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첩을 좋아해야 할 시기에는 쳐다보지도 않았다가 나이가 들어 케첩의 맛이 빠졌다. 케첩이 이렇게 맛이 좋은데 지금까지 그 맛을 모르고 지내왔다니 나도 놀랄 일이다.


생선구이에도 케첩을 뿌려 먹으니 맛이 좋다. 케첩이 맛있다는 걸 왜 어렸을 땐 몰랐을까. 싶다가도 나의 입맛을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에는 비린내 나는 음식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시들해졌다. 그런 것을 보면 케첩에 별 관심이 없다가 근래에 맛에 빠진 것 역시 내 경우에서는 이상하지는 않다.


그래서 한 번은 케첩을 밥에 비벼서 계란 프라이를 올려서 같이 먹으니 이거 뭐야, 오므라이스 맛과 비슷한 것이다. 어렵게 밥을 볶아서 오므라이스를 만들 필요가 없을 만큼 맛이 거의 흡사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와사비에 빠져서 커피 빼고는 모든 음식에 와사비를 뿌려 먹었는데 좀 웃기지만 근래에는 케첩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오래전 초등학교 다닐 때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녀석의 이름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왜냐하면 그 녀석의 동생이 나를 잘 따랐다. 아버지가 있는 것 같았지만 아버지를 본 적은 없다. 녀석의 동생은 우리 집에서 같이 밥도 먹곤 했지만 친구 녀석은 자존심 때문인지 동생만큼 자주 우리 집에서 밥을 먹지 않았다.



민수와 민지


그 녀석의 이름을 민수라고 하고 동생은 민지라고 하자. 내가 기억하는 민수의 집 모습은 백열등에서 나오는 종교적인 옅은 빛과 손으로 만져질 것 같은 천장 모서리의 거미줄, 있으나 나오지 않는 티브이, 책보다는 옷가지가 걸려있던 책꽂이. 이런 모습이다. 5학년 때에는 민수와 매일 놀았다. 말라서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였는데 민수는 그래도 덩치는 컸다. 민수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탁구였다. 민수는 학교 탁구선수였다. 탁구만 열심히 하면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나오는 빵을 먹을 수 있었다.  


민수와 민지의 엄마는 어느 날 시장에 갔다 온다며 나가서 1년이 넘도록 시장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아버지도 엄마를 찾아 나선 지 6개월이나 지났다. 아직 어렸던 나는 집세가 뭔지, 학교를 계속 다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할 때였다. 나에 비해 민수는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다.


민수는 탁구를 잘 쳤고, 탁구를 잘 쳐야만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밥을 챙겨주는 엄마가 없기 때문에 살은 점점 빠졌다. 연습량은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민수는 늘 배가 고팠다. 그 허기를 달래준 것이 식빵과 케첩이었다. 그리고 라면이었다. 나는 집에서 김치를 그릇에 담고 라면을 몇 개씩 훔쳐서 민수네로 갔다.


곤로 같은 것에 냄비를 올리고 물을 붓고 라면을 끓였다. 말린 사과에서 나는 냄새 같은 석유의 향이 번지는가 싶더니 파란 불꽃이 올라왔다. 민수는 라면을 늘 4개씩 끓였다. 민지가 잘 먹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릇 안 라면에는 케첩을 뿌렸다. 민지와 나는 으 하며 얼굴을 찡그렸지만 민수는 맛있다고 했다.


민지는 내가 집에 놀러 오는 것을 좋아했다. 갈 때마다 김치, 라면과 함께 동화책이나 백과사전 같은 것들을 들고 갔기 때문이다. 민지는 책을 참 좋아했다. 민지에게 책 보는 게 그렇게 좋냐고 물어보면.


응, 오빠야, 내 책 보는 게 그래 좋데이. 우리 집에는 책 사줄 사람이 없으니까 책이 없다 아이가. 학교 도서관에는 일찍 문 닫는다고 나가라카데.


민지는 동화책을 보면서 라면을 먹었고 다 먹고 나면 엎드려서 책을 봤다. 내가 가져간 책은 그날 대부분 다 읽었다. 우리 집도 내가 어린 시절에는 가난이 관통하는 집이었지만 동화책만은 부모님이 어떻게든 사주었다. 하루는 어린 왕자를 들고 갔는데 민지가 그 책을 굉장히 좋아했다. 보통 하루 만에 다 읽어버리고 나에게 줬는데 그날은 하루를 더 보겠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민수가 나에게 말했다.


니, 저 책 저거 우리 민지주믄 안 되겠나.


그 말에 민지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았다. 사실 마음은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책은 내 동생의 책이었다. 책이 없어진 걸 알면 동생이 울고 불고 할 텐데. 그러다 보면 엄마에게 또 혼날 테고. 무엇보다 책을 어딘가에 줘버린다며 엄마가 화를 내는 것이 무서웠다.


단칸방에서 겨우 방 두 개로 이사를 한 우리 집은 아버지와 엄마가 못 배운 사람들이라 나와 동생은 그렇게 살게 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가득했다. 그런 분위기가 책은 원하는 만큼 마음껏 읽게 하겠다는 현실로 이어졌다. 동화책 전집, 위인전, 백과사전, 집에는 어린이가 볼 만큼의 책은 가득했다. 어머니에게는 책에 대한 애정과 애증이 반반씩 었었다. 내가 멈칫멈칫하자 민지가.


오빠야, 오빠야 나는 괜찮데이. 나는 이래 오빠야가 들고 오는 책 읽으면 된다 아이가.


그날 이후 어쩐지 나는 민수랑 서먹해졌다. 학교에서 마주쳐도 예전처럼 친숙함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탁구실 앞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엎드려뻗쳐해서 코치에게 두드려 맞고 있는 민수를 보게 되었다. 민수의 얼굴은 울분을 참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천 원짜리가 몇 개 있었는데 그날 민수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식빵에 케첩을 뿌려 나란히 앉아 먹었다. 그리고 민지를 위해서 맛있는 크림빵을 샀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민수는 그날 이후 탁구를 그렇게 연습하지 않아 보였고 그것으로 인해 어떤 사건이 일어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라면과 책을 들고 민수의 집에 놀러 갔는데 보통의 날과 달랐다. 민지는 울고 있었고 민수는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그 작은 모습은 그동안 버텨온 것이 와그르르 무너져있는 모습 같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쪼그리고 있는 민수에게 다가가 보니 민수의 머리가 꼭 쥐가 파먹은 것처럼 엉망이었다.


오빠야, 울 오빠야 머리를 주인아저씨가 막 잘랐데이. 엉엉.


나는 왜 그렇게 됐냐고 물었다. 왜 민수의 머리를 이렇게 잘랐냐고. 민지는 이미 눈물로 인해 얼굴이 쭈글쭈글해져서 나에게 말했다. 민수는 머리가 길어서 자르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방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머리를 잘랐다. 자른 머리카락을 민지가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 버렸는데 주인아저씨가 보고 화가 난 것이다.


야 이자슥아, 니 머리카락 방에서 잘랐나? 머리카락을 잘랐으면 쓰레기통에 버리야지 여게 버리면 우짜노 이 잡놈의 새끼야. 하수도 막히면 니가 책임질끼가. 너거 집 월세 벌써 몇 달이나 밀린 거 아나? 아버지 어데 가싯노!


죄송합니다.


너거 애비하고 애미는 도망갔는기라, 너거를 버렸다. 니 인자 탁구도 안 친다메. 니가 탁구를 계속 쳐야 학교에서 보조금이 나오고 집세를 낼꺼 아이가. 빨리 친척집에 연락해가 방을 빼라.


안 됩니더. 곧 엄마하고 아빠가 올깁니더. 울 엄마 돈 벌어가 곧 올깁니더. 그리고 아빠도 엄마 찾아서 같이 올겁니더. 울 엄마 아빠는 우리 안 버릿습니다.


이 자슥아, 너거 애비하고 애미하고 너거만 없었으면 벌서 갔을기라. 너거 어매가 너거를 버릿는지 너거만 모르제.


민수는 눈을 똑바로 뜨고 주인아저씨를 노려봤다. 민수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탁구실에서 엄마가 도망갔다고 놀리는 라이벌이 있었다. 그만 멱살을 잡고 코피를 터트리고 말았다. 코치에게 걸려 엎으려 뻗쳐서 다리가 붓도록 맞았다. 민수는 그날로 탁구를 그만두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참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미칠 것 같았다. 몸이 뜨거웠고 주인아저씨를 홉뜬 눈으로 계속 노려봤다. 그때 주인아저씨가.


이 자슥아, 니가 그래 노려보면 우짤 긴데. 당장 방 빼서 너거 동생하고 길거리에 나갈끼가. 와 그래 꼬라보노. 이 어린자슥이 벌써부터 어른 말씀하시는데 그런 눈으로, 이 새끼 안 되긋네.


아저씨는 집으로 들어가서 가위를 들고 나왔다. 머리를 자르려는 아저씨에게 민수는 대들었지만 힘이 달렸고 기운이 없었다. 화가 난 아저씨도 울분에 참지 못하는 민수의 머리를 마구 잘랐다. 머리카락이 옷으로 마당으로 떨어졌다.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은 민수의 자존심이고 민지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다. 목구멍으로 울컥하는 슬픈 눈물을 민수는 참아냈다.


며칠 뒤 여름방학을 맞이했고 방학에 나는 민수네 집으로 갔다. 하지만 집에는 민수와 민지는 없고 공백만 가득했다. 주인집 말로는 친척이 와서 데리고 갔다고 했다. 나에게 말이라도 해주고 가지. 나는 섭섭함을 넘어서 어떤 배신감이 들었다.


며칠 뒤에 집으로 편지가 한 통 왔다. 초등학생 답지 않게 예쁘고 바른 글씨체였다. 그것은 민지가 쓴 편지였다.


[오빠야, 오빠야 니 잘 지내고 있제. 우리는 큰 아빠 집으로 왔데이. 근데 좀 무섭다. 그래도 그 집의 주인아저씨랑 같이 있는 것보다 덜 무섭데이. 우리 오빠야가 오빠야 니 많이 보고 싶다고 한다. 내도 오빠야 니가 가지고 온 책도 읽고 싶다. 우리 오빠야 다시 탁구를 한 단다. 그래가 내한테 어린 왕자 책도 사준다고 약속했데이. 어린 왕자가 지구에 와서 많은 것을 발견하고 그랬잖아. 그래가 책 안 읽는 우리 오빠야한테 말했거든. 근데 우리 오빠야가 그라데. 내는 어린 왕자처럼 많은 것을 발견하지 못해도 친구 한 명은 발견했다고. 그래가있제 내가 우리 오빠야 대신에 오빠야 니한테 고맙다고, 인사할라꼬 편지했다 아이가. 여기서 거기에 놀러 갈라믄 차타고 엄청 가야한데이. 울 오빠야가 탁구 해가 일등 하면 오빠야 니한테 꼭 같이 가자고 하더라. 오빠야 니도 딴데 가지 말고 잘 지내고 있으레이.]


해가 정수리에 꽂혀 머리가 뜨거웠고 편지를 읽는 내내 눈시울도 뜨거웠다. 민수는 그렇게 온다는 약속을 했지만 영영 오지 않았다. 편지봉투에는 받는 우리 집 주소만 있었다. 그때 몹쓸 마음에 주지 못한 어린 왕자 책은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없어질 책이라면 그때 민지에게 줘버렸어도 되는 거였다. 이후로 나는 탁구대회가 티브이에 나오면 민수가 나올까 봐 봤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책을 좋아하던 민지를 지금 다시 만난다면 몇 권의 책을 권해 줄 수 있다.



그 녀석이 내도록 점심시간에 먹은 것이 케첩을 뿌린 식빵이었다. 요즘처럼 맛있는 우유식빵 같지 않았다. 텁텁하고 맛도 없는 그런 식빵이었다. 거기에 케첩을 뿌려 운동장의 벤치에 앉아서 몇 개씩 먹었다. 그 녀석은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가면 같이 앉아서 식빵에 케첩을 뿌려 주었다. 나는 그 맛도 없는 케첩 뿌린 식빵을 그 녀석과 나눠 먹었다. 그 녀석은 늘 인상을 쓰고 있었고 운동을 잘했고 덩치도 컸다. 한창 먹을 시기인데 그 정도 먹는 것으로는 아마도 모자랐을 것이다. 근래에 자주 케첩을 이것저것에 뿌려 먹으니 그때 생각이 난다.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으리라.


케첩은 그대로 어딘가에 뿌려 먹어도 맛있지만 뜨거운 음식에 풀어 먹어도 맛있다. 김치찌개나 짜글이나 특히 라면에 넣어 먹으면 맛있다. 이런 말을 하면 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이 우리나라 컵라면 도시락에 마요네즈를 뿌려 먹는 것이라고 한다. 맛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렇게 먹지 않아 봤기 때문에 생각으로는 이상하지만 맛은 좋다. 갈비찜이나 돼지고기를 삶을 때 쌍화탕을 넣으면 맛이 확 올라오는 것과 비슷하다. 뜨거운 라면에 케첩을 같이 끓여 먹으면 아주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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