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건조하고 쌀쌀하다. 조깅을 하고 오는 도중에 역전시장의 뒷골목으로 왔다. 자주 왔던 길인데 스산해지니 낯선 곳처럼 느껴졌다. 오래된 칼국수집과 함바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가스가 새는지 가스 냄새가 났다. 칼국수집 주방에 딸린 작은 창으로 가스 냄새가 새 나왔다. 냄새는 알싸하고 쎄 한 것이 마치 액체 같았다. 그릇만 있다면 냄새나는 가스를 담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스의 냄새를 맡고 있으니 가스는 오래전 밤꽃 향기가 나는 그때의 일을 떠올려 주었다. 사라졌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밤꽃 향기 가득한 곳에서 나눴던 이야기가 책 속의 활자가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그 활자들을 손으로 읽었다. 나는 상처를 줬다. 아프지 않다고 했다. 단지 상처가 났다고 했다.


가스 냄새는 내게서 빼앗아 갔던 시간을 되돌려 주었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나 역시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상처를 받았다면 제대로 받았어야 했다. 나는 상처도 받고 아팠다. 그러지 못했기에 나의 내부에 어딘가가 손상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가스 냄새를 맡으며 30분을 서 있었다. 숨을 쉬면 입에서 가스 냄새가 났다.


조깅화를 들어서 보니 신발 바닥에 구멍이 나 있는 것도 몰랐다. 그 상태로 계속 조깅을 했던 모양이었다. 신발 밑창이 온통 붉은색이었는데 그것은 피였다. 구멍 난 곳으로 날카로운 돌이 들어와 발바닥이 찢어졌다. 피는 계속 흘렀는데 피가 죽죽 나오는 것을 보니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발바닥은 어쩐 일인지 십자 모양으로 찢어져 있었다.


찢어진 그곳을 벌리고 들어가면 예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수에게 해시시를 한 대 권하고 나란히 앉아 대화를 하면 아마도 예수는 자신의 힘든 것을 내게 쏟아 낼 것만 같았다.


손등을 핥았는데 달콤했다. 이런 달콤함은 난생처음 생크림을 맛본, 그런 달콤함이었다. 천삼백 원짜리 핸드크림을 잔뜩 발랐는데 그것을 나는 맛본 것이다. 먹고 죽지 않으면 식품으로 인정해준다는데 내가 이것을 식품으로 인정받는다면 이것은 식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핸드크림인데 달콤해서 핥아먹을 수 있는 크림은 정말 획기적인 크림이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머리가 아픈데 훼스탈밖에 없어서 훼스탈 다섯 알을 먹었다. 잠을 자고 싶다. 10살 때 내가 동화 부였을 때 그때 동화부 선생님이 수업이 끝나면 책상을 물리고 침낭을 준비해와 그 속에서 낮잠을 자게 해 주었다. 마치 엄마의 양수 속에 들어가 있는 그 느낌.


그리고 잠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처럼 그대로 퍽하며 들고 싶다. 망치로 한 번에 드는 잠. 제대로 드는 수면. 정말 깜깜한 잠을 자고 싶다. 하얀 잠이 아닌. 잠을 푹 자고 일어나면 왕뚜껑에 두부를 올려 후루룩 먹고 싶다. 그렇게 먹으면 컵라면인데 라멘 같은 맛이 난다. 그 별거 아닌 컵라면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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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요? 어떤 것 같아요?


일행은 내가 먼저 먹기를 바라고 맛을 자꾸 물었다. 우리는 마라탕이 처음이었다. 마라탕을 먹을 계획도 없었다. 이른 시간에 맥주를 한 잔 마시러 바닷가를 어슬렁 돌아다니고 있었다. 우리 동네는 바닷가다.


코로나 이전에는 퍼브가 여러 곳이어서 아무 곳이나 쓱 들어가서 맥주를 홀짝일 수 있었는데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스몰비어 집들도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시간은 오후 4시에서 5시로 흐르는 시간대. 맥주집을 찾다가 보이는 마라탕 집으로 우리는 그대로 들어갔다. 깔끔한 실내에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음향이었다. 직원이 우리를 안내했다. 안내받은 테이블에 앉았다. 자 다음. 그다음이 우리에겐 없었다.


일행이 일어나서 직원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직원은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다. 직원이라지만 같이 일하는 동업자 같았다. 일하는 사람은 총 4명으로 홀에 한 명, 주방(아주 깨끗하고 청결한 오픈 주방이었다)에 3명이 있었고 여성 한 명에 나머지가 남성이었다. 모두들 20대로 아주 젊고 무엇보다 몹시 친절했다. 일하는 모습이 활기차고 보기 좋았다. 바닷가에 왕왕 가는 국밥집 이모님들의 친절과는 또 달랐다. 직원이 알려주는 대로 그릇에 들어갈 재료 이것저것을 담았다. 몇 번의 질문과 답이 오고 간 후 계산을 하고 조리가 될 동안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조리가 되는 동안 명랑해 보이는 여고생들과 활발한 여고생들이 우르르 들어와 먹는 것을 보고 우리처럼 먹는 게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은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때요? 일행이 물었다.


결론은 맛있었다. 맛이 없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고수와 혀를 마비시키는 그 산초 같은 맛이 좋았다. 순식간에 마라탕 집이 꽉 찼다. 우리 빼고 전부 여고생들이었다. 그녀들은 이 바닷가에서 바다의 힘을 받고 씩씩하게 공부를 하며 작금의 코로나 시국을 이겨내고들 있었다.


이제 음악 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았다. 대신 밝고 맑은 여고생들의 소리가 마라탕 집을 꽉 채웠다. 우리만 둘이서 하나의 그릇을 놓고 먹고 있고 나머지는 전부 각자 한 그릇씩 놓고 먹었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먹는 게 마라탕은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먹어야 취향대로 재료를 넣을 수 있다. 일행은 고수를 처음 먹어봤고 고수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행도 금세 마라탕의 맛에 빠졌다. 마라탕은 맛도 있지만 재미있는 음식이었다. 나는 귀찮은 음식을 싫어한다. 테이블에서 조리를 해야 하는 음식은 잘 먹으러 가지 않는다. 잡고 뜯거나, 고기를 굽거나, 찌개를 끓이거나. 그런 음식은 귀찮다. 그렇게 먹는 게 재미라는데 나는 싫다. 그런 재미 별로다. 주문을 하면 바로 먹을 수 있게 나오는 음식이 좋다.


그런데 마라탕은 그 두 가지를 다 갖추었다. 재미와 안 귀찮음,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켰다. 넣고 싶은 재료를 담아서 주면 주방에서 조리를 해서 테이블에 놔준다. 귀찮지 않다. 재미가 없을 것 같은데 여고생들을 보면 재미있어한다. 자신이 먹고픈 음식 재료를 고르는 재미가 있다. 여고생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좋다. 게다가 맛도 좋다.


맥주를 홀짝이며 건져 먹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음에 먹을 때는 채소를 더 많이 넣어야지, 이게 맛있네, 이거 나중에 좀 더 넣어야지, 양고기를 넣으면 어떤 맛일까, 마른 두부를 왕창 넣어서 먹어보자, 같은 말을 하게 된다. 가격도 이 정도에 만 사천 원 정도였다. 평일의 오후라 더 맛있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정말 맛있는 음식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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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1-11-21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라탕의 ‘마‘는 마비나 마취의 마자로 입안이 마비될 정도로 얼얼하다는 의미이고 ‘라‘자는 맵다는 뜻이어서 ‘입안이 마비될 정도로 얼얼하고 매운 탕‘이라는 뜻이죠.
한국에 들어온 마라탕은 어느 정도 한국화가 되어서 ‘마‘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 느낌인데 실제 사천성에서 파는 마라탕은 첫 숟갈에 입안이 마비되는 느낌을 받을수 있더군요.

교관 2021-11-22 11:47   좋아요 0 | URL
퇴색된 마라탕도 괜찮았습니다 ㅎㅎ. 여고생들이 저렇게 좋아한다면 적당한 게 좋아요. 홍어도 그렇고 ㅋㅋ
 



운동장에 앉아 있었다. 가을빛이 스며든 바람이 불어와서 얼굴을 건드렸다. 자고 일어나면 누군가 나무에 색을 칠하고 하늘에 그림을 그려 놓았다. 그렇게 있으면 추울 텐데,라고 학교 수위 아저씨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수위 아저씨를 보고 목례를 했다. 서쪽 숲에는 이미 눈이 내리고 있지,라고 수위 아저씨가 말했다. 다리를 모으도록 해, 그러면 덜 춥지. 라며 낙엽이 바람에 딸려 가듯 수위 아저씨가 학교 뒤쪽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일요일의 학교는 고요했다. 종소리도 평소와 달랐다. 아이들의 움직이는 소리가 싹 소거된 학교는 학교 같지 않았다. 우리 학교에는 수위 아저씨가 없다. 누구일까.


발바닥이 가려웠다. 샤워를 하는 둥 마는 둥.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발바닥이 가려워서 욕실 바닥에 앉아서 발바닥을 긁었다. 좀 시원한가 싶더니 긁는 걸 멈추었더니 두 배로 가려웠다. 술만 마시면 이렇다. 특히 와인을 마시면 더 그렇다. 와인의 어떤 성분이 나의 세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대미지를 입힌다. 그 세포는 발바닥에 포진되어 있는 세포들로 방어막을 펼치느라 분주하다. 그러는 동안 나의 손은 열심히 긁어야 했다. 와인을 분명 한 병 정도 마신 것 같은데 술에 취했다. 와인은 요즘 흔히들 마시는 시고르 자브종이다.


그 정도에 이렇게 술에 취해 발바닥의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있다. 샤워를 하는 내내 발바닥이 가려웠다. 몸을 닦고 비틀거리며 소파에 앉으니 발바닥이 가려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다시는 시고르 자브종 와인을 마시지 않으리.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다. 그동안 살면서 다짐을 몇 천 번이나 했을까. 가려움은 점점 증식했다. 가려워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처한 입장, 나와 관계된 일, 내 주위의 인간관계에 관한 것들을 생각해야 하는데 가려움은 여지를 두지 않았다. 가려움은 뇌를 침투해서 두정엽, 측두엽, 전두엽 같은 것들이 해야 할 일을 몽땅 스톱시키는 것이다. 가려움이란 그런 것이다.


너무 가려워 손으로 해결이 되지 않았다. 책상으로 가서 자를 찾았다. 서랍을 여는 동안에도 발바닥이 가려워서 발가락을 오므렸다. 늘 첫 번째 서랍 안에 자가 있는데 거기에 없었다. 내 기억의 문제일까. 발바닥은 자로 긁어야 하는데 자가 없다. 할 수 없이 볼펜으로 발바닥을 긁었다. 그렇지만 자만큼 시원하지 않았다. 좀 더 날카로운 무엇이 필요하다. 술이 올라온다. 술이 목구멍을 드래프트 한다. 곧 머리까지 올라올 것이다. 한 손은 발바닥을 긁고 있고 한 손은 다리를 잡고 있었다. 인간이 할 수 없을 정도의 묘한 자세다.


인간관계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잘 대해줘야 맞는 것일까. 진정 그게 올바르게 생활한다고 믿게끔 보이는 행동일까. 모든 이들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은 정작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될 수 있으면 인간관계를 축소하고 축소하여 협소하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소리를 들었다.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것일까. 한 이불에 같이 들어도 잠은 혼자서 잘 텐데. 인간관계란 그런 것일 텐데.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발바닥이 너무 가려웠다. 손에 차가운 무엇이 잡혔다. 잠이 드는 동안 술까지 더 취했다. 천장이 빙빙 돌 정도로 어지러운데도 발바닥은 가려웠다. 욕이 나오지만 지성인이라 욕은 삼켰다. 욕을 하고 싶은데 욕을 할 수 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이런 인간이 괴물이 된다.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내일이 오는 게 무서운 것이다. 크앙.


일단 손에 잡힌 차가운 무엇인가로 발바닥을 긁었다. 잠결이고 술이 취했지만 너무 시원했다. 그 시원함이 뇌를 습격했다. 머리가 마치 무더위에 지쳐있다가 은행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가려움이 순식간에 발바닥으로 줄줄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긁는 그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듯 시원하게 다 빠져나갔다.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시원함이었다. 배가 고팠다.


학교 로열박스에 앉아 있었다. 다시 계절이 돌고 돌아, 기가 막힌 햇살과 그에 맞먹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나는 여기에 왜 또 앉아 있는 것일까. 기시감이 드는 동시에 낯선 이곳은 내 학교일까. 나는 수위 아저씨를 기다렸다. 해가 조금 이동을 했다. 수위 아저씨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나는 아저씨가 낯이 익었다. 해는 등지고 있지 않았는데 수위 아저씨의 얼굴은 그림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었다.


역시 쉬는 날 학교는 적요했다. 이런 적요는 나쁘지 않다. 세상에는 소음이 지배하고 있는데 쉬는 날 학교에는 비교적 적요가 고요하게 분포되어 있다. 그게 마음에 든다. 마치 파동 없는 호텔 풀 사이드에 나 혼자 있는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다. 바람은 있지만 소리가 소거됐고 햇살은 따스했지만 깊이가 느슨했다.


서쪽 숲은 이미 한 겨울이네, 라며 수위 아저씨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수위 아저씨를 봤다. 역시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쩐지 수위 아저씨에게 나는 신뢰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마음 저 밑에서 알 수 없는 따뜻함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수위 아저씨는 뒷짐을 지고 내가 보는 운동장의 한 곳을 바라보았다. 나도 시선을 아저씨가 두는 방향으로 옮겼다. 해가 또다시 조금 이동을 했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도 조금 길어졌다. 나는 아저씨에게 같이 먹으려고 햄버거를 사 가지고 왔다고 했다. 그 말에 아저씨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같이 먹고 싶어서요, 옛날 햄버거예요, 햄버거 안에 햄과 상추만 들어있는. 라며 나는 수줍게 내밀었다. 수위 아저씨는 표정은 없었지만 내가 내민 옛날 햄버거를 받으면서 아마도 조금 기뻤을 것이다. 예전 그 오래 전의 기억이 났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햄버거를 까서 야무지게 먹었다. 맛이 썩 있지는 않았지만 꽤나 맛있었다. 수위 아저씨는 마치 나를 어린이처럼 내가 잘 먹고 있는지 뒤에 서서 흐뭇하게 지켜봤다. 해가 이동을 할 때마다 그림자도 조금씩 움직였다. 그때 나는 수위 아저씨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햇살을 받으니 잠이 쏟아졌다. 나는 아저씨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저씨는 조금씩 투명해졌다.


정신이 몽롱했다. 가물가물 한 것이 발바닥으로 나의 의식과 자아가 몽땅 빠져나가버린 것 같았다. 겨우 눈을 떠 발바닥을 보니 날카로운 것에 난도질이 되어 침대 바닥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수위 아저씨는 눈물보다 진한, 붉은 사랑을 주고 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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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방 안의 온도, 창문의 유리를 투과하는 옅은 빛과 이불 안의 따뜻함 때문에 일어나기 싫은 아침이었다. 잠에서 깼다가 다시 들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디제이의 멘트가 들리다가 끊어졌다가. 가장 기분 나른한 오전의 시간이었다. 눈을 뜨면 아직 시간은 10분 정도 지나가 있고, 다시 잠이 들고. 이렇게 오후까지 있고 싶었다. 하지만 방뇨의 기운과 생리현상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분명 일어나고 나면 이 포근하고 아늑함이 와장창 깨질 것이 분명하다.


늘 이런 인생이다. 매일 언제나 그 시간쯤이면 화장실에 가야 한다. 군대 훈련소에서 고욕이었다. 그 시간에 구보를 했다. 얼굴이 물에 불린 찰흙을 유리창에 던져 흐르는 모양이 되어서 매일 아침 달렸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누워서 억지로 이 아늑함을 찾으면 찾을 수 있지만 그게 쉽지 않다. 지금 딱 이 기분은 아닌 것이다. 화장실에 가는 동안 30%가 깨지고 화장실에서 나오면 70% 이상이 깨져서 정신이 들어 버리고 만다. 그래도 아직 이불속 포근함을 기억하는 30% 때문에 다시 굴속으로 들어가서 이 고요한 시간을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다.


라디오에서 마스다 미리의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의 고양이 사랑은 ‘생각이 많을 땐 고양이’에도 잘 나와 있다. 여하튼 나직하게 라디오에서 마스다 미리 씨의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고양이의 모습도 좋고 고양이의 얼굴도 좋고. 또 마음에 드는 게 고양이의 우아한 꼬리다. 만약 저 꼬리가 사람에게 붙어 있다면.


디제이는 만약 고양이 꼬리가 있다면 우아하게 움직여 라디오를 켜고 끄고 볼륨을 높이고 싶다고 했다. 나도 예전에 이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그때는 배트맨에서 캣우먼이 나오는데, 여러 캣우먼이 있지만 미셀 파이퍼의 캣우먼이 제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는 꼬리가 없지만(아마 없었을 것이다) 꼬리가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 사람에게 고양이 꼬리가 붙어 있다면, 날 때부터 붙어 있는 꼬리라면 적응이 되겠지만 꼬리를 달고 누우면 아주 불편하다. 아니 불편할 것 같다. 항상 옆으로 누워 자야만 한다. 보기 싫어진 남편의 얼굴을 계속 보거나 아예 등을 돌려 자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가끔 인간화된 고양이는 지 주제도 모르고 사람처럼 벌러덩 누워서 잠을 자기도 한다.


꼬리가 인간의 몸에 붙어 있으니 세포가 연결이 되어 움직일 수는 있겠지만 사실 귀처럼 그저 보형물 같이 붙어만 있을 수도 있다. 인간의 몸이라는 게 움직이지 않는 근육은 퇴화가 되어 점점 사용이 불가능하며 그쪽으로 보내는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곳으로 돌리게 된다. 보통 네 발로 걷는 동물에게 꼬리가 있는데 아무래도 달리거나 날렵하게 움직일 때 중심을 잡으려고 꼬리가 붙어 있기도 하겠지만 인간에게 꼬리가 붙어 있으면 달리게 되면 더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꼬리 때문에 몸을 더 구부려야 하지 않을까. 바지나 치마에 구멍도 뚫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요즘처럼 민감한 세상에....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의 한 구역에는 집집마다 말이 있다. 그래서 그 구역의 사람들은 말을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키운다. 물론 말이 들어갈 살 정도로 모든 집들이 넓고 크다. 미국의 캔자스 시골 같은 그런 모습을 떠올리면 되겠다. 그 대신 빌라도 있고 아파트도 있고 그렇다. 아파트에도 말을 키운다. 이 구역은 몹시 아름다운 구역으로 자연이 다른 도시보다 훨씬 조성이 잘 되어 있다. 호수나 들판 같은 것들이 보기 좋다.


이 구역을 의미적으로 '말의 구역'이라고 하자. 말의 구역에 들어오면 자동차보다 말들을 타고 다니는 모습을 더 볼 수 있다. 아이도, 어른도 모두가 말을 타고 터득 터득 다닌다. 말을 쓰다듬고, 말에게 뽀뽀를 하고, 말에게 말도 거는 등 말과 인간이 거의 가족처럼 지낸다. 그런데 모두가 말을 타고 다니면서 말 뒤에 큰 삽을 한 자루씩 들고 다녔다. 이상하다? 왜 모두들 삽 한 자루씩 들고 다닐까. 그리고 그 옆에는 포대자루 같은 큰 자루도 들고 다녔다.


이 아름다운 구역의 광경을 즐기고 있을 때 한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한 우아하고 아름다운 말을 타고 가면서 손인사를 했다. 나도 손인사를 하는데 말이 우아하게 멈추었다. 그러자 여성이 우아하게 내렸다. 말은 꼬리를 툴툴 한 두 번 털더니 우아하게 이히히힝하며 똥을 쌌다. 근데 그 양이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면서 강아지가 배변을 보는 양의 150배는 넘어 보였다. 어떤 말은 뭘 먹었는지 묽었다. 엄청난 양의 똥을 도로에 싸질렀다. 우아한 여성은 재빨리 삽으로 그 똥을 퍼서 포대자루에 넣었다. 삽자루에는 똥이 묻어 있었고 우아하게 똥을 치우던 여성의 몸에도 우아하게 말의 그것이 묻었다. 어쩐지 이 구역으로 들어오니 아름다운 광경에 비해 미미한 비린내가 계속 나를 괴롭히더니.


이제 일어나서 하루를 맞이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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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주 토요일, 5일에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 미국 유튜버가 김종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글을 작성해서 올린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은 그 미국 유튜버가 틀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고, 더 나아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다, 라는 무지에서 벗어나려면 때가 되면 내 머리를 한 번 리셋해야 한다는 것이다.


 #


상략


내가 조깅을 한 지는 적어도 10년은 되었다. 대체로 운동을 십 년 했다고 하면 와와 하는데 그래 봐야 24시간 하루 중에 고작 한두 시간을 낼 뿐이다. 보통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운동을 하게 되면 3년 운동한 것으로 30년 동안 운동하지 않을 것을 퉁 치려고 한다. 일주일에 5일, 그것도 하루에 한 시간, 그럼 시간으로 따지면 한 달에 몇 시간 운동을 한 것일까. 하루 한 시간 운동을 한다고 해도 옷 갈아입고 벗고, 트래드 밀 하면서 휴대전화 보고, 이런 걸 따지면 운동을 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운동을 하지 않던 사람이 운동을 하게 되면 3년 동안 몇 시간 운동한 것으로 생각지 않고 3년 내내 운동을 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니 3년 운동을 하다가 석 달 운동을 안 하게 되면 다시 살이 찌고 근육이 없어지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제 기사에 미국의 헬스  유튜버가 김종국을 저격하는 유튜브를 올렸는데 그걸 보면서 그 사람 참 지질하거나, 아니면 한국이 요즘 이래저래 유명하니 조회 수를 노리고 그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브런치는 순전히 글을 올리는 플랫폼이고 나처럼 소설을 위주로 올리는 사람의 피드는 인기가 없다. 동영상 플랫폼이 아니기에 조회 수가 나오기는 참 어렵다. 그럼에도 브런치를 시작한 지 일 년 정도 지났을 무렵 백만 회가 넘었다. 이건 굉장한 일이다. 그럼 어떤 글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을까.


내가 소설 이외에 올리는 글은 조깅에 관한 에세이와 음식에 관한 에세이다. 좀 더 텍스트적으로 풀이하자면 ‘생활 음식의 인문학‘이며 ‘조깅의 생활화’이다. 음식에 관한 에세이는 인스타그램에서 보통 인기가 많은 사진 속 예쁜 음식이 아니라 그저 보통 밥상에 오르는 음식의 글이다. 보면 알겠지만 라면, 새우깡, 과일, 순대 이런 글이 고작이다. 여기에 생활의 인문학을 내 나름대로 덧입혔다.


사람들은 멋진 호텔의 조식 같은 예쁜 음식을 동경하지만 실은 생활 속 음식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한다. 관심은 조회로 이어지고 조회 수가 올라가면 다음이나 카카오의 메인에 노출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이런저런 곳에서 뭔가를 해보자고 메일이 온다.


나는 매일 조깅을 하는 편이다. 거의 매일 하는데 비나 눈 같은 자연현상은 조깅을 하는데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조깅은 대체로 6, 7킬로미터를 뛰며 그 사이에 3, 40분 정도 산스장에서 근력운동을 하는 편이다. 사진은 2013년부터 2021년도까지의 조깅 후 사진인데 몸 상태가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다.


나는 40대이고, 헬스장에서 운동을 해본 경험은 없다. 물론 보충제를 먹어본 적도 없고 닭가슴살을 갈아서 먹지도 않는다. 그저 매일 조금씩 조깅을 하고 근력 운동을 할 뿐이다. 여름 전에는 플랭크를 2분 정도 했는데 요즘은 30초 더 늘렸다. 그거 늘렸다고 거의 죽을 것 같지만 어떻든 하고 나면 즐거운 고통이 따라오는 것이 좋다. 친구들은 결혼하기 전에 나와 비슷했는데 녀석들은 지금 몸이 좀 망가졌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매일 운동을 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 미국 유튜버는 나이 드는 것과 늙어가는 것이 다른데 동일시하고 있다. 몰라서 무식한 건 못 배워서 그렇기에 이해하지만 자기가 다 안다고 착각하는 무지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 미국 유튜버는 지가 아는 게 전부라고 생각한다. 무지한 것이다.


나도 먹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고 먹는 족족 살이 쪄버리는 체질이라 먹는 것을 조절하는 건 아마도 죽을 때까지 해야 할 것 같다. 국물 음식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먹고 밥은 될 수 있으면 한 공기만 먹으려고 한다. 매일 두부를 먹고 집 밖의 음식들, 소스가 가득한 음식은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한다. 음료도 커피와 물과 우유를 제외하고는 잘 먹지 않으려 한다.


절제와 조절, 그리고 매일 조금씩의 운동-조깅과 근력 운동을 하면 약물과 무관하게 근육은 자리가 잡히고 유지가 된다고 생각한다. 보디빌더가 직업이 아닌 다음에 매일 운동하는 것이 힘들어서 그렇지 매일 밥 먹듯, 잠을 자듯 운동을 하게 된다면 그 부위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유지가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구를 들어본 적도 없고 그저 조깅을 매일 할 뿐이고 그 사이에 계단을 좀 오른다거나 근력 운동을 산스장에서 할 뿐이다.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한 사람들만큼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근육을 만들었고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 운동을 하는 것은, 내가 조깅을 하며 근육을 만드는 것은 매일매일 몇 시간씩 글을 쓰기 위한 동력인 것이다. 긴 시간 글을 쓰려면 체력과 체격, 그리고 정신력이 필요하다. 누군가를 저격하고 의심할 시간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책이나 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2013년 조깅 후


2016년 여름 조깅 후


2017년 조깅 후


여기서부터는 2020년 여름에 조깅을 하고


비가 오는 날에도 우산을 들고나간다




여기서부터는 2021년

10월 초


9월


7월



가장 최근, 지난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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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운동가가 아닌 사람이 매일 운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그 미국 헬스 유튜버는 뭔가 받아들이는 게, 그 뭔가를 이해를 못하는 것 같다.  헬스장에 가보지도 않고, 기구를 들어 본 적도 없는 내가, 매일 조깅을 하면서 그 사이에 산스장에서 조금씩 근력 운동을 그동안 했다. 단지 거의 매일 운동을 하는 것이다. 올해는 오늘까지 3일 빼곤 매일 조금씩 달리고 산스장에서 근력 운동을 했다. 요컨대 산스장까지 40분 정도를 달려서 도착해서 바로 플랭크를 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할 수 있는 근력 운동을 해서 몸에 힘들 좀 뺀 다음에 플랭크를 2분 30초 한다. 그래야 플랭크가 힘이 든다. 뭐랄까 운동을 할 때 그 부위가 힘이 들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게 운동을 하면 좀 이상하다. 초반에 플랭크를 하니 플랭크가 힘이 들지 않았다. 몸이 덜덜 떨리지 않았다. 플랭크는 자고로 중력에 온 몸이 밑으로 꺼지는 그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재미가 있다. 그걸 느껴야 하는 운동이니 그걸 느끼게 운동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운동하는 부위에 고통이 가하도록 움직인다. 고통이 오도록 몸에 무리를 준 다음 다시 40분 정도 달린다. 마지막 코스 1킬로미터 정도가 오르막길이라 그 1킬로미터가 다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오는데 그걸 매일 느낀다.


헬스 유튜버만큼 좋은 몸은 아니지만 나쁘지는 않은 몸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그 미국 헬스 유튜버는 매일 운동이 너무 좋아서, 운동을 할 때 내추럴하게 즐겁게 운동을 하는 김종국을 너무 모르는 것이다. 그 미국 유튜버는 늙는 것과 나이 드는 것의 차이를 모르며, 무식과 무지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내가 일하는 건물의 7층에는 헬스장이 있는데 운동이 좋아서 매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나이와 약물과 무관하게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고 잘 유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유튜브에 하루에 5분, 이 동작 한 달만으로 몸의 엄청난 변화, 같은 제목에 끌려가면 안 된다. 싸고 좋은 전자제품이 없는 것처럼 하루 5분 투자해서 한 달만에 몸이 달리지는 운동 같은 건 없다. 매일 밥 먹고, 매일 잠자고, 매일 일하고, 매일 폰 보는데 운동 따위 매일 하는 거 어려운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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