양이 지고 있다. 태양이 마지막 힘을 짜내 그림자를 까맣게 까맣게 태운다. 그림자가 다 타고나면 우리는 밤의 세계를 맞이한다.

조깅을 하고 오면서 자주 들리는 카센터에는 아직 어린이인 백구 녀석이 있어서 늘 사람을 기다린다. 낮동안 아마도 아빠와 삼촌들이 놀아주고 챙겨 줄텐데 명절 연휴에는 혼자 보내야 해서 이렇게도 다가가면 놀아달라고 난리다. 저 멀리서 보면 백구 혼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돌아올 때는 전통시장으로 온다. ‘상자 옆의 고양이‘가 세상사를 초월한 듯 초연한 자세로 앉아 있다. 사진을 찍으려 하자 나를 쓱 쳐다본다. 그 모습이 마치 느린 화면처럼 움직였다. 아마 명절 연휴라 시장에서 던져주는 고등어 머리 같은 것들이 없어서 조금 당황하지 않았을까. 이제 명절이 끝났으니 많이 얻어먹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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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깅을 하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노을이 좋다. 그대로 서서 매직 아워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그러다 생각이 든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한가위가 되면 동요 ‘노을’이 라디오에서라도 나온 것 같은데 느닷없이, 두부를 칼로 싹둑 자르듯이 끊어졌다.


노을뿐 아니라 동요 자체도 들을 수 없다. 티브이 속 어린이들은 트로트에 열을 올리고 그 모습에 어른들이라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박수갈채를 보내니 어린이들에게 동요가 무쓸모처럼 소거된 것 같다.


동요가 듣고 싶어 한 번은 유튜브로 오연준 어린이가 부르는 고향의 봄을 듣고 가슴이 터질 만큼 좋아서 그대로 댓글을 달았더니 누군가 표현이 너무 예쁘다고 해주었다. 그건 내가 예쁘게 글을 썼다기보다 오연준 어린이의 노래를 듣고 그 마음이 아마도 글로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게 동요의 힘이라면 힘이고 기능이라면 기능이지 않을까.

노을의 가사도 눈물이 나올 만큼 좋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쯤 누구나 알고 있다.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라는 상냥한 표현에서 풍경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초가지붕 둥근 박 꿈꿀 때, 라는 말도 예쁘다. 아아 정말 가을의 아름다운 모습이 떠오른다.


정말 노을의 가사가 좋아서 조깅을 하다가도 이맘때에는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연기에 취할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눈앞의 노을은 저리도 붉게 타오르는데 도대체 동요 노을은 어디로 쏙 들어가 버렸나.


노을을 부른 어린이가 귄진숙(양)이다. 30년도 더 됐으니까 이제 권진숙 양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권진숙 양의 노을이 듣고 싶어 진다. 그리하여 유튜브를 돌려 찾아보면 당시, 84년도의 동요대회로 갈 수 있다.


권진숙 양은 평택에서 왔는데 그곳의 장점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을 잘한다. 그리고 서울의 장점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에도 똑 부러지게 답을 한다. 여자 아나운서는 마지막으로 그럼 서울과 평택 중에 어디에 살고 싶으냐고 물으니까 귄진숙 양은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


귄진숙 양은 약대를 나와서 제약회사를 상대로 약에 관련된 컨설턴트 하는 회사의 대표로 있다. 노을이라는 동요는 권진숙 양을 위한 노래였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잘 불렀다. 이 곡을 만든 이동진 선생이 2010년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권진숙 양에게 하고픈 메시지를 전했다. 찾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 당시의 기사에는 동요제가 열렸을 때 모든 작사가와 작곡가들이 권진숙 양의 이야기만 했다고 한다. 그만큼 노을이라는 동요가 사람 마음의 어떤 부분을 건드렸다. 어찌 되었던 요즘은 전혀 들을 수 없다. 찾아들어야 하는 노래가 됐다. 그래서 찾아 듣곤 한다.


오늘의 선곡. 권진숙 양의 ‘노을’ https://youtu.be/xwxAdmKHlrY


다시 뒤를 돌면 매일 보는 풍경이 처음 보는 그림 같다.




요즘은 매일이 영화로운 나날이다.

이 색채와 구름 속으로 숨어버린 달과 달빛, 그리고 그 위의 별까지.

장면 장면이 영화인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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