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실의 도미노


공실공실


이곳은 시내 중심가의 가장 중심 건물의 일요일[2024년 4월 20일] 정오의 모습이다. 상가는 대부분 공실이고 이 시간에 우르르 다니던 사람들 역시 거의 사라졌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는 말이지.


생긴 이래 이렇게 공실이 많고 사람이 이토록 없었던 적은 없었다. 모두가 처음 겪는 일에 놀라고 있지만 일상이 지속되니 그것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음악을 듣고 티브이를 보고 밥을 먹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으니까 자영업의 몰락이 무섭기는 하지만 일상이 되어 버리면 그것대로 흐름에 딸려 흘러갈 뿐이다.


현재 상가 공실률이 급증하고 있다. 광수네 복덕방 대표 이광수 애널리스트의 말을 빌리면, 지난해 4분기 기준 전국 소규모 매장 공실률이 7.3%로 역대 최고치라고 한다. 자영업자들의 폐업이 증가하고 있다. 이게 공식 통계인데 이광수 대표는 비공식적이지만 15%로 보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몰락 수준이다.

출처: 광수네 복덕방


신촌 같은 곳은 18%(5분의 1이 비었다는 말), 장안동은 15% 정도라고 한다. 이 엄청난 공실을 이미 사람들은 체감하고 있다. 위의 사진에서처럼 비어있을 수 없었던 매장이 전부 공실이 되었다. 심각한 상황이다.


출처: 광수네 복덕방


이렇게 폐업이 많고 공실이 많은 이유는 자영업자들의 몰락 때문이다. 매출이 줄고, 무엇보다 대출을 받았던 타격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전체 대출액이 천조억이 넘는다고 한다. 천조억? 이런 액수가 도대체 얼마일까.


장사가 잘 된다면 매출도 늘고 대출도 갚을 수 있는데 장사가 전혀 되지 않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대출을 끌어서 쓴 자영업자들은 이자도 못 내는 형편이니까 폐업이 줄줄이 이어진다. 자영업자 1인당 대출액이 1억 원도 추정된다고 한다. 초반에 투자비용이 많이 든다. 인테리어부터 해서 각종 물품비용까지.


자영업자들은 부채를 갚는 것만으로도 돈을 번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대체로 영차영차 열심히 같은 루틴으로 매일 장사를 한다. 부채를 갚는 돈은 자신의 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돈을 벌어들인다, 그래서 부채를 다 갚고 나서는 나는 돈을 번다고 생각을 한다.


자영업자의 운명은 돈이 벌리지 않더라도, 손님이 별로 없더라도 늘 나가서 매장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한다. 휴일이라서 쉬고, 주말이라서 쉴 수 없다. 그러니 국힘 전 비대위원장이 자영업자들에게도 출산 휴가를 준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말일뿐이다. 주인이 며칠 나오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매장은, 그 가게는 장사를 안 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발길을 돌려 다시는 오지 않는다.


자영업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소득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지출이 줄어들었다. 경기가 마이너스인데 자영업이 줄 폐업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20%의 일하는 사람이 자영업이기 때문에 자영업이 안 좋아지면 실업률이 증가하고 민간소비가 감소하게 된다고 이광수 대표는 말했다. 자영업자 중에서는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 즉 직접 일을 하는 사람들이 75%가 된다. 직원 없이 부부라든가 주인이 직접 하는 경우를 말한다. 영세업자다. 이 75%가 무너지면 실업자가 급증하고 경제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만약 자영업자들이 장사가 잘 되면 자영업자 부채율이 줄어든다. 그렇게 되면 금융 문제가 해소되고, 자영업자가 영업이 회복이 되면 실업자도 증가하지 않게 되고, 공실률도 감소하게 된다. 즉 부동산 시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자영업자는 아니지만 지금 중소건설사가 월간 100개 이상 문을 닫고 있다고 한다. 위태위태한 전선 위에 놓인 사람들이 있고, 그 밖의 사람들로 나뉜다면 나는 어디에 서 있는 걸까.



요즘 아이들은 자라면서 이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까지 신경을 쓰며 살아야 한다. 위에서 말한 경제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천재지변까지 인간의 삶을 고통스럽게 한다.


지진도 많아졌다. 8, 90년대 누가 지진에 대해서 신경을 쓰며 살았을까. 지진이라는 볼케이노와 단테스피크 같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천재지변의 단어였다. 하지만 포항지진으로 집들이 무너진 이후 우리는 지진이 오면 신경이 날카로워지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얼마 전에 대만에도 엄청난 지진이 왔고 그 이전에는 아이티에 대지진으로 섬나라가 초토화되었다. 이제는 휴대전화로 매일 크고 작은 지진의 정보를 받아 보고 있다.


대만 같은 경우는 7.0이 넘는 대지진이 났지만 인명피해는 그에 비해 크지 않다. 대만은 지진이 굉장히 많이 일어나는 나라다. 그러다가 1999년 9월 21일에 7.3의 대지진으로 2,415명이 사망했고, 11,305명이 부상을 당했고, 29명이 실종되었고, 주택만 51,711채가 붕괴되었다. 그 사건을 대만에서는 921 대지진이라 부른다. 그 뒤로 대만은 모든 건물이 강진에 대비를 했다. 그 덕분에 이번 7.0이 넘는 대지진에도 인명 피해가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지진, 폭우, 폭염에 대해서 예전처럼 나 몰라라 하며 지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자연이 주는 경고를 위해 각 가정에서는 아이들을 위해서 물품을 구비해야 하는데 그에 따른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앞으로 더 벌어질 것이다.


또 미세먼지를 이제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광고에서도 아이들이 하늘은 황토색으로 그리며 하늘색이라고 했다. 봄에는 황사도 심하다. 황사가 이토록 심하다고 예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지금 아이들이 대학생, 성인이 되면 위에서 말한 경제적인 부분을 체감하면서 지내야 한다. 얼마 전부터 인공지능이 인간 생활에 틈입하게 되었다. 인공 지능을 가진 로봇이 서빙을 보는 식당이 늘어가고, 주유소는 전부 셀프로 바뀌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술하는 쪽의 사람들만 살아남고 과학이나 제조업에 종서하는 사람들이 전부 몰락한다고 했지만 인공지능 쳇이 등장하면서부터 딥페이크, 영화, 각본, 소설, 시까지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하게 되어서 예술 쪽이 불안하게 되었다. 그만큼 현재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입지가 너무 좁아질 것이다. 그리고 성인이 된 아이들은 경쟁에 견디지 못하고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외국인들은 한국으로 취업을 위해, 살기 위해 매년 들어오는 수가 늘어나고 있다. 내가 사는 도시의 구에서도 외국인들이 너무 많아서 기사에 나기도 했다. 한 구역에서는 지나다니면 외국말을 더 많이 듣는다. 중국말과 동남아시아 쪽 말들. 아직 그들은 힘든 일에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든다.


아무튼 시내 중심가의 공실 상태를 보며 난생처음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들이 후에 어른이 되었을 때는 이런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될 수 있게 만드는 사람들은 정치인들인데.....


밑의 기사는 대구 매일신문 기사인데 지금은 닫혔다. 매일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낸 걸 누군가 싫어해서인지 지금은 들어가지지 않는다.

근데 우리 금쪽이 대통령 '2036 서울올림픽' 유치 직접 나선다고 2022년에 불굴의 의지를 보였는데 지금은 이러지 않겠지ㅠ 이 현실이 그저 꿈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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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에 마요네즈는 이상하지 않지



이상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어려워서 못 하는 게 아니라 쉬워서 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하는 건물 화장실에 [문을 닫아 주세요]라고 써 놨지만 문을 닫지 않는다. 문을 닫는 게 어려워서 못 하는 건 아니거든, 쉬워서, 너무 쉬어서 안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는 건 아니다. 만약 사람들이 전부 문을 닫지 않는다면 받아들이고 내가 일일이 닫겠지만 다 그러는 게 아니다. 다수보다는 소수가 절대적으로 문을 닫지 않고 나온다. 늘 그렇게 하는 사람이 언제나 그렇게 할 뿐이다.


그게 어려운 일은 아닌데 절대 닫지 않는다. 마치 닫으면 자신의 자존심 같은 것에 금이 간다고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화장실을 나오면서 문을 닫는 일이 어렵다면 이 세상은 너무나 어려운 일들로 가득 차서 사람들은 서로 미워할 것이다. 미움이란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증오는 공격성을 드러내고 결국 망하는 꼴이 되겠지.


쉬우니까 해봐,라는 말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쉬우니까 사람들은 하지 않는다. 쉬우니까 나중에 언제라도 하면 된다는 얄팍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쉬우면 당연히 성공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또 이렇게 쉬운데 자신 혼자 이 쉬운 걸 성공하지 못하면 타인에게 비방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다. 그런 불안이 쉬워서 안 하는 것에 가득 붙어 있는 것이다.


[얼마 전의 일인데 일방통행으로 차를 몰고 가고 있었어. 그 도로는 한 300미터 정도 되나, 반 정도 왔을 때 저 앞에서 차가 오는 거야. 나는 상향등을 깜빡 깜빡였거든. 근데도 계속 오는 거야. 마주하고 보니까 그걸 썼더라고. 선캡. 김여사더라. 양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절대 비켜주지 않을 것처럼 가만히 있는 거야. 일방통행이라고 했지만 김여사는 그냥 운전대를 잡고 나와 대치를 할 뿐이었어. 나도 더 이상 말하기 귀찮아서 신호 때마다 잠깐 읽으려고 차에 둔 짤막한 소설책을 집어 들어서 봤지. 그리고 내 뒤로 여러 차들이 온 거야. 차들은 빵빵 거리고 난리가 났지. 차들이 계속 빵빵 거리니까 일방통행 도로의 양 옆의 상가 사람들까지 나왔지. 김여사에게 여기는 일방통행이니 차를 뒤로 빼라고 해도 꼼짝도 하지 않았지. 여기저기서 이해 못 하겠다는 소리가 나왔고, 끝내 경찰에게 신고를 했어. 그리고 경찰이 와서 김여사를 끌어내렸는데 김여사는 그때에도 버티더라고, 결국 경찰이 김여사를 차에서 내리게 해서 여기는 일방통행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왜 차를 뒤로 빼지 않았냐고,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냐고 하니까 자신은 후진은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데. 그저 전진만 할 뿐이다, 오직 앞으로만 갈 뿐이다! 참 좋은 미래지향적인 생각이야. 후진도 못하는 사람에게 운전면허증이 나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의심해 봤지.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경찰이 차를 뺐지. 김여사는 뭐랄까 사람들에게 욕을 많이 들어도 아무렇지 않더라고. 그래 너네는 짖어라, 같은 모습이었어. 욕을 많이 들었나 봐. 정말 아무렇지 않더라고. 그 자세에서는 나는 내일에도 앞으로만 갈 거고, 내가 가려고 하면 일방통행이라고 역주행을 할 거거든, 같은 분위기가 흘러나왔어. 물론 나만 그렇게 느낀 거겠지만 말이야]


강변을 조깅을 하다가 산스장 같은 강스장에서 몸을 푼다. 근데 거기서 허리 돌리기를 하던 한 아저씨가 가래가 끓어오르니 그 앞에 퉷 뱉는 것이다. 한 번은 그렇다고 해도 몇 번이나 가래를 뱉는 것이다. 3미터만 나가면, 고작 3미터만 나가면 강변이라 풀숲에 뱉어도 될 텐데 모두가 운동하는 거기에 가래를 계속 뱉는 것이다. 입을 꿰매어버리고 싶더라고. 누가 운동하다가 가래 뱉은 자리에 넘어지기라도 해 봐라. 정말 상상하기도 싫다.


몇 걸음 나가서 가래를 뱉는 게, 그게 정말 어려운 일일까.

쉬워서 사람들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어려워서 못하는 게 아니라 쉬워서 안 하는 것이다.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 같다.


에쿠스를 모는 어떤 아저씨는 인도로 차를 올려 주차를 하려고 했다. 근데 전봇대 옆에 근처에서 내놓은 쓰레기봉투가 있었는데, 에쿠스가 인도로 올라와서 쓰레기봉투를 밟은 것이다, 봉투가 다 터져서 그 안의 쓰레기가 다 봉투 밖으로 나왔는데 그냥 아무렇지 않게 가버렸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쳐다보고 있는 내가 있음에도 뭐야? 같은 표정이었다. 한 60 중반정도로 보이는 아저씨들은 대체로 고집이 센 거 같다. 내가 한다는데 뭐? 같은 분위기가 몸에 가득 배어 있는 거 같았다.


그리고 가장 이상한 사람은 종교인이다. 특히 내가 아는 기독교인. 나는 신은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에 속한다. 만약 신이 있다면,라고 해서 쓴 글도 많다. 가장 간단하게 하느님이 있다면 하느님을 자신과 동격으로 놓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전광훈이라든가, 그간 입에도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신도들을 유린한 목사 놈들을 가만 내버려 둔다는 게 신을 믿지 않는 나로서는 하느님의 존재는 없다고 본다. 기독교인 대부분이 하느님이 자신 옆에 왔다고 말하는 개소리를 늘어놓는데 참 웃긴 소리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신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을 믿는 신도들 역시 잘못은 없다고 생각한다. 없는 신을 만들어서 인간 형상화 시켜 중간에서 신을 믿게 만드는 중간자들이 나쁜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내가 아는 교인도 교회에 나가면 세상 착하고 나긋한 말투에 친절하다. 너무나 사람 좋아 보인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화를 자주 낸다. 짜증도 가장 그러지 말아야 할 옆사람에게 다 풀어 버린다. 그럴 때 이게 뭐지? 하게 된다. 제일 사랑하고 온화하게 대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고 타인들에게는 그저 온화할 뿐이다. 이거 왜 이러는 걸까. 너무 이상하다. 교회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지 못해서 밖에 주차를 했을 때 그 공간이 타인의 주차공간인데 차를 빼달라고 연락하면 연락도 안 되거나 연락이 되면 적반하장의 경우가 온라인에 많이 있다.


이렇게 이상한 교인들 대부분 어른들이다.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은 그러지 않는다. 이상한 교인들은 전부 어른들이다. 사람들은 청소년 범죄에 대해서 큰일이다, 문제다, 세상이 말세다, 같은 말을 하는데 뉴스를 장식하는 사건 대부분이 어른들이 저지른다. 청소년들이 주식 사기나 전세 사기를 치나? 피를 빨아들이는 악독한 범죄는 어른들 뿐이다.


나도 누군가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겠지.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사람이 많은 건 정상일지도 몰라. 그러나 정상이 정상이 아니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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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에 버터를 발라 구웠다. 버터를 전복에 발라서 구운 이유는 인간이 음식을 좀 더 맛있게 먹으려는 집착이 만든 것 같다. 전복은 그냥 날 것을 잘게 썰어서 먹어도 맛있다. 하지만 가스레인지 불을 켜고 프라이팬을 달군 다음 버터를 전복에 발라서 이리저리 굴려 가면서 굽고 그 안에 마늘도 같이 굽는 이 행위가 무척이나 귀찮은 데도 하는 이유는 좀 더 맛있게 먹어보겠다는 집착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게 뭐 집착이야 라고 하겠지만 나는 그걸 집착이라고 부르겠다. 내 경우에 집착이 그다지 없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집착을 보인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방청소, 자동차 청소 하는 건 싫은데, 욕실 청소는 집착을 보이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집착이라는 말이 나쁜 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집착 없이는 이루어지는 것이 없는 경우도 있다. 가령 버터 발라 전복을 구워서 먹는 일 같은 거 말이다. 집착이 있으면 좀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사실 인간 사회의 모든 것들이 집착으로 이루어졌다. 인간의 집착이 하늘을 날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들어 냈다. 스티브 잡스의 집착 없이는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니는 아이폰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집착이 너무 심해지면 모습만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을 뿐 행동이나 사고, 생각은 마치 기계처럼 변한다. 권력을 향한 집착은 인간성이 말살된다. 사람인데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사람의 말을 하는데 사람의 말이 아니다. 자리에 대한 욕심이 과하고 하고자 하는 신념이 사라진다.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남의 탓으로 돌린다.


주위에는 하는 쓴소리는 전혀 듣지 않고 달달한 말만 하는 사람으로만 주위를 채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고 기분이 안 좋으면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업무를 보러 나가지도 않는다. 일주일 주에 며칠은 몇 시간씩 지각에다가 살이 쪄서 늘 구부정하게 걷는다. 심각한 집착은 오만을 불러들이고 외모를 변화시킨다. 심각한 집착은 결국 몰락을 몰고 온다. 그러나 그 사실을 당사자는 알지 못한다. 집착이 심해지면 그렇게 된다.


하지만 버터를 전복에 발라서 구워 먹는 정도의 집착은 좀 귀찮지만 일상을 풍요롭게 한다. 이 정도의 집착으로 풍요로운 하루를 맞이한다면 괜찮은 집착이다. 자동차는 더러워도 욕실을 깨끗하게 하는 정도의 집착은 무난하다. 그래서 버터를 발라 구운 전복을 칼스버그와 맛있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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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활동 ㅋㅋ


유채가 강변을 따라 활짝



조깅을 하고 오다가 어제는 시내 전화국이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전화국 그 맞은편 중앙극장 1층에서 친구들을 기다릴 때를 생각했다. 전화국 앞에는 공중전화박스가 일렬로 죽 있었다.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공중전화박스는 인기였다. 사람들은 전부 시내의 전화국 앞에서 만날 약속을 정했고 삐삐를 보며 그 앞에서 친구나 연인을 기다렸다. 사람들의 약속장소였지. 대구의 대백 같은 그런 장소였다. 토요일 오후에는 사람들로 가득해서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그렇게 사람이 많아서 더 약속 장소로 재미있었다.


그때에도 요즘처럼 카페가 많았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에 카페 하나씩은 있을 정도였다. 중앙극장 건물에도 커피숍이 있었다. 그곳은 다른 곳보다 공간이 커서 중 2층이 있고 중 2층에 앉아서 커피숍 실내를 내려다봐도 이상하지만 재미있었다. 전화국 앞에 가득 모인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커피숍에 가득 찬 사람들을 보는 것 역시 재미있었다. 또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로비에 가득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사람구경하는 게 여러 재미있는 구경 중에는 제일인 것 같다. 그렇기에 우리는 대 놓고 사람을 보지 못하고 영화로 사람을 본다. 사람이 나오지 않는 영화는 대체로 인기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극장에서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보기 전에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사람을 구경하고, 커피숍에서 음료를 마시며 사람들을 구경하고, 영화 속에 나오는 사람을 구경하고.


요즘도 창을 사이에 두고 여기에 앉아서 창밖으로 내리는 빗속을 다니는 사람들을 멍하게 보면 재미있다. 벚꽃이 만개하는 날에 비가 내려 사람들은 마치 손해 봤다는 표정으로 어딘가를 향해 빠르게 걸어 다닌다. 멍하게 있어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뭔가를 해도 시간을 빠르게 지나간다. 사람들이 우산을 들고 지나간다. 모두가 다 다른 우산을 들고 있다. 우산이 촌스러우면 나는 싫다. 그런데 내가 드는 우산은 늘 촌스럽다. 촌스러운 우산이 있으니까 다른 우산이 빛을 발하겠지.


예전에는 비가 오면 극장 앞에서 비닐우산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근데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영화 속에서만 봤다. 요즘도 비가 느닷없이 내리면 극장 앞에서 우산을 팔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몰고 붕 가버리니 우산이 딱히 필요가 없다.


우산도 개성의 시대(라는 말도 나온 지 오래되었다)인데 도대체 언제, 누가 우산을 제일 먼저 썼을까. 하루키 에세이 중에 [브리그의 우산]이 있다. [에스콰이어]에서 하루키가 퍼 온 이야기다. 이 에세이도 하루키가 80년대에 쓴 에세이인 것 같다.


처음 우산을 쓰고 런던 거리를 걸었던 조나스 한웨이라는 남자는 당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그 괴상한 꼴로 다니지 말고 비를 맞고 다니라는 말을 들었다고. 그때가 1750년의 일이고, 우산이라는 게 일반인에게 퍼진 건 그 후 30년이 지난 후라고 한다.


18세기 당시 남자들은 칼을 들고 다녔는데 우산이 등장했을 때 꼴 사나워 보였다고 한다. 이상하다는 것이다. 비에 젖지 않으려는 노력이 비열해 보이기까지 했다고.


19세기에 칼을 버리고 지팡이를 들고 다녔지만 우산은 아직 저 세계의 이야기였다고 하니 뭐든 처음이란 참으로 어렵고 힘들다. 처음이라는 건 타인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기도 한다. 아니 이상하게만 보일 것이다. 좀 비켜간 얘기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와서 [난 알아요]를 불렀을 때 전문 음악인들의 눈에도 기괴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19세기 이후 우산은 뼈대가 생기고 마치 신이 인간을 빚듯이 우산은 여러 과정을 거쳐 현재의 형태로 발전을 했다. 요즘 우산은 개인맞춤으로 제작을 해 주기도 한다. 나만의 우산인 것이다. 근데 맞춤 우산이 아니라도 어떤 우산을 들던지 대체로 내가 사용하는 우산은 나만 사용하고 있다. 나와 똑같은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보지 못한다. 그래서 비싼 돈을 주고 개인 우산을 맞춤 제작해서 들고 다녀야 하나? 우산은 다른 물품에 비해 잘 잃어버리기도 하는데 그러다가 잃어버리면 낭패다.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제멋대로니까.


우산에 대해서 한 번 검색하면 우산에 대해서 모르는 것들이 주르륵 나온다. 우산의 세계 역시 넓고 풍부한 것이다. 개인 맞춤 제작을 하는 우산이 있어야 또 공급을 하여 먹고사는 사람들이 있기에 함부로 별거 아니네 마네 할 수는 없다.


어제까지 그렇게 더운 사월이더니 오늘은 10도 정도 낮아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사월이다. 비가 오는 날은 어떤 음악이 어울릴까. 라디오를 늘 켜 두고 있는데 비가 오면 비에 걸맞은 노래를 선곡하려고 디제이들도 나름대로 분주한 것 같다. 그렇다고 대 놓고 비! 하는 노래보다는 비가 내려 감성을 건드리는 노래를 선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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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잘 익은 김치를 얻었다. 이런 김치를 아주 좋아한다. 정말 씹으면 아삭 하는 소리가 난다. 그래서 고기를 삶았다. 씹을 때마다 아삭아삭하는 식감이 삶은 고기와 몹시 잘 어울린다. 김치가 이렇게 내 입에 맞으면, 김치가 맛있으면 식탁 위에 반찬이 없어도 풍성한 기분이 든다.


나는 밥을 먹을 때 김치가 반드시 있어야 해. 같은 스타일이 아니다. 김치가 있으나 없으나 신경 쓰지 않는다. 밖에 나가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식당에는 밑반찬으로 김치는 다 나온다. 그런데 어떤 식당은 김치가 말라서 이걸 먹으라고 주는 건지 아니면 그냥 김치라는 걸 알리려고 주는 건지 알 수 없는 김치를 준다.


손님들도 그런 식당에 나오는 김치는 먹지 않는다. 그냥 구색 맞추기의 김치를 왜 올리는 것일까.


나는 김치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다. 있으면 먹고 없어도 김치를 찾지 않는다. 라면을 먹을 때 대부분 김치를 곁들이는데 개인적으로는 단무지하고 같이 먹는 라면이 더 맛있다.


최민식 주연의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을 보면 라면을 먹다가 김치가 없어서 라면 먹기를 포기한다. [선생 김봉두]에서도 라면을 먹다가 차승원이 김치가 없어서 뚜껑을 닫아버린다. 하지원과 임창정의 영화 [1번가의 기적]에서도 하지원이 임창정에게 라면 있냐고 물어보고, 임창정은 하지원에게 김치 있냐고 해서 같이 왕뚜껑을 김치와 먹는다. 아주 맛있게 먹는다. 그나저나 임창정은 어떻게 되어가나.


아무튼 영화 속에서 김치와 라면 먹방은 아주 맛있게 보인다. 한국 영화 속에는 그런 먹방의 클리셰가 있다. 라면은 김치와 함께 먹고,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꼭 국밥을 먹는다. 그런 기류를 꼭 타는 한국영화들이 있다. 한국영화 속에서 라면에 단무지를 먹지는 않는다.


예전에 박찬일 요리사가 몽로 주점을 열었을 때 거기는 김치가 하나의 요리로 주문을 하면 비용이 따로 들었다. 몽로에서 김치를 먹은 사람들은 대부분 맛있다며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이런 김치는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일본에서도 식당에서 김치는 돈 주고 사 먹는다.


우리나라 식당에서도 김치를 공짜로 내서 메인 음식의 가격을 올리지 말고, 김치를 주문하면 비용을 따로 받고 메인 음식의 가격은 김치값만큼 빠지면 좋겠다. 그러면 나 같은 사람은 천 원 정도 저렴하게 메인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나는 김치를 안 먹으니까. 먹지 않는 김치를 식탁 위에 올렸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도 막을 수 있고. 이래저래 좋은 것 같은데 인식 때문인지 그렇게 하는 식당이 별로 없다.


김치를 그렇게 잘 먹지 않지만 나도 이렇게 잘 익은 김치는 맛있게 먹는다. 갓 지은, 아주 뜨거운 밥에 올려 먹으면 아삭아삭 식감과 함께 톡 쏘는 신 맛이 터진다. 삶은 고기도 그렇게 맛있는 부위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김치가 맛있기 때문에 밥이나 고기는 그냥저냥이라도 괜찮다. 고기와 김치의 역할이 바뀌는 것이다. 김치가 주인공이 된다. 그런 자세로 김치를 대한다. 어딘가에 곁들여서 주 요리의 맛을 끌어올리는 반찬이 아니라 당당하게 주연으로 대하는 자세로 먹으면 더 맛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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