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검은 버섯을 보니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이 생각난다. 음식은 인간 생존에 밀접하게 닿아있고 거기서 사람들은 몽상을 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성취감을 느끼기도 한다.


여림 시인은 시만 쓰다가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생계가 아닌 생존에 부딪히면서 하루를 견디다가 죽고 말았다. 그의 찬란한 시들을 친구인 시인이자 대학 교수인 ###이 여림 시인의 시들을 묶어서 시집으로 출판을 했다.


코로나 이전에는 마스크를 쓰는 것은 미세먼지 때문이었다. 미세먼지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지금 내가 타인에게 받은 상처는 내가 누군가에게 준 상처보다 덜 하기 때문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글을 신형철의 글에서 본 것 같다. 신형철의 평론을 읽으면 평론도 문학이 된다는 것을 느낀다. 신형철 이전에 먼저 평론이 문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람이 있었다.


89년 문지에서 나온 ‘입 속의 검은 잎’라는 시집이 있다. 바로 기형도의 시집이다. 이 시집의 제목은 기형도가 지은 것이 아니다. 다 알겠지만 기형도는 자신이 적은 시를 아기처럼 안고 출판의 길로 가던 도중 제목도 짓지 못하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기형도의 이 시집의 제목은 문지에서 활동하는 평론가 김현 선생이 지었다. 이 김현 평론가의 평론을 듣던 80년대 대학생들은 딱딱할 줄로만 알았던 평론이 문학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기형도가 파고다극장인가 종로의 심야 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을 당시 김현 평론가가 기형도의 가방을 보니 시집을 내기 위한 시들이 있었다. 그때 그 시들을 보고 김현 선생이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제목을 붙여 시집을 출간했다.


잎은 혀를 말하며 그 혀는 이미 검게 되었고 그 입은 죽은 자의 입속을 말하는 것이다. 기형도와 기형도의 시를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와 그의 시를 말하자면,


두터운 모호함, 이성의 손길로도 잡히지 않는 무의식의 신호, 예측 불가의 미지를 향한 구애, 두려움의 대상인 낯선 것들에 대한 애정, 우리는 어둠 속 미아로 헤매는 존재, 죽음과 상실을 미치도록 탐닉했던 시인과 시였다. 유난히 기형도의 젊은 죽음은 비극적이다.


기형도의 시는 기형도의 몽상과 심연에서 나온다. 고 생각이 든다. 김현 평론가가 이런 기형도의 내면을 들어가 본 것처럼 알고 제목을 ‘입 속의 검은 잎’으로 지은 것은 김현 평론가 역시 기형도와 같은 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기형도의 시가 세상에 나온 그다음 해 김현 평론가도 기형도를 따라갔다. 김현 선생은 기형도를 무척 좋아했다.


기형도의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읽으면 인간은 사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존재 같은 기분이 든다.


인간은 어떤 극단적인 일을 당하지만 조금 지나면 허기짐을 참지 못하고 배를 채우는 것에 달려드는 존재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망각으로 인해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는,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특히 요즘 뉴스를 보면 그런 사람들이 잔뜩 나온다. 우리는 대체로 우주의 중심은 ‘나’라는 이기적인 생각이 강하다.


‘나’가 중심이 아니라 ‘우리’라고 느낄 수 있게 시는 그 길을 인도해준다. 기형도의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읽으면서 어디에 와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갈 곳이 없음에도 버스에는 계속 사람들이 올라타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작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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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0-07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얼마전 치과 치료를 받으며 혀에 대한 생각을 새삼 다시 하게 되었어요.
제 혀가 제 말을 안 들으니 정말 난감했지요. 기형도의 시를 생각하며...
페이퍼 잘 읽고 갑니다.

교관 2021-10-08 13:0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전복 같은 이런 해산물을 보면 백석의 시가 생각난다. 백석의 시가 사람들에게 칭송받고 그의 시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 중에는 백석의 시 속에는 미각이 살아있어서 이기도 하다. 백석의 시에는 많은 향토 음식이 나오며 그 향토 음식은 어머니의 추억이기도 하다.


백석의 시에는 오감이 다 열려있다. 백석의 시 ‘통영 1‘에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라는 문구가 나온다. ‘조개가 울을’이라는 말은, 지금은 그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지만 백석이 있던 시기의 바다와 바닷가에서 조개가 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조개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유월이 되면 달과 지구의 거리가 일 년 중에 가장 가까워진다. 그렇게 되면 조수간만의 차라든가, 바다 수면의 높낮이가 달라진다. 유월에 해가 저물어 바닷물이 빠져나가고 드러나는 바위에 수 천, 수 만 마리의 따개비를 비롯한 조개가 붙어 있다. 이들이 숨을 쉬기 위해 아가리를 쩍 벌리는데 그 수가 어마어마하니 입이 벌어지는 소리가 마치 조개가 월광을 받아 우는 소리처럼 백석은 표현했다.


저런 표현을 보면 백석은 영어, 러시아어, 일어 같은 언어에도 능통했지만 과학적으로도 비상한 사람이었다. 현재는 그런 조개의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유는 사람들이 전부 다 따먹었기 때문이다. 요리사 고 임지호는 자연에서 늘 식재료를 구하지만 그는 자연에서 조금 신세를 진다는 마음을 가지고 소량으로 채취를 한다. 배부르게 먹기보다 허기를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먹기를 바랐다.


사람은 자연에게 늘 미안한 마음으로 지내야 하는데 이미 인간의 마음은 욕심으로 충만해졌다.


전복은 양식이 가능해져 자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가격도 예전만큼 비싸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 전복을 먹지는 않는다. 뭐든 과하면 득 보다 실이 많다. 육류의 남용으로 지구촌 인간들의 생명에 견제가 들어오게 되었다. 전복 역시 어디에 곁들여 먹어도 맛있다.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하고 라면을 끓여 먹을 때 전복을 넣으면 라면 맛이 배가 된다.


전복장은 전복을 홀라당 먹은 후에 남은 양념장에 밥을 비벼 먹는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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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 수육


고기를 삶는다는 건 특별한 지식이나 기교를 요하지 않는다. 그저 물을 붓고 고기를 넣어 삶는다. 또 삶고 계속 삶으면 된다. 다른 요리처럼 이것저것 첨가하거나 손을 많이 움직이고 양념들이 오고 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짧아도 안 되고 너무 오래 삶아도 안 된다. 알 수 없는 정성의 눈길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그저 불 위에서 끓인다기보다 고아내는 의미로 삶아야 한다. 인생도 고아낼수록 진국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돼지수육은 단순하다. 복잡한 동파육과는 다르다. 복잡한 요리는 맛있지만 수육은 담백하다. 담백한 맛이 있다. 인간도 담백한 인간이 재미는 덜 살지라도 그만이 가지는 멋이 있다.


수육이 단단하게 지니는 의미는 ‘여럿이서’이다. 둘러앉아, 또는 다 같이 모여 먹는 음식이 수육이다. 집에서 혼자 먹기 위해 고기를 부로 삶지는 않는다. 역사 속 음식에는 활자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애가 스며들어 있다.


잔치가 열리는 곳에는 어김없이 삶은 고기가 있었다. 수육을 한 접 먹으며 모두가 하하 웃으며 지난 일들을 얘기하는 분위기를 가졌다. 우리는 때때로 지구 반대편의 맛을 찾아 헤매지만 달력의 뒤편처럼 간단하게 넘기면 만날 수 있는 음식이 가까이 있다. 그런 음식들은 대체로 영원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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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1-10-05 1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냄새가 모니터를 뚫고 나옵니다.

교관 2021-10-06 13:02   좋아요 0 | URL
오늘 한 번 해 드세요 ㅋㅋ 김치와 함께 와암 ㅋㅋ ㅁ맛있어요
 

1.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지구도 생겨나지 않았을 때 일입니다. 우주 밖에 없었던 세상이었습니다. 우주에 있던 먼지들이 모이고 모여 한 행성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행성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불빛이 번쩍! 하더니 한 아기가 “응애응애” 하며 하늘에 둥둥 떠있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는 노래에 맞혀 입으로 후! 하고 바람을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행성에 공기가 생기고 적당한 중력도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노래에 맞혀 침을 뱉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바다가 생기고 강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하늘은 파랗게 물들고 구름이 생겨나고 해, 라는 것도 생겨 났습니다. 해는 행성을 따뜻하고 밝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행성은 살기 좋은 곳으로 변했습니다.


행성은 평화롭고 조용하고 잠잠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행성을 살기 좋게 만든 아기가 그새 훌쩍 자라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제 아기라고 부르면 안 되겠죠? 이제는 이름을 부릅시다. 이름은.

2.

‘페리마’였어요. 페리마는 행성에다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이름을 ‘지구’라고 지었지요. 페리마는 지구를 좋아했어요. 그리고 시간이 흘렀어요. 페리마는 시간이 갈수록 지구가 너무 허전하고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페리마는 생각했어요.


‘내가 지구를 더 발전시켜야겠군!’


페리마는 지구를 더 발전시키기로 마음먹었어요. 페리마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요.  갓난아기 때 지구도 만들었는데 이런 것쯤은 식은 죽먹기겠죠? 그래서 페리마는 씨앗 이란 것을 만들었어요. 여러 종류에 씨앗들을요. 씨앗은 작았어요. 그 씨앗들을 흙에다 뿌렸어요. 그리고 며칠이 지났어요.


씨앗을 심었던 자리에서 작은 싹이 자라났어요. 그리고는 얼마 안 있어 풀과 나무 그리고 꽃까지 생겨나 지구는 훨씬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습니다. 페리마는 생각했습니다.


‘지구는 허전하진 않지만 너무 조용하잖아’

그래서 이번에는 사람을 만들어 보기로 했어요. 페리마는 흙을 물에 적셔 진흙을 만들고 그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페리마는 얼굴부터 만들기로 했어요.

3.

처음 만든 얼굴은 좀 이상했습니다. 돼지 같기도 했습니다.


“이건 아니야”


페리마는 다시 만들었습니다. 이번에도 좀 이상했습니다. 이건 말 같기도 했습니다.


“이것도 아니야”


 페리마는 다시 한번 만들었습니다. 이건 토끼 같기도 했습니다.


“이것도 아니야”


페리마는 이것 말고도 여러 번 실패를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26번째 얼굴이었습니다.


“바로 이거야!”


페리마는 너무 좋았습니다. 페리마는 실패한 얼굴들이 아까워 그 얼굴들로 ‘동물’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사람에 팔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4.

그래서 팔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팔도 처음 만들건 이상하겠죠? 역시 그랬습니다. 처음 만든 팔은 이상했습니다.


“이건 아닌 것 같아, 다시 만들어야겠어.”


페리마는 다시 만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만든 팔에다가 손이라는 것을 달고 손에는 5개의 손가락이 있었습니다. 손가락이 5개인 이유는 페리마가 아기였을 때 페리마는 5년의 시간이 흐르고 듬직한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얼굴과 팔과 손이 완성되었습니다.


페리마는 아까 만든 팔과 손이 아까워 그것은 다리와 발이라고 지었어요. 발에는 손가락처럼 발가락이 5개가 있었어요. 발가락은 손가락보다 짧았어요. 그리고 페리마는 이번에 가슴과 배와 엉덩이를 만들기로 했어요. 가슴, 배, 엉덩이는 모두 연결되어있었어요. 페리마는 만들기 시작했어요. 다른 것들은 한 번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가슴,


여기까지가 초등 2학년인 조카가 쓴 소설이다. 그 후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으나 깜깜무소식이다. 어린이와 이야기를 하면 재미있는 말들이 입에서 막 나오는 경우가 있다. 놓치고 싶지 않은 경우가 있다. 조카가 3살인가 4살 이럴 때, 밤에 차에 태워서 집으로 오는데 창에 붙어서 하늘을 유심히 보더니 “삼톤, 달이 왜 우리를 따라와?”라고 말했다. 어린이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 그러면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대답을 하게 된다. 어른의 입장에서 아무말대잔치겠지만 어린이 입장에서는 그 순간은 몹시 진지하다. 나는 자식이 없으니까 조카를 비롯해서 어린이와 지내게 되면 나도 진지해진다.


친구의 아이는 두 명인데 아직 작은 애가 뱃속에 있을 때 가족사진을 한 번 찍어 준 적이 있다. 그것을 이렇게 걸어 두었는데 둘째가 태어나고 3살인가 되던 무렵 그 사진을 보더니 기겁하고 울면서 엄마에게 형 하고는 같이 사진 찍고 나는 왜 먹어 버렸냐고 하는 것이다. 어찌나 애틋하고 웃기던지.


어떻든 조카가 쓴 소설은 읽으면 별거 아닌데 재미있다. 소설이란 읽기 쉽게 쓰는 게 좋은 소설인 거 같다. 뒤의 이야기가 궁금한데 언제 나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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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볶음밥을 만들 때 법칙은 없. 다. 밥이 많고 반찬이 없을 때 냉장고에 있는 것들로 기름을 두르고 볶으면 그만이다. 호주산 소고기도 많아서 당근과 파를 썰어서 넣고 볶으만 소고기 볶음밥이 완성된다. 소고기는 좀 질기다. 그래서 씹는 맛이 있다.


이렇게 반 정도 볶고 반은 김치를 넣어서 볶았다. 그러면 이름이 소고기 김치볶음밥이 된다. 이렇게 볶음밥을 만들면 어쩐지 집에서 먹는 한 끼가 마치 어떤 날을 기념하는 듯한 분위기를 가지기도 한다. 볶음밥만큼 쉽게 해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없고, 또 일회용 볶음밥도 많아서 그저 데우기면 하면 되는 볶음밥이지만 자주 해 먹지 않는다.


어릴 때는 볶음밥 하면 중국집 볶음밥을 최고로 쳤다. 웍에서 튀기듯이 볶은 볶은밥에 우리는 한껏 취했다. 양도 많고, 특히 같이 튀겨진 듯 그러데이션으로 튀김옷이 입혀진 계란 프라이와 함께 먹는 그 맛은 특별한 날에만 맛볼 수 있었다. 짜장면보다 더 비쌌고 우리에겐 짜장면보다 더 맛있는 게 볶음밥이었다. 그때의 볶음밥에는 짜장은 곁들일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집에서 볶음밥을 하면 의미가 있는 날처럼 여기곤 한다. 볶음밥은 사실 여러 반찬을 꺼내고 담아서 먹기 귀찮거나 힘들기 때문에 한 접시에 담아서 먹는다. 그게 본질일지는 모르나 예쁘게 보이는 볶음밥은 그것만으로 사실을 덮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볶음밥이 맛있으면 인정받을 수 있다. 나 자신 이외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살아간다고 느끼는 일이다.


볶음밥을 먹다가 생각을 해봤다. 우리는 왜 살아갈까. 우리는 어쩌다가 태어나서 살아가기보다 어느 시점부터는 살아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이 질문은 아주 오래전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고민해왔다. 도대체 우리는 왜 살아가는 거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치고받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거지? 게다가 그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게 말하고, 그렇게 살아내고 있다. 태어나서 죽음이라는 끝으로 가는 인생일 뿐인데 왜 치열하게 살아가며, 그러려고 살아가는 것일까.


가끔 우리는 정체성이나 주변성 때문에 고민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나는 왜 이럴까? 왜 제대로 안 되는 것일까? 또는 내 친구는 이런데 나는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지? 같은 생각을 가끔씩 한다. 이런 정체성은 가족 간에도 일어난다. 어릴 때야 다 비슷하지만 시간이 흘러 가족의 구성원에서 벗어나는 사건사고를 치거나 그저 주변인의 자리에서 맴돌고 있다면 가족에게서 외면을 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철학가들과 문장가들이 왜 사람들을 살아갈까를 고찰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린 것이 우리 인간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 살아간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인정을 받기 위함이다. 어릴 때는 부모에게 칭찬을 들으며 인정을 받고, 학교에서는 공부한 만큼 성적으로 인정을 받고, 부부관계에서 남편으로 아내로 서로에게 인정을 받는 일, 군대에서 고참에게 인정받고, 직장상사에게 오늘 하루 고생했다며 인정받는 일, 의사는 환자에게 인정을 받고, 대통령은 국민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일을 할 때 창조적인 일을 하라는 말을 가끔씩 듣는다. 창조적인 일을 하지만 그 속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건 창조적인 회사에서 반복적인 일만 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반복적인 일을 해도 상사에게 또는 동료에게 인정을 받으면 하루를 잘 보냈다고 하겠지만 대체로 그러지 못하다. 그래서 매일 지옥 같은 하루를 겨우 견디고 있다.


닭을 좀 팔면 어때. 좀 못 배워서 닭요리를 파는 일을 하지만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누구나 닭을 먹는다. 닭 요리를 잘해서, 닭을 튀겨서 손님들이 맛있다며 인정을 해주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그런 것 따위 손님들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돈을 내며 먹는데도 잘 먹었다며 인사까지 한다.


이 힘든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인정받기 위함이다. 남들에게 인정받으려면  자신에게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볶음밥을 먹다 인정을 받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내가 만든 볶음밥을 옆에서 오물오물 맛있다며 먹는다. 인정을 받는다는 생각이 든다. 이 별거 아닌 것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 그건 가슴이 꽤나 뜨거워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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